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란 순간이라는 말의 산스크리트어다. 1찰나는 75분의 1초로 약 0.013초 정도로 인간의 눈으로 거의 인식하기 힘든 아주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런 찰나의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경호원이다. 특히 국가의 원수의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경호원은 바람 소리까지도 놓치지 않을 만큼 찰나의 실수도 인정하지 않는다.
시크릿
청와대에서 26년간 몸담았던 염상국 전 대통령 경호실장은 재직당시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을 정도로 신분 노출을 차단했다. 1982년 대통령경호실에 입사해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사건부터 노무현 대통령 퇴임까지 지켜 본 청와대사의 산증인이다. 그리고 그는 지난 2008년 2월, 청와대 경호실을 떠나는 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2005년 부산 아시아 ·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큼직한 국제행사를 성공리에 치러낼 정도로 일에 있어서는 프로패셔널이고, 근무 틈틈이 공부해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초 처장, 차장을 거쳐 내부 승진으로 임명되어 경호실 사기를 진작시켰다.
평소 그는 "경호원은 충성심과 명예심을 가진 경호안전업무의 리더다. 그리고 경호실은 고도의 전문성과 소통 능력이 요구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조직이다"라고 밝혀왔다. 실제 경호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진다. 경호현장에서는 경찰은 물론 유관기관이나 행사 관계자와의 유기적 협의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원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상경했다. 경희대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ROTC 임관 후 공수부대에 지원했다. 지인들은 "다친다, 어렵다, 고생이다"라며 만류했지만 평소 운동을 좋아하고 도전정신도 있던 터라 2년간 군복무인데 뭐 어렵겠냐 싶어 자원했다. 제대를 앞 둔 염상국 씨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 당시 특전사 전역장교를 대상으로 경호실 공채가 있었어요. 7공수특전여단에 근무할 때인데 여단장님이 경호실 공채시험을 추천했어요. 전공을 살려 기업에 취직준비 중이었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이미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운명처럼 이끌려 그는 마침내 장세동 경호실장 재임 당시 경호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리고 1년 만에 버마사태가 일어났다.
"저는 당시 다음 방문국인 스리랑카에 도착해 있었어요. 경호선발대로 가 있는 동안 사건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급거 귀국을 했습니다. 그때 더욱 절실히 알게 됐어요. 이 일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직업이라는 걸요. 갈등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만 두자는 마음보다 힘들고 어려운 직업이지만 선택한 길이니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먼저 들더라고요"
경호도 과학이다
그의 목표는 경호처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경호실장은 줄곧 군 출신이 맡아왔었다. 그리고 경호처장 등 실무자만 내부인사를 기용하던 시기라 경호처장을 목표로 열심히 달렸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성실하게 하면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기대와 오기도 있었다.
그는 오랜 경호업무를 통해 경호는 무도나 체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많은 부분에 있어 각종 안전업무와 관련된 전문지식, 유관부서와의 업무협조기술뿐 아니라 리더십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일반적 권위와 관습에 얽매여 있으면 유관기관들로부터 욕먹기 십상이에요. 후배에 귀감이 되려면 업무체계도 과학적이어야 하고, 먼저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꾸준히 영어와 업무관련 공부를 쉬지 않았던 그는 2000년 아셈(ASEM) 2002년 한일월드컵 등 대형 프로젝트를 맡으며 기획능력과 실력을 발휘해 청와대 경호실의 위상을 높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경호원은 기획과 교육이 중요한 보직이 되어, 경호실 교수요원으로도 활동 했다. 2003년 그는 드디어 경호처장이 되었다.
경호실 역사를 새로 쓰다
2005년, 그는 또 한 번 큰 행사를 맡게 됐다. 부산 APEC 때 경호안전통제실장직을 맡아 3개월을 꼬박 현장에서 지냈다. 경호실, 국정원, 경찰, 군, 소방방재청 등 5만 7천여 명의 경호 · 경비인력을 단계적으로 투입해내며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그리고, 2006년 경호실 차장에 이어 마침내 2007년 공채출신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수행부장을 지냈던 그는 당시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의 경호실장 임명 관행을 끊고 경호실 사기를 진작시켰다"는 주위의 평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고 직원들에게는 자부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지요. 경호실이 전문기관으로 인식된 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체력단련은 기본, 육체와 두뇌 순발력까지 겸해야
특전사를 전역하자마자 경호원이 된 그는 특공무술을 꾸준히 단련해왔다. 하루 종일 서 있거나 걸어다니는 업무 특성상 체력단련은 기본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몸으로 막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육체적 순발력도 갖추어야 하므로 매일 새벽 6시면 연무관에 들러 체력훈련을 했다. 그러나 육체적 순발력 못지않게 두뇌 순발력도 중요하다. 폭넓은 안전관련 지식을 갖추어야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무 당시 일이에요. 대통령께서 저녁 만찬행사를 앞두고 오후에 벌에 쏘이신 거예요. 그 때 신참이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벌침을 뽑고, 응급조치를 해드렸어요.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저녁행사를 치렀고 그 자리에서 '경호원의 응급조치 덕분'이라는 칭사를 받았어요."
그 일 이후 냉정하고 신속하게, 육체와 두뇌 순발력을 갖춰야 겠다고 마음먹었죠. 그 때부터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를 기르기 시작했다. 늘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고,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연구하고, 동선을 만들어 그대로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공채를 준비하는 경호학과 학생을 보면 두뇌도 명석하고, 신체조건도 좋고, 운동도 많이 한 학생들이 많아요. 그렇다고 경호원은 특출한 사람만 되는 것은 아니에요. 경호원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타고난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도 성실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기본만 있으면 남녀 누구나 경호원이 될 수 있어요. 그 이후 노력에 따라 스스로 전문 경호원으로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는 "경호원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다. 항상 국가 원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소명의식이 있다. 순수한 전문가다"라는 자부심으로 바르게 살아왔기에 명예로운 퇴직도 할 수 있었다.
청와대 경호원에서 소시민으로
2009년 2월 25일, 그는 퇴임하는 노무현 직전 대통령을 수행하여 대통령 이취임식장에서 출발하여 봉하마을에 모셔드리고 김해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 탈 없이 자신의 임무를 마칠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다. 그것도 매일매일 목숨을 내놓는 경호생활이었기에 의미가 더욱 컸다.
퇴임 후 그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8개월을 쉬면서 취미생활에 푹 빠져 살았다.
"일반 시민으로 돌아와 마음은 편하지만 생활이 달라져 처음엔 잘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예와 색소폰 덕분이에요. 아침 일찍 일어나 서예를 하면서 마음수양을 쌓고 오후에 색소폰을 배우며 그동안 상상도 못하던 진정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모시며 백담사에 근무하던 시절, 서예 심취한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서예의 매력을 알게 됐다. 그 뒤 1990년부터 매산 김선원 선생에게 사사받아왔고, 작년에는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또 2006년, 딱딱한 이미지의 경호실 조직문화를 바꾸어 보려고 경호실장에게 건의해 색소폰동호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잦은 해외와 지방출장으로 활동을 하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그는 출장은 물론 휴가 중에도 일이 생기면 복귀를 해야 했고, 여름 장마와 겨울 폭설로 인한 재해시 비상출동하여 사무실에 대기하거나 대통령 경호행사를 위해 출장을 가야 했다. 그래서 부모님 자주 찾아뵈지 못해 죄진 느낌으로 살았고, 주말에도 같이 지내지 못한 딸에게도, 명절에도 혼자 시댁에 가게 한 아내에게도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인생 2막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