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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家父長制)
부계의 가족제도에 있어서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 따라서 통을 따지며, 일체 집안 일에 남자인 가장이 권력을 가지는 제도.
家 : 집 가
父 : 아버지 부
長 : 길 장
制 : 절제할 제
가장인 남성이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고 가족구성원을 통솔하는 가족형태, 또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지배를 뒷받침해 주는 사회체계를 일컫는 말이다.
이 가운데 앞의 정의는 가족을 단위로 한 것이고, 뒤의 정의는 가족을 둘러싼 전반적인 사회체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가부장제적인 가족형태와 사회체계는 서로 규정하고 서로 재생산하면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 둘은 분리해서 고찰될 수 없고 종합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 최근의 여성학계에서는 가부장제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일반적인 억압체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성학계의 이와 같은 개념 정의는 가부장제의 한 측면,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라는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며, 기존 사회과학계의 개념 정의와 모순된다기보다는 특정 측면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가부장제는 역사 이전의 시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체계와 가족형태의 근간을 이루어 오고 있으며, 또한 여성의 지위와 삶을 결정짓는 데 가장 핵심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이러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대마다, 그리고 지역마다 그 성격을 달리해서 존재해 왔다. 특히 우리나라 사회사에서 가부장제는 매우 고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우리나라에서 가부장제의 발생과 변화사는 수렵채취시대, 초기 국가의 성립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로 시기를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최근까지의 사회과학 이론에서는 초기국가 성립 이전의 무계급사회에서는 남녀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최근의 인류학적 연구 결과들은 이러한 이론을 부정하고 있다.
즉, 수렵채취시대에도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여성이 담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성별 역할 분화와 이에 입각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한편, 혼인제도는 생산에 대한 기여도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남성에게 우월적인 소득분배 방식을 발생시켜 남성의 지배권을 확립시켰을 뿐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유를 제한하는 장치로도 기능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남녀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소유·종속 관계를 확립시키며, 여성이 출산한 자녀들에 대한 지배권을 남성에게 부여하여 초기적 가부장권이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이 우리나라의 수렵채취사회에도 적합하게 들어맞을 수 있는가는 아직 실증적 연구들이 부족하여 단언할 수가 없다.
초기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남성이 그의 계층적 지위에 관계없이 국가에 대한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피지배 집단의 남성도 한 가족의 대표자라는 지위를 부여받게 되며, 이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남성들은 여성을 지배한다고 하는 공통의 관계에 입각해서 결합하게 된다.
이때, 초기적 가부장권이 확립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때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실증적 연구들을 통해 확인된다.
이 시기 여성들의 자율성은 남녀관계의 자유 개방성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가족제도의 몇몇 특징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이 시기에는 외가와 처가에 대한 관계가 매우 긴밀하여 부계친(父系親)의 일방적인 중요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처가를 자기 집처럼 생각하여 장인·장모를 아버지·어머니라 부르고 친부모처럼 섬겼다.
또한 동성친(同姓親)과 이성친과의 차별이 없었으며, 족보 등의 기록에서도 딸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았고, 제사 상속과 재산 상속에도 아무런 차별이 없었다.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경우에도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이 시기에는 강고한 가부장권이 성립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 강력한 유교적 가부장제가 사회 저변에까지 확립되었음이 여러 가지 사실들을 통해 드러난다.
즉, 앞에서 언급한 친족제도·제사 상속·재산 상속·양자제도 등이 남성·동성친·장남을 집중적으로 선호하고, 여성·이성친·차남 이하를 차별하는 방향으로 짜여진다. 이와 같은 변화는 유교 규범이 사회 저변에 정착됨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조선 초기에 국가 이념으로 등장한 유교 규범이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 저변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우리나라의 가부장제는 유교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즉, 효라는 개념을 통하여 가장에 대한 가족구성원들의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고, 여자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정조가 강제됨으로써 남성과 가족에 대한 절대적 종속이 요구된다.
여성과의 강제 이혼을 법률적으로 보장하는 칠거지악이라는 장치가 마련되고, 철저한 내외법을 시행하여 여성이 사회 내에서 주체적 행위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 버렸다.
이와 같은 유교적 가부장제는 국가조직 원리에까지 적용되었다. 즉, 국왕은 충(忠)이라는 규범에 입각한 가부장적 존재로 군림하였고, 신분관계를 비롯한 모든 사회관계에도 가부장적 관계가 적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정착되자 우리나라 가부장제의 성격은 또 한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가정은 생산단위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사적 영역인 가정의 전담자가 되고, 남성은 임금노동자로서 사회적 생산을 책임지는 공적 담당자가 된다.
