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Ⅰ부. 내가 겪은 1946년-6‧25전쟁 <순 담>
1. 밤손님이라는 빨치산
올해는 북한의 6‧25불법남침 60주년이 되는 해다. 광복 후 1946년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빨치산반란군과 군경토벌대가 수없이 격전을 벌리던 곳에서 위험천만하게 겪었던 체험을 기술해 보고자 팬을 들었다. 나는 광복 후 일본에서 나와 전라남도 장흥(長興)군 유치(有治)면 금성리 앞 삼거리와 노루목에서 잠간 그리고 강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46년 초부터 빨치산들의 활동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초기 이 지역 밤손님으로 활동했던 빨치산들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유치면 일부는 6‧25이후 얼마동안도 빨치산의 영향권에 들어있었다. 유소년들은 빨치산사상교육을 받고 노래를 배우며 소년단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매포(전문)를 전달하려 다니기도 했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보림사는 인도와 중국에 있는 가지산-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삼보림(三寶林)으로 일컬어지는 천년의 고찰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860년경에 세워진 보림사는 산세가 깊고 물이 맑은 탐진강 상류 가지산 아래 있는데 주변에는 귀한 비자나무가 무성했다. 절 앞으로 흐르는 냇물에는 등이 검고 배가 누리끼리한 큼직한 쏘가리와 어린애 팔뚝만 만큼 자란 향긋한 은어가 많고 고동(다슬기)가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이와 주변 환경이 좋은 보림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 자락의 봉덕리에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죽동과 연결된 암천리라는 유치 분교가 있는 천연요새와 같은 마을이 나온다. 암천리는 6‧25 후 지리산 다음으로 가는 빨치산들의 행정보급 전진기지로 1951년도까지 전라남도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절터가 될 깊은 소(沼)에 살았던 용을 쫓아내려고 도사가 주변사람들에게 눈에 피(안질)가 생기게 하여 그 치료의 방법으로 숯 한 섬과 모래 바지게씩을 용이 사는 소에다 넣게 했다. 계속 숯을 넣고 모래를 부으니 소의 물이 줄어들어 용이 쫓겨 내려가면서 화가 나서 앞을 가리고 있는 산자락을 꼬리로 쳐서 깊게 생긴 용소(龍沼)가 있다. 이 소에서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갔다는 피재와 보림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에는 안쪽으로 금성리 마을이 있고 소 우측 아래로는 우리 외갓집이 지역의 부호로 동학란을 겪다가 떠난 용문리가 있다.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외갓집에 다니러 왔다가 보림사를 구경하시고 나오시다 경치가 좋은 삼거리 여관집을 사들인 바람에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암천리와 봉덕리 앞을 흘러내려 금성리와 용문리 앞을 지나고 다른 한쪽으로는 조양리와 덕산리 앞으로 흘러내려 면소재지 장터 앞에서 합쳐진 탐진강은 금사리와 단산리 앞으로 흐른다.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 범바위골 성터샘에서 시작한 탐진강 물줄기는 유치면을 양 갈래로 적시면서 부산면 앞들과 장흥읍내을 거쳐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삼각점에 이르러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근래에는 유치면과 부산면 사이를 막아 장흥다목적댐이 생긴 후 유치면의 낮은 지역은 물에 잠겨 큰 호수가 되어버렸다. 유치면소재지는 조양리로 옮겨가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남은 산간지역이 더 깊숙한 곳이 되어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고, 6.25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한 보림사의 역사와 더불어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아픈 흔적들은 곳곳에 묻혀 있다.
이러한 유치면은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골짜기와 분지로 돼있어 40년대 초반까지도 금성리 옆 아흔아홉 골짜기라는 엉골과 보림사 위쪽 깊은 산속에 호랑이와 곰 늑대가 살았다고 한다. 나는 46년부터 살면서 밤에는 호랑이가 나와 사람도 물러간다고 하고 호랑이 불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자주들 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는 보지 못했는데 여우는 한낮에도 산마루나 고갯길에서 종종 보았고 문씨네 문중산소와 토지를 관리하는 둘째 외삼촌이 은어낚시와 사냥의 명수셨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에 사냥개가 발견한 오소리 굴에 마른 풋고추대와 생솔가지로 불을 지펴 연기를 들여보내면 오소리가 연기를 피해 밖으로 나올 때 일차적으로 몽둥이로 타격을 가한 후 사냥개들이 잡았다.
그리고 논밭을 갈아엎어 가을 농사를 망치게 하는 멧돼지는 함정을 파서 빠뜨려 잡거나 여러 겹 가는 철사 줄로 덧을 만들어 잡기도 하고 노루는 빠르지만 사냥개로 잡고 껑은 솔개들도 잡아먹고 작은 외숙은 여름철엔 은어 낚시를 하고 가을에는 멧돼지와 노루 겨울 봄에는 꿩을 무더기로 잡고 특별한 방법으로 오소리사냥을 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구경은 잘했지만 우리아버지는 소질이 없어서 손수 잡아보지는 못해서 섭섭했다. 이런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동학란 난을 겪고, 6.25전후로는 지역 좌익분자들과 여수14연대 반란군 잔당들까지 모여들면서 좌익들의 빨치산 활동이 더 심했다.
일본에서 나온 지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말이 서투른 형 누나 그리고 나와 두 살 아래 누이동생 우리 사남매는 생활이 답답하고 불편하여 일본으로 다시 갔으면 했다. 특히 철없는 나는 일본에서 먹던 사탕을 사내라고 떼를 쓰고 울면서 졸라대기가 일수였지만, 해가 바뀌어 46년 이른 봄이 되었다. 겨울 못지않은 찬바람이 심하게도 불고 숯을 실려 왔던 목탄차가 내려앉은 목조다리 옆으로 난 도랑 길 언덕을 못 오르고 멈춰선 것을 동네사람들이 밀고 당겨서 겨우 나간 후 날이 저물었다. 인적이 끊기고 호롱불마저 꺼진 적막한 밤중인데 금성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집 앞 냇가 길로 누군가 쫒기고 떼를 지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와 온 가족이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일제 때부터 금성리에서 구장으로 행세하는 자그맣고 당당한 체구의 박채동영감과 그의 큰아들이며 유치지서 순경인 우람한 체구의 박노호가 간밤에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변을 당한 것이다. 가지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 십여 명의 괴한들은 동네에서 터주 대감 노릇을 하며 세도를 부리고 사는 박영감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몽둥이로 패고 칼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때 옆방에 있던 박순경은 재빠르게 뒷문으로 빠져나 밖으로 튀었는데 임시 경찰인 둘째 아들 박병찬은 미쳐 빠져나가지 못하고 헛간으로 들어가 섯가래를 붙잡고 천정에 납작 붙어있는 통에 화를 면했다. 맨몸으로 마을을 빠져나온 박순경은 그들에게 쫓기면서 우리 집 뒤 냇가 길을 따라 용소 쪽으로 뛰다가 송들 앞 요강沼 못 미쳐서 추격해 온 무리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2. 빨치산과 반란군
한반도에 합법적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 과도기를 틈타 준동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지식이 들었다는 일부좌익분자들이 소위 밤손님으로 빨치산 짓을 하기위해 입산하여 쓸 만한 청년들을 선동 회유를 하다가 납치해 가기시작 했다. 장흥군내에서는 산악지역인 유치면 가지산 일대를 아지트로 밤에 나타나 자기네 맘에 안든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기 시작했다. 순박한 주민들은 누가 밀고하여 화를 당할까봐 두려워 서로 경계를 하고 산사람들이 이번에는 누구 집에서 이러고저러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아 밤손님이라고 우대해 불렀다. 금성리에 나타났던 밤손님 빨치산들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경찰관을 살해하고 주로 우익성향이 짙은 유력인사들을 회유협박하며 납치해갔다.
