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에 대학가요제가 MBC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에 민청학련사건을 고문수사로 180명을 구속시키면서 대학생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절실했다.
이에 맞아 떨어진 우민화 정책이 대학가요제였다. 그 다음해 ‘대마초 파동’으로 대마초를 흡입한 가수 신중현, 조용필 등을 구속시켰다. 이로 인해 기성 가요계는 초토화됐다.
6.25 전쟁 이후 미군부대가 남한에 주둔하면서 미군이 갖고 들어온 LP판을 불법 복제한 빽판을 들으며 자란 학생들의 음악수준은 높았다. 이 수준이 대학가요제에서 샌드 페블즈 ‘나 어떡해’, 블랙 테트라 ‘구름과 나’ 그리고 활주로의 ‘탈춤’ 노래로 발현됐다.
컬러TV를 수출하던 1977년에 개최된 제1회 MBC 대학가요제는 흑백TV로 방영됐다. 북한은 1974년에 컬러TV를 보급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다양한 색깔(자유로운 표현)의 컬러보다는 두 가지 색깔, 흑백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가두고 통제하려 했기에 컬러TV 보급을 늦추고 있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국민통제에 문화적 자유를 억압당하던 대학생들이 허락된 공간(대학 가요제)에서 발산한 노래들은 그 스펙트럼이 넓게 퍼져나갔다.
제1회 MBC대학가요제에는 창작곡 뿐만 아니라 기성가요도 부를 수 있었다. 혜은이가 불렀던 노래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갖고 성신여대 학생들이 참가했고 충남대 학생 이명우는 이스라엘 민요에 고려가요 가시리와 청산별곡을 짬뽕시킨 노래로 은상을 받기도 했다.
제2회 MBC대학가요제에서 명지대생 심민경이 피아노를 치면서 기성 트롯가수를 뛰어넘는 창법으로 ‘그 때 그 사람’을 발표했는데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당한 현장에 있었던 여자 대학생 가수가 바로 심민경이다. 훗날 이름을 심수봉으로 개명하고 기성가수로 데뷔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의 들국화 밴드에서 기타를 쳤던 조덕환도 제2회 대학가요제 출신인데 관악기가 포함된 브라스 밴드 코리아 스톤(고인돌)의 리더로 입상을 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아마추어의 서툰 연주가 아닌 프로페셔널한 밴드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제4회 MBC대학가요제에 ‘마그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마그마독집앨범
연주에 자신감이 넘쳐 키보드 건반악기를 쓰지 않는 3인조 연세대 밴드 마그마는 조하문이 베이스를 치면서 노래를 했지만 이 밴드에서 주목해야할 사람은 기타리스트 김광현이다. 김광현은 해외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하드록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마그마 독집앨범에 수록된 노래 ‘알 수 없소’ 의 헤비한 기타리프를 듣고 있으면 김광현을 당대 대학가 최고의 기타리스트라 칭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 마그마의 '알수없어'
이 음반은 현재 1백만원에 호가되는데 그 합당한 가격의 노래들이 담겨있다.
한양대학교 학생 정오차의 ‘바윗돌’이 1981년 제5회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지만 이 노래는 곧바로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 정오차의 '바윗돌'
굴러 굴러 굴러라 / 굴러라 바윗돌 / 저 하늘 끝에서 / 세상 웃어보자/ 바윗돌
- 바윗돌 노래 가사 중에서 -
단순 반복되는 멜로디에 평범한 노래가사 ‘바윗돌’은 정오차가 대상 수상 직후 ‘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에 살해당한 자기 친구를 기리며 만든 노래’라고 신문 인터뷰한 게 금지곡 사유였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중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게 광주 이야기는 금기였다.
박정희 정권 때 연포 해수욕장에서 개최되었던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서 심사위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노래가 있었다.
예선에서는 악보(가사포함) 제출없이 TBC 라디오 PD들이 참가자들의 노래를 듣고 당락여부를 결정했다. 이렇게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들 중에서 본선 심사위원들을 긴장하게 만든 노래는 중앙대 스쿨밴드 블루 드래곤의 ‘내 단하나의 소원’ 이었다. 아래 가사를 읽어보면 참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 블루 드래곤의 '내 단 하나의 소원'
‘내 단 하나의 소원/ 난 화려한 깃발도 소용없어/ 훌륭한 집도 필요없어/ 내 베게 밑에서 슬퍼할 자는 아무도 없고/ 마른 잎 위를 스쳐가는 가을바람 소리 뿐/
- ‘내 단 하나의 소원’ 노래 가사 中에서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던 독재정권 시절에 화려한 깃발도, 훌륭한 집도 필요없다는 가사에 연포해수욕장에서 본선 심사를 하던 심사위원들은 뭔가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지례 짐작했다. 삶을 억지로 꾸미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아가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담은 이 곡은 가까스로 본선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전혀 난해하지도 않은 노래가사를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해석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 심사평을 보면 “멤버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연주 중간 중간에 박자를 놓쳤다”고 했지만 추후 레코딩되어 발매된 음반을 들어보면 좋은 시 한편을 읽은 후 여운이 남는 느낌이다.
차분한 보컬이 돋보인 이 노래를 작사·작곡하고 부른 이가 김성호라는 학생이다. 그가 이끌었던 블루 드래곤도 활주로, 피버스, 블랙 테트라처럼 자신들의 독집앨범을 내려했지만 하드록 사운드를 구사하는 밴드가 아니었기에 음반 제작사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 블루드래곤 옴니버스 앨범
발라드한 노래가 먹히지 않던 그 시절, 블루 드래곤은 인기듀엣 ‘유심초’의 힘을 입어 옴니버스 음반을 가까스로 제작한다. 가수 하나로는 안 팔릴 거 같아서 음반 Side A, Side B에 각각 다른 가수들의 노래가 실려있는 옴니버스 음반은 일명 반쪽짜리 음반이다.