다시 말하면, 남성은 명실공히 정치·경제·사회적인 면에서 공적 영역을 담당하고, 여성은 사회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사회적 분업이 제도화된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여전히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객체적 존재로 머물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더욱 강력한 가부장권을 확립하게 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성립은 남성의 생활 영역을 직장과 가정으로 분리시킨다. 낮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여성을 비롯한 가족구성원이 가정 내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고, 또한 남성의 가정관리권을 약화시켜 가족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잃게 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의 현대사회가 자유주의적인 합리적 관계보다는 전근대적인 사회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조직의 원리가 가부장제적인 온정주의와 가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 문제를 온정주의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사회의 합리화를 계속 지연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한편, 북한 정권은 전통적 가부장제의 기초 위에 김일성이 가부장적 권력을 획득하고 가부장적 국가조직을 형성시켜 전제주의체제를 유지시키고 있다.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성격은 우선 가족 내에 형성된 가부장권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부장권의 첫 번째 특징은 가족구성원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지배권이라 할 수 있다. 즉, 혼인·이혼·상급학교 진학 등 가족 내의 모든 문제가 부모, 특히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처리된다.
두 번째 특징은 가산(家産)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이라 할 수 있다. 가장은 조상 대대로 상속되어 온 재산은 물론, 자기가 취득한 재산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며 처분할 수 있다.
세 번째 특징은 가족의 영속성을 실현할 가계 계승권이다. 가장은 조상 숭배를 계속시켜야 하며 가통(家統)을 계승시킴으로써 가족의 영속성을 보존하여야 한다. 물론,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부장권은 이러한 특징들이 상당히 약화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부장권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다.
한편, 가부장제는 결코 가족제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특정한 사회체계에 의해 유지되며, 가부장적 국가기구에 의해 재생산된다. 따라서 가부장적 국가기구와 사회체계는 많은 비합리적인 측면을 내포하여 합리적이며 규칙적이어야 할 사회적 기능체계를 마비시키곤 한다.
가부장적 사회체계가 있는 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부장제는 조선 후기보다는 매우 약화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가부장제가 많은 사회적 비합리성을 초래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성격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특히 여성의 억압된 지위와 삶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변화되어야 할 대상임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여성학계에서 가부장제의 문제가 보다 심각하게 논의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급격히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고, 보다 합리화된 방향으로 사회 발전과 민주주의 교육을 적절히 시행해 나감으로써 점차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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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가부장제의 역사는 남녀관계의 역사적 변천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관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경제적 지위는 물론 노동력 재생산과 성(性) 등을 둘러싼 여성의 자율성 여부와 정도, 자율, 억압의 형태가 밝혀져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친족제도나 촌락 내의 혈연관계에 대한 역사자료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시대에 이미 확고한 부계제가 성립한 것으로 평가했다.(→ 한국사).
그러나 최근에 호적, 족보, 분재기(分財記), 장적(帳籍) 등을 바탕으로 친족제도를 연구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엄격한 가부장제가 성립한 것은 조선 후기이며, 그 이전까지는 여러 영역에서 여성의 자율성이 상당히 허용된 느슨한 형태의 가부장제였거나 아니면 모계, 부계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다음의 4가지 기준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결혼으로 인한 배우자와 자녀의 거주규칙, 혈통체계, 경제적 지위, 성적 자율성과 기타 사회적 지위 등이다.
고대사회에서 조선 중기
서류부가(婿留婦家), 남귀여속(男歸女屬)의 혼인풍습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데릴사위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살다가 자녀를 낳고 아이가 자란 뒤에 부인, 자녀와 함께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같은 모처(母處)-부처(夫處)의 거주규칙은 조선에 와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지배계급이 서류부가의 예가 지켜지지 않음을 통탄하는 기록이나, 15~16세기 사림파에 처가, 외가의 경제적 기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까지 서민층은 물론 양반계급에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친족과 성씨집단 등에 관한 연구를 보면 혈통체계 역시 이때까지는 부계(父系)라는 단일 혈통체계로 설명될 수 없다.
