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6
12월11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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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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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O8NZtRTeWE
(김영수 헨리코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72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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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입장에서 정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요즘 갑자기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인물, 예수님이 과연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일까, 아닐까?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부여하신 사명 가운데 가장 막중한 것은 아무래도 메시아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는 일, 결국 백성들에게 저분이 바로 메시아임을 확인시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예수님이란 인물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행동거지가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란 중차대한 사명을 완수하러 오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에 함께 할 제자들을 뽑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니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의견 충돌을 빚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한 율법 규정들을 하나하나 깨트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종래 다른 지도자들과는 명백히 달라 생명력과 에너지로 넘쳐흐릅니다. 시원한 샘물 같은 그의 가르침에 백성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칩니다. 그의 모습은 한없이 겸손하고 소박하지만 때로 당당하고 강력한 포스가 느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더이상 갈등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옥에 갇혀있던 그는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1장 3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구구절절 설명이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세례자 요한이 보낸 두 제자가 보는 앞에서 메시아로서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이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해주십니다.
자신들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훨씬 능가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세상만사를 자유자재로 마음껏 주관하시는 우주의 지배자 예수님의 모습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말로서가 아니라, 이론과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 앞에 입을 닫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 지나친 오만, 단단히 닫힌 폐쇄성은 끝끝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 눈에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여겨진 사람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와 계명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너무나도 단순명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이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그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메시아=그리스도=하느님이란 등식을 굳게 믿는 일 그것이 구원과 새로운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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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손전등과 서치라이트>
언젠가 바닷가에서의 일입니다. 물때가 딱 맞는 한 밤중이었습니다. 발목 정도 오는 찰랑찰랑한 썰물에는 크고 작은 게들이 와글와글했습니다. 야간작업이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손전등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아예 광부들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헤드라이트를 하나 장만해서 나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발산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수렵 작업 중이던 순간 가까운 산 위에서 군부대용 강렬한 서치라이트가 환하게 켜졌습니다.
순간 제가 착용하고 있던 헤드라이트는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변 전체가 대낮같이 밝아져버렸습니다.
대림시기도 반환점을 돌고 있습니다. 대림시기 아주 빈번하게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육화강생 작업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이지 탁월한 대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큰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세례자 요한의 빛은 아주 작은 손전등보다 작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출현이전 수많은 예언자들이 출몰했습니다. 아모스, 예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엘리사...그들의 삶을 정말이지 매력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다양한 박해와 고통은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작 바닥에 엎드려 쉬쉬하며 살아갔지만 우리 예언자들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절대 권력 앞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권세가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굽힘이 없었습니다. 촌철살인의 말 한 마디로 그들의 부끄러운 치부를 들쳐 냈습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큰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은 특별히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가장 큰 대예언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수행한 예언직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으로 바로 이분이 메시아시라며 손가락 끝으로 정확하게 말해준 분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예언자였으면 교회 전례력은 그의 축일을 한번만 지내지 않습니다. 탄생 대축일, 수난 대축일 이렇게 두 번이나 경축합니다. 그만큼 그는 교회 역사 안에서 위대한 인물이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이정표이자 길잡이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인물인 세례자 요한의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겸손한지 모릅니다. 하도 궁금해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군중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 대림시기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바로 겸손의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덕 중의 덕, 모든 덕의 근본인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눈이 밝아져 우리의 죄, 결핍, 상처, 병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덕으로 인해 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내 건너편의 이웃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겸손해야 우리의 이 어쩔 수 없는 한계, 이 비참한 처지를 인식할 능력이 주어집니다. 겸손해야 용기가 생기고, 그로 인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일에 전심전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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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3EPKabq0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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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짜 본성은 낳고 키울 때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당연히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면서까지 제자들을 당신께 보낸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사람 중에서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는 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개 중에 가장 훌륭한 개는 인간 중에 가장 작은 인간보다 귀한 존재일까요? 