여기에 총 아홉 곡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이 중에 여섯 곡이 유심초 노래고 나머지는 블루 드래곤 자작곡이다. 이 음반 최고의 백미는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표현한 김소월의 7.5조 운율의 시 ‘눈물을 흘리지 말어’에 김성호가 멜로디를 입힌 노래다.
‘내 단 하나의 소원’처럼 ‘눈물을 흘리지 말어’도 노래가 끝날 무렵 베이스 기타음과 키보드가 서로를 어루만지듯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조용히 사라져준다.
김성호는 학교 졸업 후, ‘김성호의 회상’, ‘웃는 여자는 다 이뻐’ 등을 발표하며 스쿨밴드 시절부터 표현한 ‘여운의 미학‘이 나타나는 곡들을 선보였다.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서 ‘바람과 구름’을 불러 장려상을 받은 장남들의 연주를 지켜본 연포해수욕장 나이트클럽 사장이 장남들에게 나이트클럽 밴드 아르바이트를 제안할 정도로 이들은 뛰어난 라이브 실력을 갖췄다. 멤버들 모두가 장남들인 ‘장남들’의 그룹명을 본 따서 보성고등학교에서 ‘막내들’이라는 유사(?) 그룹사운드가 결성되기도 했다.
TBC 해변가요제는 1978년에 제2회 젊은이의 가요제로 타이틀을 변경하고 대상은 경기대생 한승기가 부른 ‘탑돌이’가 받았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사람은 한국에서 최초로 바블껌 사운드 ‘연가’의 가수 이규대인데 대마초로 인해 그는 활동정지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 이름 대신 부인 이름을 작사/작곡가로 표기했다.
195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 매카시 선풍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트럼보가 본인 명의로 영화대본을 쓰지 못하고 영화 ‘로마의 휴일’을 가명으로 작성한 것과 그 맥락이 같다.
제2회 젊은이 가요제에서 작사/작곡자 이름이 바뀐 노래가 또 하나 있다. 한양대학교 스쿨밴드 큰 별이 부른 ‘바닷가에서’인데 가요제 방송 직후 이수만(현 SM 기획사 회장)이 큰 별 멤버들을 찾아와서 “어떻게 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베낄 수 있냐?”고 호통을 쳤다.
이에 큰별 멤버들이 생각해보니 어느 날, 우연히 이수만이 라이브로 부른 이 노래를 듣고 노래가사를 붙여 자신들의 자작곡으로 젊은이 가요제에 참가한 거였다. 귀신에 홀려서 그랬다는 궁색한 변명에 표절이 100퍼센트였지만 발매되는 음반에 작사/작곡 이수만으로 적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대학가요제 양대 산맥인 'TBC 젊은이의 가요제'는 1980년에는 개최되지 못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TBC 동양방송국 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1980년 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생 김태훈은 신군부 계엄군에 의해 집단발포와 학살이 벌어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 대학도서관 난간에서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며 투신자살 한다. 그리고 1981년 8월, 단군 이래 최대의 놀자 판 행사라는 국풍(國風) 81이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한국판 괴벨스'로 불린 허문도가 기획한 '국풍81' - 일본의 군국주의 상징인 가미카제 특공대, 신풍(神風)에서 그 어원을 따왔다는 설이 있음 - 대학가요제 부문 2위는 ‘바람이려오’(서울예전 이용), 1위는 ‘학’이라는 노래를 부른 서울대 그룹사운드 갤럭시였다.
“화사한 두 날개 너울거리며 허공을 가르네/ 나 이제 포근한 자연의 품에 안겨서/이제 맑은 물 마시며/ 맑은 달 보며 살겠네”
- 갤럭시 노래 ‘학’ 가사 中에서 -
이용이 부른 ‘바람이려오’는 대중들의 애창곡이 되었지만 1위 노래 ‘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는 ‘학’을 아트한 노래라고 하지만 그건 듣기 나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노래가 1위로 등극했을까? 전두환 신군부 입장에서는 서울대학생들도 전두환 정권 창출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상징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풍81에서 대상을 받은 갤럭시는 그해 10월 서울대학교 축제 때 학생회관 라운지 2층에서 공연을 하려 했다. 그런데 ‘향락축제 거부투쟁’을 벌이던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이 갤럭시 공연 무대 앞에 대거포진해서 ‘애국가부터 시작하라’고 외쳤다.
갤럭시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평소 연주해보지 않은 애국가를 제대로 치지 못하자 학생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공연무대를 부수기 시작했다. 서울대 김태훈 학생이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면서 목숨을 던진 교정에서 전두환이 만든 국풍81의 대상곡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연예기획사들이 키울 가수들의 등용문으로 대학가요제가 변질되면서 심사위원들은 댄스풍의 노래들에게 상을 몰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가요제는 젊은이다운 참신함과 진취성을 잃어버리고 대학생(대중)과 유리된 저들만의 가요제로 전락하고 만다.
군부독재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대학가요제였지만 결과론적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 스쿨밴드(그룹사운드) 르네상스기를 만들었다.
‘딴따라’라는 비아냥거림,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연습실(자기 집)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헤비메탈, 재즈록, 프로그레시브록 등의 노래를 창조해낸 스쿨밴드들의 음악적 열정과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글: 셀수스협동조합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