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이미순
키 큰 남자가 걸어간다
배꼽 근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툭,
바닥에 떨어뜨렸다
지랄하네
자기가 떨어뜨리고 떨어뜨린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자기가 떨어뜨리고 떨어진 휴대폰에게 하는 소린지
내가 자기를 앞질러 가서 그러는지
야!
이번엔 고함소리가 들린다
앞질러가며 자기 얘기를 핸드폰 메모장에 쓰는 걸 눈치 챈 건지
떨어뜨린 지랄을 주워들고 전화 속 상대에게 화풀이하는 건지
몰라,
쿵 내려앉는 심장을 추스르고
앞만 보고 걸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지랄’은 우리 한국인들의 비속어이며, 원래 뇌전증을 가리키는 간질병을 뜻한다. 뇌전증을 순우리말로 ‘지랄병’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지랄병(간질병)은 느닷없이 드러누워 입에 게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증상)을 말한다. ‘지랄’은 ‘간질병’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이제는 ‘지랄의 현상학’을 탐구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현상학이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현상 너머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지랄의 현상학’을 어떻게 정립할 수가 있는 것일까? 첫 번째는 뇌전증(간질병)으로서의 의학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쓸데없이 함부로 떠들거나 분별없이 행동하는 존재론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끊임없이 타인들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괴롭히는 심리 사회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고, 네 번째는 ‘돈도 못 벌고 헛지랄했다’라는 말에서처럼 쓸데없이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자책의 양상일 수도 있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부모형제나, 또는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지랄하네’라고 농담을 주고받듯이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순 시인의 [지랄]은 매우 독특하고 그만큼 극적이며, ‘지랄의 현상학’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어느 날, 어느 길거리에서, 키가 큰 남자가 “배꼽 근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툭/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자책하듯이 “지랄하네”라고 말한다. 이때의 ‘지랄하다’는 거의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는 말이겠지만, 그러나 이미순 시인은 그것이 “자기가 떨어뜨리고 떨어뜨린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자기가 떨어뜨리고 떨어진 휴대폰에게 하는 소린지”, 또는 “내가 자기를 앞질러 가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중얼거린다. 아무튼 키가 큰 사람은 싱겁고 너무나도 우스개 소리를 잘 한다. ‘지랄하네’는 일이 전혀 엉뚱하게 꼬였다는 것을 말하고, 그러나 그 ‘지랄하네’라는 말을 듣는 시적 화자는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요컨대 ‘지랄하네’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의 말인지, 아무런 잘못도 없는 휴대폰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자기를 앞질러 가서 그러는” 것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랄하네’, ‘개지랄하네’, ‘지랄 발광하네’, ‘헛지랄하네’, ‘지랄 말어’ 등, ‘지랄’의 쓰임새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지만, 이미순 시인의 [지랄]은 그만큼 극적이고, ‘지랄의 현상학’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시적 화자가 키 큰 남자가 내뱉은 ‘지랄의 의미’를 되씹고 있을 때, 이번에는 너무나도 뜻밖에 “야!”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앞질러가며 자기 얘기를 핸드폰 메모장에 쓰는 걸 눈치 챈 건지/ 떨어뜨린 지랄을 주워들고 전화 속 상대에게 화풀이하는 건지”, 그 지랄이 한번 더 발광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지랄’은 병이나 행동양식이 아니고, 이미순 시인의 [지랄]의 주연배우가 된 것이고, 그 주연배우에 걸맞게 명품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을 자기 자신이 떨어뜨려 놓고 자기 자신을 꾸짖고 있는 모습도 우습고, 그 화풀이를 애꿎은 휴대폰에게 해대는 것도 우습다. 지극히 우연히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그가 지랄하는 모습을 저장하는 것도 우습고, 제발에 절여 그것을 들킨 줄 알고 “쿵 내려앉는 심장을 추스르고/ 앞만 보고 걸었다”는 것도 우습다. 지랄이 지랄을 낳고 지랄발광을 하면서, 그 화풀이의 대상을 자기에게서 휴대폰으로, 휴대폰에서 시적 화자에게로, 시적 화자에서 전화 속의 상대방에게로 옮겨가는 ‘지랄의 현상학’은 우리 한국인들의 존재론적 토대가 된다.
지랄은 중독성이 강하고, 지랄은 그 전염력이 너무나도 엄청나게 빠르다. 우리 인간들은 ‘지랄하는 동물’이고, 시시때때로 지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쓸데 없이 함부로 떠들며 그 지랄을 육화시키는 사람도 있고, 끊임없이 타인들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지랄발광하는 사람도 있다. 가능한 일이었거나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거나 간에 공연히 헛지랄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형제, 또는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지랄 말고 술이나 한 잔 하세”라고,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긴 말로 ‘지랄하는 사람’도 있다.
‘지랄의 주연배’우는 자기 자신이나 휴대폰에게 화를 내는 희극배우일 수도 있고, “야, 이 자식”이라고 끊임없이 타인들을 살해 위협하는 비극의 주연배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어쨌든 우리 인간들 모두는 ‘지랄의 무대’의 ‘주연배우’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