당연히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 중 가장 작은 이도 개의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며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곧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파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꿀벌이 될까요? 만약 파리가 꿀벌이 되었다면 그 중간에 꿀벌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투머로우랜드’(2015)란 공상 과학 판타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아테나란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주인공 남자는 그 여자아이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아주 먼 미래입니다. 아테나는 시간 여행을 시켜줄 수 있는 여자아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미래로 가는 것은 본성을 바꾸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서 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 태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본성으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의 본성을 가진 이를 태어나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영화 ‘킹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노예 소년이 대장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노력한 결과 그냥 싸움 잘하는 노예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 준 이가 왕이 되자 그의 지위는 그대로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낳는 이의 본성이 왕이면 자신도 그와 대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도 제자들을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게 만들기에 그 본성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한 거지에게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태석 신부는 돌아가셔서도 아이들을 의사로 키워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한 거지를 그리스도로 볼 수 없고 믿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면 의사로 키워낼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본성을 바꿔주는 일입니다. 만약 나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제직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사제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당신과 같은 비천한 종도 하느님을 낳으셨다면 우리도 모두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내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들어 높일 수 있는 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뱀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본성에 머물러 있게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뱀과 그 말을 따르는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인 이는 모두 신이 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마치 난자처럼 정자를 받아들이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믿음을 전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되고 내세에 어디에 살지, 어떤 위치에서 살지가 결정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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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umbrella] 2022-12-10 ㅣNo.159417
산보를 하면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머리, 허리, 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말은 다른데 끝에 말은 모두 ‘리’로 같습니다. 앞의 말은 우리 몸의 특정 부위를 뜻하는 것 같고 뒤의 말은 그냥 붙이는 접미사 같습니다. 비슷한 말로 예수님, 선생님, 임금님, 사장님의 ‘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며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제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접미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마르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우산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는 경우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글에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던 날입니다.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날씨도 흐리고 추웠다고 합니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됐습니다. 그 말이 변형되어서 1957년 국어사전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입니다. 70년에 걸쳐서 4번의 큰 박해가 있었고 만 명 이상이 순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교회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것처럼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은 신앙을 증거했던 ‘성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경기도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해미, 갈매못, 줄무덤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베론 성지가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한티성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신앙을 지켜온 곳들이 성지가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여의도에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집전하였습니다. 30년 후인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광화문에서 124위의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을씨년스러운 날을 광명의 날로 바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삶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하던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 했던 말들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이웃의 비난과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에서 야고보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항상 기도한다면, 언제나 기뻐한다면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찾아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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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오늘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차 있다. 이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 기쁨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가 주는 기쁨이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 환희와 기쁨을 준다고 한다. 이사야는 기쁨을 드러내는 구원의 개념을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트리리라.”(35,6) 표현한다. 구원은 인간 전체가 대상이다. 병은 인간의 신체적인 관계의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을 균형으로 맞게 해주신 것이 예수께서 하신 기적이다. 이것이 구원의 표지이며, 그를 체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하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예언의 기쁨이 복음에서 다시 조명된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다. 요한은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 3,12) 분,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 나약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5-6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보다도 구원자 해방자로서 메시아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한센인, 청각장애인,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가까이하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지만 그보다도 특히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동참과 구원의 행위이다. 이러한 표징들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심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더는 의심할 여지를 가지지 않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찬사를 하신다(7-11절).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구약의 탈출기(23,20)와 말라키서(3,1)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 세례자보다 크다고 하신다.(11절)
