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禍)와 복(福)의 씨앗은 각자가 뿌린다.
내가 늘 비유하는 이야기 가운데
희빈 장씨 이야기를 자주 해요.
희빈 장씨가 중전이라는 자리가 탐이 나서
초상화를 그려놓고 백일동안
저주를 하면서 화살을 쏘아 죽였다고 해요.
희빈 장씨의 이 기운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우주와 한 덩어리인 이 원점이
그대로
저주덩어리가 되고 독기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이
조각이 나서 여기에 있지만은
이 기운이 대우주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하는 기운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 기운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만 이 기운이 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 기운이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대우주입니다.
그러니 원점이 대우주의 원점이 되는데
이 기운이 끝없는 끝이 없고
무한의 기운을 가진 것이 대우주이기에
여기에 대우주의 기운이 전부 쌓이게 됩니다.
그러니 옛 도인이라는 어른들이
이 물체의 구속을 안 받고
물체가 생겼다가 물체가 없어졌다가 하는데
구속을 받지 않고 대 자유를 누리는데
바로 원점이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원점이 그대로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이 덩어리가 얼마나 큰지
진묵스님의 통이 얼마나 큽니까.
하늘을 옷을 삼고 땅을 자리를 삼고
산으로 베개를 만든다 했습니다.
달을 촛불을 삼고 구름을 병풍으로 둘러놓고
바다를 술 두미를 만들어 놓고 잔뜩 취해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싶은데
옷소매가 희말라야,
곤륜산에 걸릴까보아 그 짓을 못하겠다.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바로 이 자체가 대우주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우주의 기운이 다 있고
대우주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40년 조금 전에 겪은 분이
부산 옆 김해 동림사에 화엄노스님이 계십니다.
70이 훨씬 넘으셨습니다.( 2001. 11월에 입적하심)
이 스님이 직접 격은 사건입니다.
화엄스님은 일제 때
일본 오사카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졸업 무렵 2차 대전으로
일본에서 학병으로 일본군대
소위계급장을 달고 집에 오지도 못하고
일본의 학교에서 필리핀으로 가서
삶과 죽음사이에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2차 대전 끝나고
일본으로 가지 않고 부산으로 오셔서
전쟁 중에 넓적다리에 들어간
쇠 조각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큰 수술은 미군 야전병원에서 다 뽑았는데
콩 알만 한 파편조각은 미처
수술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왔답니다.
전쟁 중에 쓰러져서 미군들에 의해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깨어나니 미군 야전병원이었어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여
몸속에 쇠 조각이 있는 줄 모르고 살다가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와서 목발을 딛고
나중에 척추가 야단이 나서 목발을 딛고 다녔습니다.
자기 몸이 그렇게 되다보니
남이 존경해 주는 것도 필요 없고
선생님, 선생님 하고 대접해주어도 소용없고
월급도 소용없고 자기 몸이 망가져가니 어떻게 합니까.
스님 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어디 가서 조용히 몇 달 수양하다가
몸이 회복되면
다시 나온다는 생각으로 찾아간 곳이
범어사였습니다.
범어사에서 동산 노스님을 만나서
몸뚱이가 망가져 가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하여
동산스님에게 처음배운 것이 ‘
신묘장구대다라니’였습니다.
다라니를 지극히만 하면 몸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 하라는 대로 했어요.
본래 기운이 있던 분이어서
텅 비어 있는 암자에 혼자 가서
오른쪽다리는 마비되어
무릎이 구부려지지 않고
어떤 자리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예요.
다리를 쭉 펴고 살고 있는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열심히 했어요.
혼자 사는 암자니
큰소리로 해도 방해하는 이가 없어요.
몇 달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음해 추석날 암자에서 내려와
범어사 큰절에서 점심을 먹고
떡 과자 과일을 싸가지고 암자로 가서
다리를 뻗어놓고
누각 마루에서 다라니를 하는데
앞을 바라보고 다라니를 하는데
얼굴을 돌려야
바라보일 신장탱화가 보이더랍니다.
그림 속에
신장님 마루로 척 뛰어 내리는데
그 갑옷이 철커덕거리고
칼이 철커덕거리고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랍니다.
그러더니 신장님이 긴 칼로
오른쪽 넓적다리를 쑤셔서 도려냈습니다.
순간 뜨끔하더랍니다.
순간적으로 눈을 떠서보니
쇠 조각 세 개가 마루에 있더랍니다.
