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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라"
출애굽기 4장 1-26절
우리나라 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또는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어떤 일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어 나갈 텐데 그 제일 첫 걸음, 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바로 그 한 동작이 매우 어려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하루의 첫 걸음을 일단 내딛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씁니다.
자명종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고 자는 것은 아마도 가장 보편적인 방법일 것이고, 미국에서 어떤 사람은 자명종이 울림과 동시에 낚싯대에 연결된 자기 침대 이불이 저절로 벗겨지도록 장치를 해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또 어떤 카운슬러는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된 순간 그날 할 일 중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생각해 내면 곧바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일단 일어나기만 하면 그 다음은 무척 쉬운 것입니다.
혹 몇 시간밖에 못 잤더라 하더라도 세수만 하면 정신이 말짱해지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집을 나서면서 바깥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실 때쯤이면 이미 새롭고 상쾌한 기운이 온 몸에 스며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인물들 중에 일의 제일 첫 걸음 내딛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명을 받고 나서도 당장 일하러 떠나지 않고 잠시 꾸물거리거나 한두 번 사양하거나 혹은 아주 도망치려고까지 한 몇 선지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 모세만큼 많은 횟수를 반복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시키시는 일을 어찌하든지 피해 보려고 한 사람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민족의 출애굽이라는 이 위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모세는 바로 그 사명 받는 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유를 들면서 무려 다섯 번이나 꽁무니를 빼려 하는 모습을 우리는 3장과 4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세가 결국에는 자신의 사명 속으로 첫 발을 내디디게 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그 같은 사명을 받고도 우물쭈물한 것은 물론 잘못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처럼 못난 자세까지도 선용하셨음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그처럼 밀고 당기고 하는 중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더 잘 준비된 자세를 다지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일단 첫 발이 내디뎌지자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사명 수행을 위해 가속적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 첫걸음을 내딛기 바로 직전에 다졌던 준비 자세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세 가지 대답을 나누어 보면서, 우리 경향의 제직들이 새해에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 수행을 시작하고자 할 때 마지막 출발선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신앙 자세들이 무엇인지를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심을 의지하면서 사명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9절에 "1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6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7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8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지금 조금 전에 3장에서 "스스로 있는 자"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게 된 모세는 자기가 가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점이 심히 염려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생전 보지도 못한 자기를 만나게 되면 호응하고 따라 주기는커녕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고" 또한 격려해 주는 대신에 오히려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라는 핀잔이나 조소만 받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모세가 그런 염려를 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사십여 년 전에도 그와 같은 쓴 맛을 한 번 보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모처럼 자기 민족을 어떻게 도와 보겠다고 작정하고 애굽 사람 하나를 죽였지만 오히려 모세가 듣게 되었던 말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라는 어처구니없는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또 가서 그 이스라엘 민족들을 만나 봐야 그 반응이란 똑같을 것이라는 걱정이 자연히 앞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 줄까 걱정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이적을 그 표징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이적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되어 온 지도자임을 확신하는 증거가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 모세 자신에게 있어서 그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 순간부터 자기 속에서 전능으로 역사하시게 될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모세 자신은 원래 그런 이적들을 스스로 행하기는커녕 흉내도 못 낼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그저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명령만 따를 때, 하나님의 이적이 바로 자기 손을 통하여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그저 하나님 말씀대로 지팡이만 던지고, 그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고 할 뿐 다른 것은 전혀 한 것도 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적들을 행사하시는 신비한 체험을 모세는 처음으로 겪어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바로 이 확신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명을 시작하고자 할 때 꼭 필요한 준비 자세입니다.
일단 사명을 받게 된 사람이 대표적으로 빠질 수 있는 잘못은, 지금 그 사명을 내려 주신 하나님 쪽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 수행의 어려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표현하자면 그 사람의 시야의 초점이 빗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목회라는 사명에 뛰어 든 이후 점점 교인 쪽으로만 그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경우도 한 예입니다.
'내가 이렇게 목회하면 이 성도가 무어라고 말할까? 저 성도는 어떻게 될까?' - 이렇게 될 때, 그는 자기를 목사로 파송하신 하나님 쪽으로 심령을 돌리고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워질 것은 자명합니다.
장로로 집사로 안수 받은 후에도 같은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이구, 어떻게 장로라는 이름이 창피하지는 않을 만큼 해야 할 텐데, 이번에 건축헌금을 얼마나 작정해야 하나?' - 그런 경우도 역시 그 얼굴을 엉뚱한 쪽으로만 돌리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야말로 모세처럼 자기가 가서 만나게 될 백성들만 생각하며 염려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인간적인 걱정이 들 때에, 그 시야를 돌려서 여러분에게 사명을 내리신 바로 그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바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영력이 충만해서 목사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장로 일, 집사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내게 사명 주신 그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스스로 역사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바로 이 사실을 주님의 일을 해 나갈 때 항상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바로 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니 내가 이제는 이전에 내 스스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일들을 거뜬히 해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구나.'라는 믿음을 가지고 새해의 사명에 힘차게 제일보를 내딛는 제직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나의 약점이 결코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임을 믿고 사명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10절로 17절의 말씀에 "10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12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15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9절 이상에 나타난 놀라운 이적까지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아직까지도 자기 사명 수행을 위한 첫발을 내디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을 잘 못하는 것' 즉 언변이 약하다는 자신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습니다.