요한의 사명은 신랑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기쁨은 불확실성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가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내지 않거나 무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표징의 의미가 약화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때는 바로 은총의 때, 구원의 때이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농부의 개념을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까이 이루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기쁨에 대해 오늘 독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 기쁨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구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가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갖춰 입어야 할 옷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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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홍근표 바오로 신부님]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사회학에서 자선의 의미는 너무나 미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이 신에게 벌 받지 않으려고 하는 적당한 정도의 적선행위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즉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그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음 모색하는 것이라기보다. 단지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 불편함을 없애는 정도의 희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에서 말하는 복지는 너무도 비교할 수 없이 부족한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대림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회학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해결의 복지는 아닐지라도 이 추운 겨울에 어럽게 지내는 가난한 이웃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면서 작게나마 그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음 요청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맥 폴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험을 돕우어라."(이사 35. 3)
긴긴 터널 같은 팬데믹에 갇힌 지 번씨 3년,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아 맥이 폴린 우리들의 삶이 어디 하나 희망을 찾지 못하는 꺾인 무릎에 상처투성입니다. 직접적인 바이러스로 인한 희생자는 물론이고 백신을 맞은 분 중에도 죽음 내지는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는 분들도 주변에 제법 계십니다. 요양원에 모셨던 부모님과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이별을 해야 했던 분들도 적지 않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움은 늘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육 심각해지는 법입니다. 지난해 겨울 영등포 쪽방촌에서만 무려 21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 겨울은 제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어야만 할 텐데 하고 직정이 앞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 2-11)
요셉의원의 선우경식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
다. '진료비가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다. 그의 말대로 진료비가 없어 목습을 잃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각박해도 소문 없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들이 언제나 계십니다. 요셉의원에도 선우경식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 무료 진료 자원봉사 의료진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줄을 이었습니다. 그 수가 무려 월 펑균 100여 명이 넘습니다. 그들을 통해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볼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기도와 자선을 통해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따뜻한 격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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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학배 안젤로 신부님(사회사목국장)]
<주님을 만나는 기적>
"우리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아마도 이 물음에 우리 모두는 자신 있게 "주님'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가장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강생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세례자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감옥 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이렇게 질문한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3)
예수님의 대답은 구구한 설명이 아니셨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 하시며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라고 선포하신다. 주님 강생의 열매는 바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해방임을 가르쳐 주시는 선포이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에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고, 우리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앞 못 보는 이들, 듣지 못하는 이들,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죽음을 앞둔 이들을 통해 그분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있는지, 혹여 이런 고통받는 이들이 오기에 우리 공동체의 벽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지.
우리는 주님을 말씀 안에서 만나고, 미사 안에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그리고 또 가장 미소한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말씀과 성찬이 삶으로 실천되는 기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언제든 찾고 위로받을 수 있는 교회. 그 안에서 아픔과 고통을 치유받고 주님을 만나는 교회, 소외되는 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사랑받는 교회,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교회의 모습은 이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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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됩니다. 마태오 복음 11-12장은 10장의 파견 설교에 이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을 의심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엿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물으시면서 그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가십니다.