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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수술과 악률
-율려는 음과 양을 조절하고 하늘과 땅을 화합시킨다-
앞장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악문화禮樂文化’로써 전통문화를 평소에 즐기며 이것이 일상생활에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옛적부터 사람들은 흔히 ‘예禮’ ‧ ‘악樂’을 통합하여 불러왔다. 그 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악樂이란 같은 것이 되는 것이요 예禮란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같은 것이 되는 것은 즉 서로 가깝다는 것이고 다른 것이 되는 것은 즉 서로 공경한다는 것이다.
악이란 천지의 조화이고 예란 천지의 서열이다. 그러므로 조화란 만물이 모두 동화된다는 것이고, 서열이란 무리의 물건이 모두 구별된다는 것이다.1)
위의 뜻은, ‘악’은 사람들이 공통본성을 표현하고 ‘예’는 사람들의 계급차이를 표현한다. 공통본성이 표현되면 사람들은 서로 친근해지고, 계급차이가 표현되면 서로 존중하게 된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악’은 천지간의 사물을 서로 어울리게 하고, ‘예’는 천지간의 사물을 질서정연하게 한다. 이렇듯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고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구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예’와 ‘악’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악’의 특징과 기능에 대해서도 숭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악’이 천지와 통하고 만물과 조화되는 힘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는 이것도 반드시 ‘악’과 ‘수술’을 밀접하게 연관시켜야만 규명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독자들에게 ‘악’과 ‘수술’과의 연관성에 착안하여 고대 음률학과 연관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한다.
1. 옛날 음악의 기원
-음악은 신과 통한다
예전에 공자孔子(BC 551~BC 469)가 하천에서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설주야不舌晝夜!’라고 탄식한적이 있다. 시대적 예술로써의 흐름에 따른 음악의 변화는 하천보다도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음악의 연주는 관중들을 매료시킨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후의 여음은 그 소리가 수백년이 지난 현대인들의 마음을 울린다. 다행히도 음악의 흐름은 아직도 세월의 충격 속에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풍부한 전세傳世 문헌 ‧ 부단히 발굴된 지하음악문물地下音樂文物 및 오늘에까지 전해온 음악형태에 의거하여 우리는 여전히 고악古樂의 아름답고 시원스러움을 대략 엿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발생학적인 차원에서 최초로 출현한 악기를 타악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첫째, 음악의 초기형태 가운데서 절주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줄곧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들 중에는 아직도 절주만 있고 선율이 없는 악곡이 아직도 유행되고 있는데 절주성이 바로 타악기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둘째, 타악기는 제작과 연주에 있어서 다른 유형의 악기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돌을 높이 걸어놓고 경磬으로써 두드려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鼓과 고악鼓樂은 인류역사상에서 가장 일찍 출현한 음악형태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근 몇 십년의 음악 고고考古 발견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원시사회의 음악 자료를 많이 제공하였다. 서안반파앙소문화유지西安半坡仰韶文化遗址(약BC5000 ~3000년) ‧ 절강여요하모도문화유지浙江余姚河姆渡文化遗址(약 BC 6000~5000년)에서 선후로 신석기시대의 도초陶哨 ‧ 골초骨哨 ‧ 도훈陶塤 ‧ 도각陶角 ‧ 도구陶球(搖響器)등 여러 가지 종류의 원시사회 악기를 발견하였다. 제일 일찍이 발견한 것들은 이미 약 6.7천년 전에 나타난 것이다. 어떤 것은 그 시대의 음향 효과를 다시 들어볼 수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의 음악발전 수준을 ‘괄이상청刮耳相聽’할 수밖에 없다. 청해대통靑海大通에서 발굴한 오천년 전의 채도무도문彩陶舞踊紋에서 우리는 시 ‧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원시 악무樂舞의 매력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발견은 하남무양가호배이강문화유지河南舞陽賈湖裴李崗文化遺址(약 BC 6000~BC 5000년)에서 발굴한 비견흠골적批竪吹骨笛이다. 음악가들의 측정에 의하면, 정밀한 계산을 거쳐 제작한 칠공골적七孔骨笛은 뜻밖에도 궁宮 ‧ 상商 ‧ 각角 ‧ 변치變徵 ‧ 치徵 ‧ 우羽 ‧ 변궁變宮이란 칠성음계七聲音階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하북河北 민요 <작은 배추> 따위의 악곡을 성공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고 한다.
