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예고한 대로, 이번에는 RPG의 직업들 중 도적과 성직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적과 성직자는 사실은 상당히 힘든 직업입니다. 왜냐구요?
일단 도적. 도적은 의외로 할 일이 없는 직업입니다. 전투는 전사보다 못하죠, 그렇다고 마법사나 성직자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성직자? RPG에서의 성직자는 사실 힐링(healing), 즉 hp회복을 해주기 위한 직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까딱 잘못하면 hp 회복을 위해 모든 마법을 아껴두고 전사나 마법사가 열나게 싸우다가 다쳐오면 그거 치료해주는 역할로 전락해버립니다.
이러다 보니, RPG를 시작할 때에는 '음 뭔지 모르지만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뭐야 재미없잖아!" 하고 때려치우는 경우도 꽤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도적과 성직자가 재미가 없느냐? 그건 절대 아닙니다. 지금부터 하는 설명을 잘 들으… 아니 읽어보시면 어째서 이 두 가지 직업이 RPG에 절대로 등장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도적이란 무엇인가?
뭐, 말 해 뭐합니까? 도동놈이죠. (^^)
다만, 도동놈은 도동놈인데 그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알기에도 도둑은 일반 도둑이 있고 강도가 있고… 가 아니라, 의적이라는 것도 있고, 산적이라는 것도 있고, 요즈음은 산업 스파이라던가 007 같은 부류도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RPG에서의 도적도 그것만큼 여러 종류가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실제적으로 도적의 분류 자체를 여러 가지로 해 놓은 시스템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전사라던가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세세한 분류를 가진 것이 많지만, 도적은 규칙으로 정해놓을 정도로 세세하게 만들긴 좀 애매하다는 것이지요.
RPG에서의 일반적인 도적은 로그(Rogue)라고 불립니다. 로그라는 것은 방랑자, 사기꾼, 건달 등등의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적류의 모든 직업을 모아 통칭할 수 있는 말인 것이죠.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느낌의 도적은 시프(Thief)라고 부릅니다. 이게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진짜 '도둑'입니다. 남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물품을 훔치는 녀석이지요.
대표적이지는 않으나 많은 시스템에서 '로그' 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직업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새신(Assasin)이고, 또 하나는 바드(Bard)입니다. 어새신은 암살자, 바드는 음유시인이라는 말로 번역 가능합니다. 어새신은 말 그대로 암살자이죠. 암살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직접 관련된 일이다보니, RPG에서 직업으로 실체화 되어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접 플레이하기보다는 NPC로 많이 등장하죠. 그에 비해 음유시인은 상당히 유쾌하고 재미있는 직업입니다. 로그의 뜻이서 '방랑자'라는 쪽에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할 겁니다.
도적은 무엇을 하는가?
이것이 의외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앞서 말했듯, 싸움은 전사보다 못하고 그렇다고 마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HP(생명력)마저 낮아서 싸워보려 애써도 별 효과를 못 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니 처음 도적 해보겠다고 나선 플레이어들이 조금 뒤에 '뭐야 이거 재미없잖아 T_T' 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일도 제법 벌어집니다.
그럼 대체 도적은 뭘 해야 되는가? 사실 없는 건 아닙니다. 도적류는 다른 직업에 비해서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그건 다시 말해 뭐든지 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한 겁니다.
일단 도적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대부분 도적이라고 하면 처음 시작할 때에 묘한 기술들을 많이 익히게 됩니다.