(루카 7,18ㄴ-23; 7,24-30도 참조)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여기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은 헤로데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는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른 채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대조됩니다(마태 3,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질문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이며 동시에 예언자보다 더 큰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로서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에서 예고된 하느님의 약속을 완성한 인물입니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에서 사용된 일인칭(‘내’, ‘나’)은 마태오 복음 11장 10절,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에서 2인칭(‘네’, ‘너’)으로 수정되었는데, 복음서 저자는 이러한 편집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늘은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대가 한층 커져 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하나로 합쳐지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강론 지침』, 90항 참조)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마태 3,2.7-12 참조)를 귀담아들으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례자 요한은 기쁜 소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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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용하진 실바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선생님이 메시아가 맞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러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던진 질문은 조금 의외이면서도 우리 모습을 대변해주는 거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을 ‘내가 믿고 있는 주님이 과연 나를 구해 주실 분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으로 바꿔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신앙인이더라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구심입니다. 그래서 마치 나를 대신해 예수님께 질문을 해준 듯한 세례자 요한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듭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 답하십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릴 거라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이 말씀은 그러한 세상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기적을 통하여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이들을 살리셨으며, 당시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소외당해서 외롭고 괴로운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절망적 상황에서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바로 희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 교회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냅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풀 수는 없을지라도, 눈멀거나 다리 저는 이들의 눈과 다리가 되어주며,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죽을 듯한 고통 속의 이웃들에게 삶의 희망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선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셨고, 당신처럼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역시 가장 작은 이들에게 다가갈뿐더러 스스로 작은 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닮은 꼴이 되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때,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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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서철승 가롤로 신부님]
<자선은 하느님이 갚아주신다>
옛날 어느 왕이 성탄 전날 밤 거지처럼 변장하고, 동냥 바가지를 든 채 여러 집을 돌며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은 문도 열어주지 않고, 문전박대하였습니다. 어느 집은 기분 좋은 성탄절 이브에 거지가 찾아온 것이 불길하다며 동냥 바가지를 깨뜨리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느 집은 먹을 수 없는 썩은 음식을 주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고, 또한 왕이 거지 행색을 잘 흉내 내는 바람에 왕을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성탄절 저녁 만찬에 이들 모두를 궁궐에 초대하였습니다. 초대를 받은 백성들은 잔뜩 기대하며, 다들 말쑥한 옷을 입고, 궁궐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식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문전박대하며, 문도 열어주지 않았던 가족에게는 빈 접시들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에 불길하다며 동냥 바가지를 깨뜨린 가족에게는 식탁 위에 음식은 없고, 깨진 접시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썩은 음식을 준 집은 곰팡이가 끼고, 변질되어 먹을 수 없는 음식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식탁에는 산해진미로 푸짐하게 잘 차려진 진수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쟁반 위에는 감자 크기의 황금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이 집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젯밤 왕이 방문했을 때 자기들이 너무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다며, 감자 몇 개를 주었던 것입니다.
위 이야기가 신앙의 관점에서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만큼 하느님에게서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토빗 4,7)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빗 4,11)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 19,17)
오늘 대림 제3주일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정한 자선 주일입니다. 1984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제39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선 주일은 국내의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나눔 실천을 강조하는 날입니다.
재물은 똥(?)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으고 모을수록 악취가 나고, 모여진 곳은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돈, 재물이 모여지고 모여진 곳에서 악취가 나는 뉴스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으지 않고, 뿌리고 뿌릴수록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거름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재산을 기부하는 뉴스를 볼 때면, 세상이 훈훈해집니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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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표창연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좋은 일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설령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정당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벌이 과중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을 본다면 참으로 불행했을 사람입니다. 옳은 소리를 한 죄로 감옥에 갇히다니요! 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관심사는 결코 자신의 억울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볼 수 없는 갇힌 몸이었습니다. 그저 찾아오는 제자들로부터 그분의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라고 여쭈었던 그 마음의 간절함을 헤아려봅니다. 그런 요한의 마음을 누구보다 공감하셨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당신이 행하신 일들을 전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는 오래전 선포된 이사야 예언서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마태 11,5;이사 26,19;35,5-6;61,1 참조).
동시에 갇혀 있던 요한에게는 다른 이로부터 ‘전해 들었던 것’이 그분의 ‘말씀’에 의해 확인되고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경고가 아닌, 믿고 바라던 이에게 마침내 전해주시는 축복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떠올리며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ㄴ)
메시아에 앞서 먼저 오기로 된 엘리야로 왔으며, 메시아를 준비한 엘리야로 살았고, 사명을 마친 엘리야로서 하느님께 돌아갔습니다. 다시 오기 위해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예언자는 이제 죽음으로 진리를 증언하며 자신의 사명을 완수합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보다도 먼저 생명을 바치며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순교의 예형이 되어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삶을 온전히 내어드린 이보다 더 큰 인물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덧붙이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ㄷ) 이 또한 요한을 거슬러 하신 말씀이기보다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위대한 예언자적 삶보다 그 예언의 성취인 하늘나라의 삶이 더 크다는 희망의 귀띔이 아니셨을까요?