위의 소개에서 보면 고대의 음악문화는 일찍이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복잡한 형태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독자들은 옛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심리상태로 음악의 창작, 감상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는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음악창작과 감상활동이 옛 사람들한테서 일종의 순수한 심미활동인지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대답은 응당 부정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반드시 앞에서 다시 한번 제기한 원시사유原始思維를 고려해야 한다. 원시사유가 휩싸인 문화배경 중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리의 쾌감과 심리쾌감을 선명히 느낄 수 있게 한 물건이라도 한 층의 신비한 면사포에 덮이게 된다. 음악적인 절주와 선율적인 조화가 일으킨 뚜렷한 영향력은 우리가 보기에는 대자연과 인간의 공동의 생명율동과 관계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명율동은 악률樂律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또 사람이 태초부터 갖고 있는 것 같은 절주감과 모방본능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원시인한테서는 모두 신비한 요소로 귀결되었으며, 이런 신비한 요인은 또 점차 신령으로 대상화對象化 ‧ 인격화人格化되었다. 그러므로 음악창작과 감상활동을 통하여 신령神靈과 교류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악’의 특징과 기능에 대한 숭배의 근원도 실제로 여기에 있다.
사실상 인류학에 관한 연구에서 보다시피 모든 후세에 음악은 가歌 ‧ 시詩 ‧ 악무樂舞 ‧ 극劇 따위로 분화된 예술의 형태인 것이다. 그리고 원시인한테서는 모두 당시 유일한 의식형태인 원시무술原始巫術과 종교예의宗敎禮儀 중에 혼합된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각주?) 원시무술과 종교예의 중에는 ‘가歌’는 사람의 소리, ‘詩’는 가사, ‘樂’은 기악, ‘무巫’는 신체의 동작, ‘극劇’ 따위는 모든 이런 예의禮儀 활동의 총체로서 옛날 사람들은 어떤 때 이런 활동을 ‘악樂’으로 총칭하였다.
글자 의미에서 보면 ‘악’의 원 뜻도 원시 무술과 종교 활동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악’자字의 현상은 바로 무사巫師 혹은 제사祭司가 손으로 소의 꼬리를 잡은 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분석을 동의하지 않는 자도 있다. ‘악’는 응당 종고鐘鼓나 사죽絲竹유형의 악기를 나무에 걸어놓은 상형象形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악’의 원 뜻은 곡물穀物의 형상으로서 선민先民들의 풍작의 희열이 내포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몇 가지 견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한자漢字에서 ‘악’은 다음사어多音詞語이다. ‘yue’로 읽을 때는 음악을 뜻하고 ‘le’로 읽을 때는 즐거움 ‧ 기쁨을 뜻한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통할 수 있다. 원시인들이 여문 곡물의 형상을 본다고 생각해 볼 때, 마음속에 풍작에 대한 희망과 즐거움의 심정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다음 무술巫術 혹은 종교 예의활동을 진행하는데 시가詩歌 ‧ 악무樂舞 등 행위로 자기들의 즐거운 심정을 토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이것이 바로 ‘악’자字의 다음이의多音異義의 근원이 될지도 모른다.
상고上古음악과 무술巫術 ‧ 종교적인 연관은 옛 사람들이 음악특징과 기능에 대한 신비주의 관점을 초래하였으며 그로 하여 음악과 수술의 해석의 어려움을 가능케 하였다.
