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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미국에서 돌아와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인턴을 시작한 해 4월,
안양중앙병원에 파견을 나가있었슴다..
아내는 임신중이었는데 임신 5개월에 자궁 가운데에 비정상적인 벽이 놓여있어 (Septated Uterus)
아이가 오른쪽 한쪽에서만 자라고 있는 것을 초음파로 확인할 수 있었슴다.
그러던 어느날, 임신8개월 반이 되었을 때
아내는 진통을 느꼈슴다.
내게 전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걸,
늘 '참는' 아내는 다니던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외래에 접수하고
무려 2시간 가까이를 진통을 참으며 기다리다가 진료를 받았었슴다.
진료를 본 박모 교수는 임신34주에 진통일 리가 없다며 돌려보냈슴다.
Septated Uterus라는 진단명을 아예 놓친 것이었죠.
집에 도착한 아내는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는데,
가자마자 탯줄(제대)이 빠져나오는 제대탈출이 생겼슴다.
태아는 폐로 숨쉬지 않고 탯줄을 통해 영양공급을 받기 때문에
제대는 아이의 생명줄임다..
따라서 제대탈출은 아이의 목을 조르는 것과 동일한 상황이져...
초응급상황이었슴다...
탯줄이 빠져나온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마침 낮시간인데도 집에 계셨던 아버님께서 차에 태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가셨슴다.
또 때마침 소아과 레지던트를 하는 제 친구가
아내를 알아보고 응급상황을 파악한 후 산부인과에 곧바로 연락해서
응급수술을 들어가게 되었슴다.
저는, 산부인과 레지던트가 수술에 들어가면서
전화로 수술 동의를 받는다면서 전화를 해와서 상황을 알게 되었슴다.
안양중앙병원에서 신촌까지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선을 넘어가면서 30여분만에 도착했슴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아내는 고운 얼굴로 누워있었슴다.
가슴이 뭉클했슴다..
제왕절개술 마무리를 하고 있던 동기 레지던트의 얼굴 표정은 매우 무거웠슴다.
그가 말하길, 응급실에 도착할 때에는 아이의 심장이 뛰고 있어서 응급수술을 진행했는데
수술실에 도착해서 태아심박동을 체크했더니 이미 심장마비가 와 있었고,
급히 꺼내긴 했는데 아이가 숨도 안쉬고 심박동도 없어서 교수가 Still birth(사산)처리를 하고 나갔다는 것임다.
그런데 약 5분 후에 사망선고를 받은 아기를 치우러 온 간호사가
죽었다는 아기가 간간이 숨을 쉬는 것 같다고 하여 체크를 해보니 심박동이 있어
그 때 부랴부랴 인공호흡을 하여 일단 살려놨는데, 기대는 하지 말라는 얘기였슴다.
신생아실로 달려갔더니,
한 줌도 안되는 새카만 아이(1.7kg)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제대에 주사를 꽂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슴다.
하지만, 한 눈에도 '내 아들'임이 느껴졌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핏줄'에 대한 본능적인 느낌이었슴다.
그 때부터 한 달은 악몽이었슴다.
응급수술로 인해 제대로 소독도 하지 못하고 수술을 받은 아내는 상처와 전신에 감염이 생겨
하루 30번 넘게 설사를 하며 고열에 탈진상태에 빠져 3주간을 사경을 헤매었슴다.
그러는 중에도 아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더군여... 두려워서였을 것임다...
저도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았슴다...
저는 한달간 낮에는 안영병원 파견근무, 밤에는 신촌에서 밤을 새며 병간호를 하는 초인적 체력을 발휘했었슴다...
소아과에서는 계속 저더러 아이의 치료를 포기하라고 하였슴다.
아이가 출산 당시 심장마비로 인해 이미 뇌손상을 많이 받았고,
이후 뇌출혈이 심해 뇌손상이 더 커져서 "살 확률도 1%도 안되고 설사 산다고 해도 뇌성마비가 될 확률이 99%다"라는 것이었슴다.
