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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유언과 죽음
창세가 49 : 33
아브라함은 175세에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으며(창25:9), 이삭은 180세에 나이가 많고 늘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창35:29).
그리고 야곱은 147세에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의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고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창47:28).
아브라함은 가나안 헷 족속이 살던 에브론(헤브론)에서 살다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장사할 땅을 은 이백 세겔을 주고 땅을 사고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고 아브라함 자신도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23:19).
그리고 이삭도 헤브론에서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35:29).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죽어 장사 되었지만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는 야곱의 죽음에 대한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야곱의 죽음은 가장 복 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의 죽음이 가장 복 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야곱은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야곱은 기근만 끝나면 곧 바로 가나안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지만 17년을 거주하게 되다 보니 생전에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덕택으로 노년을 애굽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애굽에서 죽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었습니다(창46:4).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운 줄 알고 요셉에게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말고,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창47:29,30)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조상들이 죽어 장사 된 무덤에 자신도 장사 되기를 원한 것은 조상의 묘지 자체보다는 하나님께서 언약 맺어 주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을 암시합니다.
애굽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이스라엘의 참된 기업인 가나안을 사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어서라도 그 몸을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야곱이 조상들과 함께 장사 되기를 원한 것은 이미 죽은 조상들이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의 영원한 세상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믿는 신앙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9-32).
사람은 죽음 후에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죽음 즉시 주님께서 예비하신 낙원으로 돌아갈 것을 믿습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유언대로 애굽에 장사하지 않고 가나안 막벨라까지 운구하는 장사행렬을 50:1-14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야곱의 장례는 애굽식으로 한 것이지만 장례 행렬을 본 애굽을 비롯한 가나안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죽기 전에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란 말씀은 1-32절까지 열두 아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임종을 앞둔 야곱은 그의 열두 아들을 예언적 형태로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죄악과 선행에 따라 각기 저주와 축복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하에서 야곱의 축복과 저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미래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하여 장차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와 도래할 메시야 강림과 구속사의 큰 흐름을 계시한 것입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중에 특별한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유다 지파의 왕권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왕권의 예언입니다.
야곱은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고 예언했습니다.
유다 지파가 선민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과 사망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속사적인 예언입니다(8).
우리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죽음 후에 다시 만날 것을 가르치는 것은 구속사적인 유언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야곱은 자손들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머리의 손을 얹고 축복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을 므낫세 머리 위에 얹고 아우가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을 축복했습니다(48:1-22).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아들)이 될 것이라(창48:5)고 양자로 입양하고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로 축복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 자손은 제사장으로 섬기게 하고 요셉을 대신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열두지파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죽음이 가까울수록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내세를 가르치고 자녀들에게 구속사적인 축복을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야곱의 임종입니다. 야곱의 복된 죽음은 바로 ‘침상에 누워서 발을 가지런히 뻗고 그의 삶을 다 마치고 숨을 거두다’는 이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죽음은 누구나가 다 원합니다.
대부분이 어떤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다가 주사 바늘을 주렁주렁 달고 흰 까운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병실에서 숨을 거두는 것은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병원에서 외롭게 죽도록 하는 것은 죽음 당사자의 마지막 외로움과 심리적인 고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모셔다가 평상시에 잠자던 침상에 발을 모르고 숨을 거둘 수 있도록 해 주어서 야곱처럼 사랑하는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외롭지 않게 임종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면합니다.
야곱처럼 자신이 평소에 잠자던 그 침상에서 덮고 자던 그 이불을 덮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숨을 거두는 임종하는 것은 죽음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혼자 외롭게 죽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죽음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열두 아들과 손자인 므낫세과 에브라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요셉은 숨을 거둔 아버지의 얼굴에 입 맞추었습니다. 야곱의 죽음은 누구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복 된 죽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야곱은 죽음 즉시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는 말씀은 숨을 거두는 즉시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낙원으로 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신은 조상들과 함께 장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가 죽어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으나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9-31).
그와 같이 죽음 즉시 믿음의 사람들의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서 위로를 받지만,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은 죽음 즉시 낙원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음부에 던져지는 것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말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의 종말과 세상 끝날의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입니다. 죽음 즉시 의인은 낙원으로 들어가지만 악인은 음부로 던져져 고통을 받게 됩니다.
종말론적 심판은 인자가 올 때 모든 민족이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 앞에서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는 비록 병들고 굶주려 죽었으나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으며, 부자는 죽어 지옥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낙원에 들어간 것과 부자가 죽어 음부에 들어간 것은 개인의 종말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면 나사로처럼 죽음 즉시 그의 영혼은 낙원으로 들어가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처럼 믿음으로 살면 죽음 즉시 음부에 들어가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도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죽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살았음에도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 즉시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죄악 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창47:9)고 말했습니다. 열두 아들을 낳고 키우는 수고와 아들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슬픔과 고통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의 노년은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어릴 때나 젊었을 때 세상을 부유하게 사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늙어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불행한 죽음은 영원한 불행입니다.
살았을 때 죽음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비록 하나님과의 언약하신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서 살다가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왕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행12:23) 이세벨은 창밖으로 내리쳐 던져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어 개들이 그의 살을 먹어 두골과 발과 손 외에는 찾을 수가 없는 죽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왕하9:30-37).
오늘 우리에게 죽음 후에 어디로 가느냐를 준비하는 것은 영원한 축복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 장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를 우리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합시다.
죽음은 자신의 개인 종말이며 심판입니다. 악인처럼 살다가 악인으로 죽게 되는 것은 영원한 저주의 죽음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어디로 가느냐를 준비하는 것은 영원한 축복이냐 저주냐가 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비록 실패하고 병들고 헐벗고 가난하게 험악한 세상을 살았을지라도 야곱처럼 복 된 죽음이 되시고 낙원에서 들어가서 안식하며 영생합시다. 아멘!
참고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와 원장으로 수고하셨던 허순길 박사(저의 삼촌)는 은퇴하신 후 죽을 때까지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호주로 가서 자신이 10년 동안 목회했던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보고 화란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학교와 지도교수를 비롯한 모든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폐가 굳어 석고화가 되어서 산소 호흡기를 6개월 이상 죽을 때까지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고향 마을 어릴 때 뛰놀던 정자나무도 가보았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마지막으로 [개혁교회 질서 해설] “도르트 교회 질서” 원고를 쓰시면서 ‘이 책을 다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쓰겠다’고 하는 말을 저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다 정리하고 난 후에 화장실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시고 약 한 달 정도 지나 1월 6일에 세상을 떠난 후 4월 1일에 그 책을 유작으로 발행했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70주년 기념식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 갈 수 있을른지 모르지만 강의할 원고를 정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하게도 산소호흡기를 달고 부산에서 천안 고려신학대학원까지 가셔서 강단에 앉아서 직접 강의를 하셨습니다.
교수로 평생을 가르쳤던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유언과 같은 말씀은 교수들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호주와 미국에 사는 두 아들과 손자가 왔으며 카다다에 사는 큰 딸도 함께 하며 마지막 병간호를 하였고 아들과 딸과 손자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한 말씀하시고 조카인 저에게도 가족장으로 어떻게 하라고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려신학대학원장 변종길 교수를 비룻한 지인들을 불러서 학교와 교회들에 대한 유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장례는 국화로 장식한 영전도 없었고 꽃 한 송이도 없이 간소하게 치루었습니다. 그분의 시신은 약 20년 전에 조성한 조상들의 묘지에 안장한 것은 마치 야곱의 장례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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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