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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발효된 '개정 경범죄 처벌법'에 따라 경찰은 가위와 자를 들고 '장발'과 '무릎 위 17㎝ 이상 미니'에 대한 집중 단속에 들어갔다. 그 해에만 1만2870명이 장발 단속에 걸려 대부분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형도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69년 10월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 때 젊은 여성 관객이 무대 위로 속옷을 던진 사건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1970년대 초, 유신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통·블·생(통기타·블루진·생맥주)'으로 상징되는 '청년(靑年) 문화'가 대두했다. 1974년에는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1972~1973)한 소설가 최인호(29), 가수 양희은(22)·이장희(27), 저항가요가 된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23), 바둑기사 서봉수(21), 전 고려대 응원단장 이상용(30) 등이 청년들의 '우상'으로 지목됐다.
도대체 이 새로운 '청년문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1974년 4월부터 논쟁이 불붙었다. 서울대 교수 한완상은 "서양 저항문화의 표피만 들어왔을 뿐 창조적 정신이 없다"고 비판했고, 이화여대 교수 이어령은 "권위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평가했다. 어쨌든 그 문화의 핵심이 '저항'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는 셈이었다. 당시 청년층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희귀한 영화인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대학생 주인공은 송창식의 '왜 불러'가 배경음악으로 깔린 가운데 장발단속을 피해 달아나고, 자전거를 탄 채 '자유'의 상징인 동해바다로 뛰어든다.
입력 : 2008.07.18 03:08 / 수정 : 2008.07.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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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 유류의 5%를 절감하고, 2㎞ 정도는 걸어가는 운동을 펼친다. 대낮 소등(消燈)을 생활화하며, 광고 네온사인과 목욕탕 신규 허가를 규제한다." 1973년 11월 8일, 정부는 '에너지 소비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다. 그 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유발한 제1차 오일쇼크는 막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한국 경제에 큰 위기를 몰고 왔다. 2.8달러이던 유가는 다음해 3월까지 11달러로 네 배가 뛰었다.
신문 제목은 거의 날마다 '인상(引上)'이라는 말로 뒤덮였다. 밤거리는 어두워져 뺑소니 사고도 늘었다. 사람들은 화장지·비누·라면 같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다. 이제 석유 사용을 10% 줄이자는 강력한 운동이 펼쳐졌다. 관공서는 전구 3분의 1을 빼냈고, TV 방영은 하루 4시간 단축돼 아침방송이 없어졌다. 1974년 1월 14일의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고 TV와 냉장고를 포함한 '사치품'에 대한 과세를 늘렸다. 대통령도 여름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연 채 파리채를 들고 살았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거뒀다. 1974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8.1%였고, 수출은 전년 대비 38.3%가 늘었으며, 국민총생산 실질 증가율은 7.1%였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72~1976)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11%였다. 대한민국은 이 시점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과감한 역(逆)발상을 하게 된다. 중동에 석유값으로 낸 돈을 다시 찾아오자는 것이었다. 1월 30일, 경제제2수석비서관 오원철(吳源哲)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에게 "오일달러가 쌓이는 중동시장에 공장을 짓고 건설 인력을 수출하자"고 건의했다. 월남에서 철수한 한국 기업들은 대거 중동으로 진출했다. 절정을 이룬 1978년 열사(熱砂)의 땅에서 소금땀을 흘린 한국 노동자는 14만명이 넘었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중동에서 벌어들인 205억 달러는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육박했다.
입력 : 2008.07.19 03:12 / 수정 : 2008.07.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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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처음으로 개통된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기념식이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중요한 연설문을 읽고 있었다.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공산권에 대한 문호 개방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제의한 1973년의 6.23 선언에 이어, 이번에는 북한에 불가침조약을 제의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때 장내 어딘가에서 "퍽" 소리가 났다. 맨 뒷줄에 앉아있던 20대 남자 한 명이 들고 있던 권총을 자기 허벅지에 오발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 동안 시종…." 대통령의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이 사내는 자리를 박차고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해 뛰어갔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청중이 "와~"하는 함성을 지르는 순간, 연단 뒤쪽에 앉아 있던 경호실장 박종규(朴鐘圭)가 총을 들고 뛰어나왔고, "탕"하는 두 번째 발사음이 들렸다. 총탄은 대통령 앞의 연대를 맞췄다. 대통령은 연대 뒤로 몸을 숙였고, 세 번째 총성 직후 연단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총탄에 맞은 것이다. 범인은 한 청중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져 제압당했고, 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에워쌌다. 모든 것이 순간적이었다. 2분 뒤, 대통령은 다시 연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고 침착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육 여사는 그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범인으로 붙잡힌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은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접촉, 박정희 암살의 지령을 받았으며 일본인의 여권을 위조해 입국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넉 달 뒤 사형에 처해졌다.