2. 음율의 수數
-운율은 부는 것이고 소리는 듣는 것이다
수리학數理學의 차원에서 연구한 음의 높이와 그 상호연관 된 학문을 음율학音律學라고 한다. 그는 음악학의 하나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옛날 사람들은 음악특징과 기능에 대하여 신비주의의 견해와 신비한 수자관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음율音律도 신비화가 된 것이다. 아래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북방에 좋은 땅이 있었으나 날씨가 추워서 오곡五穀2)이 자라지 못했다. 추연鄒衍이 음률을 불자 날씨가 따뜻해지며 벼와 기장이 번성하게 되었다.3)
그 뜻인즉 북방에 비옥한 땅이 있었다. 기후가 한랭하기 때문에 오곡이 자라지 못하여 추연鄒衍(BC 350~BC 240)이 하나의 기묘한 악곡을 취주吹奏하기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대지가 따뜻해지며 오곡이 무르익었다고 한다. 보라, 음률의 힘이야말로 신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신기한 힘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들은 그것이 음악과 수자에 관한 신비주의 견해의 영향을 받은 외 또 옛 사람들의 악율樂律에 대한 견해와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옛 사람들은 ‘악樂은 음音에서, 음音은 율律에서, 율律은 풍風에서 생겨났고 이 소리는 바로 종宗이다.’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한다면, 성聲 ‧ 음音 ‧ 악樂 ‧ 율律의 원 뜻은 자연계의 ‘풍風’으로 결말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의 관점에서 풍風 또한 신령 의지적 표현 형식의 하나이다. 때문에 악율의 힘은 사실 신령에서 온 것으로서 하늘땅을 감동시키는 기능을 산생하게 된 것이다. 아래에 우리가 옛 사람들이 악율에 대한 구체적 해설을 보자.
옛 사람들은 음율音律을 십이율十二律로 정하였다. 그 중에서도 육율六律과 육여六呂의 구분이 있다. 즉 황종黃鐘 ‧ 태주太簇 ‧ 고세姑洗 ‧ 유빈蕤賓 ‧ 이칙夷則 ‧ 무역無射를 육율六律4)이라 하고 임종林鐘 ‧ 남려南呂 ‧ 응종應鐘 ‧ 대려大呂 ‧ 협종夾鐘 ‧ 중려仲呂을 육려六呂5)라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십이율十二律은 황제의 악사樂師 영륜伶倫6)이 만든 것이라 한다. 영륜이 대하大夏의 서西에서, 곤륜崑崙의 음陰에서 해곡解谷의 참대로 두께가 균일한 대나무 마디를 선택하여 열 두 개의 참대 통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풍조風鳥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수컷이 육성六聲을 울었기에 육율六律이 산생되고 양성陽性에 속하며, 암컷이 육성六聲을 울었다 해서 육여六呂가 산생되고 음성陰性에 속한다고 했다. 또 풍조의 몸에 여덟 개의 구멍이 나있기에 십이율은 ‘격팔상생隔八相生’ 인 것이다. 즉 황종으로 시작하여 매 8율을 사이 두고 한 음을 일정한 기준으로 정하고 연속 12번 상생相生한 후 또 다시 황종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다.
십이율의 설說에는 다양한 문화적 함의를 갖고 있다.《사기史記》<율서律書>에는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와 십이월령十二月令과의 대응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황종黃鐘은 양기陽氣로 황천黃泉에서 솟아나며 만물이 아래에서 소생했음을 상징하며 11월에 대응된다.
대여大呂는 양기가 아직 이르러(未降) 만물이 동면하지 않음을 상징하며 12월에 대응된다.
태주太簇은 만물의 주생簇生을 상징하며, 정월에 대응된다.
협종夾鐘은 음양의 교차와 만물의 무성함을 상징하며 2월에 대응된다.
고세姑洗는 만물의 세생洗生을 상징하고 3월에 대응된다.
중여仲呂은 만물이 진여盡旅하여 西行하는 것을 상하며, 4월에 대응된다.
유빈蕤賓은 음기가 아직 어리고 적어서 위양痿陽이 일에 쓰이지 않는 것을 상징하며 5월에 대응된다.
임종林鐘은 만물의 자연스러움을 상징하며 6월에 대응된다.
이칙夷則은 음기의 시작되어 만물에 침투되는 것을 상징하며 7월에 대응된다.
남여南呂는 양기가 감추어짐을 상징하며 8월에 대응된다.
무역無射는 음이 성盛하고 양이 쇠衰하여 만물이 쇠패함을 상징하며 9월에 대응된다.
응종應鐘은 양기가 일에 쓰이지 않음으로 하여 아래로 감추는 것을 상징하며 10월에 대응된다.