그때부터 다리가 낫았답니다.
지금은 후유증인지 나이 드시면서
오른쪽 다리가 약간 잘-슨 잘-슨 하더군요.
이것을 머리 깎기 전에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신비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 뒤 머리를 깎고
범어사 참선방에 앉아 계시다가
다음해 여름에 장난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함께 해수욕장에 가셨습니다.
부산 광안리 송정 송도 해운대를 시작으로
동해안을 여름 한 달 동안 다 밟았습니다.
오전에 걷다가 점심은
가까운 사찰에서 공양하고
오후에 해수욕을 하면서
저녁은 얻어 드시고 이렇게 가다보니
낙산 양양에 도착하니 여름이 다갔습니다.
이제 바다 물도 차서 뒤돌아 오다가
경북 선산 대둔사에서
저녁에 주무시게 됐는데
한 달 내내 걸었다가
바다에 들었다가 하였으니
곧 친구들은 코를 골고 자고.
혼자 마루에 앉아 참선한다고 앉았는데…
절 주지스님인 금포 노스님이
어떻게 보면 스님이고
어떻게 보면 마을 할아버지 같고
이런 스님이 곁에 와서
---“공부하시는 가배…
내가 질문하나할게 답해보게” 그러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이 한곳에서
한 번만 진리전수를 했어도 됐을 텐데
왜 세 곳에서 세 번에 걸쳐 진리전수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답을 못하셨습니다.
---“아직 답을 못하시는군.
눈을 보니 고단해, 좀 누워야겠어.”
참선하는 이에게 약 올리는 식이지요.
질문해놓고 답 못한다고
사람 얕보고 깔보고 놀리듯이
늙은이가 고단해 좀 누워야겠어.
하면서 눕는데
방에 들어가서 누워도 될 텐데
하필 참선한다고 앉아있는 앞에 드러눕는데
몸뚱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코를 골더랍니다.
그러니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질문에 답 못한다고
놀리는 것 같고 참선 한다고 있다가
옆 눈으로 이렇게 쳐다보니
눈을 빤히 뜨고 있더랍니다.
눈은 뜨고
코는 온 집안이 떨일 정도로 골더랍니다.
그러니 저 노인이 일부러
참선하는 나를 답 못한다고
약을 올리는가 보다는 생각에
저놈의 노인이 진짜 자나 싶어서
부채를 가지고 얼굴 옆으로 돌렸답니다.
그렇게 코를 골던 노인이 코를 멈추더니
---“허허 장난치지 마.” 소름이 짝 끼치더랍니다.
이 세계가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가 다른 점입니다.
물질로 된 몸뚱이는
고단해서 코를 골고 자는데
정신의 세계는
개미 기어가는 것까지 또렷하게 살펴봅니다.
진짜 잠은 잔다. 이겁니다.
몸뚱이는 잠을 자는데
정신은 잠을 안 잔다는 것입니다.
같이 간 친구들은 방안에서 코를 골고 자는데
날이 밝아 그 노인과
다시 마주치기가 겁이 나더랍니다.
멀쩡한 놈들이 질문 한마디에 답도 못하면서
밥은 덜컥덜컥 잘 쳐 먹는다며 혼날까 싶어
다른 친구들은
밥을 얻어먹고 오든 말든 도망쳐 왔답니다.
3년 동안 낮이건 밤이건
이 늙은이에게 보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눕지 않고
화엄스님은 지금도 옆구리를 방바닥에 대지 않습니다.
앉아서 밤을 새웁니다.
3년을 몰아치고 보니 답이 보이더랍니다.
‘아! 아! 요 소리였는데 왜 답을 못했을까’
보복한다고 선산 대둔사를 찾아가니
그 늙은이 죽은 지 3일후 이더랍니다.
죽은 사람 죽었던 말든 그 노장 3년 전에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니
되진 낯짝이라도 보자고 고집을 세웠답니다.
얼굴 가려놓은
천을 들추니 눈을 딱 뜨고 계시더랍니다.
잠을 자도 눈을 뜨고 자고
죽은 시신이 눈을 뜨고 죽었더랍니다.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면서
‘이 늙은이가 요만한 자신이 있었기에
나에게 그런 칼질을 했구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3년 전에 당신이 나에게 그 질문을 했는데
지금 한마디 하라고 소리를 치니까
숨진 지 3일 지난
시신이 오른쪽 주먹이 탁 들리더랍니다.
