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은 아주 좁았다. 집의 형태가 비틀어져서 남동쪽 모서리가 예각이고 바닥이 고르지 않았다. 물을 흘려보면 알 수 있었다. 물은 빠르게 전진하다가 느리게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다시 빠르게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동그랗게 고였다. 다탁을 펼치면 늘 한쪽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이상한 각도로 벽이 틀어져서 햇빛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방안으로 들어왔다가,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 거리에는 그런 집들이 많았다. 집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이주를 목적으로 한꺼번에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주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밤에 멀리서 그 거리를 보면 벌판에 솟은 캄캄한 집들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버려진 상자처럼 보였다.
파씨는 창밖으로 빈집의 내다보며 그곳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다음 순간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쪽 모두 두 번씩 말했고 나는 두 번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파씨는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나는 잠귀가 얇은 편이었다. 파씨가 잠을 자지 못하고 부스럭거리면 나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우리는 카드를 가지고 놀았다. 그런 밤들이 계속 이어졌다. 파씨가 나를 깨우고, 내가 일어났다. 파씨가 불을 켜고, 내가 카드를 꺼냈다. 파씨가 이불을 손바닥으로 두드려서 주름을 없애고, 둘이서 함께 이불 위에 카드를 늘어놓았다. 세로로 아홉 장, 가로로 여섯 장씩을 늘어놓고 번갈아가며 한 쌍씩 카드를 뒤집었다. 무작위로 두 장을 뒤집어 숫자가 같으면 열에서 제하고, 다르면 그대로 엎어뒀다. 다른 것을 뒤집더라도 위치를 기억해두는 것이 중요한 게임이었다. 파씨의 집중력은 기복이 심했다. 세 판을 연달아 이긴 다음엔 내 판을 연달아 졌다.
오늘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 스페이드 퀸을 성의 없이 뒤집으며 파씨는 말했다.
우유 외판원, 인구조사원, 택배가 두 건 도착하고, 생수가 배달되었어.
수요일이니까.
그래. 생수는 수요일에 배달되니까. 그리고 마지막엔 가스검침원이 방문하겠다고 연락을 해왔어.
전화로?
응. 전화로.
지금 가도 되나요? 가스검침원이 물었다. 파씨는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았다.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ESPN채널에서 골프를 중계하고 있었다. 작고 단단한 공이 멀리 날아갔다. 갤러리들이 박수를 쳤다. 파시는 텔레비전을 껐다. 가스검침원이 두 번째로 벨을 눌렀을 때 파씨는 현관에 서 있었다. 세 번째 벨이 울렸다. 네 번째 벨은 울리지 않았으나 가스검침원이 문 밖에 서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릎 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으며 파씨는 말했다.
문 너머로 굉장한 밀도가 느껴졌거든.
하트 원. 내가 말했다. 파시는 다른 한 장을 뒤집었다.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어.
하트 식스.
찌를 거라고 생각했어. 문을 열면, 틀림없이, 볼펜으로.
너를?
나를.
내 차례였다. 오른쪽 끝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클로버 나인. 다른 한 방을 뒤집었다. 다이아몬드 나인. 카드 두 장을 이불 밖으로 집어냈다. 파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짝짝짝 박수를 쳤다. 잘 하는데. 파씨도 한 장을 뒤집었다. 스페이드 원. 다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나는 카드들의 뒷면을 응시했다. 파씨는 입을 다물고 스페이드 원과 클로버 잭을 있던 자리에 뒤집어놓았다. 파씨가 말했다. 망상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몸이 그걸 믿었어.
가스검침원으로 위장한 강도였을 수도 있지.
그런 게 아냐. 방문객이 많았다니까. 그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덜컥, 멈춰버린 거야.
나는 씹어 먹는 비타민제의 은박포장을 벗겨 입에 넣고 파씨에게도 한 알을 주었다. 파씨는 그것을 녹여먹었다. 비타민제를 빨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파씨가 확인하듯 말했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어.