대통령은 암살을 모면했지만, 평소 국민의 신망을 얻고 있던 대통령 부인이 서거했기에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은 컸다. 8월 19일 청와대 앞뜰에서 열린 발인식이 끝나자,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을 붙잡은 채 운구행렬이 경복궁을 돌 때까지 묵묵히 지켜 봤다. 다음해 5월 21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과의 회담에서 창 밖에 새 한 마리가 홀로 날아오자, 대통령은 "내 신세 같다"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입력 : 2008.07.21 02:58 / 수정 : 2008.07.2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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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란 양력 5~6월쯤이면 가을에 걷었던 식량은 바닥이 나고 여름 곡식인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어려운 사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1970년대 들어 그 말이 과거의 유산으로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적극적인 식량 증산의 노력이 있었다.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겼던 대통령 박정희는 1960년대 중반 신품종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 농촌진흥청이 동남아 신품종을 개량해 내놓은 새로운 볍씨의 재배가 시작됐다. 정식 명칭 IR667-98-1-2인 이 벼를 사람들은 '통일벼'라 불렀다. 보통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가 보통이었고 200~300개가 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못자리 때 싹이 안 터서 울었지만 엄청나게 벼를 쏟아내는 걸 보고 웃었다"고 말했다.(제1회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당선자 이완주씨 증언) 통일벼는 점차 '한국 토양에 적합한 다수확 품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됐고, 1972년 16%였던 보급률은 1977년에 55%까지 늘어 쌀 증산의 견인차가 됐다. 쌀 생산량은 1974년 3000만석을 돌파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自給)이 달성됐다. 쌀 4000만석을 돌파한 1977년에는 전국 벼 평균수량이 1000㎡당 494㎏으로 '단군 이래 최고 수량'을 기록했다. 이 무렵 동남아 국가들이 신품종을 개발해 식량을 증산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대한민국도 이뤄내게 됐던 것이다. 통일벼는 그 후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급이 중단돼 후속 품종들에 임무를 넘겨 줬다.
입력 : 2008.07.22 02:48 / 수정 : 2008.07.22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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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됐고, 이 사건으로 이철·유인태 등 14명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는 79.8%의 투표율과 73.1%의 지지율을 보였다. 4월 8일에는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린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됐다. 같은 날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마침내 5월 13일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조차 금지됐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당할 수 있었다. 4년 동안 이어진 긴급조치 9호를 통해 박정희는 상대적으로 정국이 안정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화를 계속 추진할 수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암흑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5년 4월의 월남(남베트남) 패망 이후 안보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1976년 8월 18일에는 북한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나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10월에는 한국인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로비를 펼쳤음이 폭로된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일어났고, 이 와중에 미국의 청와대 도청 의혹이 제기됐다. 1977년 초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Carter)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한·미 관계의 악화로 인해 유신체제의 위기가 심해지게 됐다.
입력 : 2008.07.23 03:15 / 수정 : 2008.07.23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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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수출 100억 불을 돌파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977년 12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였다. 온 나라가 흥분에 빠졌다. 100억 달러! 쉽게 믿기지 않을 숫자였다.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하던 1962년의 수출액은 5000만 달러였고, 1964년에야 1억 달러를 달성했었다. 10억 달러를 넘은 것은 1970년의 일이었다.
100억 달러 돌파는 '한강의 기적'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는 상징과도 같았지만 대통령은 그날 이렇게 말했다. "이 기쁨과 보람은 결코 기적이 아니요, 국민 여러분의 고귀한 땀과 불굴의 집념이 낳은 값진 소산이며, 일하고 또 일하면서 살아 온 우리 세대의 땀에 젖은 발자취로 빛날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렸다. 우리는 불과 7년이 걸렸다.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정부의 구호로 표현됐다. 일부에선 공허한 선전이라고 여겼으나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모두 목표보다 4년이 앞당겨진 1977년에 성취됐다. 오일쇼크와 통상 마찰의 장벽을 넘어섰고, 중동 진출과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철강·전자·선박·금속·기계 제품의 수출을 늘린 결과였다. 그해 6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인들이 몰려온다'는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었다.