그 무렵 유치면에는 1922년 송정리에 개교한 유치국민학교(현 초등학교)가 본교로 있고 조양리와 대리 그리고 암천리에 분교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본교 교감으로 학교관사에 사는 문여익교감이 밤손님들에게 납치돼 간 사건으로 면내에 큰 파장이 일고 학교가 뒤숭숭해 졌다. 유치면은 외가 집안 문 씨들의 세가 있는 고장이라 면장도 문씨요 암천리 분교장도 먼 외할아버지 벌 되는 분이셨다. 한편 왜정 때부터 순천경찰서 요직에서 유도가 5단이던 외할아버지의 사촌 벌되는 문창호씨가 8.15후 지역좌익의 두목이 되어 입산했다. 문씨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친 조카인 문교감을 찾아와 입산을 몇 번 권유했으나 듣지 않자 어느 날 밤 부하들을 시켜 강제로 끌어갔다.
이때 우리 외가 집안은 동학란 때 용문리을 떠나 장흥읍내에서 가까운 부산면 구룡리 자미부락에서 큰 외숙과 막내 외숙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교토에 사시다 귀국한 작은 외할아버지 댁이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큰 외숙은 강진군과 영암군을 포함해서 장흥군에 있는 재판소에서 유일하게 사법대서소를 하고 계셨고, 암천리 분교장인 먼 외할아버지의 큰아들은 육군 소위였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강동마을 건너 공수평에 사는 둘째고모 댁 장진철 큰형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있었기에 좌익들에게 입장이 곤란한 형편이었지만 한편 빨치산 활동을 하는 다른 외가 집은 보호막이 되었다.
또 해가 바뀌어 1947년 봄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시국이 불안하고 생활대책이 서지 않자 일본으로 되돌아갈려던 길을 막았던 외할아버지를 원망하며 방황하셨다. 여관집도 팔고 엉골 입구 노루목 문씨들의 제각 문간방으로 잠시 옮겨 살면서 아버지께서 공수평 산 아래 있는 밭에다 새집을 짓다가 보림사 절에 다녀오신 후 집터가 좋지 않다고 집짓는 일을 중단해 버렸다. 이후 아버지는 집을 비우고 부산으로 광주로 목포로 돌아다니시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게 되자 외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유치면서기로 취직을 시켜주시고 송정리 물가에 있는 강동마을로 이사를 하게 해주셨다.
이무렵 국방경비대로 출발한 여수14연대는 좌익분자인 지창수상사 등 40여명이 주동이 되어 47년 10월 19일 국군장교 20명과 하사관 43명을 살해하고 연대를 장악한 후 여수와 순천 벌교와 광양을 점령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반군을 우선적으로 진압하라고 군에 엄명을 내렸다. 진압작전에 돌입한 국군에게 수적으로 열세한 반란군들은 쫓기고 소멸되면서 살아남은 자들이 회문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유치가지산에도 들어왔다. 밤손님들과 합류하여 더 강해진 그들을 더 이상 밤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반란군이라고 했다. 무기가 열약한 밤손님은 반란군들이 가지고 온 성능 좋은 미제 M1소총을 가지고 한낮에도 전선줄을 끓고 지서를 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식량을 거둬가고 쓸 만한 젊은이들을 회유하다 강제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국방경비대 모병이 있을 때 우리 동네 앞 냇물 건너 공수평에 사는 장진철 고종형님과 전에 면장 지냈던 분의 아들이 국방경비대에 지원해 가 있었다. 그러던 어는 날 고종형님이 사지군복에 멋진 정모를 쓰고 나타났는데 그 시점이 여수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때였다. 고종형님은 반란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부대를 이탈해 나와 숨어 한동안 지내다가 6‧25가 터지자 육군에 재 입대하여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이마에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후 53년 일등중사로 명예 제대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다.
3. 산천이 풍성한 고장
또 한해가 가고 48년 봄, 일본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온 여섯 살 위의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학년까지 다니다온 네 살 위의 누나가 4학년으로 올라갔다. 나는 1학년에 입학하였는데 학생 수가 많아 한반에 60명씩 2개 반으로, 우리2반 담임선생님은 덧니가 나고 맘씨가 고운 외가 쪽 먼 친척이었다. 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가져온 가방을 매고 다닌다고 우체부체부로 놀림을 당해 학교가기가 싫어 일부러 가방을 길가에 던져버려 잃어버렸다. 또래들처럼 책보를 매고 싶었는데 또 가방을 꺼내주면서 메고 다니라는 통에 여전히 놀림을 당하느라 겨우겨우 억지로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다.
분교가 있는 조양리 쪽에서 경찰관이 또 살해되어 유치지서장과 문보고 면장이 무장한 경찰관들과 3/4톤 스리쿼터를 타고 금정면 상가를 향해 신풍리에서 덤재를 넘다가 반란군의 기습을 받았다. 전원이 살해되고 차량과 함께 시신이 불태워진 끔직한 사건이 대낮에 발생하자 광주에 있던 국군20연대의 2개 중대가 내려와 학교주변에 주둔하면서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텃세를 부리는 빨치산들은 신풍리 아래 신작로 모퉁이에 매복해 있다가 작전을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부대로 돌아가는 군인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기습공격을 받아 죽은 군인과 부상한 군인을 소달구지에 실고 내려와 죽은 군인을 강변에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장을 하는 걸 멀리서 지켜보았다.
유치면은 이웃 부산(夫山)면과 장동(長東)면을 합친 것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조양리 쪽에서 흘러내는 냇물과 암천리 쪽에서 흘러내는 냇물이 면소재지 장터 앞에서 만나 탐진강 본류가 됐다. 유치면은 장흥군에 속한 일개 면이지만 영암군 금정면, 강진군 옴천면, 화순군 도화면, 그리고 장흥군 부산면, 장평면, 장동면으로 둘러싸였다. 골짜기가 많고 지형이 흐르는 냇물을 따라 크게 세 갈래로 갈리어졌다. 송정리 앞 장터를 중심으로 동쪽은 단산리와 대리를 지나 빈재를 넘어 부산면을 거쳐 읍내에 이르고, 장터에서 서쪽은 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갈모리를 지나 우리가 살았던 강동에서 내을 건너 공수평 노루목 용문리 금성리 삼거리에 이른다. 용소 앞 삼거리에서 빈재을 넘어 장평면으로 빠져 보성과 벌교에 이르고 곧장 보림사 쪽으로 봉덕리를 거쳐 죽동 암천리를 지나면 영암군 금정면과 화순군 도화면에 이른다.
그리고 남쪽으로 길은 장터에서 국도를 따라 조양리를 지나 덤재를 넘으면 영암군 금정면을 거처 나주 영산포에 이르고 다시 광주와 목포로 가는 길이 열린다. 전기시설은 물론 신작로에 자갈만 깔려있던 시절이라 가끔 장작과 숯을 실러 왔다가는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다니고 장흥읍에서 광주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에 왕복으로 한번 지나다녔다. 우리가 살았던 금성리 용소 앞 삼거리에서 장평으로 가는 피재에는 차량통행이 전혀 없고 강도가 숨어있다고 하여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보림사까지는 소구루마가 다니고 운전석 적재함 한쪽에 보일러 통을 장착하고 숯불을 피우면서 다니는 일제목탄차가 엉골과 일대에서 구어 낸 숯과 장작을 실러 드나들었다.