게다가 뇌출혈이 주로 후두엽(보는 것을 담당) 쪽이어서 앞을 보지도 못할 것이라고 하였슴다.
3주가 지났을 때, 저는 결국 소아과 레지던트인 친구에게 '포기하겠다'고 하였슴다.
그 때는 아내가 비로소 걸음을 뗄 수 있었을 때였는데, 치료 포기 직전에 아내에게 아이에 대해 얘기를 했슴다.
아내와 함께 서서 아이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기억이 남다...
소아과 의사들은 곧바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슴다.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았슴다.
숨이 멎을 듯 하면서도 죽지 않고 계속 숨을 쉬었슴다.
그렇게 며칠이 갔슴다.
소아과 의사들은 이제 산소를 제거하자고 하였슴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산소를 끊었슴다.
산소공급이 중단되자, 아이는 더욱 까맣게 변했슴다.
동맥의 산소농도를 알려주는 동맥혈산소포화도는 이미 정맥 수준이었슴다.
살아있다는 것도, 숨을 쉰다는 것도 모두 기적이었슴다.
아이는 곧 숨을 멎을 것 같으면서도 힘겹게 숨을 이어갔슴다.
그렇게 또 며칠이 갔슴다...
일주일이 지나고, 소아과 의사들은 제게 또다른 제안을 종용했슴다.
아이가 죽지 않으니, 주사를 끊어야겠는데
병원에서 주사를 끊을 수는 없다.. 집에 데려가라..
주사를 끊으면 곧 숨이 멎을 것이다...
그들의 냉혹함과 잔인함에 놀랐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고, 제 선배들이자 스승인 그들의 말을,
아이보다 저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그들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슴다.
결국 생후 4주에 아이는 손자를 하늘나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에 넘겨져 집으로 보내졌슴다.
저는 파견근무 중이었고, 아내는 요양을 위해 처가로 가서
할아버지 할머나 두 분이 계신 집으로 간 것임다.
곧 숨이 멎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아이는 티스푼으로 떠주는 보리차를 받아먹기 시작했슴다.
살 것이라는 희망은 1%도 가지지 않고 있었는데,
보리차를 넘기는 아이를 보며 제 부모님은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가지기 시작했슴다.
그러나 제게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슴다.
약 보름 후,
부모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의 신도들이 심방을 와서 기도하고 돌아갔슴다.
두 분이 배웅을 하고 현관으로 들어서시는 순간,
두 분은 귀를 의심케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슴다.
생후 첫 울음소리였슴다.
이때부터 아이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슴다.
성은(聖恩)..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된 아이의 이름임다...
저도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슴다.
그러나, 그로부터 또 2주 후 고열이 나서 세브란스병원을 찾게 되었슴다.
폐렴이었슴다. 다시 신생아실에 입원하였슴다.
그러나 소아과 의사들은 반기지 않았슴다.
그리고 뇌CT를 다시 찍어보자고 하였슴다.
그 결과, 뇌출혈은 거의 흡수되었는데, 새로운 뇌경색이 크게 생긴 것을 알게되었슴다.
소아과 의사들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슴다.
일주일간 치료를 받았지만, 무성의로 일관한 그들의 태도에 저는 아이를 데리고 나왔슴다.
몸을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눈물겨운 인고의 시간은
이 때부터 시작됨다...
하루 평균 18시간을 자는 다른 신생아와는 달리, 성은이는 하루 수면시간이 6시간이 채 안되었슴다.
그리고, 한 번에 평균 80cc의 우류를 먹는 신생아와는 달리 성은이는 5cc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슴다.
따라서 하루에 수십번을 먹여주어야 했슴다.
아내는 하루 한 두 시간 밖에 잘 수 없었슴다. 그것도 조각잠으로...
아이는 점차 양이 늘었지만, 백일이 될 때 까지도 한 번에 먹는 우유량은 20cc 남짓이었슴다.
그 때 수유기록수첩을 아내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슴다.
백일이 거의 다 되어서야,
어두운 방의 불을 켜자 깜짝 놀라는 성은이를 보고서, 비로소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슴다.
