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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스님 수행기 (1)
“36번 국도 변에 차세대 선지식들이 모여 있다.”
선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36번 국도는 서해안 대천항에서 시작하여 청주를 거쳐 충주에서 소백산맥을 가로지르고, 영주, 봉화를 지나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 울진으로 이어진 도로입니다. 이 근처에 근래 이름 높은 스님들로는 봉화 각화사 고우 스님, 봉화 축서사 무여 스님, 영주 부석사 근일 스님, 그리고 충주 석종사 혜국 스님 등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모두 앞으로 조계종의 선풍을 이어갈 분들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법회와 설법』에서는 두 분은 이미 소개해 드렸으나 두 분은 아직 모시지 못했는데 두 분 다 서로를 추천하시면서 사양하셨습니다. 혜국 스님과는 몇 년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여러 차례 찾아뵙고 후학을 위한 일이니 응락하여 주십사 간청드렸으나 거듭 거절하시다가 이번 여름에야 애처롭게 보신 듯 자비심으로 응해 주셨습니다.
혜국(慧國) 스님께서 계시는 충주 석종사는 10년 전만 해도 폐사지였던 곳을 3년 전부터 본격적인 불사에 들어가 지금은 중부권에 우뚝한 도량으로 중창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여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습니다. 젊은 수좌 시절 해인사 장경각에서 발심으로 소지(燒指) 공양을 하신 이래 태백산 도솔암에서 수년간 장좌불와 정진을 하였고, 이후 해인사, 상원사, 송광사, 칠불암,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며 일생을 수행의 본분사에 매진하여 왔습니다. 10·27법난 직후 잠시 제주도 관음사 주지 소임을 6개월 정도 살았으나 곧 다시 산중으로 돌아가 정진하였고, 1980년 후반에 제주도에 남국선원을 개원하여 무문관까지 운영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한반도의 중심인 중원 땅 충주에 10만평 도량의 대작불사를 하고 계십니다. 석종사는 충주 동남쪽의 금봉산을 배산으로 한 남향 도량으로, 무척 장엄하였습니다. 대웅전은 이미 낙성하여 지난 5월에 점안식을 하였고, 지금은 선방과 시민선방을 짓고 있습니다. 조만간 선원 불사까지 회향되면 석종사는 충주 일대에 가장 큰 규모의 도량이자 선풍을 떨칠 또 하나의 이름 있는 선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스님, 후학들을 위해 출가 인연을 좀 들려 주십시오.
그런 게 뭐 도움이 되나요. ...... 나의 6촌 형님이 스님이셨어요.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어떤 충격을 받아 절로 가게 되었는데 그 스님께서 제 부모님을 설득해서 저를 해인사로 보냈어요. 그 때는 성철 큰스님은 해인사 들어가시기 전이고 청담 스님이 주지였을 때죠. 해인사에 가니까 워낙 어려서 그런지 노스님들께서 친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셔서 더 오래 있게 되었지요.
1962년이었습니다. 그 때는 가야에서 해인사로 올라가는 차가 없었어요. 걸어서 다녔지요. 그리고 해인사에 전기가 안 들어 왔을 때예요. 내가 간 다음에 자체 발전기를 가동해서 아침저녁 밥 먹을 때만 잠깐씩 썼지요.
내가 출가하여 해인사로 간 것은 큰 발심을 해서 간 것이 아니었어요. 중학생이 될 열세 살짜리 콩만한 것이 무엇을 알았겠어요. 그런데 해인사 가니까 그렇게 좋았어요.
- 그럼 중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출가하여 해인사로 오셨군요?
나는 중학교도 못 다니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아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갔어요. 중학교는 처음 입학시험 보던 날하고 합격자 발표하는 날, 그 때 밟아 보고 건너 뛰었지요. 하루도 못 다닌 거지요. 그런 얘기는 쓸데없는 얘기예요.
- 그러면 해인사 큰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신 겁니까? 해인사 행자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1962년 종단 정화 직후네요.
그렇지요. 해인사에서 열세 살부터 행자 생활을 한 거지요. 절에서 어른 스님들이 저를 그렇게 귀여워해 주셨어요. 특히 지월 스님같은 자비보살이 계시어 감화를 받았지요. 그 은덕이 큽니다.
내 사형이신 혜인 스님이 제주도 분이세요. 그 인연으로 일타 스님을 은사로 모시면 좋다고 권해서 찾아뵙고 스님 상좌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좋다고 그러시면서 기꺼이 받아 주시대요.
은사 일타 스님 이야기
- 은사이신 일타 스님(日陀, 1919~1999)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속가의 아버님을 포함한 가족, 일가 친척 40여 분이 모두 출가한 진기록을 남긴 분이신데, 참 인정이 많으신 자비로운 스님이셨죠. 은사 스님의 일가 친척이 출가하신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지요. 이분이 어느 정도 인정이 많으냐 하면 이건 관계없는 얘기인지 몰라도 기록해 두면 좋지요. 내가 송광사 3년 결사를 끝내고 성철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은사 스님이 계시는 지족암에 갔더니 “혜국 수좌, 좀 앉아 보지” 해서 앉으니까 “자네는 3년 한다고 하면 3년을 마치는데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강단이 있을 수 있는가? 이제 3년 결사를 했으니 이번 해제 때는 두 달만 나의 문지기 노릇 좀 해 줘. 누가 찾아오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내보내 줄 수 있겠는가?” 그러세요. 그래서 “스님, 그것은 제가 자신이 있습니다”하고 말씀 드렸죠. “그럼 내가 이제부터 2달간 묵언을 할 거야. 내가 묵언할 테니까 자네가 문을 지키며 밑으로 내려가지도 말고 위에서 나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나도 3년 결사를 해서 두 달 쉬고 싶었고 스님도 모시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서울하고 부산에서 가까운 신도 일곱 분이 스님을 뵈러 지족암에 왔어요. 스님이 6일째 묵언하고 계셨는데 나는 스님이 묵언 정진 중이니까 뵐 수 없다고 그냥 가라고 했지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보살님이 자기가 새벽 3시에 출발해서 왔는데 얼굴이라도 뵙고 가야지 안 된다고 막무가내였어요. 내가 성질이 좀 급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전권을 위임받았으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보살들이 말이 많냐”고 고함을 질러 쫓아 보내 버렸어요. 그런데 스님이 문을 열더니 그 광경을 보셨어요. 그리고는 점심을 차려 먹는데 안 드시는 거예요. “스님! 점심 안 드시겠습니까?”하고 내가 물으니 “그렇게 신도들 마음 아프게 해 놓고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 그러시더라고요. 남 아프게 해 놓고 당신이 밥을 못 먹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섰으니까 “어떻게 수행자가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느냐, 전화라도 해서 마음을 풀어줄 생각은 안 하고 그렇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할 수 없이 스님 당신이 절대 안 된다고 빼 놓은 전화 코드를 꽂아서 보살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분이 “스님! 오히려 신심이 나고 기분이 좋고 환희심이 났습니다” 그러셔요. 그래서 “보소, 우리 스님한테 그 말씀 좀 해 주소” 하고는 스님께 “전화를 바꿔 달라는데요” 하니 거기에서 뭐라고 하는지 스님 얼굴이 확 펴져요. 전화를 끊고는 “혜국이 희한한 재주가 있네. 기분이 억수로 좋단다. 밥 차려라.” 그러신 분이에요.
은사 스님이 혜국 스님을 당신 은사가 환생한 분으로 믿은 이야기
- 은사 스님께서 스님을 당신 은사였던 고경 스님의 후생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그 전에 은사께서 “저 아이는 우리 스님을 닮았어, 우리 스님을 닮았어” 그런 얘기를 들어도 나는 귀넘어 듣고 은사 스님께서 그냥 하신 말씀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1970년이였을 거예요. 당시 해인사 선방이 극락전이었어요. 은사 스님께서 극락전 선방에서 결사를 하고 계셨는데 성철 큰스님께서 나하고 11명 정도 뽑아서 퇴설당에 철조망을 치고 몇 년 나가지 말고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자 다 도망가고 결국 나 혼자 남았어요. 그 때는 성철 스님이 백련암에 안 계시고 큰절에 내려와 계셨어요. 그랬는데 퇴설당에 혼자 앉았으니까 책을 보고 싶어요. 그것도 법화경을 보고 싶었어요. 그 때가 봄이었는데 장경각에 가서 절하다가 와서 앉아서 정진을 하는데 졸음은 쏟아지고 화두가 안 들려요. 그래서 성철 스님은 어렵고 우리 은사 스님한테나 물어 봐야지 하다가 억지로 며칠을 어째어째 하는데 ‘아이고, 은사 스님도 성철 스님도 몰래 어디 가서 뒷방에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경이나 실컷 봤으면…...’ 하는 망상을 폈어요.