유년시절은 밤손님 빨치산과 반란군 빨치산들 때문에 위험한 생활을 하면서 피해를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산과 들 냇물과 계곡에 봄이 오면 삐비를 뽑아 벗겨먹고 찔레나무 새순 찔구를 꺽어 먹으면서 약초에 버금가는 취, 고사리, 고비, 더덕, 도라지와 온갖 산나물을 반찬으로 풍성하게 먹었다. 보리를 베고 모를 내는 초여름부터는 산딸기, 보리딸기, 먹딸기를 실 컨 따먹고 가을에는 참나무열매 상수리와 상수리보다 납작한 떡갈나무열매와 도토리는 지천이라 거들어보지도 않았다. 주로 산밤과 산감을 따고 어름 달래 개금 야생복숭아를 입맛에 당기는 데로 골라서 간식거리로 따먹으면서 겨울에서 봄까지는 꿩 노루와 멧돼지를 사냥해 포식을 했었다.
여름에는 약초가 많은 산 계곡물 바위틈에서 뱀장어와 메기를 냇물에서 는 크게 자란 은어를 잡아 조림을 해먹고 자갈 모래밭에 반쯤 묻혀 사는 모래무지를 발로 밟아서 잡아 제자리에서 날것으로 먹으면 고소하고 향긋한 맛이 났다. 징거미를 손쉽게 잡으면서 냇물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누리끼리한 고동(다슬기)을 건져다가 된장국에 삶아 속살을 탱자나무 가시로 맛있게 빼먹으면 그 국물에 밥을 말아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2010년 5월 18일)
제2부. 빨치산과 겪은 6‧25전쟁 <순 담>
1. 폭풍우의 전야
나는 1946년부터 빨치산들이 준동하는 곳에서 6‧25전쟁을 겪게 되었다. 해방 후 내가 본 초기의 빨치산들은 무장이 빈약했다. 상급지휘관 정도라야 러시아제 때때권총을 폼 나게 차고 나머지 대원들은 구구식, 삼팔식, 사사식 같은 단발식 소총 몇 정에 그나마 실탄이 귀해서 중요한 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대부분은 소총모양으로 깍은 목총에 단검을 꽂아 쓰고 긴 칼과 죽창이었는데 1948년 10월 19일 여수14연대가 반란군이 되어 국군에게 소탕되면서 일부가 빨치산으로 흡수되었다. 반란군들이 갖고 온 8연발-미제M1소총과 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한 빨치산들을 반란군이라고 불렀다.
48년 유치면장과 지서장이 경찰관들과 탄 스리코터가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한 후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20연대의 2개 중대가 반란군을 잡기 위해 유치로 내려왔다. 학교근처에 천막을 치고 1개 중대씩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남은 1개 중대는 학교운동에서 훈련을 했다.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허리에 실탄8발들이 탄창이 붙은 탄띠에 대검을 차고 철모를 쓴 채 야전 삽과 반합이 붙은 배낭을 메고 M1소총을 앞에 들고 뛰고 엎드리고 기고 구르기를 매일같이 반복했다. 나는 국군아저씨들의 이런 저런 훈련을 지켜보는 재미에 푹 빠져 집에 돌아갈 생각을 깜빡 잊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M!소총을 오른 쪽 왼 쪽 어께위에 바꾸어 언 졌다 내렸다 하면서 36방으로까지 흩어졌다가 다시모이는 절도 있는 제식훈련이 너무 보기 좋았다. 한참 하던 훈련을 마칠 때는 운동장 큰 벚꽃 나무아래에서 두 손을 허리춤에 언 고 좌우로 반동을 하면서 “남아 이십대 장군 남이장군이 남겨 논 그 말씀 가슴에 담고……”라는 군가를 부른 후에 네 명씩 총을 기대어 세우고 휴식을 했다. 군인아저씨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와 땀에 저린 파란군복에서 배어나오는 이상한 냄새에 매력을 느끼면서 커서 군인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 꿈이 이루어져 4‧19를 마치고 바로 군에 입대하여 미8군 카투사로 복무하다가 광주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가 되어 68년 1‧21사태 때 전방5분대기소대장으로 69년에는 베트남전 중대장으로 실전에 임했다.
장흥군 유치면에 주둔하고 있는 광주20연대는 국방경비대 최정예부대였다. 최신식 미군장비로 무장하고 강력하고 철저하게 전투훈련을 하면서 치밀하게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바람에 빨치산들이 겁을 먹고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아무데도 나타나지 못했다. 48년 가을 추수가 시작 될 무렵 어디서인지 후생사업을 하는 군인트럭들이 장작을 실러 보림사 쪽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들의 기습을 받아 빈 트럭으로 사상자만 실고 빠져나왔다. 이 사건으로 경계가 심해진 가운데 면 전체의 축제인 가을 운동회가 한참이었다. 장가를 들어 애 아빠가 되고 멀대 같이 힘이 센 장정들이 5,6학년에 있어서 홍 청팀으로 나누어 릴레이를 하고 기마전을 연습할 때부터 전쟁을 하는 분위였다. 나는 용감한 군인들과 기마전의 불꽃 튀기는 접전을 보고 달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군대시절은 물론 지금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운동회가 끝나고 서리가 많이 내리는 늦가을 어느 날 광주연대본부에서 높은 사람이 내려와 활동사진을 보여준다고 학교로 다모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에서 무사영화를 봤는데 이곳사람들은 진기한 활동사진을 난생처음으로 볼 수 있는 기회라 어른아이들 할 것 없이 각 동네마다 저녁을 일찍 해먹고 몰려나왔다. 엄하게 차려입은 대대장이라는 분이 주민들에게 “여러분을 위하여 반란군을 소탕하러 와 있는 군인들에게 적극 협조하는 뜻으로 반란군이 나타나면 즉시 신고를 해야 합니다. 만일 반란군에 협조한 자는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 입니다”라는 연설을 마치고 영화를 돌렸다. 흑백화면에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영부인이 손을 흔들며 꽃전차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고 다음 장면에서 펑하면서 영사기가 고장 나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군인들 덕에 생활이 안정되면서 면에 다니시는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동생인 김형권이 아버지와 지서순경들과 은어를 잡으러 가셨다. 7.8월이면 어린애 팔뚝만큼 자란 은어들이 큰 돌이 듬성듬성 있는 용소 위 송들 앞 여울물에서 떼를 짓고 있다. 총을 든 순경이 총구를 아래로 한 채 금방 쏘려고 손가락을 방아쇠에 대고 있다가 격발이 되어 뒤에 있던 김명덕씨가 쓸어졌다. 실탄이 오른쪽 무릎 바로위로 관통해 나가 급히 광주로 옮겨가 수술을 받고 결국 그 무릎 위를 절단하고 양쪽으로 목발을 짚어야 걷게 되었다.