2007년 한국의 총수출액은 3714억 달러였다.
입력 : 2008.07.24 03:27 / 수정 : 2008.07.24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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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62세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돌아오다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게 했다. 마치 그가 지난 18년 동안 이뤄놓은 '한강의 기적'을 눈에 담아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 전날, 대통령은 청와대 뜰을 거닐다 낙엽 하나를 줍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오동나무 낙엽 하나가 가을이 깊어감을 알린다고 했는데…."
26일 오후 6시 5분,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김재규·차지철과 함께 만찬 자리에 앉았다. 40분쯤 지나 자리를 빠져 나온 김재규는 부하들을 불렀다.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각하까집니까?" 김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7시 40분, 박정희가 합석한 가수 심수봉의 반주로 모델 신재순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김재규는 욕설을 내뱉으며 차지철의 팔에 권총을 발사했다. "뭣들 하는 거야!"(박정희) "경호원, 경호원!"(차지철)
입력 : 2008.07.24 19:28 / 수정 : 2008.07.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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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과 함께 역사는 47일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10·26 사태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에게 실권이 집중됐다. 사조직 '하나회'가 중심이 된 전두환의 신군부(新軍部)는 10·26 당시 정승화가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것 등을 근거로 그를 강제 연행했다. 하극상이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崔圭夏)는 "국방장관 불러오라"며 정승화 체포 재가(裁可)를 새벽까지 거부했고, 그 사이 신군부측 1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사단장 노태우(盧泰愚)의 9사단 병력은 중앙청으로 진입했다. 신군부는 군권(軍權)을 장악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신학기가 되자 대학생들은 정부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 구상을 사실상 유신체제를 연장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10만여 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17일, 신군부는 사회불안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독단적으로 단행하고 2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았다.
입력 : 2008.07.25 20:08 / 수정 : 2008.07.26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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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김대중(金大中)은 체포됐고 김영삼(金泳三)은 가택 연금됐다.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은 정국을 장악했다. 전국 주요 지점으로 출동한 군 병력 중 7공수여단 33·35대대는 전남 광주(光州)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전남대 교문 앞에서 학교를 점령한 33대대와 학생 200여 명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난폭하게 진압했다. 학생들은 금남로에 집결한 뒤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선생 석방하라"고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일 시위대 수만 명과 계엄군은 금남로에서 대치했다. 21일 시위대는 탈취한 시내버스와 장갑차를 몰아 돌진했고, 계엄군은 시위대에 본격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했다. 진압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둘러싸고 강·온파로 나눠 대립했다.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 진압에 나서 도청을 탈환했다. 5시 21분에 상황은 '종료'됐다.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는 광주 시위 관련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3명이며 행방불명자는 47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입력 : 2008.07.27 19:34 / 수정 : 2008.07.28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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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이후 신군부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무렵 군 장성들이 모인 한 파티에서 가수 윤형주가 '두 개의 작은 별'을 불렀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에서 한껏 고조됐던 좌중의 분위기는 그 다음 가사에서 갑자기 싸늘하게 변했다고 한다. "별이 지면 꿈도 지고 슬픔만 남아요…."
새 헌법이 공포되던 10월 27일, 계엄군이 '비리 조사'를 구실로 전국 사찰에 투입돼 승려들을 연행·폭행하고 서류를 압류한 '10·27 법난(法難)'이 일어났다. 11월 하순에는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45개사의 매체를 없앤 언론통폐합이 단행돼 TBC는 KBS에,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됐다. 전두환이 선거인단 5271명 중 90.2%의 지지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해를 넘긴 1981년 3월 3일의 일이었다.