그러한 기술 중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본분에 충실하게도 대부분이 '몰래 숨어드는 것'과 '금고문 여는 것'에 관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 쓸모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활용방법을 생각해보세요. 담벼락 타기라던가 자물쇠 열기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매치기 같은 즐거운(^^) 기술들은 현실 세계에서 쉽게 해볼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또, 도적들은 물리적 마법적인 힘에 세지 못하니까 무리를 짓는 버릇(?)이 있습니다. 소위 '도적 길드'라고 하는 것인데, 이건 어느 판타지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일종의 뒷골목 조직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이 길드 이용을 잘 할 생각을 못하는 편입니다. 특히 모험을 많이 다니는 도적들은 그렇죠. 하지만 길드라는 건 조직이고,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있다면 그만큼 이용해먹을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판타지 세계라도 줄(…)과 빽(…)이 파워의 동의어인 것은 틀림없거든요. 이걸 잘 이용해 먹을 수만 있다면 도적 플레이는 아주 즐거워집니다. 이런 곳에서 주로 할 수 있는 건 '정보 수집' 같은 고급 기술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물품을 챙기고 처리하는 것도 도적이 할 일 중에 하나입니다.
무식한 전사라던가 마법 외엔 머리에 없는 마법사에게 파티의 살림을 맡겨두어서야 일이 제대로 안 돌아갈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물품을 제대로 챙긴다? 하하, 하늘에 구멍이 나고 해가 동쪽으로 꼴깍 넘어가면 그런 일 생길 지도 모릅니다.
몬스터가 쓰러졌을 때, 그 몬스터에 붙어있을 금전! 보물! 이거 다 도적이 챙기는 겁니다. 파티의 가계부 쓰기? 그것도 물론 도적이 하면 됩니다. 보통 전사나 마법사는 금전 감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불쌍한 인간들이 굶어 죽게 놔둘 수야 있나요. 다 정이 뭔지, 같은 파티원인 도적이 챙겨주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다만, 그 챙겨주는 만큼의 대가는 다 받아야겠지만 말입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반드시 앞에 나가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가 어두운 던전이라고요? 그렇다면 누군가는 조명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걸 전사나 마법사에게 시키기에는 그 전력이 아깝지요. 건조식량이나 무기 같은 거 괜히 잔뜩 싸매고 다닐 필요 없습니다. 그런 거 말고 쓸모 많은 물품들을 배낭에 가득 채워둡시다. 던전에서 길 찾기가 어려운가요? 마을에서 분필이나 초크를 구입해둡시다. 적이 오기 전에 매복하고 싶습니까? 양초를 앞길에 문질러두고 밧줄에 잉크를 적셔 안보이게 한 뒤 발을 걸 준비를 해보면 어떨까요. 계란과 밀가루를 배낭 안에 지고 다니면 배고플 땐 핫케이크 구워 먹고 적이 나오면 던져서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고나서도 할 일이 없다면, 커다란 빨간 깃발을 꺼낸 다음에 마구 흔들어주는 겁니다! 뭐하냐고요? 아 물론 우리편 응원이죠(^^). 의외로 도적의 플레이란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도적의 플레이어는 무엇을 하는가?
흠, 중요한 문젭니다. 도적의 플레이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하는데, 플레이어가 실제로 그걸 모른다는 겁니다. 하긴 생각해 보세요. 장정들이 10명쯤 있는 시커먼 방에 들어가서 정보 협상해 본 일, 있으십니까? (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거. 끄덕끄덕)
그러다 보니, 도적의 행동지침이라기보다는 도적의 플레이어가 가져야 할 행동 지침이 생깁니다. 기왕 도적이라는 반사회적 - 이라기보다는 일탈적이고 즐거운 직업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면 재미있게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째, 마스터와 친해져라.
아∼∼∼∼∼∼주아주아주 중요한 이야깁니다.
도적의 가장 큰 적(?)은 마스터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마스터가 시나리오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서 도적이 엄청나게 활약할 수도, 아니면 저어 기억의 저편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RPG의 기본은 전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사는, 마법사는, 그리고 성직자는 절대로 잊혀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도적은? 사실상 전투에서 그다지 도움이 많이 되지는 않습니다. 거기 거기, 전투 도중에 『백스탭(뒤에서 기습)』하겠다고 『그림자에 숨기』 하겠다는 분? 참으세요. 전투 상황에서 도적의 기술은 99% 먹히지 않습니다. 먹히게 만들고 싶다면 전투 시작되기 전에 미리 미리 선언하세요.
