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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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위니어(Gwinear)
축일 3월 23일
성 그위니어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아일랜드 선교단의 책임자였음은 확실하다.
성 그위니어와 그의 동료들은 헤일 강변에서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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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콘(Nicon)
축일 3월 23일
성 니콘은 유명한 로마 군인이었다.
그는 동방을 여행하던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스승인 키지쿠스(Cyzicus)의 테오도시우스
(Theodosius)는 그에게 200여명의 제자를 남겨주었다.
박해의 손길이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위협했을 때
그들은 시칠리아(Sicilia)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그들의 순교 장소를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레아(Caesarea)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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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펠라기아(Pelagia),
성 아퀼라(Aquila),
성 에파르키우스(Eparchius),
성녀 테오도시아(Theodosia)
성 도미티우스(Domitius또는도미시오)
축일 3월 23일
성녀 펠라기아(Pelagia), 성 아퀼라(Aquila),
성 에파르키우스(Eparchius), 성녀 테오도시아
(Theodosia)는 성 도미티우스(또는 도미시오)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 도미티우스는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 사람으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필시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순교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앙키라(Ancyra)의
성 바실리우스(Basilius, 3월 22일) 행전에
이름 없는 순교자로 나오는 사람일 수도 있다.
성 도미티우스는 카이사레아의 경기장에서 공공연히
이교도의 신을 거부하라고 외쳤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칼에 맞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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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Benedict)
축일 3월 23일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는
당신의 대화집에서 베네딕투스라는 독수자를
꼭 기억하고 싶다고 하였다.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또는 베네딕토)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에 살던 은수자인데,
고트족(Goths)이 이탈리아를 점령했던 당시에
그들의 손에 의하여 화덕 속으로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를 지켜본 고트족이
그를 석방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와 당시대의
사람으로 그와도 개인적인 친교를 나누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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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Peter)
축일 3월 23일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구비오의 지센지 가문 출신인 베드로(Petrus)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브릭티니아
은수자회에 입회하여 관구장까지 역임하였다.
그의 수도자들은 그의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테 데움’(Te Deum) 성가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이 이 무덤을 발굴해 보니 그는 입을 벌리고
손을 합장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유해는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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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빅토리아노(Victorian)
성 프루멘시오(Frumentius)
축일 3월 23일
반달족의 아리우스파(Arianism) 국왕
후네릭(Huneric)은 부친 전세릭(Genseric)의
전철을 밟아서 정통 가톨릭을 철저히 박해하였다.
그러나 480년경에는 다소 완화하던 박해정책을
다시 강화시킴으로써 수많은 순교자들이 고통을
당하였다.
성 빅토리아누스(또는 빅토리아노)는
아드루멘툼(Adrumetum) 사람이나 카르타고(Carthago)
최고 갑부 중의 한 사람인 관계로 후네릭으로부터
지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황제의 박해
칙령이 내리고 그 실시를 요구해 오자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고백함으로써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처형되어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은 수천을 헤아렸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순교한 다른 네 명의
부유한 상인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의 두 명은
카르타고의 상인으로 둘 다 프루멘티우스
(Frumentiu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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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시빌리나 비스코시(Sibyllina Biscossi)
축일 3월 23일
시빌리나 비스코시(Sibyllina Biscossi)는
아기 때에 고아가 된 이래 10세 때까지 하녀로
빵을 얻어먹었고 읽고 쓸 줄도 몰랐다.
더욱이 12세 때에는 완전 맹인이 되었다.
그러나 신심이 돈독했던 그녀는 기도를 통하여
성 도미니코(Dominicus)가 그녀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그녀가 꿈을 꾼 듯 환시를 보았다.