입력 : 2008.07.28 20:38 / 수정 : 2008.07.29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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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2월 컬러 TV방송을 시작했던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2차 오일쇼크도 끝나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무렵이었다. 1981년 5월에는 대규모 관제(官製) 민속문화 축제인 '국풍 81'이 여의도에서 열려 100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1982년 1월 2일에는 중·고생 교복·두발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고, 6일 0시부터는 미 군정 이후 36년 만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5공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스크린(Screen), 섹스(Sex), 스포츠(Sports)로 돌린다는 '3S 정책'을 교과서적으로 펼쳤다. 통금해제로 본격적인 '밤 문화'가 생겨나 신흥 숙박업소와 심야극장이 전성기를 이뤘다. 첫 심야영화는 1982년 2월의 '애마부인'이었는데 개봉 첫날 인파로 극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 그 전 해의 88올림픽 유치로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이제 스포츠 진흥을 위해 프로야구 출범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지역적 특색을 살리고 스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입력 : 2008.07.30 03:08 / 수정 : 2008.07.30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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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상 큰 비극으로 남은 두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해였다.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편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됐고, 탑승자 269명(한국인 110명) 전원이 사망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정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KAL기는 0시15분(한국시각) 소련군 레이더망에 잡혔고, 3시25분 소련군 수호이 15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았다. 군대가 비무장 민간항공기를 공격해 승객들을 살해한 만행이었으나 진상은 여전히 베일 속에 있다. KAL기를 격추한 소련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200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종 명령은 모스크바에서 하달됐으며, 추락 지점에서 발견된 시신은 6~7구뿐이었다"고 말했다.
38일 뒤인 10월 9일, 6개국 순방길에 올랐던 대통령 전두환은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에서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날 아침 행사장 안내를 맡은 버마 외무장관이 차 고장으로 5분 늦게 영빈관에 도착했다. 기분이 상한 듯 대통령은 3분을 늑장부렸다. 대통령의 차가 행사장을 향해 가고 있던 오전 10시28분(현지시각),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테러 폭탄이 터졌다. 미리 와 있던 부총리 서석준, 외무부장관 이범석,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 등 정부 고위 인사를 포함한 17명이 순직했다. 폭탄을 설치한 범인들은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북한 정찰국 특공대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작원 3명 중 신기철은 사살됐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됐으며,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민철은 2008년 5월 미얀마 감옥에서 죽었다. 전두환은 훗날 "격분한 군 지휘관들이 육·해·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전방을 돌면서 말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버마는 이후 북한과 24년 동안 단교했고, 대한민국은 제3세계와의 외교관계에서 북한을 앞지를 수 있었다.
입력 : 2008.07.30 20:34 / 수정 : 2008.07.31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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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정부와 대기업의 유착이 더 심해지기도 했지만 1981년부터는 6~8%의 성장률이 회복됐다. 이제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부터 올림픽의 해 1988년까지, 한국 경제는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好況)'을 맞게 된다. 저(低)달러(엔고), 저유가, 저금리라는 국제시장의 '3저 현상'이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강화했고, 개항 이래 처음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됐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한국 경제가 드디어 자립경제를 성취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일시적 착시로 인해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고착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제 이 새로운 계층에게 제5공화국의 권위주의 정치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되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새로 약진하던 야당의 지지층이 됐다.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대중(金大中)이 1985년 2월 8일 귀국했고, 12일의 12대 총선에선 갓 창당한 신민당이 여당을 6% 차로 추격했다. 1983년의 학원자율화와 1985년의 금서 해제 이후 학생운동권의 세력도 커졌다. 일부 급진 세력은 1986년 5·3 인천사태와 같은 폭력 사태를 낳았다.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 운동이 확산됐다. 그리고 1987년이 밝았다.
입력 : 2008.07.31 21:59 / 수정 : 2008.08.01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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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총재 이민우의 '내각제 구상' 이후 야권이 일시 분열 양상을 보이자,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은 간선제를 규정한 기존 헌법을 옹호한다는 '4·13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이 대표하는 재야 세력이 연합해 개헌 투쟁에 나섰다. 5월 18일 폭로된 박종철 사건 축소·은폐의 진상은 여기에 불을 붙였다. 6월 2일, 전두환은 민정당의 13대 대통령 후보로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를 지명했다.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 주십시오."(노태우)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마침내 민정당이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식을 열던 10일, 4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2400여 명이 연행됐다. 그날부터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의 33개 도시로 확산됐으며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중산층이 대거 참여했다. 26일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나섰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와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사태는 심각했다. 당시 불안해진 노태우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할 생각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일 오전 10시30분, 전두환은 군 고위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소집하고 군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했다.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압해요." 오후 2시,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전두환을 찾아와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계엄령 선포는 한·미 동맹을 저해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 같은 불행한 사태를 재발할 수 있습니다…." 오후 4시30분, 계엄령은 유보됐다. 5공은 사면초가였다.