고요한 폭풍우의 전야 같은 49년이 저물어 가는데 지서에 방벽을 더 튼튼하게 쌓는 부역이 시작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전투경찰이 증강되면서 군인들이 안보이지 않아 친구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 무렵 나는 책보자기를 매고 다니고 싶어서 집에서 준 두 번째의 가방도 아이들이 우체부라고 건드릴 때 기회다 싶어 벗어 던져버리고 왔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면서 여기는 일본이아니라고 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가방을 버린 지점으로 달려가 봤으나 가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매를 드시고 섭섭해 하시면서 결국 책보자기를 구해주어서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교과서는 가방을 버릴 때 없어졌고 새로 공책과 연필을 사서 필통에 넣고 몽땅 책보에 싸서 왼쪽어깨위에서 오른쪽 어깨 아래로 질끈 동여맸다. 또래들도 우체부라 놀리지 않고 연필이 필통 안에 딸랑거리는 게 기분 좋았다.
겨울에는 부산면 구룡리 큰 외가 집에 제사가 몇 번 있었다. 이번에도 어머니를 따라 외가 집에 제사를 지내려가 외종형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밤에 마당건너 헛간에 있는 칙간에 가는 게 재미있었다. 부엌 옆 외할머니가 거쳐하시는 방 건너에 있는 칙간은 위에서 변을 보면 아래서는 여러 마리의 돼지들이 꿀꿀대고 나와 변을 서로 먹겠다고 밀고 받고 하는 게 볼만했다. 구룡리 앞들은 장흥군내에서 제일 크고 넓은데 김대중 대통령 때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했던 김태정씨가 태어난 곳이다. 유치면에서 문중전답을 관리하시는 둘째 외숙께서는 은어낚시와 사냥의 도사셨는데 대식이 외종형과 나를 읍내를 지나서 바다를 끼고 있는 용산면 이모님 집에 가서 사냥개를 데려오라는 심부름을 보냈다. 한나절이 걸려 이모 집에 가 누런 진돗개와 온몸에 검은 줄무늬가 칙칙하게 난 사냥개를 개 주인을 동행하여 데려왔다. 바위틈새에 굴을 깊게 파고 동면을 하는 오소리 굴을 사냥개가 찾아내자 생솔가지와 마른 고추대를 굴속으로 태워 독한 연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오는 오소리를 먼저 몽둥이로 타격해서 사냥개가 두 마리가 달려가 잡게 했다.
2. 방호산 부대
1950년이다. 나는 책가방을 고의로 거듭 잃어버리고 책보자기를 맨 대가로 왕따를 면하게 되어 우리말도 잘하게 되었다. 봄을 맞아 누나가 졸업을 하고 나는 3학년이 되면서 내 바로 다음 설자가 1학년이 되었는데 아직 말이 서툴고 큰 눈에 겁이 많아 염소를 무서워했다. 형 누나 때부터 계속 두 명씩 학교에 다니게 되어 서로 의지가 됐다. 나는 같은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학교방과 후에는 장터 면사무소에 들려 아버지가 주시는 돈으로 ‘오다마’라는 큰 사탕을 사 입에 넣고 물가에서 놀다가 집에는 늦게 들어갔다.
우리 집은 외가 집에서 준 논 다섯 마지기와 밭 너마지기가 있었는데 ‘송들’ 논에는 멧돼지들 때문에 벼대 크고 이삭에 붉은 빛과 긴 수염이 달린 ‘다마금’을 심고 ‘엉골’ 논에는 수염이 없고 수확이 많은 금계옥을 심었다. 밭에는 목화와 콩을 많이 심고 찰옥수수와 단수수 팥 참깨를 심어 가꾸시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 모내기를 끝내고 퇴비용 풀베기가 한창일 무렵 따발총과 긴 장총을 맨 인민군들이 면에 들어왔다가 떠나고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세포조직책이라며 북한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사람이 지역 빨치산들을 다그치면서 중학생들을 앞세워 인민소년단을 조직했다.
학교공부는 중단 된 채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으면서 장흥중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남녀 선배들이 우리에게 북한노래를 가르치고 빨치산을 장려하는 연극을 했다. 이런 와중에도 가을농사가 골고루 잘되고 송들에서는 멧돼지가 덧 채 사라져버려 그 후에도 멧돼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름진 다마금 햅쌀로 밥을 지어 멸치 젖에 고춧가루와 참깨가루를 뿌려 무채를 만들고 앞 냇가에서 잡은 쏘가리와 모래무지에 덜 익은 호박을 썰어 넣어 조림을 맛있게 해주셨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전투경찰대가 잠시 들어왔다가 나간 후로 유치면 일대는 빨치산들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는 장흥군 인민위원회세포조직이 들어와 있고 우리 집 안방은 참모장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위원회에서 우리 동네와 일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른이 신을 수 있는 짚신을 한 가정 당 열 켤레씩 삼아노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인민군○○부대가 이곳에서 저녁을 먹는다며 400명분 저녁을 준비하고 짚신도 다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공수평 정자나무 앞 빈 논에 여러 개의 솥을 걸어 밥을 짓고 소를 잡아 국을 끓이는 동안 장흥빨치산 기동대가 앞 뒤 산에 경계를 섰다. 짧은 초겨울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빨치산들과는 다른 복장과 무장을 한 인민군들이 말을 탄 지휘관을 앞세우고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지방빨치산간부들이 깍듯이 대하는 인민군들은 논바닥에 짚을 깔고 저녁을 먹으면서 주먹밥과 짚신을 챙겨 넣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낙동강전투에서 유엔군에 밀려 후퇴한 일명 방호산부대로 인민군6사단장이던 방호산과 그 부하들이였다. 그들은 실탄을 아끼면서 의복과 신발 보급을 받을 수 없어 짚신을 구해신고 지방 빨치산들이 제공하는 밥을 먹어가면서 북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후일 방호산은 유격활동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나머지도 지리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사람씩 최후를 맞이했다.
인민군들이 다녀간 후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와 공수평과 강동아래 마을까지를 지서에서 가까운 갈모리로 소개시켰다. 무슨 일이 벌려지려나 싶어 우리 집은 갈모리 입구 외딴집 문간방으로 옮겨갔다. 낮에는 전투경찰들이 보림사까지는 들어갔다 오는 모양인데 봉덕리 위쪽 죽동 산태몰 암천리 일대는 빨치산들의 해방구 그대로였다. 음력설을 지내고 난 어느 날 밤 때 아닌 징소리와 꽹과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횃불들이 앞 내가에서 번쩍이면서 함성이 울렸다. 지서에서 경찰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콩 볶듯 하는데 양쪽 고지에는 봉화가 오르고 경찰들을 조롱하는 욕설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빨치산들에게 동원된 산골주민들이 처대는 징과 꽹과리 소리가 더 커지고 횃불은 도깨비불처럼 요동을 치면서 지서를 향해 좁혀들고 있었다. 저들은 국군을 <누렁개> 경찰은 <검둥개>라 하는데, 극도의 공감에 빠져든 경찰들을 ‘검둥아 워리-검둥아 워리’ 하면서 힘 빼기 심리전을 펼치다 새벽녘에 일단 물러갔다. 경찰들은 자기들만 살겠다고 지서 외부 대나무울타리에 붙은 여래의 초소에 소개해온 주민들을 죽창만 들고 방패막이로 세웠다. 대나무울타리 안쪽은 대나무를 날카롭게 만들어 바닥에 촘촘히 박아둔 해자가 있고 그 다음에 돌로 두껍게 쌓은 토치카 안쪽에서 경찰들은 총구만 내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우리가 머무는 집 앞 논가에 남색치마로 덮인 바지게가 보여 가까이 가보니 피가 흥건하게 고여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난해 봄 갈모리 김아무개에게 시집간 새색시를 경찰들이 붙들어다가 죽여 버린 것이다. 사연인즉 갈모리에서 장흥중학에 다니는 김아무개와 공수평 장씨 집안의 규수가 결혼을 하고 신랑은 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중에 6‧‧25가 났다. 그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예외 없이 공산당 선무활동에 이용되다가 대부분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이무렵 빨치산들이 군경가족을 끌러다 죽이고 경찰들은 빨치산들에게 가족을 처참하게 잃고 지서를 습격당하면서 악이 받쳐 빨치산에 대한 보복으로 장 여인을 살해한 것이다. 죽은 장여인은 공수평에서 우리고모 댁 사촌으로 마음씨와 품행이 고운 절세미인 이라 아는 이들은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 경찰들을 증오했다.