그렇게 망상을 펴면서 앉아서 졸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서 노장님 한 분이 앞으로 툭 튀어 나오더라고요. 졸면 망상이 오거든요. 망상과 졸음은 같이 와요. 꾸벅꾸벅 조는데 튀어나와 앉더니 “내가 어디서 너를 봤지?” 하셔요. 근데 우리 노스님 진영에서 보았던 모습이에요. 그러시더니 옛날 끈으로 묶은 누런 금빛 나는 뚜껑을 한 법화경 한 권을 탁 내 앞에 내놓으면서 “전생에도 글을 안 보고 참선을 한다고 원을 세우더니 익혀 놓은 게 그것 밖에 없어서....... 책이나 봐라, 강사나 되거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찌나 서릿발 같던지 그 때 눈을 번쩍 떴는데 한동안 눈 앞에 책이 있더라고요. 누런 뚜껑인데...…. 나도 모르게 ‘우리 노스님이다’ 그리고는 그 길로 은사 스님께 쫓아갔어요. 극락전 선방에 가서 “스님! 우리 노스님이 쓰던 법화경 좀 주십시오.” “왜?” “스님, 죄송하지만 한번만 꺼내 주십시오.” 내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노장님이 책장에서 꺼내 주시며 “이거다” 하셨습니다. “스님, 이건 아닙니다.” “왜?” “이거 말고요. 책은 이것인지 몰라도 누런 뚜껑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이렇게 쳐다 봐요. 쳐다 보시더니 “별일 다 있네…….” “스님, 왜요?” “내가 누워서 이 책을 보다가 졸아서 촛불 때문에 파란 뚜껑으로 바꾼 것은 이 세상 천지에 나 하나 밖에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누런 뚜껑을 아느냐?” “스님, 알겠습니다. 저 갑니다.” 그러고는 그냥 바로 와 버렸어요. 어쩌면 노스님인지 모른다 싶고 그런데 다른 말은 안 들리고 그렇게 책 안 보고 참선한다고 원을 세우셨다는 얘기를 우리 스님한테 들었거든요. “내가 죽으면 바다 건너 태어나서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참선만 할 거다” 라고 돌아가실 때 우리 노스님이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노스님 이야기
- 노스님께서 강사 출신으로 입적하실 때 다음 생에 태어나면 참선만 할 거라고 말씀하셨다고요?
강사 정도가 아니라 경봉 스님, 구하 스님, 월하 스님 전부 그분 밑에서 배웠다지요. 우리나라 제일 강사로 통도사 스님이셨죠. 일제시대에 통도사 주지를 하라고 하니까 걸망지고 차기 주지가 나올 때까지 토굴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법전 임고경 스님인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동원 스님인가 하는 상좌가 “스님, 경만 보실 겁니까?”하고 억지로 금강산 마하연 선방으로 모시고 갔는데, 갔다 오자마자 “내가 이제부터 책을 보나 봐라. 이놈의 ‘강사(講師)’ 얼어죽을 강(?)자다” 그러면서 선방에만 다닌다고 하셨는데 머리가 아파 누우셨대요. 우리 스님이 충청도 공주 분이라서 “충공아!”하고 불렀다는데 조금만 머리가 나아지면 “충공아, 내가 이번에 다시 회복만 해 봐라. 금강산에 올라가서 면벽관심으로 일평생을 보내리라” 하셨대요. 그런데 결국 못 일어나고 돌아가시게 되니까 “야야, 나는 찾아오는 사람들이랑 이름 때문에 공부를 못했으니 다음 생에는 물 건너 아무도 모르는 곳에 태어나서 진짜로 참선만 할거다” 하고 돌아가셨대요. 그런데 이게 우연의 일치지만 그분이 8월 13일에 태어나셨는데, 나도 8월 13일이에요. 그분 돌아가시고 1년인가 뒤에 제가 태어났지요.
제가 은사 스님 가시고 난 후, 몇 달을 정신을 못 차렸어요. 제가 은사가 가고 나서 우는 스님들을 보면 늘 그랬거든요. “수행자가 자기 마음을 관리 못하고 눈물을 남 앞에서 보여서 저게 무슨 수행자냐!”라고……. 그런데 그게 남 말 할 게 아니에요.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산에 가서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어요. 나중에는 며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스님이 그립더라고요. 그렇게 그리운 여자가 있으면 못살지요.
- 은사 스님이 노스님의 후생이라고 믿으셨다면 참 대단한 인연이네요. 다음 생에서도 인연이 이어지고….
은사 스님은 또 만난다고 했어요. 그런데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아까 전화 바꿔 줬던 그 보살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꼭 우리 스님 상좌 된다고 하니까, 우리 스님이 말년에 “보살이 그렇게 오래 살아서 나하고 나이가 비슷해지는데 나도 혜국이한테 올지 모르니까 보살도 혜국이 한테 오소!”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믿으셨습니다.
- 인연을 기다리셔야겠네요.
쓸데없는 얘기예요. (슬며시 미소지음.)
사춘기의 방황과 성철 큰스님의 야단, 그리고 재출가
- 그러시다가 학교를 다니라고 해서 다시 제주도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니신 거예요?
그렇게 된 게 아니고 해인사를 가니까 그 때 누군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왔다고 하니까 “이 사람아! 학교를 다녀야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당신 상좌의 검정고시 강의록을 보게 하더라고요. 그 때가 1965년인데 그걸 다 보고 나니까, 그 상좌 스님이 시험을 보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어디 갔다 온다고 핑계를 대고 같이 갔는데 그 스님은 안 되고 나는 합격해 버렸어요.
그래서 중학교를 건너뛰고 고등학교 입학 자격증을 얻어 놨어요.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해인사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있었어요. 그 때 내 나이 또래였는데 교복을 입은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여요. 내가 사춘기였을 때니 나도 학교를 더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제주도로 갔어요. 제주도에서 빈 절을 찾아 거기서 학교를 다닐 생각으로 돌아다녔는데 양진사가 비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성북동 정법사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성철 큰스님한테 “혜국이가 서울에서 대학 다닌다”는 얘기가 들어가서 “이놈의 자식 내려오라!” 해서 내려갔다가 혼나고 해인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춘기 때에 그렇게 해서 몇 년을 보내버린 셈이지요. 그래 가지고 1968년경에 성철 스님께 불려가 혼이 난 거예요.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해인사로 가지 않고 1968년 겨울인가 용화사 선방으로 갔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있었는데 은사 스님이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왔다가 그렇게 성철 스님과 인연이 시작된 거지요.
성철 스님의 준엄한 경책과 소지(燒指) 공양
- 해인사로 내려오셔서 소지공양을 하신 인연을 좀 들려 주십시오.
해인사로 내려가니까 그 때서야 성철 큰스님이 받아들이대요. 처음에는 지금 종정 스님 계시는 퇴설당에서 정진을 했어요. 그런데 한 3년 해도 화두가 안 되요. 아까 망상 중에 노스님 친견하고 법화경을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그 때 화두 공부가 안될 때 이야기예요.
그래서 하루는 성철 큰스님께 찾아가서 공부가 안 된다고 하소연을 하였지요. “스님,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는 글을 봐야겠습니다. 학자의 길을 가렵니다.” 그랬더니 노장님이 “이놈의 새끼 공부 좀 하는 줄 알았더니……” 하시면서 대뜸 죽비를 들어 보이더니,
“보이나?”
“예, 보입니다.”
“무엇으로 보노?”
“눈으로 봅니다.”
“눈 어디 있노?”
“이마에요.”
“너 분명히 눈으로 본다고 했나?”
“예, 눈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불을 꺼 버리셨어요. 그 때가 밤 12시 반쯤이라 캄캄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보이나?”
“아니요.”
“망할 놈의 새끼야! 아까 눈으로 본다고 했는데 눈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있으면 보여야 할 거 아니냐. 그러면 눈으로 보는 게 아니지 않느냐?”
“스님! 캄캄하니까 안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양이 새끼나 부엉이나 올빼미는 캄캄할수록 잘 보이는데 너는 고양이 눈만도 못하다. 그 눈으로 글을 봐? 무엇으로 보는지도 모르면서 글을 본다고? 고양이만도 못한 이 놈의 새끼, 패 죽인다.”
그러시면서 죽비로 한 대 치더라구요. 캄캄한데 노장님 눈에 빛이 나면서 고함을 지르며 죽비로 치니 소름이 쫙 끼치데요. 그거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깜깜한데 언제 팰지 아니면 어떻게 될지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진짜 도인이란 다르구나 했죠.
“스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글을 보든 참선을 하든 부처님께 물어 봐서 해라. 하루에 5천배씩 절을 하면서 부처님께 물어 봐라!”
그런 일을 당하고 난 뒤에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하루 5천배씩 하는데 장난이 아니에요. 절이 그렇게 잘 돼요. 신심이 났지요. 그 날 저녁 혼나고 나서 다음 날부터 절을 시작을 했어요. 장경각에서 하루 5천배씩 삼칠일 그러니까 21일 동안 절을 하는데, 회향이 다가올 20일째 되는 날 그렇게 신심이 복받쳐 올라와요. 그래서 나도 은사 스님같이 세세생생 정진해서 성불하겠노라고 부처님께 다짐하는 소지(燒指)공양을 해야겠다는 발심이 났어요. 세 손가락에다 천을 감싸고 기름까지 다 준비해서 연비를 하려는데, 그 때 장경각을 지키는 장주(藏主)가 운범 스님이었어요. 야경을 돌 때 지나가면서 “여기에서 뭘 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삼칠일에는 못했어요. 다음에 또 하루 5천배씩 시작을 해서 삼칠일 두 번째 회향날에 연비를 했어요.
삼칠일 5천배와 소지(燒指)공양
- 아, 두 번씩이나 삼칠일 5천배를 하시고 회향날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세세생생 정진하여 깨치겠다는 발심을 다지기 위해 소지공양을 하셨군요? 처음부터 공양을 하기 위해 원을 세우고 하신건가요?
처음부터 공양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 삼칠일 동안 절하면서 은사 스님께서도 하셨는데 나도 공양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절실하게 나더군요. 18일째인가 그런 마음이 들어서 20일째 하려고 했는데 못하고, 다시 5천배를 시작해서 회향날 했지요.