입력 : 2008.08.02 02:49 / 수정 : 2008.08.02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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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5공 정부의 대(對)국민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전국은 일시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6·29 선언은 6월 항쟁의 소중한 결과물이자 '87년 체제'로 알려진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점이기도 했다. 이로부터 권위주의 청산이 시작됐고 시민사회가 성장했다. 5공 내내 억압됐던 노동운동의 물꼬도 터졌다. 이해 3749건의 노동쟁의(전년의 13.6배)가 있었는데 그 중 3628건은 6·29 선언 이후에 일어난 것이었다(87년 노동자 대투쟁). 여야 합의로 마련된 새 헌법은 10월 27일의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로 확정됐다. 대통령 선거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했으며 국민 기본권을 신장한 이 '6공 헌법'은 지금까지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1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현실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도 출마해 '1노(盧) 3김(金)'의 4파전을 이뤘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양김(兩金)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고 갈라섬으로써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당시 빈민운동가 제정구가 "대통령보다 국부(國父)로 남으시라"고 하자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열화 같은 성원을 외면하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입력 : 2008.08.04 04:23 / 수정 : 2008.08.04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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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가 전부인 것처럼 알려졌던 이 나라에서 세계 160개국 1만3000여명 선수단이 참여하는 제전(祭典)이 열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건국 40년, 이제 부족하나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두 번의 반쪽 대회를 극복하고 동·서 화합의 큰 무대인 스물네 번째 올림픽을 마련했던 것이다. 5공 때 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던 노태우는 서울 개최를 반대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IOC 위원들이 쑥덕거리자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만약 개최지를 변경하면 잠실주경기장 한가운데에 사마란치 위원장과 위원 81명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에 '세계 평화를 망친 자들이 여기 묻혀 있노라'고 새기겠다." 서울올림픽은 33개의 세계 신기록과 227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냈으며 슐레이마놀루(역도), 비온디(수영), 조이너(육상), 부브카(장대높이뛰기) 등 숱한 스타들을 낳았다.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의 성적을 거뒀다. "독일인 같은 정확성과 미국인 같은 기업가정신, 일본인 같은 친절로써 치른 행사"라며 세계는 한국을 극찬했다. 서울과 인천의 소매치기들이 모여 "외국인을 털지 말자"며 '휴업'을 결의했을 정도로 온 국민은 똘똘 뭉쳤다. "한국의 가을 하늘을 사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큼 날씨도 쾌청했다.
입력 : 2008.08.05 03:10 / 수정 : 2008.08.05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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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고르비는 그 때만 해도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 같았지만, 나중에 대통령을 그만 두고 만나보니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정상회담 이후 한·소 관계는 급물살을 탔고, 예정보다 3개월 앞당긴 9월 30일에 수교했다. 그 직전 북한을 방문해 한·소 수교 방침을 통보했다가 협박당하다시피 했던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조기 수교에 큰 역할을 했다.
세계 냉전체제의 해체 직전인 1980년대 말, 대한민국은 대단히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적성(敵性) 국가'로 분류됐던 공산권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이며, 그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었다. 1983년 외무장관 이범석이 처음 사용했던 용어인 '북방정책'에서 '북방'은 곧 '공산권'의 다른 표현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의 '7·7 선언'으로 북한·소련·중국에 대한 개방 의지를 밝혔고, 이로부터 '중공(中共)'이란 용어가 '중국(中國)'으로 바뀌었다. 88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성공상(像)을 본 동구권은 무척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對) 공산권 수교의 봇물이 터졌다.