대림 제3주일, 그분의 탄생에 앞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에 내셨을지 떠올려봅시다. 물론 세상의 가치라는 잣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감옥에 묶인 몸이어도 그를 감옥에 가둔 이보다 더 자유로워했을 세례자 요한의 마음으로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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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 세상을 맘껏 기뻐합시다>
마태오 11,2-11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새 세상을 맘껏 기뻐합시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로, 또 장미주일로 부르기도 합니다. 기쁨 가득할 때 얼굴도 홍조를 띠듯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를 입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는 말씀에 따라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며,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따라 자선, 곧 가짐이 아니라 베풂의 기쁨을 누리자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오심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던 예언자 이사야는 이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 35,10). 또한 제2독서에서 들었던 야고보서의 저자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의 때가 곧 오리라고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야고 5,7-9).
누구보다도 오시는 주님을 갈망하던 사람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요한은 정의를 외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예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온 삶으로 준비하던 주님을 죽기 전에 뵙고픈 마음에 하루하루 초조함에 지쳐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서 요한에게 바로 당신이 오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고 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4).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새 세상이 열렸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곧 예수님께서 활짝 열어젖힌 새 세상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본 것을 전해 들었을 것이고, 주님께서 오셨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한의 기쁨은 곧 우리의 기쁨이어야 하고, 요한의 제자들이 본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기 이 미사 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본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제단 위 커다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봅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하고, 때로는 제 살기 위해서 스스럼없이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되어 버린 이 낡은 세상을, 예수님께서는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심으로써 새 세상으로 만드십니다. 성체와 성혈로 기꺼이 먹히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사람다운 삶을 빼앗기고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들을 못 본 척하고, 모두가 제 배 채우기에 급급하다 못해, 급기야 제 배를 채우려 다른 이들을 잡아먹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먹고 온전히 살라고 성체로 먹히심으로써 새 세상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봅니다. 아무런 차별도 없고, 어떠한 갈림도 없이 오직 순결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향해 한 길을 걷는 형제자매들을 봅니다. 억압과 착취, 불평등과 차별,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살맛 잃은 세상을,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곱게 모으시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형제요 자매로 삼으심으로써 세 세상을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미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새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맘껏 기뻐합시다. 맘껏 즐깁시다. 낡은 세상 한가운데서 새 세상을, 사람 살기 힘든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 사는 세상을, 살맛나지 않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맛나는 세상을 맘껏 누립시다. 그러나 단지 지금여기에 머물지 맙시다. 이 미사 안에서만 머물지 맙시다. 이 성당 안에서만 누리지 맙시다. 우리의 이 기쁨은 단지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져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굳이 척박한 이 세상에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로 오시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다가오는 감격스러운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 노래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작고 약하고 가난한 벗들의 따뜻한 곁이 되어주면서.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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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정말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살고 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잘 준비된 마음 안에 예수님을 낳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의 색깔은 장미색입니다. 오늘 불이 당겨진 대림초도 장미색입니다. 오늘의 이 색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회개의 삶에 충실하여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다짐하게 하는 날입니다. 결코, 지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며 천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 년의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로 바빌론 유배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인들은 오 천리나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고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희망을 잃고 살았습니다.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다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해 페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꽃을 피우고,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넣어주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립니다.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게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제 본디 모습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이러 저러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지 아닌지 궁금하고 한편으로 의심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3,10) 하며 회개의 절박함을 선언했던 요한입니다.