빨치산들이 전선줄을 절단하고 도로와 빈재일대에 장애물을 설치해두고 매복해 있는 상태라 경찰병력을 실은 차량이 들어오지를 못한 채 날은 저물었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유치지서 경찰들은 무너진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돌격대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리게 되었다. 손에 도끼나 톱 낫을 들고 지서를 부시는 데 동원된 주민들은 마치 독한 고량주에 취한 상태로 징과 피리소리를 듣고 무작정 돌격하는 중공군들처럼 이었는지도 모른다. 빨간 불꼬리를 달고 날아가는 예광탄은 보기도 좋은데 휙휙 소리만 내고 스쳐가는 총알 때문에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밖을 보니 어제보다 더 많은 횃불이 냇가 주변에서 지서를 에워싸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실탄이 바닥나 무방비 상태가 된 경찰들을 처치하고 무기와 의복을 수거한 후 식량과 기타 전리품은 민간인들에게 지우고 가면서 지서를 불태워버렸다.
3. 빨치산의 소멸
51년에 들어 지배하는 세력이 자주 바뀌었다. 지서가 무너진 후라 빨치산들에 의해 또 짐을 싸매고 살던 동네로 다시 들어가야 했는데 얼마 안 되어 경찰토벌대가 다시지서를 접수하고 지서를 복구하기위한 부역을 나오라 했다. 공수평 위쪽사람들과 우리강동사람들도 암천리 쪽 깊은 곳으로 피해버리고 우리집에서 형이 부역을 나다녔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더운밥을 지어 내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날도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점심밥을 형한테 가져다주어 먹게 하고 빈 그릇보자기를 들고 집으로 오는데 길 양편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내려오다 나를 잡아 세웠다. “야 꼬마야 너 지금 어디 갔다가 오냐”며 다그쳐서 나는 사실대로 “우리 형이 지서에서 일하는데 점심밥 가져주고 오는 데요”라고 대답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군인이 “그러면 너의 집이 있는 동네가 어디냐”고 물어 손을 들어 동네를 가리키려는데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는 “저기 연기 나는 데가 우리 동네 강동 인데요”라고 하자 군인은 급히 나를 데리고 뛰어가 중대장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중대장은 즉시 이 아이가 사는 마을에는 불을 지르지 말고 불을 다 끄라고 했다. 나는 군인에게 손이 잡혀 금방 동네에 도착했는데 명령을 받고 군인들은 철모를 벗어 미쳐 물이 없는 데는 소변을 떠다가 불을 끄고 군인들도 모이고 동네사람들도 모였다. 중대장께서는 나를 세워놓고 “오늘 우리가 이 아이와 마나지 못했으면 이 동네는 불타버릴 뻔 했는데 천만다행입니다”라고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2월 하순경 우리 동네 주인이 또 빨치산으로 바뀌었다.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빨치산 간부가 밤에는 형과 나를 불러 동구 밖에 경계를 서라고 했다. 그날도 경계를 서려나가려는데 마당가운데 모닥불이 펴있고 어디에서 반동으로 붙잡혀온 어린애를 포함한 일가족이 초죽음이 되어 쪼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인지 빤한 일이지만 그냥 못 본채 하고 밖으로 나와 외갓집 밭둑아래 앉아서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도란도란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살펴보니 아까 우리마당에 있던 사람들을 줄로 묶어 빨치산 두 놈이 앞뒤에 서서 ‘팥밭골’산기슭으로 갔다가 한참 후에 빨치산 두 놈만 내려와 마을로 들어갔다.
또 일주일 쯤 후에 빨치산 두목이 우리동네 사람들에게 100여명이 먹을 수 있도록 점심준비를 곧 하라는 지시를 불같이 내렸다. 시키는 대로 안하면 반동으로 몰릴 판이니 어쩔 수 없이 점심준비를 분주하게 하는데 멀찍 암치부터 가마니를 등에 진 맬방부대가 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동구 밖 팽나무 아래서 무심코 냇물건너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동네 쪽으로 돌출된 곳에서 뭐가 움직이는 것 같아 더 자세히 보니 분명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우리 집에 있는 빨치산 두목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가 하는 말은 “우리 빨치산 들이 이 주변에 널려있어서 걱정 없으니 점심이나 빨리 먹게 하라요”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도 별수 없이 점심을 먹으려는데 기관총소리가 나면서 실탄이 동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어제 밤 지서가 습격을 당한 보복으로 장흥전투경찰대가 은밀히 추격해와 기습을 가해 꼼짝없이 당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동네는 물을 떠다먹는 뒤 골짜기로 각자 알아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어머니는 막내를 엎고 아버지는 설자를 데리고 골짜기로 한참 뛰는데 기관총 실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내 바로 앞에 얼음이 언 바위가 있어 못 넘고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인민군 복장을 한 사람이 막 바위를 넘으려 할 때 그 바지가랭이를 꽉 잡고 같이 뛰어 넘으려는 순간 총알이 내 머리위로 날아와 내 손에 잡힌 인민군 다리에 꽂혔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인민군이 내 위로 넘어졌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민군이 보이지 않아 다른 쪽으로 골짜기를 올라 대삼이라는 마을로 내려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을 만났는데 어떤 분이 “너희 아버지가 총에 맞아 쓸러지셨다”고 했다. 형과 나는 아버지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앞이 캄캄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경찰들은 해 떨러지기 전에 철수하기 때문에 어두워지자 우리는 산길을 넘어 동네를 향해 내려가는데 멀리 동네가 불타고 있었다. 가까이 이르러 보니 초가지붕들이 내려 앉아 옹기종기 모닥불처럼 인데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으로 위로를 하며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는 중에 아버지를 누가 부축해 왔다. 아버지는 설자를 엎고 뛰느라 미쳐 기총사격을 피하지 못해 총알이 오른 발등을 뚫고 발바닥으로 관통해버렸다. 다행히 뼈가 다치지 않아서 어머니는 익은 호박 속을 꺼내어 아버지의 발등환처에 부치고 무명천으로 싸맸다.
불타고 있는 집 마당에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 동네사람들이 다 무사한지부터 알아 보기시작 했는데 먹는 개울물 위에 사는 임배네 어머니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빨치산들은 자기네들끼리 뒤 수습을 다 한 후라 우리는 당장 잠을 잘 집부터 세워야 했다. 동네사람들을 따라 형과 나도 뒤 산에 올라가 적당한 나무들을 베다가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앉아서 말씀으로 감독을 하시고 형과 나는 기둥을 세우고 칙으로 붙들어 맨 다음 얼기설기 작은 나무들은 역어 붙여 겨우 하늘을 가리고 누울 수 있게 만들어 마른 풀을 깔고 그 위에서 이불만 덮고 잠을 잤다.