입력 : 2008.08.06 02:37 / 수정 : 2008.08.06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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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20일의 광역 지방의회 선거에서 집권 민자당은 전체 866명 중 564명을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뒀다(그달 3일 '정원식 총리 밀가루 폭력 사건'이 있었다). 신민당 총재 김대중의 진퇴 문제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우루과이라운드 반대로 할복을 시도했던 농민 후계자가 당선됐고(전북 장수), '전설의 투수' 최동원(부산 서구)과 '장군의 손녀' 김을동(서울 동대문)은 고배를 마셨다. 고려 초기 이래 한국은 1000년 가까이 지방자치의 전통이 약한 나라였다. 건국 이후 지방자치제는 3권분립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고 제2공화국 때인 1960년 12월에는 시장·도지사 선거까지 치러졌지만, 박정희 정부는 중앙집권적 근대화를 위해 지방자치를 전면 중단했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에도 '지방자치제 실시'의 조항이 있었을 만큼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1988년 3월의 지방자치법 개정에 이어 드디어 1991년 3월 26일 주민 직선에 의한 기초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지방자치제는 한국 사회에 수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지역 주민의 일상생활까지 민주주의의 요소가 도입됐고 자율적인 지방 정치와 다양한 행정 서비스, 축제와 문화행사를 통한 지역 정체성 모색이 나타나게 됐다. 반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갈등과 소통 부족,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라 불리는 지역이기주의, 단체장의 권한 남용과 토호(土豪)와의 유착 등 숱한 문제점들도 드러났다. 정부청사보다도 넓은 청사를 짓는 '허세'와 재정 자립도가 낮은 '궁핍'도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입력 : 2008.08.07 03:10 / 수정 : 2008.08.0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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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빠른 랩과 리드미컬한 비트, 메탈 사운드의 기타, 격렬하면서도 화려한 춤 동작,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말을 못했어/ 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어"('난 알아요')처럼 군더더기 없이 직설적인 가사에, 기성세대는 황당해 했고 10대와 20대는 열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음반은 두 달 만에 모든 차트의 정상에 올랐고 180만 장이 팔렸다. 노래만을 들려주던 전통적 가수들은 TV에서 퇴출돼 갔다. 서태지의 '저항'은 이념의 산물이라기보다 '소외된 자들의 리더를 자임하며 만들어 낸 분노'(평론가 임진모)에 가까웠다. 1993년부터 지식인들도 서태지를 문화적 지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메시스'라는 평론가 집단은 서태지를 "우리 시대의 혁명가이자 예술가"로까지 평가했다.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1991년의 '분신 정국'과 소련 해체 이후 기존 운동권 이념은 쇠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상하는 가운데, 거대담론에서 벗어난 탈(脫)이념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자기 표현이 강한 세대가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TV를 보며 자란 이들은 불확실성과 지루함을 본능적으로 거부했으며 이미지와 속도감에 탐닉했다. '신세대'라는 말조차 금세 진부해져 'X세대'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문화적 소비를 위한 구매력 또한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했다. 이들은 서태지를 스타로 만든 동시에 '서태지 세대'라는 칭호를 들으며 소비사회의 총아(寵兒)로 부상했고, 새로 등장한 PC통신의 이메일과 채팅을 통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서울대 교수 송호근은 말한다. "신세대가 성공한 것은 기존 질서의 부정과 파괴까지였을 뿐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어떤 대안적 질서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입력 : 2008.08.08 00:42 / 수정 : 2008.08.0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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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1992년 12월의 대선에서 당선됐고, 193만표 차로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0여 년 만에 군(軍) 출신이 아닌 대통령의 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렀다. 3월 5일 육사 졸업식 때 대통령이 "올바른 길을 걸어온 군인에게 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은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고 할 때만 해도, 그가 그렇게 빨리 칼을 빼 들 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3월 8일, 김영삼은 군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경질했다. 군 최강의 인맥이자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배출한 군내(軍內) 사조직 '하나회'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다음날 김영삼은 청와대 회의에서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씩 웃었다. 비서관들은 "각하, 국민들이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숙정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스스로를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로부터 벌어진 대대적인 군내 물갈이로 취임 석 달 만에 무려 42개의 '별'이 떨어졌다. 12·12 관련 장성들을 예편시켜 하나회 해체의 절정을 이룬 5·24 숙군(肅軍) 때는, 대통령이 달아 줄 '별 계급장'이 모자라 국방부 간부들 옷에서 잠시 떼내 썼다고 한다.
