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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놀라운 십자가 ( 갈6:12-14 )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회장님이 이야기하시기를, 소나타와 그랜저는 큰 차이가 나는데 사람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대학을 나온 같은 회사원인데 일을 시켜 보면 어떤 사원은 그랜저처럼 일하고 어떤 사원은 소나타처럼 일한답니다.
그런데 일을 못하는 사람도 결국 죽고, 일을 잘 하는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서울대학에 가려고 애쓰고 하버드 대학에 가려고 애쓰지만, 그 대학에 들어가도 죽고 떨어져도 죽습니다. 결국 인간은 똑같습니다. 누구나 흙이 됩니다.
파리가 왕왕 거리지만 다 없어집니다. 꽃이 아름답지만 다 떨어져 흙이 됩니다.
사람들이 “내가 누구네.”하고 으스대지만 결국 다 썩습니다. 영원히 살 사람은 한 사람도없습니다.
그런데 죽고 나서 그냥 흙이 되어 없어지면 좋은데,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그 심판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 법정의 심판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간음하고 도둑질해도 세상 법정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 법정은 피할 수가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법정에서는 형을 주어 감옥에 보내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보내십니다. 감옥은 입구도 있고 출구도 있지만, 지옥은 입구뿐입니다. 지옥에는 출구가 없어서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요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매우 심각하고 엄숙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 죽게 되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며 몸으로 행한 행실을 그 앞에 직고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행한 것에 달려 있다.
인생은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심고 거두는 것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과 오는 영원한 세계에서 기쁨과 행복과 평강의 축복을 거둘 것인가?
성경 전체가 그 문제의 해답을 말하고 있다.
무엇이 기독교 복음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는 그가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이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전했고 그들이 계속 고수해 나갔기 때문에 급기야는 고난을 받아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사도가 그것을 전했던 이유이다.
그가 왜 이것을 자랑하는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이 십자가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이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죄를 심판하셔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구약에서 죄에 관한 희생제사에서 보게 되며,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지나쳤으며 그들의 죄는 심판받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보라 ---저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외쳤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는가?
첫 번째, 그 십자가 사건은 예언된 일이었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을 읽어 보라.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실 죽음에 대한 완벽한 예언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모든 번제들과 희생 제물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날이 올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3장14절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그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정하셨던 것을 시간 세계 속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시다.
아담 타락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비참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켜 일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처럼 바른 교육은 받았지만 더 도덕적이지 못하다. 아무것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 [육신의 욕망, 정욕] 어떻게 하면 정결하고 건전하고 순결하고 정조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법을 모르고 있다.
왜 바울이 그것을 그처럼 자랑하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너무 사랑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담이 생겨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스탑되고 오지 못하여 사람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망과 허물로 살다가 영원히 멸망하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요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무 불쌍하고 애처롭게 생각하시어 사람을 구원하시는데,그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죄악의 담을 헐고 사람을 영생하게 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흠도 점도 죄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야 그 피의 공로로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죄가 있어도, 아무리 부끄러운 과거가 있어도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아 주시고 구원해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이것이 케리그마,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다.
두 번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것 없이는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찾는다.
-그는 그로 하여금 십자가를 자랑하도록 만드는 것을 그는 그 십자가에서 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슬픔이 함께 하고,
왕관과 가시가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본다.
죄 없으신 분이 징벌을 당하는 것을 본다.
또 “말씀” 되신 영광의 주를 본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시는 분”
아버지의 영광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영원한 영광을 버리고 실로 종의 모양과 형체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을 본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의 무지가 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한은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가지신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계시된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 십자가에 다 응축되어 있다(요14:6).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고 싶고 영원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여기 오직 한 길, 저 놀라운 십자가를 쳐다보고 응시하고 묵상하고 곰곰이 생각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그분이 여러분의 죽음을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고 여러분이 당할 형벌을 지시고 여러분 대신 고통을 받으셨음을 믿으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여러분이 평화를 얻었음을 믿으라.
여러분이 즉시 용서를 받으셨음을 믿으라.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십자가를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진실로 믿지 못한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을 열으사 십자가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가 받으실 제물을 공급하셨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취하여 그 자신의 아들의 머리위에 두시고 그 아들을 치셨다. 심판으로 끝내 죽이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갈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것이 복음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율법이 그리스도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자유케 되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마져 십자가를 조롱하는 일이 있다.
그들은 피를 언급하면 질색하며 “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번제와 희생제사들을 원시적인 종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십자가는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현대인들에게는 여전히 거침돌이다.