보다시피 십이율의 상징적인 의미 및 그것이 월령月令과의 대응 관계가 음양학설陰陽學說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옛날 사람들은 율수律數를 규정함에 따라 율관律管의 길이에 대해서도 많은 신비한 해설도 있었다. 여기에서 한漢 나라 유흠劉歆이 황종 ‧ 임종과 태족 이 세 가지 율수의 신화에 대하여 어떤 설법을 했는지 예를 들어 보자.
황종율黃鐘律의 길이가 구촌九寸이고 육율의 수首로서 양성에 속한다. 숫자 ‘9’는《주역周易》에서 ‘천수天數’의 극極이다. 때문에 황종이 삼통설三統說 가운데 ‘천통天統’과 대응된다. 황종의 관管의 직경은 삼분三分이고 ‘참천參天’의 수를 상징하며, 관의 무게는 십이수 十二銖이고 두개 관통의 무게는 이십사수二十四銖로서 이십사二十四의 절기와 대응된다.
임종율林鐘律의 길이는 육촌六寸이고 그것은 육여六呂의 수首이며 음성에 속한다. 숫자 ‘6’은《주역》에서 ‘지수地數”의 중간자中間者이다. 그 밖에도 임종의 관管의 길이는 육촌, 관의 둘레는 육분, 육육삽십육으로 대략 일 년의 일수日數에 해당된다.
태주율太簇律의 길이는 팔촌八寸이고《주역》의 팔괘八卦 수數에 해당된다. 팔괘는 성인聖人으로 인하여 ‘하늘이 있어서 상을 이루었고在天成象, 땅이 있어서 형을 이루었다在地成形’는 기능을 갖고 있다. 때문에 태족은 삼통 가운데 ‘인통人統’과 대응된다. 그 밖에도 태족의 관의 길이는 팔촌, 관의 둘레는 팔분, 팔팔육십사이므로 마침《주역》의 육십사괘六十四卦와 서로 대응된다.
12율과 그 수리數理의 상징적인 의의 및 여러 가지 호상 연관되는 대응관계는 인사人事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 앞의 1장 중 ‘음양오행화阴阳五行化의 예제禮制’와 연계시켜 본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 한다.
십이율을 제외하고 고대 음율학에는 또 중요한 개념으로 즉 궁宫 ‧ 상商 ‧ 각角 ‧ 치徵 ‧ 우羽 ‘5음五音’ 설이 있다. 5음과 12율 사이에는 정하지 않은 대응 관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매 한 율을 모두 궁宫으로 정할 수 있고 다음 일정한 계산 방법에 따라 기타 4음이 四音과 대응되는 율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상위궁旋相爲宫’이다. 또 황종을 궁음宫音으로 하면 아래와 같은 대응관계가 형성된다.
황종黃鐘―宮궁 태주太簇―상商 고세姑洗―각角
임종林鐘―치徵 남려南呂―우羽
그 외에도 옛날 사람들은 5음도 인사人事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행학설영향을 미친 결과하고 할 수 있다.《사기》<악서樂書>의 기록에 의하면, 5음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궁음宫音은 오행五行의 토土에 대응되고 군왕君王을 상징한다. 만약 궁음이 혼란해지면 곡조曲調가 산만해진다. 이것은 군왕君王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황음무도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상음商音은 오행의 금金에 대응되고 대신大臣을 상징한다. 만약 상음이 혼란해지면 곡조가 흐트러진다. 이것은 대신이 정사政事를 파괴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각음角音은 오행의 목木에 대응되며 민중民衆을 상징한다. 만약 각음이 혼란해지면 곡조가 슬퍼진다. 이것은 정령政令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민심이 원한을 품는 것으로 설명된다.
치음徵音은 오행의 화火에 대응되고 인사人事를 상징한다. 만약 치음이 혼란해지면 곡조가 약하고 슬퍼진다. 이것은 관역官役이 멈추지 않아 민중이 지나치게 피로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우음羽音은 오행의 수水에 대응되고 기물器物을 상징한다. 만약 우음이 혼란해지면 곡조가 빨라진다. 이것은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함으로 하여 민중의 재산이 결핍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만약 5음이 모두 혼란해지면 그것은 난세亂世의 음으로서, 이것은 국가의 예제행禮制行이 붕괴되어 亡國망국의 시기가 멀지 않은 것으로 설명된다.
