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밟는 소리
나희덕
그날 새벽 꿈에서 들었다
누군가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가 얼마간 곁에 머물렀다
먼 길 떠나기 전
그녀가 다녀간 것이었구나,
다음 날 아침 부음을 듣고서야 알았다
접시의 물이 증발하듯
가쁜 호흡을 내려놓는 순간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식은 심장 위에 흰 꽃을 올려놓았다
더이상 지상의 양식을 삼킬 수 없게 된
더이상 지상의 공기를 마실 수 없게 된
그녀는 죽은 뒤에도
내 속에서 한없이 죽어간다
흰 눈 위에서
텅 빈 눈동자 속에서
아무 말도 건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려 했던 것일까
어느 눈길에서 서성이고 있는지
내 오른쪽 귀를 떠난 눈 밟는 소리는 아직
왼쪽 귀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죽음을 고요한 묵음이라 말하는가
그녀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눈 밟는 소리 들린다
겨울새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 자리
그녀의 발이 시려워서 어쩌나
나는 발을 구르고
눈 밟는 소리 멀어져간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
나희덕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가능주의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