요한은 메시아를“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 3,12), 잘못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병자들을 만나시며 먹고 마시고 하니까 그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기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서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11,5-6)
결국,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말씀이 그대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곧‘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6,47)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해야 합니다. 물론,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은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회복하시는 일을 하셨고, 죄악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셔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방법대로 주어지고,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덜대기도 합니다. 가정의 우환, 자녀의 문제,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사업이 잘 안 풀리고 …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응답이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고’깨어있어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반드시 옵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자기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돌틈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그것을 거두어 가서 기도해 준답니다.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틀에 갇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들어갑니다.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그냥 들어갑니다. 사람만 모자를 씁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실대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많지만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충만함은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지만 꽃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아직도 점집을 들락거리고 철학관을 찾으며 양다리 걸치기를 하시는 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는 것은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으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 주 예수님을 내 입에 맞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기대에 걸맞은 삶으로 기뻐하고 영원히 남을 것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콜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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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사람 몸에 0.2mg(70kg 사람 기준)의 금이 들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금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소, 산소, 수소, 구리, 아연 등이 몸 안에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 몸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리나 아연은 느끼십니까? 단 한 명도 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런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에 어떤 긍정적 요소가 없다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앞서 금, 구리, 아연 등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부정적 요소나 긍정적 요소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냥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잘못된 마음에서는 나오는 것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요소도 차고 넘칩니다. 기쁨, 희망, 사랑, 행복 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적은 긍정적 요소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으며, 세례받으실 때의 사건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도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고쳐 준다는 이야기, 안식일 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세례자 요한의 감옥 생활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지금처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햇빛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감옥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까지 더해지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의심을 지우고 굳게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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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쁨에 관하여>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첫째 독서의 첫 마디가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이고 이어지는 말들도 온통 ‘기쁨’, ‘환호’, ‘환성’ 같은 매우 희망적인 말들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늘 우리도 기쁨에 대해 생각게 되고, 우리의 기쁨은 어떤 기쁨이고 어떤 기쁨이어야 하는지도 생각게 됩니다.
기쁨은 첫째로 소유적 만족감입니다. 갖고 싶었던 컴퓨터를 갖게 되었을 때 기쁘지요.
둘째로 성취적 만족감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추진 중인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기쁩니다.
셋째로 인격적 만족감입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거나 기다리던 손자를 얻었을 때 기쁩니다.
기쁨이 이렇게 몇 가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꿈, 희망,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갖거나 이루거나 만나기까지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 중의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기쁨이 더 크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이 생겼는데 집을 갖는 것이 오랜 꿈이 아니거나 꿈이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갖게 되면 그 기쁨이 오랫동안 고생고생한 끝에 산 것에 비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쁨을 추구합니까?
돈을 얻는 기쁨과 사람을 얻는 기쁨이 있는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구원을 얻는 기쁨과 치유를 얻는 기쁨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병이 낫는 기쁨과 현존 체험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기쁨을?
다른 말로 하면 소유의 기쁨과 성취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성취의 기쁨과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인간 사랑의 기쁨과 하느님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대리 만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만족을 대신하는 만족을 일컫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다가 비만이 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기쁨에도 대리 기쁨이 있습니다.
상위의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위의 기쁨에 주저앉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저앉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성취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천상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 기쁨에 주저앉습니다.
구원의 기쁨 대신에 성취나 치유의 기쁨으로 만족합니다.
구원자가 오시길 기다리지 않고 손자가 오길 기다립니다. 스마트 폰 화면에 성화가 있지 않고 손자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는 기쁨은 인격적이면서도 성취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기쁨이요, 구원자를 만남으로써 원하던 구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사야의 이 예언이 주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됨을 얘기합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보내어 주님이 그 메시아인지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말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께 희망과 사랑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바흐의 칸타타(가톨릭 성가 180번), ‘인간의 희망이요 기쁨이신 예수’ 이 성가를 들어보시길 추천하며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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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예수님이 어느 마을에 나타나셨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본 어떤 자매가 급히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부님, 큰일 났어요. 예수님이 오셨어요! 지금 막 성당 마당에 들어오셨어요.” 본당신부는 깜짝 놀라 주교에게 얼른 전화했습니다. “주교님, 어떡하죠? 예수님이 우리 본당에 오셨는데…” 그러자 주교는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는 교황청에 전화했습니다. 교황청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바쁜 척하시오!”
성 바실리오는 “누가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에 “주님이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매일 매 순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 대림절에 교회는 더욱 간절히 “주님, 어서 오소서!”(마라나 타: 1코린 16,22) 하고 기다림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진정 깨어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일에 바쁘거나 기다리는 시늉만 한 채 무관심으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의 예화는 우스갯소리만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대림 제3주일, 대림 시기 한가운데, 우리는 기쁨과 희망에 초대를 받습니다.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그래서 오늘 주일을 ‘가우데떼(Gaudete) 주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 예언자도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 35,5-6.10).
