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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백산 천왕단에서 조망, 멀리 가운데는 백두대간 구룡산, 그 오른쪽은 삼동산
直過長空入紫煙 장공을 바로 지나 자연 속에 들어서
始知登了最高巓 그제야 알고 보니 절정에 올랐구나
一丸白日低頭上 한 덩이 흰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 사면의 뭇 산들은 눈앞에 떨어지네
身逐飛雲疑駕鶴 몸이 구름 쫓아가니 내가 학을 탄 것인가
路懸危磴似梯天 길이 벼랑에 걸렸으니 하늘에 사닥다리인 듯
雨餘萬壑奔流漲 비 와서 만 골짜기 물이 휘몰려 넘치니
愁度縈回五十川 오십 천 구비진 물을 어이 건너 갈거나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7∼1348, 고려 후기 문신), 「태백산에 오르다(登太白山)」
주) 전에는 태백산 영봉 가장자리에 이 시의 시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당골광장 태백산 입구에 커다란
자연석 시비가 있다.
▶ 산행일시 : 2022년 11월 26일(토), 맑음, 바람 세게 붐
▶ 산행코스 : 태백선수촌 가기 전 백두대간 고갯마루, 함백산, 고갯마루, 화방재로 버스 이동, 화방재, 사길령,
유일사, 태백산 장군봉, 영봉, 망경사, 반재, 당골광장, 주차장
▶ 산행시간 : 4시간 39분(함백산 42분, 태백산 3시간 57분)
▶ 산행거리 : 이정표 거리 11.2km(함백산 왕복 1.8km, 태백산 9.4km)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7 : 00 - 양재역 1번 출구 200m 전방 스타벅스 앞, 버스 출발
07 : 24 - 죽전정류장( ~ 07 : 29)
08 : 23 - 문막휴게소( ~ 08 : 43)
10 : 28 - 태백선수촌 가기 전 백두대간 고갯마루, 함백산 산행시작
10 : 47 - 함백산(咸白山, 1,572.9m)
11 : 10 - 태백선수촌 가기 전 백두대간 고갯마루, 산행종료(11 : 25 - 버스 이동)
11 : 48 - 화방재(花芳-), 태백산 산행시작
12 : 00 - 사길령(四吉嶺)
12 : 12 - 산령각
12 : 45 - 유일사 쉼터, 유일사(唯一寺)
13 : 40 - 태백산(太白山) 장군봉(1,566.7m), 천제단(장군단)
13 : 47 - 태백산 영봉(靈峰, △1,561.7m), 천제단(천왕단)
14 : 10 - 망경사, 점심( ~ 14 : 32)
14 : 55 - 반재
15 : 45 - 단군성전, 당골광장, 산행종료( ~ 16 : 25 - 태백석탄박물관)
17 : 30 - 버스 출발
19 : 42 - 여주휴게소( ~ 19 : 52)
20 : 20 - 죽전정류장
20 : 38 - 양재역
2-1. 함백산 지도
2-2. 태백산 지도
▶ 함백산(咸白山, 1,572.9m)
함백산을 차로 그 턱밑까지 가기는 처음이다. 다음매일산악회에서는 들머리를 태백선수촌이라고 했지만 정확하
게는 태백선수촌 가기 전 1.1km 지점인 백두대간 고갯마루다. 해발고도가 1,320m나 된다. 함백산도 태백산국립
공원의 권역이다. 국립공원이 되고 보니(2016년에 우리나라 22번째로 지정되었다) 너덜 길도 잘 다듬었고 넓히
고 곳곳에 이정표를 설치했지만 산꾼들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다. 손맛 볼만한 데도 없애버렸고 걸핏하면 목책이
나 금줄을 둘러 가지 말라고 하니 산을 가는 재미가 줄어들었다.
함백산 0.9km. 배낭은 버스에 두고 간다. 왕복 1시간 20분이면 넉넉할 거라고 했다. 카메라만 목에 걸고 간다. 임
도 같은 대로를 간다. 그 절반은 가팔라 돌계단을 놓았다. 숲속 길 나뭇가지 훑는 바람소리가 요란한 굉음으로 들
린다. 지레 허리 한껏 굽히고 줄달음한다. 함백산 정상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숲 벗어나 강풍을 온몸으로
맞는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긴다. 연무가 끼었다. 강풍이 씻어내지 못하는 연무다. 원경은 흐릿하다.