김영삼의 군 개혁은 오랜 세월 동안 '절대 성역'으로 간주됐던 군부가 민간 정부에 의해 확실한 통제를 받게 된 대전환이었다. 당시 한양대 교수 리영희는 "DJ가 집권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무사(옛 보안사)의 대통령 독대와 대민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하는 등의 제도적 조치도 뒤따라 '군인의 정치화'가 차단됐다. 이후 군내 새로운 사조직 형성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입력 : 2008.08.09 04:14 / 수정 : 2008.08.0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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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공개 파문으로 국회의장 박준규가 민자당을 탈당했고, 유학성·김문기 등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전 국회의장 김재순은 3월 29일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하며 '토사구팽(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힌다)'이란 고사성어로 심경을 표현했다. 자신을 한신(韓信)에, 김영삼을 한고조 유방(劉邦)에 비유한 셈이었다. 5월 20일에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통과돼 공무원의 재산 공개를 제도화했다. 6월 22일, 김영삼은 부총리 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야기가 새면 모가지다. 비밀을 지켜라." 이경식과 재무부장관 홍재형은 대통령 비서실장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을 진행했다. 김영삼은 "비밀이 샌다면 급속도로 자본이 빠져나가 하루 아침에 우리 경제가 폭삭 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실무진이 7월 하순 미국 출장을 떠난 뒤 경유지인 도쿄에 내려 몰래 귀국했고, 과천의 밀폐된 아파트에서 '남북통일 작전'이란 암호명의 작업을 수행했다.
입력 : 2008.08.11 02:55 / 수정 : 2008.08.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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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내리던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 믿기 어려운 사고가 발생했다. 출근을 서두르던 직장인과 학생을 태운 차들이 지나가고 있던 서울 성수대교의 중간 지점, 48m의 현수 트러스 부분이 갑자기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았던 것이다. 이 사고로 무학여중·고생 9명 등 모두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교량 가설 당시인 1977년 서울시내 차량이 12만여 대였던 데 비해 1994년에는 200만 대에 가까워 피로가 누적돼 있었던 데다, 용접 불량과 관리 소홀까지 겹친 탓이었다.
사고 8개월 후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서초동에 있던 지상 5층 지하 4층, 연면적 7만4000㎡ 규모의 삼풍백화점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은 지 6년 됐으며 단일 백화점 매장 중 전국 2위였던 이 대형 건물의 붕괴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이 발생했다. 무단 설계 변경과 부실시공, 행정감독 소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총체적 부실'이었다.
입력 : 2008.08.12 00:38 / 수정 : 2008.08.12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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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의원 박계동에 의해 '노태우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27일, 노태우는 대국민 사과문에서 "재임 중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퇴임 때 1700억 원이 남았다"고 실토했다. 이 와중에 "1992년 대선 때 노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는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고백이 터져 나왔고 이것은 '20억+α설'로 발전했다. 김영삼은 '성역 없는 수사'의 지시를 내렸고 노태우는 11월 16일 구속됐다. 이제 12·12와 5·18 책임자에 대한 단죄 여론도 다시 높아졌다. 11월 24일, 김영삼은 그 사건들을 다시 수사할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12월 3일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겠다"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도주(검찰의 판단)한 전두환은 다음날 현지에서 체포, 구속돼 안양교도소로 압송됐다. 김영삼은 "저것들을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한 1년 동안 감옥에 보내놓고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전두환은 그동안의 생활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교도소 오지 마시오." 추징금을 대부분 낸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2008년 초까지 24%만 납부했고, 2003년에는 "내 전 재산은 예금 29만원"이라고 주장했다.
입력 : 2008.08.13 03:06 / 수정 : 2008.08.13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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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세계화(segyehwa)'는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힘을 가진 구호가 됐다. 그것은 '제도와 규범 개혁' '지식과 기술 신장'에서 '세대교체'나 '여성의 시대'라는 의미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선진국이 개방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으로 볼 수 있었지만 "치밀한 사전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어서 많은 혼선을 빚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세계화'의 흐름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95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드디어 1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것은 1945년 광복 당시보다 무려 220배 이상 늘어난 지표였으며, 압축적 경제성장의 상징과도 같았다. 승용차가 대중화되면서 문화와 레저의 수요가 급증해 영남대 교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부터 6년 동안 경상수지 누적 적자가 487억 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1만 달러' 기록 달성에 집착했고, 원화 가치는 비정상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입력 : 2008.08.15 03:00 / 수정 : 2008.08.1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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