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82
교왕지말(驕王之末)
[요약] (驕: 교만할 교 王: 임금 왕. 之: 어조사 지. 末: 끝 말)
교만한 왕의 끝이라는 말로, 태봉국 왕 궁예의 고사에서 유래함.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덕을 베풀지 않고 교만하면 그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뜻.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내용] 궁예(弓裔.857?~918)의 출생이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삼국사기에 의존하면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며(弓裔, 新羅人, 姓金氏.),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유력 왕족의 후손임을 내세우려 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실은 진골 가운데서도 몰락하여 지방으로 흩어진 집안의 후손이 아닐까 한다. 집안 못지않게 출생과 성장과정은 더욱 비극적이다.
궁예는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마치 긴 무지개가 위로 하늘에 이어진 것 같았다고 한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午’자는 ‘五’자와 통하여 端午日인 五月 五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었으며, 또 광염이 이상하였습니다. 아마도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그를 키우지 마십시오.”라고 해서,
데려가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아이를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마침 유모인 여자 종이 몰래 그를 받았는데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을 멀게 하였고,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만 치자 유모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태어나면서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그냥 두기 어려워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와 그대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궁예가 울면서 “만약 그렇다면 제가 떠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세달사(世達寺=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됨을 깨달았다는 조신(調信)이 일하던 바로 그 절)에 갔다. 지금[고려]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법호를 지었다.
궁예는 나이가 들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헌칠하고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齋)에 참석하려고 가는데 까마귀가 입에 물었던 물건을 들고 있는 바리때(鉢) 안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점대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비밀로 하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다행히(?) 시대는 어지러웠다. 특히 그가 세상에 나갈 마음을 먹은 진성여왕 5년(891) 무렵, 조정에서는 유력한 신하들 간에 패가 갈리고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절을 나선 궁예는 처음에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오만무례하였다. 이듬해 양길(梁吉)을 찾아갔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아직 경험과 힘이 모자란 궁예로서는 ‘선배 반란군’에게 한 수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문을 나선 지 3년 만인 894년, 궁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무려 3천5백 명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거느린 무리 3천 5백 명(신라본기 진성왕 8년조에는 열전과 달리 600여 인으로 전하고 있다)을 나누어 14개 부대로 하고, 금대(金大), 검모(黔毛), 흔장(盺長), 귀평(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部長)으로 삼았다. 이때 궁예는 사졸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 어려움과 편안함을 함께 하였고, 상벌에 있어서 공정히 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이로써 뭇 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세력이 커지자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으로 그 거점을 옮겼다. 게다가 거기서 천군만마와도 같이 왕건이라는 뛰어난 부하를 얻었다. 본디 개성 출신인 왕건은 철원으로 와 896년부터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왕건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을까, 궁예는 개성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궁예의 거침없는 기세 앞에 불편해진 이가 양길이었다. 제 밑에서 싸움질을 배운 피라미가 이제는 자신을 향해 칼날을 곧추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양길은 궁예의 힘을 꺾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도리어 궁예였다. 양길에게 이기고 궁예는 가슴 가득 느꺼운 감정에 몸을 떨었다. 키워준 어머니의 타박을 받고 절로 떠나던 초라한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왕이었다. 드디어 901년, 왕을 자칭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궁예의 일생 최전성기에 후고구려는 이렇게 세워졌다. 견훤이 남쪽에서 후백제를 세운 1년 뒤의 일이었다.
효공왕 8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개칭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 뒤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중앙관청으로 광평성(廣評省)을 두어 나랏일을 토의케 하는 한편, 각 지방에 관청을 둠으로써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다. 또 궁궐과 누대 등을 호화롭게 꾸며 자신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평양까지 점령하여 신라의 북쪽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함으로써 그 세력이 신라를 앞지르게 되었다.그러자 신라의 많은 장수와 학자들이 투항하였으나 신라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잔악한 본성이 이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궁예는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했다. 그리고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고, 맏아들은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은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불렀다. 또 스스로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방포(方袍. 중의 옷)를 걸치고 다녔다. 그는 불경 20권을 만들어 승려 석총(釋聰)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석총은 ‘이것은 불경이 아니라 사악하고 괴상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직언을 했다. 궁예는 몹시 노하여 석총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백성들의 마음은 차차 궁예에게서 멀어져 갔다.