오지산행에서는 함백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인 2007년 10월 13일에 무박산행으로 왔다. 그때는 천평리
백운산장에서 장산을 넘고 만항재, 평화촌을 거쳐 올랐다. 그때 함께 산행한 악우들을 떠올리는 것도 즐겁다.
대장 대간거사, 이박사, 산진이(악수), 산하늘, 사계절(사계), 선바위, 메아리, 하늘재, 영희언니, 고운, 산아, 해마.
그때는 함백산 정상에서 기저귀 차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을 보았고 하이힐 신은 아가씨들도 보았다. 그때는
승용차로 정상 바로 옆의 KBS 통신중계소까지 올라 올 수 있었다.
정상에 조형물로 설치한 함백산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함백산이 우리나라(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는 것.
척주부(陟州賦, 척주는 지금의 삼척이다)에 보면 「금대봉 남쪽에 상함백산 중함백산 하함백산이 있는데 상함백
과 하함백 사이에 본적암 심적암 묘적암 은적암의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혹 폐사가 되기도 하였다.」(臺南有上咸
白中咸白下咸白上下有本寂深寂妙寂隱寂庵今或廢)라고 하였으니 함백산은 봉우리가 셋이다. 상함백은 두문동재
남쪽에 솟은 은대봉을 말하고 중함백은 은적암 뒷봉우리이며 하함백은 지금의 함백산인 것이다.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 좀 더 머물 수도 없다. 온 길 그대로 내린다. 오를 때보다 더 가까운 것 같다. 왕복 42분 걸
린다. 나만이라도 이대로 백두대간 만항재(2.0km) 지나고 화방재로 가서 태백산을 가겠다고 할 것을 미적미적하
다가 그럴 기회를 잃었다. 일행들은 1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모두 내려왔다. 버스로 화방재로 이동한다. 화방재까
지 거리는 10km에 불과하지만 고도 1,000m가 넘는 백두대간 오른쪽 사면을 굽이굽이 도는 산길이라 무척 조심
스럽다. 서행한다.
화방재(花房-). 교통표지판은 ‘어평재’라고 표시되어 있다. 어평은 한자로 於坪, 魚坪, 御坪 등으로 쓰인다. 태백시
홈페이지 시민게시판에 장모라는 사람이 화방재를 국토지리정보원도 동의한 어평재로 개칭해줄 것을 요청한 것
에 대해 2016년 10월 26일 태백시는 다음과 답변하였다.
화방(花房)이 조선총독부 초대공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요시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보도와는 달리 화방재는
1961.4.22 국무원 고시의 순 우리말로, 고시 이후 전 국토 지명조사에 따른 한자표기는 화방(花芳)재로 조사 기록
되어 있어 사실과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화방재(花芳嶺) 유래는 고개 위에 조그마한 돌이 있는데 꽃같이 곱다
하여 화방재라 함. 화방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지지자료 및 조선지형도에서 확인할 수 없
고, 1964년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의 기록 사항으로 현재까지 일본식 지명 근거는 확인이 되지 않은
지명입니다.
어평마을은 단종의 혼령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로 혼령이 어평마을에 다
다라 잠시 쉬면서 여기서부터는 내 땅이라 하여 어평으로 부르게 됨. 현 어평마을에 단종대왕당이라는 성황당이
있으며 ….
3. 함백산 정상에서 남쪽 조망, 오른쪽 중간은 장산
4. 태백산 연릉
5. 함백산 정상
6.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장산
7. 태백산 오르는 도중에 뒤돌아 바라본 함백산, 맨 왼쪽 중간에서 올랐다
▶ 태백산(太白山)
화방재가 준령이다. 해발고도 933.9m. 함백산은 워밍업이었고 이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소로의 산길이
반갑다. 그러나 땀 흘릴 새가 없이 등로는 1,021,4m봉을 오른쪽 자락을 완만한 오르막으로 돌아 넘는다. 우리
일행들을 보기 전까지는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다. 야트막한 안부는 고랭지 밭이 있는 사길령이다. 커다란 표지석
뒤에 사길령의 유래를 새겨 놓았다. 원래는 새길령(新路嶺)이었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충으로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신라시대에 태백산 꼭대기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어 천령(天嶺)이라 했는데 높고 험하여 고려시대에 새로이 길을 낸 것이 사길령이다.”