그런데 하루 5천배씩 두 번이나 절을 한다는 놈이 어느 날 없어졌거든요. 나중에 보니 탄 냄새도 나고 하니까 연비했다 그래 가지고 성철 스님이 “장경각에서 연비를 하다니 미친놈 아이가. 그러다 불나서 국보 다 태우면 어쩌려고?” 하시면서 그놈 오기만 하면 때려 죽이라고 했다고 하대요. 장경각에서 불을 내는 연비를 못한다는 건 불문율인데 그걸 어겼으니…….
- 그래도 성철 스님이 참 좋아하셨겠습니다. 공부 안 된다고 하더니 그렇게 발심을 하여 연비를 했으니…….
성철 스님이 좋아했고 그건 다른 사람도 알아요. 그런데 우리 스님은 당신도 연비를 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아무 것도 안 드셨답니다.
연비한 날이 해제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3월 1일이에요. 손가락 세 개를 불 태우고 나오니까 부어오르는데 태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그렇지 않더라고요. 뼈가 앙상하게 남는데 진짜 태울 때는 견뎠는데 다 태우고 나니까 죽겠어요. 건드리면 온몸에 전율이 와서 건드리지를 못해요. 장경각에서 밤 1시에 연비가 끝났어요. 아무도 몰랐지요. 태운 곳을 헝겊으로 묶고 걸망 싸서 짊어지고 해인사를 내려오는데 밤 1시에 홍류동쯤 오니까, 내 착각이었는지 하늘이 분명히 맑았고 별이 총총했는데 비가 확 쏟아지대요. 그 때 비를 흠뻑 맞으며 내 업장이 다 씻어져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나는 새로 태어났다” 그렇게 고함을 지르면서 걸어 내려오는 데 다섯 시간인가 얼마나 걸었는지 몰라요. 어디서 차가 오더라고요. 손을 흔드니까 태워 줘요. 대구 가는 차예요. 손 때문에 어떻게 남에게 보일 수도 없고 죽겠어요. 어디 마땅히 갈 데는 없고 통증은 더 심해져 갔어요. 할 수 없이 내 아는 신도라고는 야단맞고 간 그 보문성 보살님뿐이었어요. 그분 집을 은사 스님 심부름 가느라고 서너 번 가본 적이 있어서 거기로 갔는데 거짓말 같이 그 보살님이 “스님, 연비하셨지요?” 그러더라고요. “스님이 연비를 하고 하늘로 훨훨 뭘 타고 올라가는 걸 봤다”고 거짓말 같은 얘길 하더라구요.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다
- 그 보살님도 보통 분이 아니네요.
그분 대단했지요. “스님, 들어오지 마시고 잠깐 기다리세요” 하더니 그 길로 병원에 데려 가더라고요. 병원에 가니까 타다 남은 손가락이 여기저기 형편이 없었어요. 두 달정도 병원에 입원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도망다니는데 그럴 수도 없고 두 달 동안 어떻게 병원에 갇혀 있겠어요. 신심이 뻗칠 대로 뻗쳐서 두 달이면 견성하겠다고 그렇게 자신이 있었고 꼭 될 것만 같아요. 그래서 대강 타다 남은 손가락 뼈를 잘라 내고 소독을 하여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 두었어요.
새벽 2시쯤에 모두 잠이 들어 아무도 없대요. 다시 바랑을 싸서 태백산으로 향했어요. 은사 스님께서 당신께서 태백산에서 정진하신 것을 자랑삼아 말씀하시고는 “너도 꼭 태백산 도솔암에서 정진해 보거라”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태백산으로 도망을 가니 또 난리가 났대요. 병원에서는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고, 죽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태백산 들어가서 그 길로 생식을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그게 염증이 나지 않게 했나 봐요. 그런데 꿰맨 실을 빼내야 되는데 뭐 마땅한 도구가 없어 망치로 못을 두들기고 숫돌에 갈아서 그렇게 해서 빼다가 두 개는 살이 찢어져 아파서 그냥 내버려 뒀거든요. 그 때는 뭐 죽음 같은 것은 두렵지 않았으니까 꿰맨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실이 살 속에 있다가 한 3년 만에 나오더라고요. 손목 위로 다 나와요. 거짓말 같지요.
- 본래 태백산 도솔암은 은사이신 일타 스님이 정진하신 곳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때 도솔암에서 혼자 정진하셨습니까?
혼자 있었지요. 도솔암 밑에 백련암도 있고, 그 밑에 홍제사가 있는데 비어 있었어요. 도솔암에 가니 겸무 노스님이 계셨는데, 내가 가서 “같이 살겠다”고 하니까 노장님이 젊은 사람이 손을 다쳐 묶어 가지고 왔는데, 그 때 내가 사람 같지 않았어요. 손을 묶어 가지고 소리를 지르고, 보이는 게 없어서 환장을 하겠고, 공부는 안 되고…. 노장님이 저러다가 홧김에 밤에 돌멩이 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나중에 그래요. 그래서 그 노장님이 밤 사이 간다온다 말씀도 없이 가 버리셨어요.
나는 그게 죄송해서 나중에 제주도 남국선원에 노장님을 위해 집을 지어 6년 동안 모신 사연이 있어요. 지금은 영주쪽 어디에 계시는데 율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율사일 거예요. 정진도 정말 열심히 하시고 그 노장님이 도솔암에 있다가 내가 발발대니까 이틀 있다가 무서워서 못 있겠다고 사람 죽인다며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서 영락없이 혼자 있게 되었어요.
생식과 장좌불와, 그리고 성철 스님의 지도
- 도솔암에서 여러 가지 체험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체험이라기보다도 처음부터 공부 길을 모르니까 발버둥이고 방황이에요. 성철 큰스님이 눕지 않고 정진하는 장좌불와를 하라고 했거든요. 그 때 삼칠일 5천배씩 하고 장좌불와를 하라고 했는데 나는 연비하고 태백산 도솔암으로 도망간 거예요. 도솔암을 간 그 날부터 장좌를 시작하고 솔잎 뜯어 먹고 가루를 만들어 먹고, 쌀을 씹어 먹고 하는데 쌀을 오래 씹으니까 이빨이 뾰족뾰족해져요.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방바닥에 침이 흘러 여기저기 굳어 있고 진짜 죽고 싶어요. 그런데 손가락까지 불에 태워서 스스로 병신을 자처해서 여기까지 와서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요. 그리고 무서워요. 왠지 그렇게 무섭고 공부가 잘 되면 누가 철퇴로 한방 갈겨 버릴 것 같고 ……. 망상을 피우는 거예요.
나중에는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그 때는 화두는 둘째고 제일 궁금한 게 성철 큰스님은 10년 장좌하는데 안 졸았을까, 이렇게 안 꼬부라졌을까, 키도 나보다 크고 허리도 긴데 정말 안 꼬부라졌을까였어요. 별의 별짓을 다 해도 꼬부라지니까 들어간 지 다섯 달 만인가 여섯 달 만인가에 열불이 나서 새벽에 일어나서 뛰쳐나와 곧장 해인사로 뛰었어요. 머리는 긴 채로 가니까, 그 때 마침 스님께서는 해인사에 계시대요. 바깥에서 듬직한 지팡이를 짚고 계시길래 땅바닥에 절을 세 번 하고 물었어요.
“스님! 장좌불와하실 때 졸았습니까, 안 졸았습니까?”
“야, 내가 목석이가?”
‘아, 스님도 졸았구나!’ 하고 다시 하직 인사하고 돌아서서 그 길로 은사 스님이 계신 지족암으로 가려는데
“이놈아! 천장에 밧줄을 묶어 놓고 목을 묶으면 될 거 아니냐”
그 말을 듣고는 은사 스님께 들러 인사 드리고는 다시 태백산으로 돌아왔어요. 딱 그 한 마디 물어 보고 ……. 나중에 알았는데 곧바로 우리 은사 스님을 불렀답니다. 부르더니 “혜국이 잘 해 줘라! 혜국이 공부할 거다.” 은사 스님이 “스님, 왜요?” 물으니 “너는 알 거 없다. 공부할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참 단순하고 우스운 얘기죠. 장좌불와해도 조니까 열불이 나서 스님은 졸았나, 안 졸았나 확인하고 스님도 졸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냅다 뛰어 태백산으로 돌아갔으니…. 성철 큰스님이나 은사 스님 모두 좋아했대요.
다시 태백산 도솔암으로 돌아와서 천장에 밧줄을 묶어 턱에 걸어 놓으면 밑으로 안 쳐지니까 노장님이 그렇게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직접 해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되지를 않아요. 가자마자 천장에 밧줄을 묶어서 했는데 끄덕끄덕 하니까 목살이 벗겨지기 시작해요. 걸리면 화두는 간 데 없고 “악, 악, 노장 해 보지도 않고…….” 도저히 효과가 없어요.
그래도 그렇게 애쓰니까 조금 안정되기 시작하고 하다 보니까 열은 내렸어요. 공부는 마찬가지로 안됐지만. 그래서 성철 스님 뵈러 갔을 때 “노장님, 해 보지도 않고 말하신거죠?”, “스님, 생식을 오래 했는데 어떻게 드셨길래 이빨이 견뎌냈습니까?”, “생쌀을 어떻게 잡수셨습니까?” 물어 보고 올 걸 정말 잘못했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6개월 만에 다시 한번 큰스님을 뵈러 갈 계획을 세웠어요.