하지만 그러는 것도 한두번이죠. 계속해서 전투에 전투가 이어지는 시나리오이면 도적은 결국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그나마 함정 찾기라도 좀 해볼 수 있는 던전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적은 꾸물꾸물 기억의 저편으로….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스터와 친해지십시오.
당신의 캐릭터가 빛을 볼 유일한 수단은, 마스터가 도적 캐릭터의 활약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스터 말을 잘 듣고, 아양을 떨고, 칭찬해 줌에 의해서 마스터가 도적이 활약할 무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세요. 혹은 직접적으로 "야 내 캐릭터 좀 활약하게 해 주라" 하고 떼를 써도 될 사이가 되세요.
함정을 만드는 것, 정보를 주는 것, 몬스터와 그에 속한 보물을 내보내는 것, 모두 마스터가 하는 일입니다. 마스터와 친해졌을 때 손해볼 일, 절대로 없겠지요?
둘째, 머리를 써라.
물론 RPG라는 게임 자체가 머리 쓰기를 요구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도적이 써야 할 머리는 좀 다른 쪽에 있습니다.
앞에서 도적의 종류에 대한 예를 들었었지요. 도둑, 강도, 의적, 산적, 산업 스파이, 007(=첩보원)… 이런 것이 직업으로 따로 정리되어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도적을 하다보면, 성직자가 치료 기계가 되어있는 것처럼 도적은 문따기 기계가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를 쓰는 겁니다.
어떤 머리냐고요? 바로 '잔머리'입니다.
RPG는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즉, 롤플레이를 잘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무조건 때리고 부숴서 적을 물리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내가 전사만큼 강하지 못하고 마법사만큼 마법도 못쓴다면 적을 물리치는 외의 방법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적을 만나면 일단 한번 협상 방법을 생각해 본다던가, 직접 적과 맞대놓고 싸우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던가 하는 건 도적의 입장을 강하게 만드는 일들입니다.
지난번에 예로 들었듯, 전사가 『무조건 돌격』에다가 『싸우자 부수자』를 실천하는 종족(?)이라면, 도적은 바로 그 고삐를 잡아끄는 종족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맥가이버 생각나십니까? 지금 무언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무언가 심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맥가이버가 되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섞다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모릅니다. 후추와 밀가루를 잘 섞으면 좋은 공격 무기가 되어줄 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자신이 어떤 도적이 될 지는 전적으로 자신이 정하는 것입니다. 007 같은 도적이 되고 싶다면 실제로 그런 부분에 유의해서 플레이를 해 보세요. 바드라던가 어새신같은 독특한 도적 직업을 하고 있다면,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열심히 연구해 보세요. 분명히 도적은 무엇이던지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셋째, 정보를 공유하라.
도적을 플레이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도적은 직업의 특성상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먼저 정보를 입수하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무언가 특이해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정보를 동료들에게 숨기게 되면 나중에 큰코다치는 일이 많습니다.
플레이가 재미없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파티원들끼리 경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파티원들끼리의 경쟁은 절대로 재미없을뿐더러, 마스터를 난처하게 만듭니다. 파티원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지, 누가 이기고 지고를 따지는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적은 평소에 활약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 싶으면 무조건 그것에 매달리게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많은 수의 도적 플레이어가 초보 시절에 그러한 오류를 범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바보 취급 하고 싶다면 그건 NPC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를 아직 모르는 파티원이 아니고 말입니다. 정보는 함께 가지고 있을 때에 힘이 되지, 혼자 독점한다고 힘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아아, 어느새 도적의 이야기를 하다보니 너무 길어졌군요. 예, 그만큼 도적은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면이 많은 직업이라는 것이지요.
그럼 이번에는 이 정도로 도적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 번에 성직자와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또 길어질지도…) 혹시 성직자나 마법사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미리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다음 번에 만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