사길령에서부터 산령각까지 0.5km는 약간 가파른 임도다. 주변은 울창한 낙엽송이 하늘을 가린다. 낙엽이 수북
하게 쌓여 있어 꽤 미끄럽다. 맨땅 골라 딛는다. 오르막이 잠시 수그러든 평원에 산령각(山靈閣)이 있고, 그 옆에
산령각의 유래를 쓴 안내판이 있다.
“이곳 태백산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하였지만 가장 가깝게 강원
도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에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 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
(契首)의 인솔 하에 넘어 다녔다. 산이 험하여 맹수와 산적들이 많이 출몰하였기에 그들은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하여 고갯마루에 당집을 집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
능선에 서면 강풍이 불어댄다. 그 바람에 비틀거리며 오른다. 바람이 차기도 하다. 눈이 없다뿐이지 한겨울 설한
풍이다. 귀가 시려 머플러로 싸매고, 손은 호주머니에 넣은 핫팩을 만지작하며 걷는다. 봉봉을 넘는다. 암봉이
나오면 조망이 트일까 금줄 넘고 잡목 헤치며 올라가보곤 하지만 그때마다 나무숲에 가렸다. 1,273.3m봉을 길게
오르고 잠깐 내리면 안부 갈림길인 유일사 쉼터다. 유일사 절집은 오른쪽으로 0.1km 내린 비탈진 사면에 있다.
들른다. 내 수차례 이곳을 왔지만 유일사를 들르기는 처음이다. 돌계단 173개 내린다. 일주문도 없는 소박한 절이
다. 본전은 무량수각(無量壽殿)이다. 다음은 태백시장 명의 안내판에 쓴 유일사(唯一寺)의 유래다.
“… 1935년경 비구니 순일이라는 스님이 기도를 하면서 지내다가 지리적으로 너무 험준하고 열악하여 떠나고,
터만 남은 자리에 1959년 한 불자(李小仙)가 영산의 정기를 받고 백일기도 중 꿈에 원효대사와 의상스님이 바위
밑에 앉아 수도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곳에 다시 불사를 일으켜 유일사라 하였다 ….”
무이선원(無二禪院)은 보수 중이다. 거기에 걸린 주련이 이채롭다. 내 어느 절집에서도 보지 못한 유일한 주련이다.
行住坐臥是什麽
語時黙時是什磨
垂時夢時是什磨
入定出定是什磨
각 구의 ‘시심마(是什麽)’는중국어에서‘무엇인가?’라고하는의문사이지만,한국의선종에서는 ‘이뭣고’화두로서널
리통용되고있다 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알아들어도 무방할 듯 싶다. 요컨대 둘이 아닌(無二), 하나(唯一)라
는 뜻이다.
걷고 머물고 앉았고 누웠고 이뭣고
말하고 침묵하고 이뭣고
자고 꿈을 꾸고 이뭣고
들어오고 나가고 이뭣고
유일사 쉼터는 왼쪽의 유일사 주차장에서 2.3km를 임도 따라 오르기도 한다. 잘 다듬은 돌길이다. 강풍에 떠밀려
오른다. 너무 세게 떠밀리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질 듯 하기 여러 번이다. 태백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강풍
에 입 벌리기가 고역이라 누구라도 수인사 나누지 않는다. 태백산 명물인 주목 고사목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 겨
울 눈꽃이나 상고대 서리꽃이 피었을 때를 생각하며 둘러본다. 왼쪽으로 산허리 돌아 망경사 가는 갈림길 지나면
곧 장군봉이다.
