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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우암 송시열 埋安之壇 과 追慕碑 (대잠동)
藥泉(승호) 추천 0 조회 86 16.12.13 14:2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추모비 전문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은 변화(變化)한다. 어떤 최상(最上)의 가치(價値)도 후인(後人)들에 의해 재평가(再評價)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재평가가 두려워 꼭해야 할 일을 피(避)하는 것은 양심(良心)있는 선비의 태도가 아니다. 나라가 위태(危殆)로울 때 나아갈 방도(方途)를 제시하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할 때 도리(道理)를 외치는 선비가 있다면 그를 높이 추앙(推仰)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시공(時空)을 크게 열어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신명(身命)을 바쳐 올곧게 산 선비가 있다면 후학(後學)들이 그를 숭봉(崇奉) 추모(追慕)함이 지당(至當)하다. 우암(尤菴) 선생이 바로 그러한 분이시다.  선생의 본관(本貫)은 은진(恩津) 휘(諱)는 시열(時烈), 자(字)는 영포(英甫), 우암은 호(號)이다. 선생은 아버지 갑조(甲祚)와 어머니 선산 곽씨의 셋째 아들로, 선조 40년(1607)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나시어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등을 배우면서 공자(孔子), 주자(朱子), 율곡(栗谷)을 푯대삼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적통(嫡統)을 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율곡(栗谷)의 학문을 전수 받았고, 전적(全的)으로 주자(朱子)의 책을 읽어 정통을 삼았다. 선생은 철저히 알고, 순수한 마음으로 실천하고 확충하는 것을 학문(學問)의 바른 길이라 여겨 정직(正直)을 종신(終身)토록 간직 하셨으므로 동정(動靜)과 언행(言行)이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분명 하셨다. 선생은 정암(?菴)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와 율곡(栗谷)의 변통론(變通論)과 사계(沙溪)의 예학(禮學)을 수용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 학자로 우뚝 서셨다. 선생은 二十七세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二十九세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六十세가 넘어 잠시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맡았던 적은 있으나 七十四세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맡기 이전에는 가급적 벼슬을 사양하고 철저히 학문에 몰두 하셨다. 덕원(德源)에 유배(流配)되었을 때 공부할 수 있도록 조용한 장소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고 장기(長?)로 유배지를 옮기고서는 부인(夫人)을 여읜 아픔 속에서도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완성하신 것이 그 한 예(例)이다. 선생의 학문적 폭과 깊이는 방대한 분량의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담겨 있거니와 나라를 걱정하는 애정哀情과 경세(經世)의 형안(炯眼)은 을축봉사(乙丑封事)와 정유봉사(丁酉封事)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호포제(戶布制)와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주장하셨으며, 여성(女性)의 경제적 역할을 중시하고 신분(身分)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선행자(善行者)를 글로 표창하는 등 인간존중(人間 尊重)의 사회구현에 솔선하시는 한편, 당신은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학자의 모범(模範)을 보이셨다. 선생은 제왕가(帝王家)의 예법(禮法)도 사서인(士庶人)이 것과 다르지 않다는 예학정신(禮學精神)으로 일관 하셨다. 선생이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問題)로 인해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덕원에서 장기로 이배(移配) 되는 도중 오천(烏川)에서 이곳 선비들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 졌다. 선생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등 여러 선현(先賢)이 이 고장에서 배출된 사실을 들어 “군자(君子)의 고을에 가가충효(家家忠孝)라”고 일깨우셨다. 이곳에서 년 가까이 머무시는 동안 고을의 학풍(學風)과 예법(禮法)이 크게 떨치니 사림(士林)들이 선생을 경모(敬慕)하여 죽림산(竹林山) 아래에 덕림서사(德林書社)를 창건하였다. 고종(高宗)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명령으로 위패(位牌)를 향교(鄕校)에 매안(埋安)하게 되고, 향교를 강북(江北) 유등(柳等)으로 이건(移建)하자, 그 자리에 단(壇)을 만들어 제사(祭祀)하고 비(碑)를 세워 사실을 기록했다. 무오(戊午)년에 서원(書院)으로 승격하였던 바, 세월이 흘러 건물(建物)이 노후(老朽)하고 주위환경(周圍環境)이 열악(劣惡)하므로, 00二十 門中이 합력(合力)하여 이곳 포항시 남구 대잠동에 새 터를 마련하고, 드디어 00월에 추모비(追慕碑)를세워 선유(先儒)들의 유지(遺志)를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고을의 선유(先儒)가 사액(賜額)을 요청하였고 후학(後學)이 덕림서원고왕록(德林書院考往錄)을 발간하는 등 정성어린 사업을 추진하였음도 첨기(添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선생의 위대(偉大)하심과 추모비(追慕碑) 건립의 아름다운 뜻과 내력을 엮어 기리는 글로 삼는다.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生命처럼 귀(貴)히 여겨, 굶주림 견디고 밝은 창(窓) 벗 삼아 독서(讀書)를 즐기셨네 지으신 글 처리하신 사업 만인(萬人)이 부러워했고, 정직(正直)과 대의(大義)로 위대한 사표(師表) 이루셨네 배움은 실천(實踐)으로 완성(完成)되나니, 이를 위해 유배(流配)와 사약(賜藥)조차 마다하지 않으셨네 정포은(鄭圃隱) 선생을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머리라 일컬으시며, 연일(延日) 고을 선비들을 로써 일깨우셨네 그 울림 생생한 역사(歷史)로 남아, 서사(書社)에서 단(壇)과 서원(書院)으로 이어 나갔네 자세한내역(來歷) 덕림서원고왕록(德林書院考往錄)에 적혀 있는데, 꿋꿋한 유림(儒林)의 정성(精誠) 참으로 높고도 크구나 아아, 선생의 자취를 여기 추모비(追慕碑)에 세기노니, 군자의 고상(高尙)한 향기(香氣) 길이 감돌지로다.

 

00  

忠南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光山 后人 金善祺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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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12.31 20:32

    첫댓글 사계 어른과 신독재께서는 광산김씨이지요!
    부자간에 불천위로 대대손손 제삿밥 얻어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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