성 도미니코가 그녀를 이끌고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났는데, 갑자기 찬란한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래서 다시 기도에 빠져들면서 이번에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도미니코회 성당 옆에
자리를 잡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80세까지 그렇게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움막 창문 곁에서
그녀의 고귀한 말씀을 듣고 개종했고 또 그녀의
간구로 치유되었다. 그녀는 성령께 대한 특별한
신심이 있었고, 사백주일을 최고 축일로 지냈다고
한다. 그녀는 65년 동안 조그마한 움막 안에서
은둔생활만 하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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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성 에텔발두스(Ethelwaldus, 또는 에텔발도)
축일 3월 23일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가 파른 섬에 마련한
은둔소에서 서거한 뒤에 이 은둔소는 리펀(Ripon)
태생인 은수자 성 에텔발두스
(Ethelwaldus, 또는 에텔발도)에게 넘어갔다.
그는 스승 쿠트베르투스의 방을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꾸미고, 송아지 가죽으로 벽을 치장하고서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바람이 너무나 세차게 불어서
종종 자신의 기도가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파른 섬은 린디스파른(Lindisfarne)에서 멀지 않는
곳이므로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그 섬의 벼랑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한번은 린디스파른의 세 수도자가
날씨 좋은 날을 택하여 이 섬을 찾아가려 했으나
심한 바람 때문에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이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성 에텔발두스가 자기 방에서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를 보고 기도하자 바람이 그치고
세 수도자들이 무사히 귀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섬의 은둔소는 아무나 방문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성인은 이곳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운명하였고 린디스파른에 묻혔다.
그 후 덴마크 사람들의 습격으로부터 성인의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더럼(Durham)으로 옮겨서 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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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오리올(Joseph Oriol)
축일 3월 23일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태생인
성 요셉 오리올(Josephus Oriol)은 요람에 있을 때에
부친을 잃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가대에서 활동했는데,
이를 지켜본 그곳의 성직자가 읽고 쓰기를 가르쳐
사제가 되도록 이끌어주었다. 그의 생활은 매우
모범적이었다. 그는 사제가 된 후 박사까지 되었다.
1686년 그는 사도들의 무덤을 찾기 위해
로마(Rome)로 갔는데, 여행은 모두 도보로 하였다.
그는 사제 생활로 생기는 모든 금전은 곧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고백성사 주는데
큰 은혜를 받았으므로 많은 시간을 고해소에서
지냈고, 어린이들의 신앙교육과 순교자 공경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그는 두 번째로 로마를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병을 얻었는데,
이때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서
병자들을 돌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고 또 예언도 하였다.
그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병자성사를 받은 후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어머니)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뒤에
운명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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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율리아노(Julian)
축일 3월 23일
로마 순교록은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를 증거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또한 순교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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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둘로(Theodulus)
축일 3월 23일
성 테오둘루스(또는 테오둘로)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사실은 그가 시리아(Syria) 지방 안티오키아의
사제였다는 것뿐이다. 그가 순교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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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투리비우스 데 모그로베호(Turibio de Mogrovejo)
축일 3월 23일
에스파냐의 마요르카(Mallorca) 섬 출신인
성 투리비우스 알폰수스 데 모그로베호
(Turibius Alfonsus de Mogroveio, 또는 투리비오)는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 겸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의 법학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라나다(Granada)의 종교 재판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평신도인 그가 페루
리마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580년). 이 때문에
그는 먼저 사제 서품을 받고 주교 축성식을 거쳐
1581년에 페루에 당도하였다.
그는 착좌한 직후부터 인디언들의 권익 옹호 때문에
정부 당국과의 분쟁에 휘말렸고, 교구 내의 교회
규율 정립을 위하여 피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교회와 학교 및
병원들을 세웠고 1591년에는 신세계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그는 인디언 언어로 설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구 내의 각 지역을 거의 모두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고, 교육과 설교에서 매우
뛰어났다. 그는 교구 내의 방문을 마치고 페루로
돌아오던 길에 산타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67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
(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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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릭스(Felix)
축일 3월 23일
성 펠릭스를 비롯한 21명의 일행은
성 빅토리아누스(Victorianus, 3월 23일)
순교자와 같은 반달족의 박해 때 고통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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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델리스(Fidelis)
축일 3월 23일
성 피델리스는 아마도 성 펠릭스(Felix, 3월 23일)와 함께
순교한 순교자 중의 한 명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