봄나물이 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는 불난 산에 돋아나는 고사리와 취나물을 채취하려 다녔다. 탐스럽게 자란 취와 고사리를 약간 삶아서 부산 구룡리 외가동네로 가 쌀과 바꾸어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외가 집들은 더 안전하게 지내려고 광주로 이사를 가고 없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무겁게 이고 간 고사리와 취나물을 겨우 쌀 한 되와 바꾸어 들고 한나절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쌀을 조금씩 넌 나물죽을 끓여 연명을 했다. 한편 호박 속으로 아버지의 환처가 많이 아물어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초겨울이 되면서 사방에서 빨치산들이 몰려들고 군경 합동으로 토벌 작전이 전개된다면서 호주전투기가 날아와 한 바퀴씩 돌고 사라졌다. 그리고 군경토벌대가 곧 들어온다고 더 깊은 곳으로 피난을 가기위해 모두들 마을 비우고 떠나게 되었다. 우리도 이불과 중요한 것을 넌 트렁크를 매고 ‘내삼’으로 들어가 트렁크를 대밭에 숨기고 이불만 지고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는데 총소리가 진동했다. 경찰 특공대들이 들어와 마을과 대밭에 불을 질러버려서 귀중품과 일본돈 증권 가족사진들이 트렁크 안에서 불타버렸다.
(2010년 5월 18일)
제3부. 빨치산과 격은 6‧25전쟁 <순 담>
1. 빨치산 토벌대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혹독한 추위와 중공군의 무자비한 인해전술에 마구 밀려 51년 3월15일 서울이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때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들의 규모도 대단해, 48년 10월 여수14연대반란군과 50년 여름 낙동강에서 패주하던 인민군 일부가 합쳐지면서 빨치산의 틀에서 벗어나 정규군 조직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었다. 원래 빨치산은 러시아어로 파르티잔(Partizan)이나 에스파냐어의 게릴라(Guerrille)는 비정규군전투조직원들이다. 이들은 우리군경의 배후에서 통신 교통 시설을 파괴하고 빈틈을 엿보아 주로 밤에 지서를 습격하여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고 있었는데, 유격대(遊擊隊)역시 비슷한 개념의 조직원들이다.
초기 남한에서는 조국해방을 염원하면서 일본에게 착취당했던 피해의식 때문에 사회주의이론에 다분히 감상적으로 빠져들어 광복과 더불어 빨치산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여기서 무장을 하고 유격활동을 하는 무리를 빨치산이라고 한다면, 빨갱이는 좌경사상에 물들어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비속어이다. 세가 많이 확장된 빨치산들은 지리산을 총사령부로 전북지역은 순창-임실의 회암산을 아지트로 삼았고 전남지역은 장흥유치의 가지산을 요새로 암천리에서는 자체 통신시설을 갖추고 대검은 물론 수류탄과 제네바군사협정으로 금지된 납으로 재생실탄도 만들었다고 한다. 지리산으로부터 상당히 독립된 암천리의 전라남도사령부에서는 전남기동대와 노령산부대 송악산부대 그리고 장흥군기동대를 관장하고 있었다.
51년 2월 중순경 장흥경찰서 관내의 지서를 빨치산들이 습격하고 전리품을 옮기는 멜방부대가 우리 동네에서 점심을 먹을 때다. 은밀히 추격해온 장흥전투경찰대가 동네를 향해 기총사격을 퍼붓고 내를 건너와 마을을 불태우면서 추격이 계속되자 암천리까지 위험해 졌다. 이에 동네사람들도 마을을 떠나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고 우리는 신작로를 벗어나 한참 들어가 내삼마을에 살고 있는 외척 신동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 때 일본에서 모아온 돈과 증권 귀중품과 사진을 넣어둔 트렁크를 그 집 앞 대밭에 숨겨두었다가 경찰들이 들이닥쳐 대밭에도 불을 질러 몽땅 타버렸다. 그 날이 51년 3월 11일이었는데, 물 맑고 야생차나무와 비자나무 숲이 울창한 가지산 자락의 세계 3대 보림(寶林)으로 유명한 천년의 고찰 보림사를 빨치산들이 불질렀다.
이는 가지산을 아지트로 보림사에 모여 있던 빨치산들이 군경토벌대에 쫓기면서 피해가 속출하자 그 화풀이로 절간에 불을 지른 것이다. 다르게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절에 불을 놓고 떠난 빨치산들은 지골(저주)맞아 며칠 후 인근 골짜기에서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빨치산들은 매일같이 추격해오는 군경토벌대에게 몰려 당당하게 버티고 있던 암천리 사령부마저 군경토벌대에게 유린당하고 대책 없이 지리산으로 도망쳐 갔다. 이때 우리가족은 이불보따리만 가지고 밥을 지어 먹을 수가 없어 생쌀을 물에 불려 먹으면서 어느 날은 화순군 도화면까지 쫓겨 갔다가 밤중에 죽동으로 돌아왔다.
군경토벌대들은 밤을 두려워 해 낮에만 들어와 의심이 나는 곳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대고 휩쓸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산골지역을 빠져나가곤 했다. 다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던 빨치산들이 밤만 되면 제 세상을 만난 듯 신출기묘하게 나타나 기습공격을 하기 때문에 병력과 화력이 수십 배에 달한 군경토벌대들도 산골짜기의 밤을 싫어했다. 이제 유치면 내에서 최종적으로 토벌작전이 벌어지는 곳은 가지산 보림사 쪽뿐이었다. 우리가 살던 강동 물 건너 공수평과 노루목 용문리와 금성리를 지나서부터 빨치산들이 장악하고 있는 동네들이었다. 우리는 낮에만 왔다가 나가는 토벌대를 피할 수 있는 데를 찾아 큰 냇가마을을 피하고 산골 작은개울이 흐르는 내륙으로 들어갔다.
빨치산들이 버티고 있던 죽동과 암천리는 타지역에서 쫓기던 빨치산들과 어쩔 수 없이 따라붙었던 민간인들까지 다 모여들어 토벌대의 손쉬운 타격점이 되고 있었다. 우리 식구는 내륙으로 들어가다 이전에 토벌대가 들어와 불을 지르고 진탕을 쳐버린 내삼에서 하루 밤을 묶었다. 이제는 집도 트렁크도 불타 없어지고 목숨만 붙어있는 절박한 인생이 되었다. 어느 날 신삼이란 작은 마을 지나면서 작년 가을 경찰에 의해 오지마을 소개령이 내렸을 때 우리 집에 잠간 와 있었던 어인동 김씨네 집을 찾아갔다. 이신동과 산태몰 마을은 더 멀리 있는데 어인동에는 김씨네 집안끼리 세 가구가 모여서 화전으로 밭을 일구어 붉은 감자 콩 팥 수수를 심어먹고 살고 있었다.