그 주먹이 내려온 다음에 방법을 바꿔서
다시 한 번 말을 하라고 하니까
두 번째 주먹이 들리더랍니다.
이거를 죽었다고 해야 합니까? 살았다고 해야 합니까?
이게 우리의 모습이고 대우주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체가 끝없이 향상할 뿐 질질 뒤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은 불교가
죽은 다음에 극락 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것은
기독교에서 하는 말이지
불교는 죽은 다음의 이야기를 하는 교가 아닙니다.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점이 불교인이 명심해야합니다.
불교는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하면서
지금 내가 끝없이 정진하고 향상하고 발전할 뿐
다음의 시간이야기를 안 합니다.
단, 여기에 지금의 책임을 잘하게 하기위해서
지나간 시간에 안 해놓았으니
지금 쩔쩔매잖아 이것이 전생이야기입니다.
어제 안 해놓으니 오늘 고통 받잖아
이와 같아서 오늘 안 해놓으면
내일 또 고통 받잖아
이것이 불교의 전생, 내생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지금의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영원히 현재에 살아라.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똑똑히 살라는 이야기하다보니까,
이 사람 정신 차리게 하다가 보니까,
어제 안했으니 오늘 쫓기잖아
어제 해놓았으면 지금 같은 고통을 받지 않잖아
그와 같아서 지금
안 해놓으면 내일 또 고통을 받지 않는가.
이것이 불교의 전생, 내생 이야기이지만
불교는
전생 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내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의 극락이라는
이야기는 죽은 다음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화엄스님이 체험한
금포 노스님의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세계에 사는 겁니다.
여기에도 염불을 부지런히 하셨거나
주력, 화두를 부지런히
하신 분은 다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라는 세계를 공부하다
체험해보면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떨어지고
그렇게 아름답고
거룩한 세계이고 편안한 세계입니다.
내가 그 세계를 체험해서 내가 그 세계에 가서
그 아름답고 거룩한 세계에서 편안함속에 살면서
내 가족들을 모두 인도해서
여기에서 같이 편안함을 누리면서
너 잘했다. 내잘했다고 찌그락 째그락이 아니라
참 고맙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하며
이 기쁨 속에 살면서
이웃집집마다 당신들도 노력해보세요.
이 세상은 이렇게 거룩하고
아름답고 이렇게 편안한 것이 이세상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서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거룩한 세계에 살면서
편안한 세계에 살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극락사상입니다.
그런데 잘못 전달되면서
죽은 다음에 극락에
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만
불교는 죽은 다음에 극락 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욕심, 감정, 욕망에
사로 잡혀있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원점의 세계에 갈 때에
이 세계는 이렇게
아름답고 편안한 세계입니다.
여기에 가서 우리가 아름답고 거룩한 세계에 가서
끝없이, 끝없이 정진하고 향상하고 발전하자,
이것이 불교의 이야기인데
오늘날에는 불교가 죽은
다음에 극락 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절에 다니는 분들은
49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숨이 지고 49일까지는
짐승으로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안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턱도 없습니다.
숨지면서 바로가요,
절대 49일까지 못 견딥니다.
선업을 많이 지은사람은
49일까지 있는지 모르지만은
업(業) 따라서 숨지면서 곧 갑니다.
절대 49일까지 있지 않습니다.
이런 잘못된 속에 살지요.
그리고 불교는 부처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아프든지 괴롭던지 따갑던지
내 마음 잘못 먹은 것 고치고
게을러서 하기 싫어도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내가 부처가 되어가야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리고 세상 살다보면
제일 먼저
복이나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 오는데
부처가 복이나 재앙을 주는 것 아닙니다.
복의 씨앗은 여러분이 뿌려야 해요.
복의 씨앗은 여러분이 뿌려서
여러분이 복의 씨앗을 가꾸어야해요.
그리고 그 열매를
거두어야지 부처는 복 안줍니다.
또한
부처가 재앙도 주지 않습니다.
잘못에 벌도주지 않습니다.
잘한 것 잘못한 것 모두
내가 씨앗을 뿌려서 내가 거두는 것이지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복을 주거나
재앙을 준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불교인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복도 내가 씨앗을 뿌려서
내가 가꾸어서
내가 거둔다는 것을 믿어야 되고
재앙도 내가 씨앗을 뿌려서
내가 재앙을 길러서
재앙의 결과를
내가 당한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 우룡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