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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질투만큼 사람을 매혹하는 감정은 다시 없다. 이 두 감정은 열렬한 소망을 지니고 있어서 쉽사리 상상이나 암시의 형체를 취하고, 특히 그 대상물 앞에선 그 감정이 당장 눈에 드러난다. 이것이 매혹력(사실상 이런 것이 있다면)을 갖게 하는 점이다.
우리는 또한 <성서>에서 질투를 '악의 눈'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점성학자들은 별의 불순한 영향력을 '나쁜 시좌' 라고부른다. 그러므로 질투의 작용에는 눈에서 마력을 투사한다든지 빛을 발산하는 일이 들어 있음을 옛날부터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주의 깊은 사람은 질투의 눈의 충격이 가장 큰 해독을 끼치는 것은 그 질투의 대상물이 영광이나 승리의 한복판에 놓였을 때라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질투에 날이 서기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질투 받는 쪽 인물의 심기가 표면에 그대로 노출되어 그 충격에 접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는 그만 두고,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남을 질투하기 쉽고, 어떤 사람이 가장 질투를 받기 쉬우며, 공적 질투와 사적 질투의 차이는 어떠한가, 이런 점을 논해 보기로 한다.
그 어떤 미덕도 갖지 않은 자가 흔히 남의 미덕을 질투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선이나 타인의 악이나 그 중 어느 것을 양식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를 소유하지 않은 자는 후자를 밥으로 하려고 한다. 타인의 미덕에 도달할 가망이 없는 자는 타인의 행운을 꺾음으로써 동등하게 되고자 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흔히 질투심이 강하다. 남의 일을 많이 아는 것은 그 수고가 모두 자기의 신상에 관계되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남이 되어가는 꼴을 보는 데서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쾌감을 갖는 것이 틀림없다. 오로지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질투할 만한 것을 별로 보지 못한다. 즉 질투란 방랑적인 감정이어서 거리를 헤매고 집에 붙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는 대체로 악의가 있다."
명문가 사람들이 새로 출세하는 사람들애 대해서 질투하는 일이 많다. 그것은 양자의 거리가 바뀌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따라오면 자신이 후퇴하는 것같이 느끼는, 일종의 착시현상과 비슷한 것이다.
불구자, 고자, 노인, 사생아들은 질투심이 많다. 자신의 신상을 개선할 수 없는 자는 타인의 신상을 손상시키는 데에 있는 힘을 다한다. 다만 예외로 이러한 결함이 매우 영웅적인 성격에 깃드는 경우인데, 그런 때에는 그들은 자기의 자연적 결함을 자기의 명예의 일부로 삼으려고 한다. 고자, 절름발이가 이러한 훌륭한 일을 하였다는 것으로써 기적적이라는 명예를 얻고자 노리는 것이다. 고자 나르세스, 절름발이 아게시라우스, 타메를랑은 그런 예이다.
재난과 불행을 겪고 나서 일어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시대와 사이가 벌어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서 남의 재난을 자기의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한다.
투박한 생각, 쓸데없는 허영심에서 다방면에 출중하고자 한 사람은 언제나 질투한다. 그들에게는 질투의 재료가 끊일 새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중 어떤 방면에선가 그들을 능가함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제 아드리안의 성격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 방면에 출중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었기 때문에, 시인이나 화가나 갖가지 기술자들을 맹렬히 질투하였다.
마지막으로, 가까운 친족이나 동료, 또는 같이 자라난 사람들은 상대방이 출세하면 그것을 질투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불운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고 그것이 멸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서 자꾸 상대방의 출세가 기억에 떠오르고, 다른 사람애게도 눈에 띄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질투는 사람들의 얘기나 평판으로 인하여 박차를 가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카인의 그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는 아주 악질적이고 악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아벨이 드린 희생을 물리치고 카인의 것을 받아들였을 때, 곁에서 이것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질투하기쉬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한다.
다음으로 다소간에 질투의 대상이 되기 쉬운 사람에 대해서 말해보자.
첫째, 뛰어난 덕을 소유한 자들은 그들이 승진하여도 별로 질투를 받지 않는다. 그들의 행운은 그들에게 당연히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금의 회수를 질투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지나친 수상이나 은혜를 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질투는 항상 타인과의 비교에 따르는 것이다. 비교가 없는 데에는 질투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은 다른 국왕에 의해서밖에는 질투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무가치한 사람은 처음 출세했을 때에 가장 질투를 받고 시간이 감에 따라 그것을 극복하지만, 이와 반대로 가치 있고 유능한 사람은 그들의 행운이 오라 계속될 때에 가장 질투를 많이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능은 오래 계속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변함 없지만 신인들이 자라나서 그것을 덮음으로써 그 빛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명문의 집안 사람은 출세하여도 별로 질투받지 않는다. 그들의 출신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고, 그들의 행운에 별로 더 많이 첨가되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는 평지보다는 둑이나 급격히 솟아오른 땅 위에 한층 뜨겁게 쪼이는 햇볕과 흡사하다. 같은 이유로 순차적으로 승진하는 자는 급히 '비약적'으로 승진하는 자만큼 질투를 받지 않는다.