그 때는 산에서 먹을 게 없으니까 약초를 팔아 쌀을 샀어요. 잠이 올 때마다 뒷산에 올라가서 당귀, 백출, 천마 등 한약재가 될 약초를 캐서 6개월간 모았다가 짊어지고 영주장이나 춘양장에 가서 팔아서 생쌀과 생콩을 사서 먹었거든요. 그래서 약초를 짊어지고 가서 팔고 성철 스님께 가서 물어 보기 위해 다시 해인사로 갔어요.
성철 스님의 생식 지도
성철 큰스님은 늘 해인사에 계셨으니까 가서 정식으로 삼배를 하니,
“와? 뭐 때문에 왔노?”
“스님! 밧줄로 진짜 해 봤습니까?”
“안 해 봤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와?”
“여기 보십시오, 벌겋게 되었잖습니까? 보십시오.”
“하하하! 그러면 말이야, 내 발우 하나 줄테니까 발우를 머리에 올리고 하거라!”
그러시고는 철발우를 하나 내 주시대요. 그러면서 생쌀 얘기를 또 물었죠. 그랬더니
“미련한 놈의 새끼야, 내가 그렇게 미련하나? 발우에 담아 물에 불려서 묽어진 다음에 먹는 거지, 누가 생쌀을 먹냐? 그리고 콩을 그냥 먹으면 어쩌느냐, 솔잎은 가루로 먹는 게 아니라 썰어서 먹는 기라!”
그렇게 장좌할 때 머리에 철발우를 이고 해 보라는 말씀과 생식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듣고서 다시 태백산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는 가르쳐 주신대로 솔잎을 고무줄로 감아서 사각사각 썰으니 꺼끌꺼끌해서 안 넘어갈 것 같은데 가루보다 훨씬 잘 넘어가요. 희한해요. 잠 올 때마다 써는데 잠이 오면 어째서 어째서 하다가 방이 크지 않으니까 방 한쪽이 솔잎 향기로 향기로워요. 그거 보다가 잠 오면 썰어 놓고 한 숟가락씩 먹었어요. 그리고 성철 스님 얘기가 만일 가루로 하려면 콩을 같이 넣고 빻으면 절대 비리지 않고 목에 걸리지 않는다더라구요. 그건 해 보셨어요. 딱 맞아요.
“생콩을 물에 담갔다가 솔잎하고 같이 넣어 갈아 먹어라, 대추랑 같이 먹으면 떫지 않고 좋다.”
“스님! 대추가 어디 있습니까?”
“응, 대추가 없구나.”
실제로 대추하고 같이 먹으면 절대 떫지 않아요. 솔잎이 보들보들해요. 그런 걸 다 가르쳐 주셨어요. 노장님께서도 진짜로 해 보고 와서 달려들어 물어 보니까 그렇게 좋으셨던 거예요.
생식은 배우니까 좋았어요. 먹을 것은 자리가 잡혔어요. 그런데 이 장좌가 문제예요. 철발우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화두 하라고 해서 수건을 동그랗게 해서 하는데 이것도 노장님이 안 해 보신 거예요. 수건을 크게 동그랗게 하면 졸지만 않으면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졸다가 까딱하면 딱 떨어져서 우당탕 물을 엎지르죠. 어떤 때는 몇 분 사이에 열 몇 번씩 떨어져요. 죽겠어요. 조는 거, 안 조는 거 알아보는 데는 세상 없는 법이에요. 또 하고, 또 하고 어떤 때는 졸다가 그래도 또 하고, 또 하며 몇 달이 흘렀어요. 별짓을 다 했지만 진전이 없어요. 포기할 생각이 저절로 났어요. 나는 이 공부는 어려운 사람이구나! 은사 스님 말을 듣고 참선을 시작했는데 글 공부를 이 정도 했으면 벌써 우리나라 수준급에 들어갔을 텐데……. 우리 은사 스님 말을 들어서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는 참선은 도저히 안 될 사람이 아닌가 싶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 주로 졸음, 수마 때문에 그랬습니까?
졸음 때문에…. 잠이 말도 못해요.
공부인이 생식을 하는 이유
- 생식을 하면 공부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생식하는 이유는 된장, 간장 필요 없지, 소금 필요 없지, 국 끓일 필요 없지, 반찬이 필요 없어요. 그냥 옆에 갖다 놓고 떠 먹으면 되니까 시간적으로 엄청나게 절약되지요. 밥을 해 먹으려면 하루에 서너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국 끓여야지, 반찬 한두 가지라도 해야 먹게 되지요. 생식은 정진하는 자세 그대로 옆에 놓고 그냥 떠서 먹으면 되니까 시간적인 여유가 벌써 하루에 3분의 1을 벌어요. 그게 첫째 조건이라고 봐요. 그리고 밥을 지어 먹으면 반찬을 또 어떻게 해 먹어요. 참기름이 어디 있으며, 간장이 어디 있어요. 생식은 쌀가루만 있으면 거저먹는 거니까 ….
독초를 먹고 죽음을 경험하다
그러다가 별 공부 재미 없이 두 번째 봄이 왔어요. 아침에 하도 배가 고파서 풀잎을 뜯어 먹었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풀이 산삼하고 초오(草烏)예요. 산삼은 영약이고 초오는 독약이에요. 영약하고 독약은 같이 나와요. 나는 그 때 그런 걸 몰랐지요. 파랗게 올라오길래 그냥 뜯어 먹는데 혀가 따끔따끔하고 확확 쏘대요. 아주 독하대요.
- 초오요?
초오, 풀 초(艸)에 까마귀 오(烏)자를 쓸 거예요. 독초예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선식을 믿었어요. 성철 스님이 생식하려면 독하건 쓰건 떫건 한 구멍만 넘겨라 그랬거든요. 독해도 한 구멍만 넘겼지요. 그게 믿음이 가요. 한 구멍만 넘겨라 하면 옛날 사람들은 한 구멍을 넘겨요. 그런데 요즘 사람은 믿지 않아요.
무조건 한 구멍만 넘겨라 한 구멍 넘겨야 생식한다 그러기에 뜯어 먹으면서 한 구멍을 넘겼는데 조금 있으니까 목구멍이 끊어지는 것 같아요. 죽겠는 거예요. 그런데 소리 질러도 누가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소리를 지르지요. 아무도 없으니까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다가 다리가 뒤로 넘어가더라고요. 다리가 뒤로 넘어가서 엎어졌어요. 다시 한번 죽어 보면 그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을까 ……. 엎어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죠 . 출처 ; 묘심사
미주현대불교제공
http://blog.daum.net/mkw728/6940641
선지식에게 듣는다(여섯 번째)│충주 석종사 혜국 스님 ②
박희승 | 조계종 포교원 연구차장
유체이탈(有體離脫)을 체험하다
산비탈에서 뒤로 나뒹굴면서 속으로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는데 조금 있으니까 편안해요. 그 다음에는 의식이 끊긴 것 같은데……. 얼마나 지났는지…… 내가 제주도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갔더라고요. 얘기가 좀 그런데 …… 부처님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어머니를 찾아간 거예요. 어머니는 제주도에 살았지요. 나는 태백산 암자인데 …… 정말 영혼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생생한 현실로 보여졌어요. 진짜로 간 걸로 생각했어요. “어머님! 저 왔습니다” 하니까 그 전에는 내가 왔다고 하면 난리가 나는데 그 때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아들이 행방불명 됐다며 절에 불공하러 간다고 쌀을 고르고 계셨어요. “어머니 저 왔습니다.” 쳐다보지도 않고 쌀만 골라요. 그래서 ‘이상하다 별일 다 있네’ 싶었어요. 그 다음 생각에 ‘송암 스님한테나 가버려야지’했어요. 성철 스님한테도 안 가고 우리 스님한테도 안 가고…….
- 그 순간에요?
네. 송암 스님한테나 갔다오자 싶었어요. 송암 스님이 전라도 광양 백운암에 사실 때예요. 거기 가보니까 앉아서 참선하고 있더라고요. “스님! 혜국이 왔습니다” 하니까 노장이 들은 척도 안 해요.
그러다가 저승으로 갔어요. 우여곡절을 거쳐서 간 저승에서는 “내 명이 다 안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돌아가야 된다며 뭘 따라가라고 해서 따라 나오다가 다리에 오르는데 다리가 끊어져 버렸어요. 그래 가지고 ‘집에 가야지’했죠. 집이라는 게 태백산 도솔암이에요.
도솔암을 걸어 올라가는데 한도근 처사하고 김 처사라는 심마니를 만났어요. 당시 이 심마니 처사님들이 태백산 도솔암 근처에 산삼 캐러왔다가 내 시신을 발견한 거예요. 한도근 처사가 지금 원일 스님 친아버지예요. 머리가 길고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엎어졌는데 처음에는 동삼으로 봤대요. 산삼이 오래된 걸 동삼이라고 하는데 동삼이 오래 되면 사람이 되어서 자고 그런대요. 다 그렇게 믿어요. 동삼 하나 얻으면 팔자 고친대요. 거기에 간단히 차려놓고 절을 하고 그랬대요. ‘어서 동삼으로 돌아가시소. 우리 정성이 모자란 모양인데 삼의 모습을 보여주시오’하고 빌었대요.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자세히 보니까 피가 보글보글 끓고 있더래요. 그 때는 사람들이 나를 혜국 스님이라고 안 부르고 도솔암에 오래 산다고 ‘도솔 스님’이라고 그랬어요. “도솔 스님이다! 도솔 스님 죽었다”하고는 나를 엎고 뛸 때 나와 마주친 거예요.