신라의 왕위계승, 가계계승 및 상속제도, 양자제도, 혼인제도, 제사, 거주제, 친족조직은 부자계승의 원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에는 모계씨족제가 유지되었다거나 부계가 우월하면서도 비부계적 요소도 공존했다거나 모계 아니면 부계라는 식의 이해는 곤란하며 좀더 연구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친족체계에 대한 실증적 연구 없이 고대사회를 부계사회로 단정한 기존의 연구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며, 고려와 조선 중기까지도 강한 부계 친족집단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려 초기의 지배권력은 중국의 종족제(宗族制)와 상례에 관한 오복제(五服制)를 받아들여 국가예절로 선포했으나, 고려의 가족제도를 반영하여 처부모를 친부모와 차별하지 않았다. 부계 중심의 적장자(嫡長子)로 이어지는 제사상속제 및 유교적 제례가 고려말까지도 제정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까지 장자봉사(長子奉祀)를 우선시하면서도 자녀들이 번갈아가면서 제사를 지냈으며,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이나 외손이 제사를 지냈다. 족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개인과 가족의 뿌리가 부계 시조(始祖)에 있지 않고 수많은 남녀 조상으로 확대되어, 궁극적으로 민족공동체로 귀착되는 16조도(祖圖) 가계보(家系譜)였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여자로만 몇 세대 이상 직계로 연결되거나 남녀가 섞여 있는 계보 등이 발견되며, 외손 봉사(外孫奉祀)가 이루어져 양자제도도 없었다.
조선 전기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볼 때 부모의 사유지(私有地)는 자녀에게 차별없이 상속되었고, 노비나 토지는 부부가 따로 소유했다. 여성의 성적 자율성과 기타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면 상당히 자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합의를 전제로 혼인이 이루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으며 처첩과 적서(嫡庶)의 구별이 없었다. 여자는 남편이 죽은 후 호주(戶主)가 될 수 있었고 재혼도 자유로웠다. 이런 현상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 17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방계가족이 부계 직계가족으로, 부족 안에서 이루어졌던 혼인이 마을 밖의 먼거리 혼인으로 변하고, 부계 씨족이 성립하면서 모처-부처의 거주제는 약화되어 갔다.
조선초부터 강요되던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이 후기에 와서 양반을 중심으로 행해지면서 제사를 지낼 때 점차 여자들의 참여와 외손, 여계의 제사상속을 배제했다.
부계 혈통을 내세운 적장자주의로 변해갔으며 여성은 시댁의 아들을 낳는 도구로 전락했다.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17세기 중엽까지는 균분제(均分制)의 사례가 많으나, 차츰 장남우대, 남녀차별, 남자균분 등으로 바뀌었다. 장자우대제의 확립은 상속분 자체를 우대하기에 이르렀고, 딸은 출가외인으로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같은 부거제, 부계종족제, 남성 중심의 상속제로의 변화는 가부장제 가족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가장권을 강화시켰다. 양반 집안의 가장은 가족뿐 아니라 첩, 노비, 고공(雇工) 등의 비혈연을 통솔하는 지위를 나타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는 여성의 재산에 대해서도 가장이 그에 따른 이익을 가지고 처분할 수 있는 관리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까지 15명 정도의 집단 노동으로 짓던 한전(旱田) 농법이 3~4명의 가족 노동으로 바뀌면서 서민층에서도 가부장적 경제권이 확립되었다. 즉 지주가 소작인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경작권은 가족 대표인 가장에게 속한 것이었다.
이런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장은 양반이나 서민층 모두에서 가구를 대표하는 법적 지위와 책임, 즉 공법상(公法上)의 호구신고의 의무, 가족 혼인에 관한 의무, 그리고 국가가 법으로 금하는 행위를 가족이 범하는 경우 책임을 지는 금제 위반 감독의 의무 등을 가졌다.
여성은 이러한 공적인 가장권에서 제외되었다. 특히 서민층 여성은 조세·군역 및 유통수단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도, 독립된 생산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남편이나 시아버지인 가장에 예속되었다.
나아가 처첩제, 서얼제도(庶孼制度), 재가한 여성의 후손에 대한 과거(科擧) 금지 등의 제도는 여성의 성(性)과 노동력 재생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이 시행되면서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악(七去之惡), 일부종사(一夫從事), 내훈(內訓)과 같은 성차별적 유교이념이 강요되어 왔다.
향리에서 유교이념을 가르쳐온 사림파와 전통을 위태롭게 했던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유교이념이 서민층에까지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남편이 죽거나 외간 남자에게 손을 잡혔다고 자살하는 등 성통제 규범을 극도로 내면화한 열녀 형태에까지 이르렀다.
구한말에서 현대 조선 후기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도 전래의 관습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어져 왔다. 예를 들면 1900년대초까지 함경도지방에서는 결혼 후 신랑이 처가댁에서 5~10년 동안 살다가 본가로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으며, 경상도지역에서도 해묵이, 달묵이 형태로 1900년대 중반까지 이 풍습이 유지되었다. 오늘날에는 결혼식 장소를 신부측이 사는 곳으로 하거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처가에 먼저 가는 정도로 남아 있다.