기쁨은 우리 믿음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느끼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슬픔에 버림받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생활이 험악할 것이며, 하느님이 그에게 하신 모든 일을 보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눈먼 사람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주어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7).
기쁨, 기도, 감사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은, 우리 마음에 주님이 오실 자리를 마련하고자 깨어기다리는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때 이제 하늘은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존재하게 됩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모두 만나는 시간이 바로 성찬례 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바로 그분이, 지금 여기서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참으로 그분을 우리 몸과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모실 때, 우리는 더욱 기뻐하고 더욱 기도하고 더욱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중심에 계시면 나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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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다려라, 만나라-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주여, 오소서. 오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오실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림 촛불 셋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라우다테Laudate’ ‘기뻐하여라’ 주일이자 기쁨의 장미 색깔 제의를 입기에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제39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신앙 실천 행위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실천하며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영원히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기다릴 것도 사라지고 이제 믿는 이들에게는 기다릴 대상은 주님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광야인생, 기다릴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는지요! 이런 주님을 기다림이 없이 무슨 희망으로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산다면 정말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주님을 참으로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필립비서 말씀이 반갑게 떠오릅니다. 그대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에 맞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4,4)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서두 말씀도 온통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막이 상징하는 바 우리들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주님의 영화와 영광이 빛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런 기쁨의 빛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라에 이어지는 두 번째 권고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기쁨은 힘이자 빛입니다. 기쁨의 빛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다음에 “기다려라”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고맙게도 잘 맞습니다. 재림이란 말마디를 적당히 바꿔 전문을 읽어봅니다. 아마도 기다림의 달인은 충실한 농부일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기쁨의 기다림 앞에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원망, 절망, 실망이 사라진 희망과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인내의 기다림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에 이어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라”입니다.
대림시기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는 날마다 이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만남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가톨릭 교회 전례도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가 정화은총이고 성화은총입니다. 영육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과 행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억지로 뺏어 올 수 있는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참으로 믿는 이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한 두 번 만남이 아니라 결정적인 성탄의 만남에 앞서 대림시기 날마다 앞당겨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고마운 것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가 힐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 이르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 온전한 치유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의 치유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이런저런 것들에 매여 참 자유로움도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탄에 앞서 이 은총의 대림시기,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앞당겨 만나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1.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주님을 기다리십시오.
4.주님을 만나십시오.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해야할 구체적 과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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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나도 예수가 되자!>
오늘 복음(마태 11,2-11)에 나오는 이 질문(11,3)은 감옥에 있는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게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1,4.6)
우리는 지금 '메시아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십니다. 그 오심에 좀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면,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에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죽으러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죽으신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참의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대림 제3주일'은 한국천주교회가 정한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 주일은 국내의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자선의 의미'를 담고 있는 '카리타스(Caritas)'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선 주일이 일회적인 나눔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선 주일은 우리 주변에 다양한 이웃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채 외로운 삶을 이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아파하며, 우리의 관심과 연대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날입니다."(2022년 자선주일 담화)
"내가 곧 간다."(묵시 22,7.20)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야고 5,9)
그러니 지체 말고 얼른 바른 길로 돌아서서, 믿는 사람의 참모습을 드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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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IlH3SbSZA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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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오 11, 3)
오실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기다리는 대림의
기쁜 설레임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응답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보고 듣는 사랑을
전하고
나눌 뿐입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의심을 품을 수 없는
행복한 소식입니다.
행복한 만남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광야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오실 분의
길을 닦는 사람은
고운 옷을 걸친
왕궁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느님께서
수련을 시킨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하느님의 겸손을
바라보고
만날 수 없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
기다림의 본질을
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본질은
마음을 닦는 것이며
마음을 닦는 것은
자선(慈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기다림은
충만하여지고
기다림으로
사랑은
깊어갑니다.
사랑으로
오실 분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자선주일입니다.
무엇을 보며
살 것인가보다
무엇을 나누며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복음의 삶입니다.
사람의 희망은
사람이며
사람의 기쁨이
소중한
사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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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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