즉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애굽 왕을 설득해 내어야 할 어려운 사명인데, 다른 것은 제쳐 놓고라도 말재주가 시원치 않아서야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모세는 나름 논리적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즉 "이 사명 수행하기에 더 적절한, 언변 좋은 사람을 찾아 보내시는 것이 제 생각에는 더 좋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11절을 다시 보시면,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모세가 말 잘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건강한 사람과 꼭 마찬가지로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소경 역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모세가 자기가 어눌하다고 핑계하는 것은 결국은 모세를 어눌하게 만드신 하나님께 불평하는 말과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모세를 파송하실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마저도 이미 다 계산에 넣고 계셨습니다.
모세 생각에는 그 자신의 약점이 그 같은 사명 수행에 치명적인 것이라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런 걱정은 하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이었고, 또 모세의 형 아론의 입까지 동원하셔서 모세의 입을 "대신하게 할 것"까지 이미 계획하시고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세는 자신의 어눌한 말솜씨 따위는 걱정하지 말고 그저 지팡이만 손에 잡고 행하기만 하면 충분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변명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 것입니까?
자기에게 있는 약점을 들어서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서 꽁무니를 뺄 수 있는 구실로 삼으려 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아니 때로는 그것이 결코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우리 생각에는 너무나도 합당한 이유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나같이 젊은 사람이,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나같이 힘없는 사람이, 나같이 신앙생활 짧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맡아 할 수 있겠습니까?" - 분명히 자신이나 제 삼자가 볼 때도 너무나도 타당해 보이는 이유들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핑계를 듣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의 약한 것까지 바로 당신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그 본인보다도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쓰실 때에는 다 그만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 약점을 커버할 그 어떤 하나님 흉중의 깊은 계획 역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이 사명 감당하기에는 이러저러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로지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하고 그저 첫걸음을 내디디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좀 모자라면 모자라는 그대로, 좀 무식하면 무식한 그대로, 좀 약하면 또 약한 그대로 일단 무조건 하나님 일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기만 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자신의 약점조차도 결코 그 사명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 알아서 조처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시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나 자신의 숨겨진 신앙 문제부터 해결하고서 사명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18절 이하 23절의 말씀에 "18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25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하여 모세 편에서는 이제 사명 수행을 위한 제반 문제들이 다 해결된 듯이 보였으며 출애굽 사명 수행을 위하여 몸과 마음의 준비가 다 갖추어진 듯이 보였습니다.
장인과 작별 인사도 하고 자기 가족을 거느리고 애굽을 향하여 출발했으며, 또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사명 수행 방법의 요지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제대로 첫 걸음이 내디뎌졌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 사명을 위해 출발하기 전에 모세에게는 정작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어렵게 작정하고 이제 막 애굽을 향해 떠난 모세였는데 이번에는 웬걸 하나님 쪽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나오셨습니다.
애굽을 향해 가는 길 어디서 노숙하는 밤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생명의 위급함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갑자기 위독한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곁에 있던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자기 남편을 보았을 때 그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십보라가 보여 준 반응이었습니다.
십보라는 그 자리에서 즉시 차돌을 취하여 자기 아들, 즉 모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면서 "당신은 나의 피 남편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26절에서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대로 하여튼 할례와 연관된 표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백히 알려 줍니다.
하나는, 그때까지 모세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십보라가 바로 그 문제와 어떤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남편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을 지경이 되는 것을 보자마자, 십보라는 그것이 바로 자기 부부가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임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아마도 짐작건대, 모세가 그때까지 자기 자식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아내 십보라가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십보라로서는 할례와 같은 의식에 대하여 어떤 반발심 같은 것이 충분히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보건대, 모세에게는 바로 그때까지 그 자신 속에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 문제에 있어서 아내와의 갈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로 이것을 해결하고 출애굽 사명을 위해 떠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모세 생각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나 자기 자신의 약점만이 사명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는 모세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앙생활의 불화와 갈등이 더 시급한 선결 과제라고 여기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그 같은 숨겨진 신앙 문제가 없겠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급히 해결되어야 할 신앙 문제가 나 자신 속에, 우리 부부 관계 속에, 우리 자식들에게 남겨져 있지는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 문제를 놓고 그래도 고민도 하고 걱정도 하고 기도는 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방관하게 되어 이제는 아예 문제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진짜 큰 신앙 문제가 내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를 도와주고 지도하기는 고사하고, 자기 자식에게 할례를 베푸는, 그야말로 신앙 교육에 있어서 가장 기초 중의 기초적인 것조차 혹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불신자를 전도하기는커녕,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예배생활이나 기도제목에 있어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불화하는 내적 문제점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지는 않는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바로 나와 내 가정 속에 고질적으로 남아 있는 신앙 문제야말로 우리의 사명 수행에 있어서 자신의 연약이나 사명의 어려움 같은 것들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 일깨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것부터 급선무로 해결하는 여러 제직들과 직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 수행을 위해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바로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잡아당기며 다시 제자리에 눕혀 놓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해결하고 출발하면 그 다음부터는 가속도가 급속히 증가될 것입니다.
모세 역시 이 같은 문제들 때문에 출발이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일단 그가 그런 내적 외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첫 걸음을 내딛자마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습니다.
그 뒤로는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로서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큰 구원을 이루는 위대한 사명의 여정을 40년 동안이나 뒤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12년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더 이상 출발선에서 지체하지 말고 이제는 곧 떠나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맡겨 주신 사명의 대상을 보고 걱정이 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친히 역사하심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망설임이 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덮어 주시고 알아서 처리해 주실 줄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결정적인 신앙 문제가 마음에 걸리면, 바로 그것부터 깨끗이 해결하고 정리한 후에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사명의 여정에서 이처럼 일단 첫 걸음을 내디딤으로써 그 다음 남은 평생은 자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속적인 신앙대로를 달려가시는 경향의 모든 제직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