제가 한 처사에게 “이 스님이 누구냐?”, “어떻게 나하고 같이 생길 수가 있느냐?”하고 물었어요. 들은 척도 안하고 내려가길래 나도 따라 내려갔어요. 도솔암 아래 황평에 그분 딸 집이 있는데 거기에 눕혀 놓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 들었어요. 숟가락으로 쌀뜨물을 먹이는 한 처사에게 “이 스님이 누구냐?”고 아무리 물어도 듣지를 못해요.
- 계속 따라가신 거네요?
따라갔지요. 황평에 가서 그 스님 얼굴을 보며 “스님! 어떻게 나하고 닮을 수가 있소? 손가락 없는 것까지 닮았소.”하는데 그 때 혼이 쏙 들어간 거예요. 눈을 뜨면서 첫 마디가 “아까 그 스님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스님 없었습니다. 스님 혼자였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내가 자꾸 스님을 찾으니까 “스님이 잘못 됐구나! 정신이 이상해졌구나!”하며 다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 때 ‘아, 이 몸이 내가 아니구나’ 싶고 성철 스님께 죽비로 “보이나?” 하시던 그 때처럼 전율이 일어나요. ‘영혼이 돌아다니다가 왔구나, 진짜 내가 아니구나’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도솔암으로 향했어요.
도솔암에 올라와서 발우를 보면서 성철 스님께 큰절 삼배를 올리고 ‘제가 오늘부터 발우를 잘 올려놓을 겁니다’했지요. ‘이제 정말,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죽어도 전혀 말 안 할 거니까 내 몸 누구한테 주고 팔고 싶으면 진짜로 마음대로 하라고 하이소!’ 했습니다.
그래도 졸음은 마찬가지예요. 또 잠이 오는 거예요. 진짜 죽겠어요. 좌절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몇 달 지나고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해 나가는데 중간에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공부는 되더라고요. 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걸 ‘어째서……’ 하고 화두를 잡고 앉아 있으면 그 전에 “내가 글을 볼 걸 잘못했나’하는 잡념도 없어지고, ‘성철 스님이 ‘보이나?’ 할 때 지금 들었으면 달려들 수도 있을건데, 영혼이 보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더 얻어터질 뻔 했어요.
철야 정진 끝에 경계를 체험하고 성철 스님과 문답하다
그 놈이 보고, 그 놈이 돌아다니는 건데 공부는 되기 시작한 거예요. 신심이 난 거예요.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정말로 중 노릇을 잘 해봐야지’ 하고 ‘어째서, 어째서……’ 하며 몇 시간 시간이 지나갈 때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서는데 그러다가 또 좌절이 오는 거예요. 졸고 또 졸고 하다가 어느 날 저녁에 다짐을 하고 올려놨는데 눈을 뜨니 해가 뜨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벌떡 일어났는데 그 때 물이 와장창 했어요. 그 와장창하는 소리에 찰나간에 내가 없어져 버리더라구요. 거기에서 뭔가 달라진 거예요. 이제 됐구나! 그 길로 달려 나와서 온 산을 헤매고 다녔어요.
- 이제 됐다고요?
다람쥐가 도망가는데 “이놈아, 도망다니는 바로 너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서 그 길로 도솔암을 뛰쳐나온 거예요. 태백산을 나와 역시 해인사 성철 스님께 제일 먼저 갔어요. 가니까 그 때 성철 스님이 백련암에 올라가 계셨어요. 원명 스님이 시좌를 봤을 때에요. 그 때가 1973년쯤 될 거예요.
“스님! 일 다 해 마치고 왔습니다.”
“뭐, 니가 깨달았다고? 어흥,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왔노?”
“스님! 그 소리 가지고 몇 명이나 속여 먹였습니까? 거기에 속을 줄 압니까?”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한데 너는 어디에서 주워왔나?”
“스님! 그런 거 가지고 속이려고 하지 말고 스님 살림살이를 내보이십시오.”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일러라” 하는데 막히데요. ‘덕산탁발화’를 말하면서 ‘일러라’ 하는데 막혀서 멍하고 있으니까
“아나?”
“스님! 환한데 모르겠습니다.”
“짜쓱이 양심은 있구나. 환한데 몰라? 환하다는 소리는 빼!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3년은 더 해야 돼!” 하시고는 영각을 비우라고 하시더군요.
- 3년을 더 하라고요?
“3년은 더 해야 돼! 3년 동안 나가지 마라!”고 하시대요. 그래서 있어 볼까 했는데 지금도 살아 계시는 스님인데 어떤 스님이 “스님이 여기 있으면 입장이 곤란해진다. 수좌들이 내놓으라고 할 때마다 내놔야 하니까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나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다른 선지식을 만나서 확인받고 싶었던 거지요.
경봉 스님과 문답하다
- 성철 스님께서 3년간 있으라고 한 건 뜻이 있는 말씀 일텐데요.
그 어른만 그런 게 아니라 경봉 스님도 그러시더라고요. 백련암을 내려와 그 길로 통도사 극락암으로 경봉 스님에게 쫓아갔어요.
극락암에 가니까 대중들이 산행을 갔고 송암 스님만 시자 소임을 맡아 계시더라고요. 경봉 스님은 누워 계셨어요.
“뭐, 혜국이 깨달았어? 손 내봐라”
손을 내놓으니까 ‘탁!’ 때리고는
“이 소리가 네 손에서 났느냐, 내 손에서 났느냐?”
“아이고, 어린애 달래는 소리 하지 마시고 스님 살림살이나 내놓으십시오.”
“육자 선지식을 이르라” 그러셨어요
내가 바로 “무자 소식을 일러라” 하니까 노장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제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요. “여사미거에 마사도래라 일러라” 하는데 막히대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막힐 수밖에……. 정확해요. 법신변사(法身邊事)에서 깨달으면 법신변사는 환한데 향상구에서는 막혀요. 법칙이에요. 역도를 100㎏ 드는 사람은 130㎏은 못 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경봉 스님이 “수좌! 내가 오 처사 나가라고 할테니 1,000일만 살아. 3년만 살아라.” 하셨어요.
송광사 구산 스님과의 법연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또 송광사 구산 스님께로 간 거예요. 구산 스님께서는,
“저 앞산에 바위가 눈이 열렸구나. 눈 열린 소식을 일러라.”
“눈 열린 소식 이르라고 하는 사람에게 물으십시오.”
그리고는 노장님이 원을 그려놓고 한 가지 더 물었는데 그건 바로 답을 했는가 봐요. 노장님도 “여사미거에 마사도래라” 똑같은 걸 물어보는 거예요. 왜 똑같은 말을 물어보느냐고 그러니까 노장님이 중간에 말을 잘 못했어요. 제가 “스님! 귀 좀 빌려 주십시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말합니까?” 하니 노장님이 귀를 내미는데 제가 올려 부쳤어요.
- 구산 스님한테요?
“미친 놈!” 하시는데 나는 냅다 뛰어나왔어요. 모르는 건 모르는데도 기분이 좋았어요. 혼자 기분이 좋아 전국을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나무 아래에서도 자고 저 멀리 불영사 계곡으로까지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그 직후 구산 스님께서 나를 그렇게 찾았답니다. 그 양반은 기회를 안 놓친 거예요. 그러나 저러나 난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점점 환했던 것이 희미해져 가요. 머리는 이만큼 긴 채로 누더기를 걸치고 미친 놈이지. 그래도 좋아서 제주도까지 가서 거기에서 머리카락을 깎았어요.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인 취급을 해요. 그래서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때까지는 내가 생각해도 좀 잘 살았다 싶었는데, 그 뒤부터 들락날락하고 다시 공부는 안 되더라고요. 그저 앉으면 휙 시간이 지나가리라 생각했는데 안돼요. 자신만만하고 다른 사람 식이 보이고, 모든 것이 훤했던 것이 희미해져 가요. 확실히 그 때 봤던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그 세계는 분명하고, ‘야! 이걸 진짜로 다시 해봐야 되겠다’ 싶었는데 그게 안 돼요. 태백산 도솔암 전반기는 정말 애를 썼고 후반기는 유야무야 들락날락하면서 별로 재미를 못 봤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나오게 된 거지요.
- 그러니까 당대 선지식이셨던 성철 스님, 경봉 스님, 구산 스님 친견해서 문답하고 전국을 주유하다가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오셨군요? 그 때가 1970년대 중반인가요?
1970년대 초반이에요.
- 저녁에 선정에 드셔서 아침에 태양을 보고 뭔가 체험을 하신거군요?
해가 분명히 졌는데 내가 앉아서 몇 시간만 지나도 좋다고 했는데 해뜰 무렵까지 간 거예요. 그러면 몇 시간이야 ‘와!’ 손바닥을 치면서 벌떡 일어나는데 발우가 떨어졌으니까 ‘꽝’ 하는데 내가 없어져요. 그냥 그게 좋아서 뛰쳐나온 거예요. 그게 찰나예요. ‘꽝’ 하는 순간에 찰나예요.
- 그런 공부 이야기를 젊은 분들이 많이 알아야지요.
하고 싶지도 않아요. 요즘은 모든 게 믿어지지 않는 세계니까. 나는 진짜 내가 직접 당한 일이고 처절했어요. 처절했어요. 요즘이야 어디 그런 걸 믿나요? 나는 내 상좌들 보고 ‘너희들이 나보다 선근은 낫다고 하는데 나만큼 밤까지 애쓰는 사람 못 봤다’ 그런 얘기를 하지요.
송광사 구산 스님 회상에서 다시 정진하다
-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가서 하시다가 어디로 가셨나요?