그 분들은 무슨 사연에선지 외부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곳에 살면서 큰집 아들이 장흥읍에서 중학교에 다녔는데 6‧25가 난후 다른 중학생들처럼 좌경에 휩쓸리지 않고 집에 와 있었다. 깊은 골짜기 높은 산마루에 분지를 이루고 있는 어인동 이신동 산태몰은 지대가 높아 외부에서 오는 게 훤히 보이고 토벌대의 발이 아직은 닿지 않은 곳이었다. 낮 시간 편하게 밥을 지어먹고 해질 무렵 물가에 있는 죽동으로 내려갔다. 밤이 되자 도깨비불처럼 불빛들이 번쩍이면서 죽동 앞 냇물가에는 어디서 왔는지 빨치산들과 피난민 인민군 패잔병들까지 꾸역꾸역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몹시 지치고 허기진 군상들 중에는 총에 맞아 들것에 실린 사람도 있었다. 민간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랑개 검은개들이 한꺼번에 챔빗질 하는 통에 여기까지 밀려왔소”라며 자기들 끼리 생존의 안부를 물으면서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다. 노랑개는 국군을, 검은개는 경찰에 대한 빨치산들의 비속어로 민간인들도 그렇게 알고 챔(참)빗질은 머리카락 속에 기생하는 이를 빗질해 잡듯이 군경토벌대가 빨치산들을 심하게 소탕한다는 말이었다. 이미 순창 임실 남원 쪽에서 군경합동토벌에게 전북지역 빨치산의 요람 회암산이 참빗질을 당해 살아남은 자들이 지리산으로 가고 일부가 이곳까지 몰려왔다.
2. 암천리의 최후
유치면 암천리는 지역이 좁고 주변의 퇴로마저 토벌대가 지키고 있어 독안에 든 쥐처럼 피할만한 곳이 못되어 맥이 풀려버린 빨치산들은 군경토벌대와 맞설 수가 없어 각개 약진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미 전북지역을 강타하고 기세를 몰아 온 군경토벌대는 암천리와 가지산일대를 참빗질하려고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어 암천리의 운명은 내일모래가 고비가 될 것이라고들 했다. 이런 와중이었지만 아버지의 부상당한 발이 거의 완쾌되어 우리가족과 우리를 따라다니는 이웃 몇 가족은 그 날 밤 저녁을 먹은 후 내일문제를 심각하게 의논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여러 가지 정보와 정황으로 볼 때 “날이 새면 국군과 전투경찰이 이곳을 참빗질 할 텐데 한꺼번에 모여 있다가 떼죽음을 당해도 시신을 처리해 줄 사람도 없게 됩니다. 그러니 두 세 사람씩이 어디쯤으로 알고 피했다가 밤에 이곳으로 모입시다.”라고 당부했다.
밤을 어떻게 샜는지 날이 밝자 어제 밤 약속대로 몸을 피하기로 하고 우리 집은 네 패로 갈라져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나 어머니와 49년 태어난 막내 아기, 할머니와 누나 형과 설자 여덟 식구가 패를 가른 대로 어디어디로 간다는 약속을 한 후 몸을 피하기 위해 새벽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나는 죽동 맞은편 골짜기로 들어가 억새풀이 앞을 가리고 있는 바위틈새를 찾아들었다. 어느덧 햇살이 밝게 비추고 정오가 가까워오는 시간에 콩볶는 것 같은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어오고 박격포 날아와 터지는 소리, 기관총 소리가 산골을 뒤흔들었다. 아버지와 나는 꼼짝 않고 엎드려 있는데 바로 뒤에서 군인들이 줄줄이 지나가면서 말하는 소리가 옆에서처럼 들리고 한참을 앉아서 중얼거리다가 건너편으로 총을 쏘아대면서 지나갔다.
군경토벌대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고 인기척이 나는 곳에는 집중 사격을 해대는 통에 갓난 어린애기 울음소리가 치명타가 되어 엄마가 자기아기의 입을 틀어막다가 죽게 하기도 했다. 민간인들은 해치지 않을 터이니 손들고 나오라고 했다지만 주민들은 이쪽저쪽으로 이용당하고 속기만 해서 믿지 않고 사는 데 까지 피해 다녔다. 어린애기 우는소리 때문에 아지트가 발각되어 여러 사람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문 때문에 같은 피난민들끼리도 우는 애기가 있으면 입을 막아 죽이도록 했다. 이에 우리 어머니는 유난히 소리가 큰 막내로 인해 몇 번 고비를 넘겼기에 독해지셔서 남들은 물론 우리 가족에게까지도 피해주지 않고 당하면 둘이만 죽겠다며 피난처를 따로 하셨다.
결전이 있던 날 해가 서산에 걸치기 시작하자 약속을 한 것처럼 총소리가 싹 멈추고 사방이 고요해졌는데 암천리 초가집들이 타면서 곡물 타는 메케한 냄새가 진동하고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계곡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는데 인민군복을 입은 여자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억센 북한 악센트로 아버지더러 “동무 내래 좀 살려 주시구래, 물! 물! 물……”하면서 픽 쓸어졌다. 주변에는 부상당하고 쓸어져있는 빨치산과 인민군들이 뒤엉켜 있지만 아무도 도와주고 치료를 받게 해줄 형편이 못되었다. 이 순간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네 패로 흩어져 피한 우리 가족과 마을 분들이 과연 무사하게 돌아올 것인지 걱정하면서 약속한 장소를 찾아가는데 시체가 널려있었다.
그 날 밤 우리가족은 할머니까지 무사하게 모였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도 다는 아니고 가족들끼리 모여 이미 대세가 기울러진 형편에 어떻게 해야 살아 날 수 있겠는지 판단을 내려야 할 책임이 아버지께 주어졌다. 이에 아버지는 “더 이상 피해 다닐 곳도 없고 빨치산들은 괴멸되고 있어 우리는 오늘 밤 이 지역을 벗어나 토벌대를 찾아가 자수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하셨다. 우리 집 식구에게 따라 다니려는 이웃집 식구들과 자정이 넘은 시각에 큰 냇물 길을 피해 죽동마을 고개를 넘었다. 대삼을 향해 가는 산길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바로 앞에서 “누구냐 손들어”하는 소리가 났다. 아!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까이 총을 겨누고 닥아 서던 빨치산이 뜻밖에 “아제 아니어요”라며 어둠속에서 아는 채하는 게 노루목 사람이었다.
우리를 향해 겨누었던 총을 내린 청년은 이전에 아버지 어머니에게 신세를 진 외갓집 먼 친척이었다. 청년은“아제, 아짐씨 고생 많으시지라요. 암천리 쪽은 많이 위험한디 잘 생각해서 피해 가시오. 아마도 이쪽은 하는 짓이 틀린 것 같소. 엉골이 우선은 안전할 것 같소만 거기가면 아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소”라며 우리를 배웅해 주듯이 지켜봐주다 사라져 갔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용문리 냇가에 도착했다. 사방이 적막해서 물 흐르는 소리만 크게 들리는데 냇물만 건너면 노루목을 금방 지나 호랑이가 산다는 엉골이다. 아흔아홉 골짜기의 엉골은 큰골 작은골로 갈라지는 삼거리 큰 쥐엄나무 앞에는 논과 밭이 마당처럼 펼쳐있고 그 양쪽으로 골짜기가 있다. 새벽이 되어갈 무렵 사방을 살피면서 신속하게 냇물을 건너 엉골 입구에 있는 쥐엄나무에 무사히 도착해 골짜기가 다양하고 깊어 숯 굽는 터가 많은 큰 골짜기로 들어갔다.