고대 악율학에서 5음과 수술의 관계는 가장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수술 활동에서 그 영향을 확인한다면, 훌륭한 술사術士는 직접 5음을 경청하는 것으로 인사人事의 길흉을 추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서史書의 기록에는 수양제隋煬帝(569~618) 대업 말년의 악인樂人 왕령언王令言은 음율音律을 통달했다고 하였다. 어느 날 그가 침실에서 휴식하다가 그의 아들이 밖에서 연주하는 한 수의 비파곡琵琶曲을 들었다. 그는 대경실색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물었다. ‘이 곡은 어디에서 배웠느냐?’ 아들은 ‘방금 황궁에서 배웠습니다. 제가 군왕郡王을 따라 강도江都를 노닐 때 거기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령언은 눈물을 흘리며 ‘군왕은 돌아 올 수 없다. 그것은 궁음은 군왕을 상징하므로 이 악곡에서 음宫音은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군왕의 이번 행은 위태롭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 후 수양제는 과연 강도에서 노닐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3. 시로는 요사함을, 노래로 예언함을 안다
앞의 소개를 통해, 중국 고대 음율학과 기氣 ‧ 풍風 따위의 개념과의 관계가 밀접함을 알아보았다. 바로 그들 상호 혼합이 ‘악樂’의 의미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氣나 풍風의 개념 또한 수술의 중요한 내용으로서 악율학樂律學과 수술數術에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악율학의 입장에서 보면, 기 ‧ 풍이 수술에서의 기능과 의미는 그 외연外延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이와 같은 외연의 범위는 매우 풍부하다. 예를 들면, 팔자추명술八字推命術 중 ‘오음추명술五音推命術’이 있는데, 이는 악율학의 많은 개념을 충분히 적용한 것으로 고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 책의 제5장을 참고). 이밖에도 또 어떤 술사術士는 직접적으로 악율학을 활용하여 점복을 진행했는데 바로 ‘청음聽音’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악의 곡조曲調에서 인사人事의 의기宜忌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제시한 왕령언王令言이 바로 그러하다. 또《구당서舊唐書》7)의 기록을 보면 술사 이사진李嗣眞이 음율에 통달했는데 어젠가 한 번 그가 태청관太淸觀에서 악樂을 들었다고 한다. 곡曲이 끝난 후 그는 ‘이 곡은 왜 이렇게도 슬프고 조화롭지 않은가?’고 물었다. 옆의 사람이 그에게 알려주기를 ‘이것은 황태자의 신작新作의 하나인데《보경악寶慶樂》이라 합니다.’ 그 결과 며칠 후 황태자는 서민庶民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사진은 악곡에서 모종의 불길한 조짐預兆을 볼 수도 있고, 혹은 황태자가 내심의 고통과 불안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악곡은 이미 점험占驗의 매개물의 근거가 된 것이다.
더욱 생동한 형상을 갖고 있는 청음은 한漢 나라 학자 채옹蔡邕(139~192)8)에 대한 한 토막 이야기이다. 채옹은 학문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악리樂理를 통달하고 ‘소리를 듣고 길흉을 알아내는 것’에 능숙한 명사名士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한 집 앞을 지나는데 안뜰에서 오동나무가 타서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오동나무는 좋은 목재이므로 그것으로 금琴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금琴을 만들었더니 과연 그 음악이 매우 아름다웠다. 금의 꼬리 부분을 태운 흔적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초미금焦尾琴’이라 불렀다. 그것은 제환공齊桓公(미상~ BC 643)의 ‘호종금號鐘琴’, 초장공楚莊公(미상~ BC 591)의 ‘요양금繞梁琴’, 사마상여司馬相如(BC 179~ BC 117)의 ‘녹기금綠綺琴’과 함께 ‘4대금四大名琴’이라 불린다. 또 이런 이야기도 전하지고 있다. 언제가 한 번 채옹이 초청을 받아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가 친구의 집 앞에 왔을 때 어떤 사람이 금琴을 타고 있었다. 그 소리에 한참 서서 듣더니 놀래며 ‘아! 이 악곡에는 살의가 감추어져 있다. 그래 누가 나를 살해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몸을 돌려 되돌아갔다. 하인이 이것을 보고 바로 주인에게 알렸다. ‘채군蔡君이 방금 왔었는데, 우리 집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쫓아가서 채옹에게 무엇 때문에 들어오지 않는 가고 물었다. 채옹은 방금 들은 악을 친구에게 알려주었다. 친구가 말하기를 ‘그래? 내가 방금 금琴을 탈 때, 바퀴벌레 한 마리가 울고 있었네. 마침 매미에게 덮치려 할 때, 매미가 날개를 펴고 날려고 하는 것을 보았네. 내가 마음속으로 바퀴벌레가 매미한테 덮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설마 그런 사심이 악곡에 나타났겠는가?’ 채옹이 빙그레 웃더니 ‘알고 보니 그렇군요.’라고 하였다.