송광사에 구산 스님한테 붙들려 갔어요. 구산 스님께서 사람을 보내가지고 어느 날 어디 나와 있을 테이니 잠깐 왔다 가라 하셨어요. 가니까 열을 내시며 잔소리 말고 빨리 들어오라고 해서 송광사에 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송광사에 들어간 이후로 구산 스님과 인연이 이어졌어요. 스님 입적하실 때까지 거기에서 몸은 떠났다 해도 늘 편지를 보내고 사랑을 보내서 떠나지 못했어요.
- 구산 스님 입적하실 때까지요?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도 불러서 갔더니 뭘 써놓고 저더러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당신 입던 누더기를 나한테 물려 주면서 “이건 네가 입고 살라”고 해서 받았지요. 하여간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도 제가 칠불암 선원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 노장님은 떠나기가 어려워요. 그분 대단해요. 제자들 붙드는 데는 …….
- 그러시면 구산 스님 회상에서는 몇 년 지내신 거예요?
많이 살았지요. 거기에서 제일 오래 살았을 거예요. 5, 6년 이상 살았으니까. 계속 산 게 아니라 나왔다가 붙들려가고 3년 결사는 한 번 했는데, 그 외에는 나왔다가 불려갔어요. 그 노장님은 직접 찾아와요. 함양 용추사 은신암에 가 있을 때나 소백산 토굴, 제주도 남국선원 조그마한 토굴에 있을 때는 당신이 직접 오셨어요. 참 놀라워요. 대단한 분이셨어요.
- 3년 결사는 언제 하신 건가요?
거기에서 그렇게 살다가 자꾸 사중 대중에서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내가 왜 이렇게 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나왔어요. 오대산 상원사에서 무여 스님하고 같이 들어가서 살다가 1974년인가 1975년 그쯤 되었을 거예요. 그 때 상원사가 험하게 살 때예요. 한암 스님 좋은 가풍이 없어지고……. 봉암사도 그랬고 상원사도 그랬어요. 무여 스님이 오대산 스님이거든요. 잘 지내보려고 나하고 약속을 해서 상원사에 들어갔는데 아주 힘들었어요.
그 때 구산 스님 편지가 왔어요. 뭐 때문에 나갔느냐, 나간 이유라도 밝혀라 하길래 ‘스님, 다른 말씀드릴 건 없고 나와 살아 보니 오대산이 힘들어서 방 하나 주시면 제가 거기에서 3년을 지내 보겠습니다’ 하니까 노장님이 3년 결사를 한다고 소문을 얼마나 내놓았든지 혜암 스님, 적명 스님, 무여 스님, 지금 봉암사 선원장 정광 스님, 돌아가신 휴암 스님, 일장 스님 등 하여간 기라성 같은 스님이 다 모였어요. 그래 가지고 3년 결사를 했는데 첫 철에 깨졌지요. 뭐 때문에 깨졌나 하면 서옹 스님이 종정을 하면서 승군단을 창설한다고 해서 법정 스님하고 나는 절대 반대였어요. 다른 대중은 다 해서 구산 스님이 가라고 해서 갔다 왔지요. 그런데 다녀와서 여러 가지 때문에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입승이셨던 혜암 스님이 가버리셨어요. 입승이 가시고 그 다음에 해제하고 누구누구 가고, 다 깨졌지요.
- 승군단(僧軍團)에 안가시고 반대하신 뜻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승군단이라고 하는 게 수행자로서 총칼 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세속(世俗)으로 가는 것이지. 보살행도 아니고 속인화 되는 것이지요. 보살행으로 속화한 거라면 당연히 속화되어야 하고 속인 쪽으로 가야지만, 세속화 되어서 수행을 버려두고 세속의 총칼을 잡으러 간다는 것은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어요. 그래서 끝까지 안 갔어요.
- 3년 결사가 첫 철에 깨지고도 계속 남아 계셨습니까?
계속 있었어요. 결국 거의 나 혼자 3년을 끝냈지요. 그러니까 구산 스님이 그런 걸 인정을 해요.
당시 봉암사·상원사 선원 분위기
- 아까 봉암사하고 상원사가 당시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안 잡혔다고 하셨잖아요. 봉암사는 당시 공부 분위기가 안 잡혔었던가 보지요?
지금처럼 봉암사가 저렇게 잡아 살기 시작한 게 도범 스님이 주지할 때쯤일 거예요. 지금처럼 수좌들이 하나의 긍지처럼 된 것은 1980년 넘어서입니다. 그 이전에는 원력을 세운 분들이 많았지만, 대중 분위기는 쉽지 않았지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 오대산 상원사는 당시에 어땠습니까?
상원사는 한암 스님이 잘 사시다가 가신 이후로 거의 선방을 못 했어요. 어영부영 쉬는 장소처럼 되어 버리고 그러다가 능혜 스님이 주지로 들어가면서 선방을 해보겠다고 해서 무여 스님 하고 내가 들어갔는데 힘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차츰차츰 나아지더니 정념 스님이 주지할 때 상원사 선방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요.
어느 곳이든 대중을 이루어 살면 이런저런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당시 상원사 선원 같은 경우 좀 자유롭게 살려는 분들이 많았어요. 무여 스님이 입승 맡고 내가 찰중 소임이었는데 몇몇 대중이 아주 말썽을 부렸어요. 무여 스님이 본래 월정사가 본사여서 상원사를 제대로 선방으로 만들어 보려고 작심하고 노력했는데 갈등이 계속 되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차라리 어른 있는 데 가서 공부나 하자. 차라리 공부 잘 한다고 해서 시비 듣는 게 낫지 이런 데서 못 하겠다.’ 그래서 구산 스님 계신 송광사에 간 거예요. 태백산에서는 붙들려 갔지만, 오대산에서는 내가 자원해서 편지를 올렸어요.
다시 송광사로 들어 가다
- 송광사에는 구산 스님이 계시니까
그런데 그 노장은 공부를 잘 하면 너무 드러내서 칭찬해 버리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도 말 듣게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장좌불와하던 끝이라서 잘 안 누웠어요. 안 누워져요. 누우면 허리가 아파서 앉아 있으니까 노장이 놀래서 인삼이 귀할 때였는데 당신 드시라고 한 인삼을 시자도 몰래 11시 반부터 12시 사이에 달여서 한 그릇 가져다 내 방 앞 마루에 놓고는 ‘똑, 똑, 똑’ 하고 가요. 그러면 나는 그걸 먹고 빈 그릇을 놔두면 도로 가져 가셨지요. 하루는 조느라고 못 봤더니 확 쏟아 버리더라고요. 그걸 당신이 하루도 안 빠지고 6개월을 하셨어요. 세상에 비밀이 있나요. 대중들이 그걸 알게 되었어요. 가만이 있나요. 노장이 두부 한번 사 먹자고 해도 시주물 아낀다고 안된다 하시던 분인데 …….
- 그렇겠네요. 대중들 말이 많았겠습니다.
인삼 달여 먹이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그게 저를 힘들게 만들어요. 노장이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앞에 놓고 그래 버리는 거지요.
- 대중들 앞에 놓고 법문하시면서 칭찬도 하시고 그러셨겠네요.
“혜국이 한 쪽 눈 열렸다”고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저기 애꾸눈 오네” 하며 빈정거렸지요. 그런 게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도 공부한다고 말 듣는 그게 더 낫더라고요. 상원사는 하도 시끄럽게 하고 나와서 …….
축서사 무여 스님과의 인연
- 축서사 무여 스님과 아주 절친하시다고요?
무여 스님은 나하고 오래 살았거든요. 상원사부터 시작해서 송광사 3년 결사, 봉암사, 대승사, 칠불, 도솔암, 망월사에서 같이 살았지요. 열 손가락으로 못 셀 정도로 같이 다녔어요. 그래서 무여 스님 가는 데 내가 있고 내가 가는 데 무여 스님이 있다고 할 정도로 도반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사이입니다. <계속>
출처:
http://www.buddhism.or.kr/pBeliever/board/board_read.aspx?board_seq=286&article_seq=34242
http://cafe.daum.net/yumhwasil/3CQj/3214
봉암사에서 10·27법난을 맞다
- 그러시다가 제주도로 가셨어요? 10·27법난을 맞으시고요?
그걸 봉암사에서 맞았지요.
- 그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봉암사에 도범 스님이 주지였던 1980년에 제가 갔어요. 봉암사에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은 군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해요. 수좌들이 나가서 봉암사만은 군화발로 법당 못 들어온다고 굉장히 강경하게 막았지요. 어느 놈이든 들어오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해서 군인들이 봉암사에는 못 들어왔어요. 그래 가지고 봉암사는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가고 결국 그냥 돌아갔지요. 뒷날 보니까 서울에서 빨리 올라오라고 한다 해요. 그래서 봉암사에 대중공사가 붙었지요.
나는 “가지 말자. 서울이라는 데가 우리 수좌들이 견뎌낼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아니다. 가지 말자” 했는데 나머지 대중들은 “봉암사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까 일단 서울 사정이라도 알아 봐야지 않느냐” 해서 탄성 스님, 고우 스님, 적명 스님, 무여 스님, 휴암 스님이 다 올라갔지요. 그 후에 아예 수좌들이 총무원을 접수하여 개혁을 하게 되었지요.