큰 노력과 심로와 위험을 수반한 명예를 얻은 자는 그다지 질투를 받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힘들여서 그 명예를 얻는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동정까지 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동정은 언제나 질투심을 완화한다. 그래서 생각이 깊고 온건한 정치가는 그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한탄한다. "이 얼마나 우리는 고생하는가?" 라고 부르짖는데 물론 그 말은 그들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질투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과해진 일에 대한 얘기이지, 그들이 저 좋아서 손을 댄 일애 대한 얘기는 아니다. 즉 불필요하게 야심에 끌려 일을 독점하는 것보다 더 남의 질투를 사는 일은 없다. 반면에 지위 높은 사람이 그 부하에게 각각의 권리와 그 지위의 존엄을 충분히 보장해 주는 것보다 그 자신에 대한 질투를 해소시키는 것은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자신과 질투 사이에, 그만큼 많은 장벽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권세의 위대함을 오만불손하게 드러내는 자는 가장 질투받기 쉽다. 그들은 외관상의 호세에 의해서, 또는 모든 반대와 경쟁을 압도함으로써,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이지 않고선 만족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대단치 않은 점에선 때로는 고의로 내 뜻을 굽혀 굴복함으로써 오히려 질투 앞에 희생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권세를 솔직히 정정당당하게 표시하는 것은 (오만과 허영에 빠지지 않는 한) 음흉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질투를 덜 받는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처럼 행동하면, 자기 행운의 정당성을 자기가 부인하고, 자기의 무가치를 자각하고 있는 듯이 보임으로써 남에게 질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의 결론으로서 말할 것은, 내가 첫머리에서 질투의 작용에는 다소 거기에 마술적 요소가 들어 있다고 말했는데, 역시 질투의 요법으로서도 마술적 요법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이다. 즉 주기(주술의 기운)를 자신으로부터 옮겨서 남에게 넘겨주는 방법이다. 이렇게 할 목적으로 현명한 큰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질투를 끌어갈 사람을 누군가 무대 위에 내세우는 것이다. 때로는 대신들이나 관리들을, 때로는 동료나 협조자, 기타 이런 등속을 내세운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세상에는 권력과 일만 차례온다면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는 극성스럽고 모험적인 성질의 인간이 얼마든지 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적인 질투에 대하여 말해 보자. 사적 질투에는 좋은 점이 아무것도 없는데 공적 질투에는 약간의 좋은 점이 있다. 공적 질투는 사람이 너무 강대해졌을 때 그것을 억제하는 패각추방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 질투는 역시 하나의 강대한 자를 구속 견제하는 고삐인 것이다.
이런 유의 질투는 라틴어의 invidia라는 뜻으로서 근대어에는 discontentment(불만)의 뜻으로 들어왔다. 그에 대해서는 '폭동'을 논할 때에 얘기하겠다. 이것은 전염병과 흡사한 국가의 병이다. 전염병이 건전한 사람에게도 퍼져서 그것을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투가 일단 국가를 침범하면, 국가의 가장 건전한 활동까지도 썩혀서 악취 나는 것으로 변질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인기 정책을 가끔 남용해서 쓴다 해도 별 효과가 없다. 도리어 그것이 다만 약점 혹은 질투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되어 폐해는 더 심하다. 이 점도 전염병애서 흔히 있는 바와 같아서, 두려워하면 도리어 그것을 불러들이게 된다.
이 공적 질투는 국왕이나 국가 그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주요한 관리나 대신들에게 주로 화살이 가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이 하나의 원칙이다. 즉 만일 대신에 대한 질투가 너무 큰데 실은 그가 이것을 받을 만한 이유가 박약할 경우, 또는 질투가 국가의 모든 대신들에게, 말하자면 균등하게 쏠릴 경우에는, 그 질투는 (뚜렷하지 않지만) 실은 국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공적 질투 또는 불만, 그리고 첫머리에서 논한 사적 질투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겠다.
그리고 우리는 질투의 감정에 관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 둔다. 질투는 모든 감정에서 가장 집요하고 지속적인 것이다. 다른 감정은 가끔 때에 따라 일어날 뿐인데, 질투에 대해서는 "휴일이 없다"는 말로 잘 표현했던 것이다. 그 감정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하여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애와 질투는 사람을 애태워 못 견디게 한다고 한다. 다른 감정은 그처럼 지속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다. 그것은 또 가장 사악.비열한 감정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감정은 악마의 속성으로 되어 있고, 악마는 "밤에 보리밭 사이에 '가라지(강아지풀)'를 덧뿌리는 질투자"라고 불린다. 질투는 항상 교활하게 어둠 속을 돌아다니고, 보리 같은 선량한 물건을 해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나르세스: 로마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장군이 된 사람
아게시라우스: 스파르타의 왕(BC 398~361)
타메를랑: 14C 아시아 서반부를 점령하여 큰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의 별명
아드리안: 로마의 Hadrian 황제(117~138)
패각추방: 옛 그리스 사회에서 안녕을 해칠 우려가 있는 인물을 조개 껍데기에 의한 공중 투표로써 추방한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