그 순간의 기쁨은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였슴다.
백일이 되어 백일잔치를 했지만, 아이는 앉는 것은 커녕 뇌수종으로 큰 머리와 눈을 아래로 뜨고
전신황달로 노란 눈과 새카만 피부를 가지고 있는 외계인 같았슴다.
그러나, 그래도 예쁜 아들이었슴다.
16개월이 되어 아이는 비로소 걸을 수 있었고,
복합사시로 눈 수술을 세 번 받았지만 정상적인 아이로 커나갔슴다.
그러나 뇌손상을 워낙 많이 받았던 터라
정상적인 학습능력은 기대하지 않았슴다.
그래서 한 번도 '공부해라'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었슴다...
초등학교시절, 심한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e Disorder 과잉행동학습장애)로 인해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교실에 20분 이상 앉아있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
아내가 그 학교의 교사로 들어가는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몸이 건강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저와 아내는 만족했슴다.
아이는 밝게 커나갔지만,
저조한 성적으로 인해 점차 열등의식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는 것을
저는 몰랐었슴다.
중학교 입학 후, 80kg으로 비대해진 아들을 보고 나서야
저의 실수를 알게 되었슴다.
이후 아들은 아이스하키를 하게 되었슴다.
공부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도 있었고, 비만으로 건강을 잃을까봐
적극적으로 시켰슴다.
고1때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입기 전까지 아들은 약 3년을 아이스하키에 매진했슴다.
아내는 더욱 열성적으로 아들을 지원했슴다.
그런데 경기도중 퍽에 맞은 선수가 사망하는 일이 생겼슴다.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부상을 당한 아들은
쉬는 동안 두달만에 20킬로 이상 몸이 불었슴다.
위험한 운동을 더 이상 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캐나다로 보내게 되었슴다.
이후 4년이 흘렀슴다.
아들은, 힘겨운 노력으로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슴다.
동기들은 대학 3학년에 올라가는 해임다.. 2년이 늦었슴다.
그러나, 피아노/베이스기타/드럼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교회찬양대에서 봉사하고
누구나와 밝은 모습으로 잘 어울리고,
학교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Presentation을 멋지게 하는 아들의 소식을 들으면
너무나 감사하고 또 감사함다...
그저께 캐나다에 있는 아들에서 전화가 왔슴다.
Ryerson대학 국제경제학과에 합격했다고...
너무나 기뻤슴다. 지난 시간들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듬다...
그런데 어제 아내로부터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슴다.
York대학에 세개 학과에 지원했는데, 모두 합격했다고...
이제 Toronto대학의 결과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슴다.
대학에 한 곳에만 합격해도 과분한 감사일텐데,
대학을 골라서 가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슴다.
I am은 알았어도 I was를 모르고 캐나다에 갔다는 아들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이 정말로 대견함다.
정말 해 준 것 없는 아빠 밑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고등학교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된 아들이 자랑스럽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수업시간을 하루에 몇 시간씩 견디며 앉아있다 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슴다.
살아가는 목적,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또 받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함다.
아들이 이룬 작은 기적,
우리 가족에게는 결코 작은 기적이 아님다.
아들은,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생각을,
못해낼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보기 좋게 뒤집어 버렸슴다.
아들이 이룬 작은 기적이 희망이 필요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함다.
긴 글 읽어주셨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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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일이 있었구나, 어려운날은 간다고 지금의 행복을 만껏 누려..
가슴 찡한 글이네요.. 예전 사진으로만 봤을때는 건장한 모습에 이런 일이 있었으리라 전혀 예측할수도 없군요.. 멋진 아드님께 화이팅 입니다^^
그런일이 있었군요~~꼭 닮았읍니다
아~~~~ 가슴이~~~~~ 앞으로는 좋은 일만 충만하실 겁니다....^^
푸대형, 오늘 아침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형님 !!!!!!!!!!!!!!!!!!!!!!!!!
감동적인 글과 사연...제아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