“어제 친정 길에 고모와 함께 한나절 밭두렁을 누볐지요. 그 보다 이 국맛이 어때요. 예전의 된장맛을 오랜만에 느끼겠는데요.”
한 주간 산천을 떠돌다가 집에 돌아오니 삼척 응봉산 심마니 마을에서 보낸 소포가 배달되어 있었다. 화구와 배낭을 짊어진 나그네에게는 그 어떤 선물꾸러미도 짐이 되는지라 당시에 극구 사양하였건만 산골 인심은 아직도 시대를 거스르는 경우가 있는가 보다. 간장, 된장에다 주산물인 가시오가피 농축액을 보내온 살뜰한 마음이 아내에게 봄날의 햇살처럼 느껴졌고, 그 고마운 정성이 냉이를 캐게 했나 보다.
뇌물과 선물이 헷갈리는 세상. 그 진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상대에 대한 이해관계를 떠난 경우만이 가능하다. 나의 경험으로 산촌은 해발이 낮을수록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고, 해발이 높을수록 인심이 후하고 잠자리가 편했다. 외롭고 사람이 그리워서 반기는 인지상정인가. 아니면 산수(山水)에 물든 자연인의 배려인가.
삼척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서 427번 지방도를 트럭으로 질주하는 시간. 나를 태운 기사는 노곡면 상마읍리 심마니마을의 안근준(安根濬·57) 선생이다. 마을에서 묵을 요량으로 미리 잠자리를 부탁한 터에 마중까지 나왔으니 그를 통해 마을 얘기를 청해 듣는다.
백두대간 태백동령인 응봉산(1270m), 사금산(1310m), 두리봉(1072m)의 고봉들로 둘린 산빛 아래 둥지를 튼 마을 이야기다. 양리, 대평리, 하마읍, 중마읍, 주지리, 상마읍 6개 마을이 산골짝으로 숨어들었는데, 예전 고려조에 강릉김씨, 밀양박씨가 처음 입산했고, 경주최씨가 뒤를 이었다가 근자엔 점차 각성받이가 되고 있다.
‘마읍’은 고려의 마지막 공민왕이 은거 당시 두리봉의 영험함에 말에서 내려 3번 절 하였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예전에는 화전과 약초, 송이가 주산이었으나 가시오가피, 황기, 당귀, 도라지, 황정 등의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에는 이 산골 청정지역을 ‘강원자연생태 민속촌’으로 가꾸고자 6개 마을을 묶어 ‘신선고을’로 부르기를 원한다.
태백으로 넘어가는 버스(28번)가 하루 6회 왕복하는 깊은 산골길, 신라 때 고찰 신흥사를 끼고 마읍천이 흐르는 길은 산마을로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산골 주민의 민원과 행정을 담당하는 마읍민원중계소에서 소장(김덕호)과 차 한 잔을 나누고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산색은 유난히 푸르고 봄기운이 완연한데 수년 전 태풍(루사, 매미)의 잔해가 강변 곳곳에서 드러난다. 또 급조된 인공의 흔적이 안타깝다.
먼저 마을분들과 인사를 나누기로 하여 늙은 배나무터의 최홍식(崔洪植·50) 이장댁에 들리니 몇 분이 모여 있다. 향긋한 산나물 점심을 물리고 이내 화첩을 펼쳤다. 이장을 비롯한 노인회장 박상규(씨69), 새마을지도자 정의성씨(32), 정씨의 어머니이기도 한 부녀회장 김영자씨(54), 개발위원 윤영희씨(53)를 그린 후 붓을 씻었다.
또 뵙기로 하고 마을 길라잡이를 자청한 안 선생을 따라 그의 거처인 상마읍 심마니마을 황토집에 배낭을 풀었다. 그리고 함께 마을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 먼저 신서들 계곡을 오르는데 물빛이 맑다 못해 깊고 푸르다. 여태 응달엔 눈꽃이 시리고 해빙은 멀었다. 하지만 황장목(적송)의 씩씩한 기상이 숲을 이루어 벼랑으로 치달리고 계곡 물소리 기운차다.
예전엔 심마니들이 이 산속에서 겨우내 자신들만의 생활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았단다. 남들은 폭설로 고립된 마을이라고 하지만, 산사람들에겐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기도 했단다. 지금도 고란이, 노루, 멧돼지, 족제비, 너구리, 산양이 가끔 출현한다는 설산엔 멧돼지 발자국이 눈밭에 뚜렷하다.
하늘봉이 마주보이는 산길에서 잠시 돌아보는 풍광. 빈집에는 산사람이 아닌 도회지 사람이 두어 해 머물다 갔는데, 부탄가스 쓰레기와 가전제품, 침대 등을 버리고 갔다. 입산 때 통사정하여 부득이 빈집을 빌려주었더니 갈 때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단다.
자족하지 못하는 관습은 적응도 안식도 되지 않는 법, 자연 속에서 무엇을 타박하랴. 이 푸른 숲, 저 맑은 물을 바라보며 산속에 홀로 살기가 사실 그리 쉬운가. 누가 홀로 있음이 외롭지 않다고, 세속을 잊겠다고 쉽게 자신하랴. 새삼스레 옛사람의 무위정신(無爲精神)이 그리워진다.
첫댓글 속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