나는 너무 속상해서 봉암사 위에 백련암이라고 있어요. 거기로 가버렸지요. 혼자 가서 날마다 나무를 해서 수북히 쌓아 놓고 장작을 하면서 살았어요. 한달 반 만인가 어느 스님이 와서 “스님! 관음사 주지로 발령났습니다” 해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갔지요. 차라리 중앙에서 울력하더라도 할 거니까, 관음사는 안 된다고 연령도 미달이고 안 된다고 생떼를 썼지요. 했더니 며칠 있으니까 당시 정화중흥회의 상임위원장(총무원장)을 맡고 있던 탄성 스님이 오라고 해서 가니 적명 스님이랑 고우 스님이랑 같이 계시면서 “관음사가 꽤 많은 돈이 압수를 당했고, 또 수석이 많았는데 그걸 다 압수를 당해서 스님이 가야만 한다”, “신도들이 원하는 게 스님이니 잠깐만 갔다 오라”고 그래서 결국 내려갔지요.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는 수 없이 임명장 받아서 내려가니까 바로 국회의원 선거예요. 그 때 정치권력에 당한 수모도 있고 해서 오기가 생겼어요. 마침 강보성씨라고 나중에 농수산부 장관도 한 이가 찾아 와서 자기가 불자이니 밀어 달라고 해서 확인해 보니 내외가 독실해요. 그래서 그분을 밀어 당선이 되었어요.
- 관음사 주지는 언제까지 하신 거예요?
6개월 했어요.
- 왜 6개월만 하셨어요?
가자마자 그 일을 해놓으니까 청년들이 좋아해서 몇몇이 제주도 전체에 불교유치원이 없다고 유치원을 하자고 하대요. 그래서 유치원을 세웠지요. 그런데 나중에 누가 주차장 만든다고 유치원을 없앴다던데 기가 막힌 일이죠.
그런데 하루는 봉암사에서 수좌들 몇이 왔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돌아다니는데 역시 수좌들의 세계가 좋구나 싶은 생각이 나요. 얼마 후 은사 스님이 법회를 청하니까 오셨어요. 본사 주지 은사 스님인 일타 큰스님 오셨다고 강보성 씨도 오고, 도지사도 오고, 신도들이 많이 동참했어요. 그런데 은사 스님이 법문을 하시면서 “종단에 공부 유망주인줄 알았더니 야망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본사 주지 이런 거나 한다”고 내놓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그래도 기분만 나빴는데 하루는 유치원 아이 중에 하나가 다쳤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는데 그 애 어머니가 기억이 안 나요. 돈 많고 나한테 잘 해주는 아이 부모는 기억나는데 그 아이 어머니는 기억이 안나요. ‘우리 스님 말씀이 맞구나. 이건 수행이 아니라 내가 완전히 뭐가 되어가고 있구나, 중도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주지직을 다른 분에게 위임했다가 안 되어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사표를 내고 6개월 만에 나왔지요. 그러니까 관음사 주지는 그저 한번 거쳤을 뿐이죠.
- 그리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지리산 칠불암 선원으로 가서 3년 결사를 했지요. 그 때 통광 스님이 불사를 할 때예요. 위에 선방은 조그마한 양철집인데, 그 양철집에서 살았지요. 우리나라 수좌들이 남한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을 평하기를 오대산은 워낙 흙이 많고 덕이 많고 약초가 많고 산나물이 많이 나서 불보살산이라고 해요. 적멸보궁도 있고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오대가 있을 정도로 워낙 풍요로운 불보살산이라고 하지요. 지리산도 그렇게 풍요로워요. 지리산은 워낙 웅장해서 마치 제불보살산 같다고 하거든요. 그 지리산의 웅장함이 좋고 그 때는 칠불 선원이 양철집이고 보잘 것 없었지만 통광 스님이 워낙 밑에서 신심있게 기도하면서 불사하는 게 좋아서 3년 결사를 했어요. 그 때 축서사 무여 스님, 송광사 유나 현묵 스님이 같이 사셨습니다.
제주도 남국선원 창건 이야기
- 제주도 남국선원 창건한 인연을 좀 들려주십시오.
송광사에서 3년 결사를 할 때인데 내 사형 스님께서 지금 제주시 남국사가 그린벨트에 묶인 줄 모르고 불사를 시작했다가 워낙 문제가 많으니까 당신이 떠나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절 신도님이 나를 데리러 송광사로 온 거예요. 나는 결사 중이라 못 간다고 하니까 결사 끝날 때까지 자기는 기다리겠다고 해요. 결사가 끝나고 문경 대승사에 가 있으니까 거기에 또 왔어요. 해제하고 가 보니까, 남국사는 터가 아니에요. 이런 저런 인연으로 지금 터에 남국선원을 지은 거지요.
한번은 내가 수도암에서인가 결사라는 말을 안 붙이고 3년을 살았는데 거기를 제주 불심행보살이라고 남국선원 창건주가 와서 “스님, 남국선원에 선방 하나 지읍시다” 해요. 그래서 나는 업이 많아서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성철 스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니, 고향 제주도지?”
“예.”
“제주도에 절이 없지?”
“스님! 100개가 넘습니다.”
“무슨 소리냐? 선방도 없는 게 절이냐? 앞으로 물으면 절 없다고 해!”
그런 말씀이 생각이 나도 나는 못한다 했어요. 그 다음에 가 보니까 그 보살님이 도장하고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해요. 내 이름으로 돈을 한 달에 천만원씩 적금을 했는데 그게 7억원이 되어 다른 스님을 모시고 불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이에 실명제가 되어 “스님 도장하고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해요.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7억원이 들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성철 스님 생각이 나면서 ‘할 걸 그랬나, 1년만 고생하면 제주도에 선방을 지을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났어요. 7억원이면 아무 걱정 안 하고 하나 지을 수 있는데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신도님이 왔길래 도장들 달라고 하니까, “다른 스님 모시려니까 도저히 안 되어 못 찾았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러지 말고 합시다. 나 도장 주고 후회했소” 그러니까 좋아해요. 그래서 1991년도에 수도암 3년 결사를 끝나고 가서 남국선원을 짓기 시작해서 1994년도 개원했으니까 지금 딱 10년이 됐네요.
- 그 신도님 참 대단하시네요. 그런 시주 인연이 오늘 제주도 유일 선방, 그것도 무문관을 지으셨네요.
그 분이 남국선원 명실 공히 창건주예요. 강불심행이라고 제주도 분이에요. 재산이 그리 많은 분이 아닌데 신심으로 하셔요. 지금 70대 중반이지요. 그러니까 돈 7억원에 넘어가서 지은 게 남국선원이에요. 그런데 해놓고 나서 수좌들이 무문관에서 몇 년씩 안 나오고 잘 지내니까 잘 지었다 싶기도 해요.
충주 석종사 중창 이야기
- 내친 김에 석종사 불사 인연도 들려주시지요.
석종사 불사 인연은 길어요. 내 맏상좌가 있는데 아버님이 이북에서 와서 친척이 아무도 없고 어머님이 아들, 딸 8남매를 낳았지만 다 죽고 자기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교통사고가 났는데 아무도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참 곤란한 상황이였어요. 그 때 내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맏상좌 보고 “니가 공부해서 사십 전에 견성하면 내가 너희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사십 전에 견성하겠다고 해요. 그 때는 봉암사에 살던 때인데, 남국선원 불사도 안했을 때라 어디 갈 곳도 없어요.
참 곤혹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요. 어떤 하얀 옷을 입은 스님이 내 뒤에서 나왔는지 내 몸에서 나왔는지 앞에 딱 서더니 “아이고, 중 노릇이 시원찮으니 전생에 살았던 데도 모르는구만!” “예? 그게 어딘데요?” “죽장사도 몰라?” 그러면서 탑이 보이고 절이 보이는데 이 절이에요. “저기가 어디예요?” “중원 땅 살던 것을 잊어버렸어?” 꼭 도반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래요. “어떻게 찾아가는데요?” “인연 따라서 아침에 떠나봐.”
그래서 아침에 봉암사를 떠났어요. 걸어서 가는데 버스가 와서 손을 들었는데 충주 가는 버스예요. 그래서 충주에 가서 내리니까 산천초목 부동산이 있더라고요. 거기에 가서 탑이 있고 이러한 데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 사람 얘기가 3년 전에 이미 나온 게 있는데 아직 안 팔리고 있다는 거예요. 가 보니까 조그마한 옛 탑이 있는 폐사지인데 내가 살던 데라는 게 확 드러나요. 세상에 내가 이 터를 몰랐구나, 조그마한 탑이 고려시대 거라고 해요. 그래서 보니까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주인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샀지요.
사고는 상좌 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 살기가 안 되어서 비구든 비구니든 아들, 딸 하나 밖에 없는데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갈 데 없는 노인들을 모셔다가 내가 보림(保任)하는 셈치고 여기에서 한바탕 살겠다고 해서 모인 분이 다섯 분이에요. 그런데 할머니들이 외로워 하길래 부모 없는 아이들을 학교공부를 시키는 게 좋겠다 싶어서 다섯 명을 모아서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그 때는 오두막으로 시작해서 한 800평이었어요. 그렇게 살다가 불사를 하려고 해도 공원지역에 묶여서 못했어요. 3년 전에야 풀려서 그 때부터 이렇게 시작을 해서 지금은 10만평으로 늘렸지요.
남국선원 무문관 조성 이야기
- 다 복이고 법력이십니다. 제주도 남국선원 선방을 하실 때 처음부터 무문관을 생각을 하신 건가요?
그건 내가 옛날 천축사 무문관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어려서 안 된다고 못 들어갔거든요. 아예 상대도 안 해줘요. 어거지 쓰다가 혼만 났거든요. 내가 어디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간 게 처음이에요. 그래서 ‘두고 봐라. 내가 언젠가는 한다.’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무문관을 했지요. 무문관을 만들고 직접 1년을 살아 봤지요.