근대 개혁의 기점이 된 갑오개혁은 여러 봉건제도를 근대화하려는 의지를 나타냈으나, 가족제도에 직접 관련된 것은 과부의 재가허용과 조혼금지 정도였다. 이것도 관련된 형법의 개정이 뒤따르지 못해 실효를 나타내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 확립된 가부장제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보수적 관습으로 이어지면서, 식민통치의 필요에 따라 몇 차례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1909년 일본식의 호적법을 적용한 민적법(民籍法)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신분을 파악하기 위한 호구조사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호적이 집안에서의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공증문서가 되었다. 즉 호적이 가족상의 개인 신분과 이동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본자료가 된 것이다.
그리고 호주의 지위를 가족상속자의 지위로 강화하여, 식민통치를 위해 가족구성원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부의 관장은 경찰관서가 맡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은 고려나 조선시대의 호적에서 차지했던 호주의 지위를 상실했다.
조선시대의 동성동본 불혼, 성(姓) 불변의 원칙, 다른 성(姓)의 양자(養子)를 금하는 3가지 제도는 종족제의 기본이며, 여성을 차별하고 속박하는 가부장제의 기본이었다. 이것을 일제는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에 이용, 성불변의 원칙을 폐지하고 다른 성을 가진 양자제를 허용했다.
일본인 양자나 서양자(壻養子)를 허용해 양민족의 피를 섞는 내선일체의 수단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나아가 이것을 기반으로 가족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우리의 성씨제도가 성불변의 원칙에 따라 한 가족의 아버지, 어머니, 부인의 3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식은 1가 1씨 제도로서 우리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편 1920년대에 자유주의 여성론이나, 이 시대의 소수 여성해방운동가들은 자유연애와 같이 유교적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을 거리만 남겨 놓고 1920년대 후반부터 사라져갔다(→ 여성운동).
1920년대 중반 등장한 사회주의 여성운동도 근우회가 해체된 뒤 여성 대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1930년대 발간된 여성잡지를 중심으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긴 가족중심주의의 일본식 형태인 현모양처의 상(像)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남자들이 징병, 징용되거나 유학, 독립운동 등으로 가족을 떠나 아버지 부재현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이때의 여성은 가족을 이끄는 적극적인 가장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존여비사상을 약화시키기보다 부계 혈통을 이어갈 남성의 생존을 확실히 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남편과 아들을 감싸고 아버지의 권위를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 남성우월주의를 강화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어 바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시행되어 이성양자(異姓養子), 서양자 제도는 무효화되었고, 성불변의 원칙과 다른 성을 가진 양자를 금하는 제도를 회복하여 전통적 가부장제를 현행 민법의 기본으로 삼았다(→ 8·15 해방).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동성동본 불혼과 다른 성을 입양하지 않는 원칙을 대한민국의 민법에 그대로 유지시켰다. 1991년 개정된 가족법은 가부장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개혁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나, 종법제의 모국인 중국에서도 폐지된 호주제는 조금 손질되었을 뿐 여전히 가부장적 지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해방 이후 특히 1960년대 산업화 이후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의 변화에 조응하여 새롭게 발전되고 있다. 즉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봉건적 가부장제의 성이중규범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 위에 일제강점기 현모양처론에서 이미 맹아를 보였던 낭만적 사랑과 노동 시장에서의 성차별적 성별분업이 확고히 자리잡아가고 있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받는 아내, 성공하는 남편이라는 대표적 여성잡지의 슬로건에 압축되어 있듯이 여성에게 추구해야 할 유일의 또는 제일의 가치는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 문화는 사실상 혼전 성관계의 개방을 요구하는 등 유교적 성규범과 충돌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여성에게만 혼전 순결과 배우자와의 배타적 성관계를 요구하는 이중적인 유교적 성문화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가운데 서구의 낭만적 사랑 문화가 들어와서 성생활의 측면에서 여성을 더욱 질곡에 빠뜨리고 있다.
최근에는 피상적·상투적인 낭만적 사랑의 문화에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와 성까지 상품화하는 자본의 논리가 결합하여 성폭력, 포르노 산업, 향락산업의 형태로 여성의 성적 착취, 성적 수단화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슈가 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자는 가정, 남자는 일터'라는 새로운 성별분업이 기본적인 사회적 분업으로 자리 잡았는데, 우리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별분업은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적인 성별분업으로 연결된다. 즉 남성은 기술직, 관리직의 상대적인 고임금 분야로 나아가는 데 반해, 여성은 경력과 승진이 인정되지 않거나 일정 한도까지만 허용되는 단순 생산·사무직의 임금이 낮은 분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부장제 구조하에서 여성은 주부 소외, 이중노동,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성폭력, 이중적인 성문화로 인한 피해 등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1980년대 들어 다양한 분야의 여성운동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가족, 여성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