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 조동범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조동범 투명한 냉동고의 서늘함 속에 꽃잎처럼 피어 있는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천천히 꽃잎을 지우고 있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은 무료하게 손톱을 만진다.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에선 빠른 템포의 음악만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판매원은 자신의 손을 뺨으로 가져간다. 냉동고의 서늘함이 판매원의 뺨 위에서 얼음처럼 부서진다. 냉동고에 손을 넣을 때마다 판매원은 살의를 감지한다. 냉동고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판매원은 생각한다. 마감을 넘긴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밤이 깊어질수록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밝고 서늘하게 차오른다. 사람들은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심야로 흘러간다. 판매원의 좁은 미간이 예리한 주름을 만든다. 냉동고의 모서리에서 은빛 조각이 서늘하게 빛난다.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롭게 심야를 맞고 있는 중이다. 평화롭게 심야가 다가오고,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로운 살의로 가득 찬다. 평화로운 살의를 가로질러 판매원은 냉동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냉동고에서의 죽음. 판매원의 마지막 온기는 수증기가 되어 냉동고의 덮개를 가린다. 판매원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냉동고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서늘하게 누워 있는 판매원은 고요해 보인다. 꺼지지 않은 간판만이 심야를 밝혀주는, 은빛 조각 서늘하게 빛나던 심야 아이스크림 판매점 위로 하현달이 하늘을 가르고 있다. 깊고깊은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2006.3
....................................................................................................................................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도시적 삶과 비극성이다. 도시는 그 모든 풍요로움과 환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전제하는 공간이다. 다만 비극은 아름다운 도시 이미지 뒤로 감춰진 채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도시의 비극에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어느 경우에는 근대성의 비극과 도시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고까지 한다. 자연을 통해 이상적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경우도 도시의 비극과 고통 너머를 꿈꾸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시는 현실의 비극에 응전하는 언어이다. 내 시의 근간은 이러한 도시의 비극에 있다. 일반적으로 시는 ‘지배적인 정황’(dominant impression)을 통해 시적 감각과 국면을 제시한다. ‘지배적인 정황’으로서 비극은 강렬한 시적 국면이 되어 나의 시를 이끈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끔찍함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통해 ‘지배적 정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비극은 다채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며 시적인 국면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역시 도시 속 비극을 내세운다. 화려함과 풍요로운 불빛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단절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차가운 냉동고 속 냉기처럼 차고 서늘하다.
빛이 물러간 도시의 어둠은 공포와 외로움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홀로 전등을 밝히고 있는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공포와 외로움을 극대화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 시는 현실과 환영이 혼재된 지점을 통해 비극을 보여주고자 한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이 냉동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그것이 환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가의 전등이 모두 꺼진 적막한 도심 거리에 홀로 불 밝힌 상점을 본 적 있는가. 그것은 어둠 속 따스함이기도 하지만 어둠과 적막을 강조하는 외로움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던킨도너츠’를 운영한 적이 있다. 이 시의 배경이 된 ‘배스킨라빈스’와 같은 회사의 외식 브랜드다. 벌써 25년 전 일이지만 그때의 노동과 마음고생이 어제인 듯 선명하다. 아침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이어진 노동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매출이 적어 늘 전전긍긍 마음을 졸여야 했다. 유흥가는 늦은 밤까지 북적였지만, 인적 끊긴 새벽의 어둠과 정적에 쓸쓸함을 느끼던 때였다. 매출이 적은 날이면 팔리지 않은 도넛을 창가에 진열하고 새벽까지 손님을 기다리곤 했다. 새벽에 도넛이 팔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캄캄한 거리에 외로이 전등을 밝히고 있는 도넛 매장이 무인도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아무도 그곳에 오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던킨도너츠’를 운영하며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예상보다 일찍 끝을 맺었다. 매출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매장을 접어야 했다.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은 이런 경험에서 나온 작품이다. 시의 배경만 도넛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바뀌었을 뿐이다. 냉동고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시적 화자는 바로 나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의 일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늘 시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쉬는 날도 없이 매장에 묶여 있다 보니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외출이라고 해봐야 인근 마트에 샌드위치 재료를 사러 가는 것이 전부였다.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속 어둠과 비극은 당시에 느꼈던 고립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심에 매번 오르내렸지만 등단은 요원했고 미래는 불안했다. 지난하게 이어갔던 ‘던킨도너츠’는 더 이상 버틸 여력도 비전도 없었기 때문에 열 달 만에 문을 닫았다. 본사에서는 다른 지역 매장을 알아봐 준다고 했지만, 벼랑 끝에 서 있던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두려움이었다. ‘던킨도너츠’를 그만둔 이후에는 대학원에 다니며 시를 썼고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이민을 준비하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2002년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으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게 되었다. 최종심에 너무 많이 언급된 탓일까? 담담하게 당선 연락을 받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나의 시 역시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겠다. 그저 오늘도 쓰고 또 쓸 뿐이다.
―계간 《시인시대》 2024년 가을호, 〈그때 그 시절〉에서
조동범 1970년 안양 출생. 2002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외 평론과 산문집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