- 지금은 방에 몇 분이 계신지요?
방이 7개예요. 언제든지 7명이에요. 한번 들어가면 1년은 지나도록 하고 있어요. 그래도 너무 밀리니까 그 옆에 있는 간이시설 방도 같이 해서 여덟 분도 되고 아홉 분이 되는 거지 방은 7개예요. 1층이 무문관이고 2층은 대중 선방이지요.
- 무문관 들어가려는 분이 몇 년 치 밀려 있다고요?
지금도 6년치가 밀려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1년 만에 나와 줘야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데 지금도 어느 스님은 4년째 되도록 안 나와요. 한번 들어가면 그렇게 안 나오니까 자꾸 밀려요. 그래서 요새는 내가 인심도 잃어요. 안 나오려는 사람을 나와라 할 수도 없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왜 자기는 안 넣어주느냐고 그러고 아주 난처할 때가 있어요. 그래도 공부 때문에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 한번 들어가면 약정한 대로 내보내는 게 아니고 더 있고 싶다고 하면…….
더 있고 싶은 사람은 더 있고, 1년이 되기 3일전에 얘기해 주지요. 그런데 자기는 안나가겠다고 하고 문을 다시 잠그면 또 1년이고, 그러다 보니 뒤에 밀리고 밀리고 해서 들어가서 1년 만에 나와 주는 사람이 30%가 안 돼요.
- 굉장히 좋은 모양이네요.
좋다고 해요. 그래도 나는 만족하지 못해요. 여기는 무문관과 대중선원을 겸해서 섞어서 혼합하는 형태로 하려고 생각을 하는데 언젠가 다시 한번 하게 되면 바꿀 생각이에요. 그런데 수좌들은 좋다고 그래요.
나중에 석종사에 만약 무문관을 한다면 조그마하게 원두막처럼 해서 한 사람씩 주고는 밥은 못 갖다 준다, 밥 먹으러 왔다가 말을 하거나 그릇을 깨뜨린 사람은 나가고 밥만 먹고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어요.
남국선원 무문관 수좌 방광 이야기
- 남국선원 무문관에서 방광한 수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목격하셨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를 좀 들려 주십시오.
남의 방광 얘기 들어서 뭐하게요. 자기 방광이 나와야지……. 벌써 여러 해 전이지요. 나는 2층 방을 쓰고 행자 하나가 아래 사무실 1층을 썼어요. 창문이 선방쪽으로 나 있어요. 하루는 9시 반인가 10시 되었는데 바깥이 환해 오더라고요. 문을 열었더니 선방 앞 무문관에서 불기둥이 세 곳에서 올라와서 뱅뱅 돌아요. 기분이 이상해요. 내려가서 신도들을 깨울까 하다가 성철 스님이 “남의 방광이나 쫓아다니는 새끼 자기 방광을 못 찾고 ……. ” 하시던 말이 생각나서 남의 방광 찾아다녀서 뭐 하겠나 하고 문을 닫았지요. 그 때 그 행자가 문을 열어본 거예요. 행자가 못 견디지요. 쫓아가서 보살님들 빨리 나오라고 해서 나오니까 무문관에서 불길이 올라와서 뱅뱅 도니까 엉엉 울고 절을 땅바닥에 하고 …….
- 불기둥이 올라와서 그 위에서 휙휙 돌고 있어요?
살살 도는데 뭉게뭉게 도는 것이 안개가 피어나는 것처럼 멈춰 버렸어요. 희한해요.
- 그 방광한 수좌는 어찌 됐습니까?
그 수좌가 얼마 후에 자기는 다 마쳤다고 쪽지가 나왔어요. 내가 문 열고 들어가서 “다 마친 소식을 일러 보라” 하니까, “여여하고 여여한데 뭘 이르라고 하느냐?”고 해요. 내가 안 됐지만 귀싸대기를 올리면서 “여여하다는 놈 따로 있고, 여여한 경계가 따로 있는데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여여한 경계는 그만두고 여여한 놈이나 내놓아 보라”고 하니까 “다만 모를 뿐이다”고 얘기해요.
거기에 속았어요. 서옹 스님께 가라고 했는데 서옹 스님께 갔는데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고 해요. 서옹 스님이 “이 사람아, 여여한 게 따로 있으면 어떻게 해 여여하다는 놈이 따로 있고 여여한 것이 있으면 이미 주객이 나뉘어 있지 않은가?” 하셨데요. 그래서 이 사람이 거기에서 다시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길래 들어와 봐야 되지 않고, 또 방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가 버려 아무리 말해도 안 나와요. 그래서 지리산 쪽으로 갔지요.
선원 운영에서 어려움과 개선 방향
- 스님께서는 전국 선원장회의 대표를 맡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선원을 운영하시는 입장에서 현재 종단 선원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것이며, 혹 개선 방안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 해까지 전국 선원장 스님들이 친목 등을 위해서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국선원수좌회와 중복되는 점도 있고 해서 단일화하기로 하여 지금은 수좌회로 통합되었죠.
선원은 우리 종단의 종지종풍의 산실로서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하안거, 동안거를 정기적으로 전국 90여 개 선원에서 2천여 명이 넘는 수좌들이 대중생활을 하면서 정진한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랑입니다. 이런 전통은 세계에 내놓을 자랑거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문제도 있습니다. 법으로 볼 때 방장, 조실 스님께서 상당 법문이나 소참 법문을 자주 하시고 면담을 통해 수행자의 발심을 촉발시켜 주는 역할이 점점 미미해지고 있는 문제가 있지요. 또한 차담, 해제비 등등에 신경쓰는 풍토도 문제입니다. 선원장 스님들이 모이면 이런 문제를 염려하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전국 선원 공동청규를 제정하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 석종사 선방이 완공되면 나름대로 선원 운영을 새롭게 해 보려합니다. 선방에는 차담실을 없애고 차담은 밑의 공양간에서만 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 수좌가 공부 중에 몸이 아프다거나 치과에 갈 경우 일체의 비용을 사중에서 책임을 지도록 해서 해제비 등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
<간화선 수행지침서>와 관련하여
- 스님께서는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찬위원장을 맡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이 불사와 관련해서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전국 선원 수좌회와 선원장 스님들이 협의하여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선배 스님들께서 젊고 추진력이 있다고 해서 맡으라 하셨습니다. 실무는 교육원 불학연구소가 맡고 있는데 아마도 내년 초까지는 지침서가 나올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올 여름에는 여기 석종사에서 그 무더위에도 1박2일 동안 두 차례나 토론을 하여 대략적인 윤곽은 잡았습니다. 제가 출가해서 스님들이 모여서 그처럼 열성적으로 자료를 보고 토론하여 내용을 정리해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 7시부터 시작해서 밤 12시 넘어까지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불사를 반대했습니다. <육조단경> <서장> <선요> 등 조사어록에 다 나와 있는데 뭘 또 만드느냐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요즘 제3수행법이나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들의 법문집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보급되는 반면에 우리 조사어록은 한문투로 되어 있어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는 문제가 있어 생각을 바꿨습니다.
돌아보면 고려시대에 10여 개 종파가 융성하다가 조선시대 선교양종으로 다시 종단이 해체당한 시대에도 면면히 간화선은 이어져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수행 전통 중에서도 간화선은 불교를 가장 빛나게 하였고,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산중 선원에서는 간화선이 주류인데 일반에는 너무 어렵게들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선원장 스님들이 의논하여 현대적인 결집을 하듯이 간화선을 체계적으로 알리는 불사를 해보자 하여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현대인을 위하여 그렇게 체계를 잡아 내놓고 자꾸 보완해 나가면 간화선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지난 해와 올해 여러 방장, 조실 스님들께서 서로 약속한 듯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제 수행자를 제접하고 지도하는 몫은 선원장급 스님들에게로 넘어 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 말씀해주십시오.
세월이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큰스님들께서 저렇게 가시니 이제 60대와 50대 후반의 선원장급 스님들이 역할을 대신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성철 큰스님이나 서옹 큰스님 같은 분들도 50대에 방장, 조실을 맡으신 분들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신 것이 오십여섯인가 그랬지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수행력, 법력의 문제이지요. 아무튼 시대가 요구하니까 잘 해나가야겠지요.
간화선이 왜 최상승이고,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 간화선을 실참하시고 지도하시는 분들께서는 “간화선이 최상승(最上乘)이다, 지름길이다”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이해를 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것은 지금까지의 서양의 사상철학이 의식세계를 다루었지만, 불교사상은 의식세계,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 가르침이기 때문에 호응을 받을 것이다.” 선이란 생각의 세계를 초월해서 말길이 끊어진 세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언어문자나 논리를 넘어선 세계를 자기 마음에서 바로 깨치는 길을 일러주기 때문에 최상승이다, 지름길이다 말합니다.
-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혼탁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선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습니까? 한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세상은 본래 혼탁한 것도 아니고 혼란하지도 않습니다. 혼탁한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다 차지해도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는 마음이 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잠재의식입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을 바로잡아야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지요. 우리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이 잠재의식의 세계가 있는데 이 잠재의식을 바로 해야 운명이 바뀝니다. 참선은 바로 이 잠재의식을 바로잡아 운명을 개척하는 길입니다. 모든 문제를 내 안의 문제로 보고 내 마음을 바로 해서 업력과 잠재의식을 바꿔 나가면 세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끝>
첫댓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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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큰 스님들의 일화를 접하고 보니
더욱더 심신이 성성해 지네요.
더욱더 정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