8. 태백산 명물인 주목 고사목
9. 멀리 가운데가 삼동산, 맨 왼쪽은 구룡산
10. 멀리 가운데가 삼동산
11. 태백산 장군봉에서 바라본 영봉 천왕단
12. 태백산 장군봉에서 남서쪽 조망, 앞은 1,205.6m봉, 그 뒤는 삼동산
13. 문수봉
14. 오른쪽부터 장산, 순경산, 매봉산
15. 멀리 가운데는 삼동산
16. 오른쪽부터 장산, 순경산, 매봉산, 단풍산
17. 태백산 영봉 천왕단에서 남쪽 조망, 저 산중에 옥돌봉, 선달산, 문수산 등이 있다
장군단에 들어가 돌담에 기대어 바람을 피한다. 장군단은 사방 첩첩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일대 경점이다. 태백산
은 설경이 아니면 이러한 조망이 있어 좀처럼 헛걸음하지 않는다. 옅은 연무로 원경이 흐릿한 게 조금 아쉽다.
나는 천제단을 장군봉 지나서 있는 영봉의 천왕단만을 천제단인 줄로 잘못 알았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제단인 천제단은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을 중심으로 한 줄로 놓여 있는데 천왕단 북쪽에 장
군단이 있고, 천왕단 남쪽에 하단이 있다고 한다.
장군봉 장군단에서 영봉 천왕단까지 0.3km, 평원 같은 이 길이 태백산을 올 때마다 험로였다. 눈보라 치거나
아니면 설한풍이 불어댔다.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 태백산을 올랐을 때도 그랬다. 그는 1735년 겨울에
각화사(覺華寺)에서 산행을 시작했는데 3일 동안 승려 90명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그의 「유태백산기(遊太白山
記)」의 한 대목이다. 오늘도 그때처럼 큰 나무들은 울부짖으며 분노하는 듯하고(巨木吼怒), 작은 나무들은 슬피
우는 듯하다(小木哀鳴).
“동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천왕당으로 향했다. 해가 지고 달이 뜨자 보이는 건 산마루의 나무들뿐이었다. 높이는
고작 몇 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만 고비를 겪어 내면서도 유연하게 붙어서 생존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 울퉁
불퉁함은 기괴스럽고, 너울거리며 아래옷을 잡아당기고 소매를 찢는 것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하여 사람이 등을
꼭 숙여야만 지나가게 했다. 나무의 밑동까지 뒤덮은 눈은 사람의 무릎까지 빠지게 만들면서 바람을 만나 마구
휘날렸다. 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을 어둡게 하고 땅을 뒤흔들면서 우르릉하는 우레 같은 소리를 내
바다까지도 쓸어버릴 듯한 기세다. 큰 나무들은 울부짖으며 분노하는 듯했고(巨木吼怒), 작은 나무들은 슬피 우
는 듯했다(小木哀鳴).”
영봉에서도 천왕단에 들어가 돌담에 기대 바람 피하여 주위 조망을 살핀다. 날이 맑으면 소백산 비로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보이지만 오늘은 연무로 가망 없다. 이 영봉이 장군봉보다 고도는 약간 낮지만 태백산 정상 노릇을 한
다. 듬직한 정상 표지석이 있다. 태백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은 그의「태백산기
(太白山記)」에서 문수봉 너덜을 들고 있다.
“태백산은 신라 때의 북악(北嶽)이다. 문수(文殊)ㆍ대박(大朴)ㆍ삼태(三台)ㆍ우보(虞甫)ㆍ우검(虞檢)ㆍ마라읍(摩
羅邑) 백산(白山)이 모두 큰 산인데, 동이(東暆)와 진번(眞番) 지역을 점거하고 있다. 태백산과 문수산이 가장 높
고 큰데, 북쪽으로 두타산(頭陀山)ㆍ보현산(普賢山)과 이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뻗쳐 있어 푸른 산이
6,7백 리나 된다. 문수산 정상은 모두 흰 자갈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으니, 태백이란 명칭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태백산의 천제단에 대해서는 태백시 홈페이지 시민게시판에 김강산이 ‘태백산 천제단에 대한 고찰’이라는
긴 글을 올렸다. 설득력이 있다. 천제단에 대해 깊이 연구를 하신 분이다. 관련 부분만 추렸다.