사실상 고대의 수술 활동에서 또 다른 한 가지 현상이 악율樂律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악곡樂曲중의 가사이다. 많은 사서史書의 <오행지五行志>에는 전문적으로 ‘시요詩妖’라는 사항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는 일부 함의가 명확하지 않은 시사詩詞 ‧ 곡사曲詞 ‧ 민가民歌 ‧ 동요童謠 따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이 불러 전해짐은 흔히 인사 길흉의 닥쳐옴을 예시하고 참어讖語와는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함이 있다. 그러므로 통치자와 술사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궁정宮廷의 아악雅樂은 시요의 표현형식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수隋나라 개황開皇 10년, 문황文皇( 541~604, 재위 581~ 604)9)이 병주연并州宴에서 진효왕秦孝王과 왕자상王子相을 청하였다. 자리에서 문제文帝가 4언시를 읊었다.
붉은 빛 얼굴은 곧 제향에 쓰이는 기구가 되고紅顔詎几
옥과 같은 용모는 잠깐이고玉貌須臾
하루 아침에 꽃이 져서一朝花落,
흰 것이 생기더니 없어지며 떠나니白發離除
내년 뒤의 세월에는 明年后歲,
누가 있고 누가 없는가誰有誰無
시가 만들어 진 후 가지歌伎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에 왕자상이 죽었다. 8년 후 진효왕도 죽었다. 바로 문제文帝의 시에 결말이 예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외에 민가와 동요는 시요의 또 다른 한 가지 보편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매번 일대一代 왕조가 장차 쇠망해갈 때 거리에서 아이들과 민중들이 흔히 이상야릇한 가요를 불러 시운時運의 변화를 알렸다고 한다. 동한東漢(25~220)말년에 조정이 쇠퇴해져 난신亂臣이 정권을 잡았을 때, 갑자기 많은 가요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한영제漢靈帝(156 ~189 재위 168~189) 중평년간中平年間(184 ~ 89), 어떤 동요가 부르기를
풍악의 세상을 이으니 동탁이 도망가고承樂世董逃,
사곽에서 노니 동탁이 도망가고游四郭董逃,
하늘의 생각에 몽매하니 동탁이 도망가고 蒙天思董逃,
금빛 의관과 인수를 띠니 동탁이 도망가고帶金紫董逃,
감사와 은혜를 행하니 동탁이 도망가고行謝恩董逃,
수레와 기마를 정리하니 동탁이 도망가고 整車騎董逃,
없앨 욕심을 가지니 동탁이 도망가고 垂欲廢董逃,
중용인 말씀과 함께 하니 동탁이 도망가고與中辭董逃,
서쪽 문을 나서니 동탁이 도망가고 出西門董逃,
궁전을 우러러보니 동탁이 도망가고瞻宫殿董逃,
서울을 바라보니 동탁이 도망가고望京城董逃,
밤이 가고 해가 뜨니 동탁이 도망가고日夜絶董逃,
꺽이고 상처받은 마음을 가지니 동탁이 도망간다心摧傷董逃.
라 하였다. 여기에서 동董은 당시의 난신亂臣인 동탁董卓(미상~192)을 가리킨다. 가요에서 동탁이 벼락출세하여 횡폭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최후에는 도망 다니고 9족九族10)이 멸망당하는 처지에 이르기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암시가 모두 포함된 것이다. 앞에서 측자술測字術을 소개할 때, 제시한 또 다른 한 수의 동요 ‘천리초千里草 하청청何青青 십일복十日卜 부득생不得生’도 동탁의 독재가 오래가지 못하고 최후에는 자기 명에 죽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