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대 최고의 천재, 허균
교산 허균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로 1569년(선조 2)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불꽃처럼 살다가 1618년 광해군 10년 역모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허균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이름 높은 문벌가로서 부친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이며 동인의 영수였고 두 형인 허성과 허봉은 뛰어난 수재였
누이 또한 시재를 떨친 여류시인 허난설헌이고
막내로 태어난 허균은 이들 '허씨 5문장가' 중 가장 빼어난 천재였다.
허균은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허균은 당대 천재 문장가였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빛을 발한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6차례 방문하며 학식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짓는 문사들이 담당하는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 뜻을 통하는 조선의 외교 방식인 수창외교(酬唱外交)를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엔
명나라 사신 오명제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시인이기도 한 그가 조선의 시를 구하자,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과 더불어 그가 외우고 있는 조선시를 들려주게 되고
오명제는 돌아가 <조선시선(朝鮮詩選)>을 저술하게 된다.
오명제가 지은 <조선시선(朝鮮詩選)>은 신라때 최치원, 백결선생부터
고려의 이규보, 정몽주, 조선의 정도전, 서거정, 김종직, 허매씨 등 08분의 한시가 332편으로 엮어져 있고,
책 끝머리에 '조선장원 허균서'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허균의 공로로 우리 나라의 시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이다.
1606년.
주지번과 양유년 등 명의 사신들을 맞아 누이 난설헌의 시를 소개하는 등 화답시를 나누었는데
옛 고서를 외우는 허균을 보고 사람들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2. 허균, 조선의 이단아
선조는 허균을 아꼈다.
임란때 훌륭히 수행해낸 사신 접대와 중국 사신행으로 형조정랑, 삼척부사, 공주목사 등에 제수받지만,
허균은 20년 공직 생활에 3번의 유배와 6번의 파직을 당한다.
허균은 지나치게 자유분망했다.
1619년 31세의 허균이 황해도사에 부임해가면서 서울에서 황해까지 알던 기생들을 데려간 것이 문제가 되었다.
또한 허균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해윤판관을 지낼 때 쓴 일기 <조관기행>에는 언제, 어디서, 어떤 기생을 만났는지 잠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심지어 기생 한 명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관리들의 일화까지 기록했다.
"기생 내기가 잠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기생들이 인사를 해 바라보니 내 방에 왔던 자가 12명이었다."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 없다."
허균의 이러한 솔직함과 자유분망함은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 양반 사회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허균은 불교에도 심취한다.
사명스님은 허균이 18살때부터 열반하실 때까지 깊게 교류한 분이었다.
허균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안군수에서 파직되고 삼척부사에서도 임명 13일만에 해임된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에 심취한 허균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허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자 한다.
"나는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 만한 곳이 없다
3. 허균이 꿈꾸는 세상
허균은 성리학 체제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중국행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불교, 도교, 양명학은 물론 서학을 접하게도 된다.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 사신으로 갔을 때는 천주교를 접해 서양지도와 함께 천주교 찬송가 <십이궤장>를 가지고 온다.
또한 조선이 세계를 만나는 유일한 창고인 중국 고서점거리 유리창에서
은 1만냥을 들여 4천여 권의 책을 사온다.
허균은 새로운 세상에 목말라하는 신지식인이었다.
조선의 이단아가 되어갔다.
그는 다양한 세상과 사람들을 만났고, 피부로 세상의 모순을 실감했다.
허균의 스승은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당대 3당(唐) 시인이라고 불린
서얼 출신의 손곡(蓀谷) 이달인데,
허균은 스승을 통해 서얼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그들을 후원하며 사회 부조리에 더욱 눈을 뜨게 된다.
그는 1607년 공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서얼 친구들을 초대한다.
공주목사에서 9개월만에 또 파직 당하게 되고 나주목사 자리도 취소되면서
부안에 내려가 <홍길동전>을 쓰게 쓴다.
홍길동은 연산군때 실존했던 인물로전남 장성군에는홍길동의 생가가 있고, 허균의 소설을 통해 100여 년만에 부활한 것이었다.
그가 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서자 홍길동이 부패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로 그가 본 세상의 불합리를 극복하고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그의 개혁 사상이 표출된 것이다
4. 칠서지옥(七庶事件) 사건과 허균
조선은 첩의 자식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허용치 않는 이른바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었다.
이것은 소수의 양반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 하기 위해 지배층내에서 다시 중인과 서얼을 희생양으로 격하 시킨 제도라 볼 수 있다.
1613년. 광해군 때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난다.
명문가 서자 7인이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소양강 위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부르며 지내며,
광해군 즉위초에 서자도 관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연명상소했다가 허락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문경새재에서 은상인의 돈을 강탈 하다가 붙잡힌 사건이다.
평소 7서자와 친분이 있었던 허균은
대북파의 이이첨과 손을 잡고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서며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위기를 모면할 뿐 아니라 정2품 좌참찬에 오르며 권력의 핵심에 서게 한다.
그러나, 허균은 서자 7인과의 공모가 들어나 능지처참 된다.
허균과 함께 스러진 그의 꿈.
허균은 조선의 이단아였다.
허균의 죽음과 함께 그가 이루고자 하던 그의 꿈도 사라졌다.
조선 사회 절대 권위에 도전했던 허균.
그가 진정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적 명분론만을 절대시 하는 양반 관료 사회의 신분 지배 질서가 아닌, 서얼, 무사, 심지어 승려 계급과 호민들까지 중심이 되는 새로운 평등 사회를 꿈꾼 허균.
학문과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했던 허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게 있음을,
사람 사는 세상의 기본과 원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400년 전에 이미 인본주의, 민주주의를 인식한 허균의 꿈은 조선 후기 이익, 이수광 같은 실학자들에 영향을 주고
개화사상, 신분제 폐지 등 수난의 근대화속에 스며들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빛이 되었음을.
오늘날 여전히 같은 꿈을 꾸는 많은 이들의 희망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