궁예의 왕비가 그의 난폭한 행동을 염려하여 평상심을 찾으라고 간곡히 간하였다. 화가 난 궁예는 왕비에게 말했다.
“감히 미륵불을 가르치려 하다니……, 너 요즘 다른 사내와 가까이 지내고 있지? 나는 미륵불이야, 미륵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심(觀心) 능력이 있어서 상대방의 눈동자만 보아도 속마음을 훤히 알 수가 있어.”
그리고는 끔찍하게 왕비를 인두로 지져대자 아들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 말렸다. 더 화가 난 궁예는 그 자리에서 철퇴로 두 아들을 때려 죽여 버렸다. 또 신하들도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죽였다.
드디어 918년 6월이었다.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갔다.
어지러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큰 의리라며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왕건은 혁명이라는 말 앞에 두려웠지만, 때는 두 번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주어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입을 것이라는 말에 선봉에 서기로 하였다. 왕건의 나라인 고려 사람의 기록이긴 해도,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궁궐 앞에서 왕건을 기다리는 이가 1만여 명을 넘었다 한다. 혁명은 성공했다.
궁예의 최후는 어땠을까. 그는 누추한 차림으로 산 속 깊이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백성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았다. 궁예는 역사 속에서 평가받는 악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고 말았다. 그것은 패자가 감수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의문; 20여년을 함께한 도적무리의 친위대는 어디로 가고 혼자 헤메다가 배가 고파서, 보리를 훔쳐 먹다가 농민에게 살해당한 것이 맞을까?
이로써 태봉국은 28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끝나고 고려가 열리게 되었다.
(이글은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 다른 자료를 첨삭하여 재구성함)
[네이버 지식백과] 명성산 [鳴聲山]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강원도 철원군의 중남부 갈말읍 신철원리에 위치한 산이다(고도:922m). 한북정맥에 속하여 대성산 · 복계산 · 광덕산 등을 잇는 산으로 험준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삼부연과 같은 명승지 외에도 석천곡(石泉谷) · 등용 폭포(登龍瀑布) · 비선폭포(飛仙瀑布) 등이 있는데, 특히 가을 억새로 유명한 산이다.
조선 시대 지리지에는 명성산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데, 『1872년지방지도』 「철원구방지도(鐵原九坊之圖)」에는 부의 남동쪽 경계에 명성산(鳴城山)이 묘사되어 있다.
이곳은 궁예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은 곳이다. 궁예가 918년에 왕건에게 쫓겨 이 산중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가 전의를 상실하고 통곡하면서 군사들을 해산하였는데, 그 후부터 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와 명성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궁예왕굴(弓裔王窟)은 상봉에 위치한 자연동굴로 궁예가 왕건에 쫓겨 은신하던 곳이었다 한다. 항서받골(降書谷)은 궁예 군사에게 항복하는 항서를 받은 곳이라고 하며, 가는골(敗走谷)은 궁예가 단신으로 이 골짜기를 지나 평강으로 도망갔다고 하여 패주골, 또는 가는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눌치(訥雉)는 궁예가 도주하면서 흐느껴 울었다는 곳으로 느치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명성천(鳴聲川)과 명성산억새꽃축제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첫댓글 명성산=궁예
강씨봉=궁예부인 강씨 가족이 숨어살던 산
네에 전설이 많지요.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네에 감사합니다.
교왕지말(驕王之末), 교만한 왕의 끝이라는 말로, 태봉국 왕 궁예의 고사에서 유래함.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덕을 베풀지 않고 교만하면 그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뜻. 잘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이 없으면 지도자는 국민이 배반하죠. 감사합니다.
겸손.😅😅
감사합니다.
저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시간되세요.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덕을 베풀지 않고 교만하면 그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뜻.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높은자는 교만해서 버림을 받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