3. 자유를 찾아서
이전에 어름 다래를 따먹으며 봐 두었던 빈 숯굴에 들어가 아침을 맞았다. 사방이 훤해질 무렵 마른 갈대숲이 우거져있는 개울가에 나가 가재를 잡아 싸리나무 불에 구워먹고 주변을 정찰하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나 가까이 접근해 보니 뜻밖에 공수평 고모님 식구들이었다. 암천리 쪽으로만 몰려가고 토벌대들도 그 쪽으로 몰아붙이는 통에 엉골은 비무장지대처럼 되어있었다. 계속 안심을 하고 있을 곳은 아니지만 우선 고모님이 비축해 논 양식으로 밥을 해먹으면서 모처럼 편히 쉬었다. 그러던 며칠 후 엉골 입구에 토벌대가 다녀갔는데 곧 들이 닥칠 것이라는 정보를 누가 전해 주었다.
아버지는 엉골에서도 더 이상 있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에 같이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의논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무사히 토벌대에게 자수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밤중에 엉골을 빠져나와 노루목과 마주보고 있는 공수평 마을로 들어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장진상이네 빈집에서 밤을 새고 토벌대들이 나타날 때쯤에 짚을 아궁이에 태워 연기가 나게 했다. 한참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동구 밖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이어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손을 들고 밖으로 나와 정자나무 아래로 모이시오”라는 메가폰소리가 들렸다. 이때를 기다렸기에 아버지를 따라 우리식구와 일행들이 두 손을 뻔쩍 들고 나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들에게 인솔되어 지서로 갔다.
지서에서 일단 조사를 받고 금사리 앞 강변으로 옮겨가 수용시설로 설치된 미군 군용천막에 여러 세대가 같이 지내게 되었다. 나는 경찰토벌대를 따라다니며 탄피를 줍고 빨치산들이 도망쳐 간 곳에서 담배며 식량 남은 것을 가져다 날랐다. 그 무렵 날씨가 따뜻해지고 위생시설이 썩 좋지 않은 수용소 에서는 겨우내 피난생활하면서 못 먹고 지친 몸들이 풀리면서 역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이나 옆에 있는 사람이 신고를 하게 되었고 신고를 하면 경찰들이 착검을 한 총을 겨누면서 환자를 들것에 담아 차로 실어갔다. 환자들은 외딴 강변에 환자 막을 치고 있다가 죽게 되면 외부로 전염이 안 되도록 환자 막 안에 시신을 둔 채 불태워졌다. 그런 형편이었는데 어느 날 암천리까지 경찰들을 따라 갔다 온 나는 으쓱으쓱 춥고 머리가 아파 눕게 되어 그 것이 역병이라고 경찰에 신고가 되었다.
즉시 경찰이 총검을 하고 찾아와 누워있는 나를 환자 막으로 데려갔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곳에 버려둔 나를 밤에 아버지가 찾아와 업고 그 밤에 빈재를 넘어 부산면 구룡리 외갓집으로 갔다. 그 때 외갓집은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하고 집이 비어있는 터라 우리가족이 다 옮겨와 생활을 하는데 내아래 설자가 머리가 아프다며 눕게 되었다. 그 때 조양리에 사는 외갓집 친척분도 다 큰 딸이 역병에 걸려 외갓집 외할머니 방에서 치료하다가 땀을 못 흘리고 그만 죽었다. 나와 설자 그리고 누나도 앓아눕게 되자 초여름인 데도 아랫목에 눕혀 솜이불을 덮어 놓고 불을 지펴 땀을 푹 흘리게 하기를 몇 차례 한 후 조금씩 낮게 되었고 재발을 했다가 완쾌되었다.
큰 외갓집이 돌아오고 우리는 대문 밖 창고에서 생활하다 고개 넘어 금박골 박씨네 집으로 이사를 해 놓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목포 대성동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께로 갔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는 시장에서 소금 도매업을 하시면서 다섯 살짜리 미자와 나를 집에 두고 일찍 시장에 나가셨다. 이틀째 되는 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목포 사람들이 뒷교라고 부르는 서부국민학교에 찾아가 4학년에 편입을 시켰다. 학교에 가는 길가와 바닷가에는 북한 피난민들이 얼기설기 움막을 지어 생활하며 바닷가에 나가 무엇을 줍고 햇볕을 쬐며 앉아있었다. 나는 6‧25가 나던 50년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 7월부터 학업이 중단된 채 51년 그리고 52년 지금까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4학년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는 또래들도 없고 텃세를 부리는 애들이 수업이 어눌한 나를 이상하게 보고 따돌리기 시작하자 48년 유치초등학교 일학년 때 책가방을 매고 다닌다고 우체부라고 놀림을 당해 학교에 다니기를 싫어했던 그 때처럼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는 척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학교엔 가지 않고 유달산 아래나 선창가로 놀러 다녔다.
말수가 없으신 아버지와 일본에서부터 나를 사랑해주셨던 작은 어머니는 일찍 시장에 나가시고 다섯 살짜리 미자가 칭얼대는 게 귀찮아서 아버지가 오시면 목포를 떠날 작정이었다. 그 때까지 학교에 갈 때 쌀독에서 쌀을 주머니에 잔득 넣고 나가 쌀을 깨물어 먹으면서 부두가에서 미국 군함들이 짐을 싫고 내리는 것을 구경하고 목포 시내 가 볼만 곳을 돌아다니다 저녁 때 학교에서 오는 것처럼 하고 집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학교에 잘 다니는지 보려고 아버지가 찾아오셨는데 나는 목포가 싫다며 무작정 우리 집으로 가겠다고 떼를 쓰자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난감해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외갓집 동네로 다시 데리고 와 장흥군 부산국민학교 4학년으로 전학시켜 주셨다.
초여름이 짙어갈 무렵 외갓집 동네를 떠나 우리가 살았던 유치면 송정리 강동으로 가 불타버린 집터에 우선 살만하게 집을 지었다. 식량이 떨어져 나물죽을 끓여먹으면서 풋감을 따다 우려서 먹고 지내는데 어느 날밤 낡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는데 먹을 것을 구하러 왔소. 식량을 내놓으시오”라고 했다. 이 때 어머니께서 “사실 우리도 식량이 없어 며칠 째 굶다가 풋감을 우려먹고 속이 아려 이렇게 누어 있소”라고 하자 한참 뒤져보더니 쌀 한 톨이 나오지 않자 다른 데로 가자며 떠났다. 그때가 52년 여름밤이었는데 이후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빨치산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연초에 집을 나가 소식이 없던 아버지께서 편지와 돈을 부쳐왔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취득한 운전면허증으로 미군 부대에 취직이 되셔서 의정부에서 매달 돈을 부쳐와 주변에서 부러워할 만큼 생활이 나아졌다. 나는 5학년 때부터 급장이 되었다. 여자가 8명에 남자가 16명 모두 24명이었는데 이전까지 두 학년이 한 교실을 쓰다가 우리 때부터 단독교실을 사용했다. 광주사범학교를 갓 나온 문행준 선생님이 담임을 맡아, 나와 부급장인 김형권이를 진학시키려고 집중지도를 해주셨다. 그 무렵 빨치산을 공비라고 했는데 공비잔당이 또 출몰하여 전투경찰대가 매복을 나가고 있을 때다. 53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 식량을 구하려 산에서 내려오는 공비를 전투경찰대가 사살하여 들것에 실어다 우리 동네 앞 신작로 옆에 두었는데 이웃 부산면에 사는 가족이 시신을 찾아간 이후 공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2010.05.27)
첫댓글 유치면에서 벌어진일이 참으로 엄혹하군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11.30 13:33
아.....
아픈 현대사..
가보고 싶다... 유치라는 곳..
좀 슬퍼요
다시 보니, 1000이 넘는 조회수는 첨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