“신라 일성이사금이 태백산에서 친사(親祀)하였고 제사한 그 자리에 신사(神祠)나 신당(神堂)이 만들어졌는데,
하늘에 제사하던 당집을 천신사(天神祠) 또는 천왕사(天王祠) 태백신사(太白神祠) 태백당(太白堂) 천왕당(天王
堂)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천제단은 불타 헐린 천신사 또는 천왕당 곧 태백신사(太白神祠)의 담장 돌이었다.
조선 인조(仁祖) 3년에 경상감사(영남 관찰사) 김치(金緻)가 음사(淫祠)라 하여 당집을 불태워 헐어버리자 천신을
믿는 사람들이 둘로 갈라졌다.
그 무리들 가운데 무당들은 물이 있는 용웅굴(龍井) 옆으로 내려와 태백산사라 하고 새로이 당집을 지어 계속
음사를 이어 갔다. 그러나 그 당집들도 6.25 때 아군들에 의해 공비의 은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모두 불태워졌
다. 또 한 무리는 그 담장 돌을 모아 천신단(天神壇) 또는 천왕단(天王壇)이라는 신사를 만들어 기도 제사하였으
나 당집을 짓지는 않았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당집이 없었고, 특히 일제강점기에 천제를 엄금하여 방치되어 있
었고 1966년에 기존의 천왕단 돌로 새로이 쌓고 몇 번의 보수를 거쳐 제천단(祭天壇)이라 하였고 1975년에 ‘한배
검’ 비를 세웠으며 1991년부터 천제단이 되었다.”
나만 혼자 부쇠봉을 넘고 문수봉을 오른다는 것은 유난 떠는 일이라 바로 하산 길에 든다. 눈 오면 미끄럼 타는
슬로프를 종종걸음 하여 내린다. 단종비각 지나 용정에서 물 한 모금 마신다. 시원하다. 용정(龍井)은 옛날부터
천제를 지낼 때 제수로 사용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70m)에 위치한 이 샘은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제일 먼저 받아 우리나라 100대 명수 중 으뜸에 속한다고 한다. 100대 명수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우리나라 100대 명수는 1987년 7월 16일 경향신문이 자연보호중앙협의회와 공동으로 선정하였다. 원류‧계곡‧
폭포 44개, 샘 46 개, 호소‧연못 10곳을 선정하였다. 샘으로는 도봉산 거북바위약수(45번, 샘으로서는 으뜸이다),
추곡약수, 삼봉약수, 오색약수 등에 이어 용정은 57번째(샘으로서는 13번째)에 올랐다. 용정이 명수 100선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물이기는 하다.
21. 멀리 가운데는 구룡산
22. 멀리 가운데는 옥돌봉(?)
23. 멀리 왼쪽은 삼동산
24. 태백산 영봉에 있는 정상 표지석
25. 태백산 천왕단
26. 망경사에서 바라본 문수봉
27. 당골 계류
28. 당골 계류
망경사에 들른다. 양광 가득한 절집 마당에 놓인 평상에 자리 잡고 점심 도시락 편다. 수저 들 때마다 문수봉 푸짐
한 품을 바라본다. 절집에서는 커피도 판다. 내가 좋아하는 맥심 봉지 커피다. 한 잔에 1천원이다. 스님이 즉석에
서 더운 물에 타 준다. 스타벅스 커피에 비길 맛이 아니다. 용정 명수이니 스타벅스 수돗물(?)이 가당치 않을 터이
다. 두고두고 생각날 커피 맛이다.
쭉쭉 내린다. 임도처럼 너른 길이다. 낙엽 쓸린 데 골라 내린다. 내리막은 Y자 갈림길인 반재에서 잠시 멈칫한다.
왼쪽은 백단사주차장(1.7km)으로 가고, 오른쪽이 당골광장(2.4km)으로 간다. 직진 능선 길은 금줄 쳐서 막았다.