모든 인간의 고통들은 교만에서 파생된다.
사람이 타락한 것도 교만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더러 교만에 영합하여 우리를 높이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교만을 참으로 훼손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를 미워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찿아 구원하려 함이로다”(눅19:10) 이 말씀은 그들을 격분케 하였다.
자기들이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암시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차이가 없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의가 더러운 옷과 같고,
우리가 가장 좋게 여기는 것은 모두 분토와 배설물이요, 전적으로 쓸모가 없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땅바닥에 메다꽂아 버린다.
미국의 팝 가수인 마이클 잭슨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요즈음에는 별로이지만, 저도 한때는 그를 좋아해서 미국에 있을 때 그가 공연하는 것을 TV에서 몇 번 보았는데, 참 희한했습니다. 걷지 않는 것 같은데 걷고, 좌우간 흉내도 낼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늙지 않으려고 치료하는 광선이 나오는 비싼 유리관에서 잠을 잔답니다. 그리고 매일 전기가 흐르는 금속판에 몸을 접촉시킨답니다. 그러면 그 충격으로 몸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랍니다. 또 채소는 혹시 균이 들어올까 봐 꼭 익혀서 먹고, 하루에 비타민을 오십알씩 먹는답니다. 그리고 젊어지기 위해 동물과 논답니다. 원숭이에게 자기 옷을 입혀 놓고원숭이하고 놀고, 또 다른 동물과도 논답니다.
그렇다고 늙지 않습니까?
마이클 잭슨이 화장을 짙게 하고 나오니 잘난 것처럼 보이지, 화장을 지우면 얼마나 보기싫은지 모른다고 합니다.
불로장생하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써도 늙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영원히 죽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도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 그 분을 다시 볼 때, 무엇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랑함으로 그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점이다(롬5:6-10).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갈2:20).
신성 모독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인 다소 사람 바울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셨다.
한 마을에 공부를 너무 못하는 용수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용수는 대개 공부를 잘 하는 편인데, 이 용수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다른 과목도 못했지만 특별히 산수는 정말 못했습니다. 저는 같은 용수라도 산수를 아주 잘 했습니다.
선생님이 잘 풀지 못하는 문제도 제가 다 풀어서 동네에 천재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입니다. 고향에 가면지금도 "저기에 천재가 온다."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 용수는 산수를 못해서 늘 20점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용수가 마음에 작정을 했습니다.
'한평생 20점만 맞을 수 있나? 아니야, 이제부터는 산수를 파자.'그래서 열심히 산수를 팠습니다. 산수를 판다는 말은 삽으로 판다는 말이 아니라 산수만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가 나오는 법입니다. 산수 시험을 쳤는데 용수가 100점을 맞았습니다.
늘 20점을 맞다가 100점을 맞았으니 그 시험지를 가방에 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시험지를 손에 들고 갔습니다. 그러면 친구들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자고 해야 되는데 아무도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시험지를 이마에 붙였습니다.
"용수야, 그게 뭐니?"
"네가 봐라.""어! 너 산수 100점 맞았네?"
집에 와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시험지를 이마에 붙인 채 "엄마!"하고 어머니를 불렀
습니다."야, 너 이마에 붙인 것이 뭐냐?"
"나와서 읽어 봐."어머니가 나와서 보니 100점 맞은 시험지입니다."아이구! 우리 용수가 100점 맞았네."
어머니는 그 시험지에 밥풀을 발라서 벽에 딱 붙여 놓고, 동네 사랑방에서 노는 아버지에게
달려갔습니다."여보, 여보. 빨리 좀 오세요.""왜 그래?"
"빨리 집으로 가 봐요. 가 봐요."
집에 와서 보니 벽에 100점짜리 시험지가 붙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우리 아들 용수가 100점 맞았네. 이것은 벽에 붙여 놓으면 안 돼."하더니, 대나무에 묶어서 지붕에 달아 놓았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저게 뭐요?""우리 아들이 100점 맞은 시험지요."
20점 맞던 아이가 100점을 맞아 오니, 아버지가 좋아서 온 동네에 자랑하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일도 자랑하고 싶어서 야단인데, 십자가의 복음보다 더 좋은 소식, 더 기쁜 소식이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죄가 없어지고, 예수님만 믿으면 저주가 없어지고 마귀가 떠나가고, 예수님만 믿으면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바로 천당에 가고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사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냔 말입니까?
이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냔 말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믿게 된 것을 정말 감사하고 부지런히 자랑해서 우리 겨레와 온 세계가 십자가의 복음 아래 구원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