오른쪽 사면 내려 계곡 길로 가는 편이 거리로는 더 길다. 데크계단 0.4km 내리면 문수봉 갈림길인 당골과 만나
고 계류와 이웃하며 가는 길은 평지나 다름없다. 당골 계류는 초동만추인데도 제법 소리 내어 흐른다.
하산시간이 너무 일렀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단군성전을 들른다. 성전 본당 전면에 모신 단군 할아버지
상에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이 당골이고 당골광장인 것은 이유가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단군과 단골
과 당골은 같은 말이다. ‘프레시안’에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가 2020.04.10. 올린 ‘[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단군과 단골과 당골’이 한 번 읽어볼만하다.
“우선 ‘단골’은 무당에서 유래한 말이 맞다. 전라도에서는 지금도 ‘당골네’라고 하면 ‘무당을 칭하는 말’이다. 무당
은 과거로 올라갈수록 권위가 있었다. 치병(병을 치료하는 역할), 제사장, 각종 행사의 주례 등을 도맡아 하는 사
람이 무당이다. 특히 제정일치의 시대로 올라가면 위정자를 겸하게 된다.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무당을 찾았고, 상을 치르거나, 기우제를 지내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면 당골(단골)을 모셔다가 해결
하였다. 그러므로 단골과 당골은 동일한 어원을 지닌 말이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한웅)이 곰(웅녀)과 혼인하여 낳
은 사람이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현대어로 하면 ‘당골임금’이다. 즉 당골은 ‘제사장’을 일컫는 말이고, 왕검
(임검>임금)은 ‘위정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 겸 정치인’을 말한다. 그렇다면 단군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단군은 한자로 ‘檀君’(단군)이라고 쓰기도 하고 ‘壇君’이
라고 쓰기도 한다.”
당골광장으로 내려와 근재 안축의 「登太白山」 시비와 그 맞은편의 「천부경(天符經)」 81자를 들여다본다. 『대종
교요감』에 의하면, “천부경은 한배검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천하만민을 교화하는 데 ‘조화의 원리’, 즉 우주창
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으로, 1에서 10까지의 수리(數理)로 천(天)·지(地)·인(人) 삼극(三極)의 생
(生)·장(長)·노(老)·병(病)·몰(歿)의 무한한 반복의 경위를 설파한 것이다.”라고 한다.
나로서는 첫줄부터 해독불능이다. 一始無始析三極無盡本. 하나는 천지만물의 근본이나 무에서 비롯된 하나이어
라. 이 하나가 나뉘어져 천지인 삼극으로 작용해도 그 근본은 다할 것이 없어라.
그래도 시간이 남아 태백석탄박물관에도 들른다. 박물관 건물 앞마당에 갖가지 돌을 전시하였다. 내 비로소 깨닫
는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돌들도 모두 이름이 있다는 것을. 나무와 풀에도 저마다 이름이 있듯이 말이다. 박물관
건물로 들어간다. 입장료는 2,500원이다. 경로우대는 무료라 이에 해당된다고 하였더니 굳이 신분증을 보자고 한
다. 일단 기분은 좋다. 배낭 속에 넣어둔 신분증을 꺼내려고 배낭을 벗자 그냥 입장하시라고 한다.
박물관은 1층부터 3층까지 전시실이다. 1층은 여러 희귀한 보석들을 전시했다. 2층은 채탄과정, 3층은 광부들의
일상과 그들의 사진을 전시했다. 괜히 이곳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볼 것을 보아버렸다. 광부들의 막장을
보니 마치 내가 막장에 있는 듯 가슴이 먹먹했다. 당골광장 주차장 주변 음식점에 들어 소주로 그렇고 안주로
먹는 메밀전병도 탄가루가 섞인 듯 서걱서걱하다.
29. 태백석탄박물관에서, 방해석/휘안석(중국)
30. 태백석탄박물관에서, 석고(멕시코)
31. 태백석탄박물관에서, 황수정(브라질)
32. 광부들의 살림집
33. 막장을 비추는 한 줄기 빛, 석탄박물관 건물에 들어가면 현관 서쪽 벽면에 걸려 있다.
34. 태백석탄박물관 특별기획전, 전제훈 광부의 ‘묻히지 않는 기억’ 사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