가스검침원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손등을 긁으며 파씨는 닫힌 문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방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벨을 한동안 올리다가 멈췄다. 문 저쪽에서 구두를 바닥에 비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씨는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발소리는 삼층에서 일층에 이를 때까지 계속 들려왔고, 조금씩 아래쪽으로 멀어졌다. 파씨는 단단하게 굳은 껌을 뱉고 수돗물을 틀었다. 귀가 너무 뜨거워서 물을 묻혀 식혔다. 종이타월로 얼굴을 문지르고 손가락 사이와 귀를 닦았다. 그때 생각했어. 파씨가 말했다.
동물원에 가야겠다고.
동물원?
어째서 동물원이냐고 나는 물었다. 파씨는 숫자가 같은 카드 두 장을 뒤집어 이불 바깥에 내려놓았다.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설명할 수 없어, 그런 건. 일단 동물원을 떠올렸으니까. 가냐, 가지 않느냐의 문제만 남은 거야. 지금은 오직 그것만 물어볼 수 있는 거야.
*
파씨는 어렸을 때 동생과 함께 외삼촌의 집에서 자랐다. 그가 파씨의 친척 중 가장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외삼촌에게는 달리 양육해야 할 아이도 없었다. 6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12살 때 이모에게 구출되었다. 6년의 기억은 하나의 자세로 압축되었다. 팔꿈치와 무릎이 닿도록 엎드려서 바닥에 손등을 대고 손바닥 위에 이마를 얹고 허벅지를 꽉 붙인 채 왼쪽 발 위에 오른쪽 발등을 얹은 다음 관절을 딱딱하게 조인다. 나는 이 자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 본 것은 어느 계절인가의 석양 무렵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파씨가 창을 향해 엎드려 있었다. 단지 ‘엎드려 있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압도적인 몰입으로 만들어진 자세였다. 모든 관절과 마디가 하나하나의 자물쇠로 완벽하게 잠겨서, 파씨의 의지 말고 그것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부를 파는 트럭이 확성기로 두부, 두부, 라고 떠들며 골목을 지나갔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뭘 하고 있어?
내가 묻자,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고, 파씨는 등을 세우고 앉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켰다. 오래 전에 본 영화가 더빙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둘이 함께 앉아서 그것을 보았다. 파씨가 두부를 데워왔고 내가 술을 내왔다. 둘이서 영화를 보며 두부를 잘라먹고 술을 마셨다.
파씨의 외삼촌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인상을 가진 남자였으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잔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잔혹, 이라고 발음할 때 파씨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맞았어? 주먹이나 도구 같은 것으로.
나는 물었다.
파씨는 앞뒤로 상체를 흔들었다. 그건 좀 더 미묘한 형태의 학대였어. 물리적인 형태가 느껴지는 악담들. 악의적인 행동들. 쾌적하지 않는 접촉들. 예를 들어, 반드시 귀 위쪽을 잡아당기는 거야. 이렇게. 파씨는 귓바퀴 위쪽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올렸다. 근육이 당기면서 파씨의 오른쪽 얼굴이 미묘하게 밋밋해졌다. 어린아이는 목이 가늘기 때문에, 위쪽에서 이렇게 귀를 당기면 대번에 머리가 기울어지잖아. 이렇게 한 다음에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또, 또, 애, 새, 끼, 씨, 팔, 또, 밥을, 흘, 렸, 어, 거기를, 찢어, 버리기 전에, 주워, 처먹, 어, 또, 또, 또.
파씨는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 음성을 듣자 나는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파씨가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나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끈적이는 질감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나는 예전에 페인트를 갓 바른 벽을 만졌을 때를 떠올렸다. 손바닥을 벽에서 떼자, 두꺼운 에나멜질의 페인트 층이 피부처럼 묻어나왔다. 온갖 종류의 세제를 사용해서 닦았는데도 제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파씨는 귀에서 손가락을 떼고, 달아오른 귀를 손목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평범한 말도 그런 식으로 했어. 그럴 때 외삼촌의 입술엔 늘 침이 고여 있었는데, 그 입술이 귀에 닿았어. 몇 번이나. 귀에 멍들어 본 적 있어?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른 부분하고는 좀 달라서 멍이 잘 들지 않아. 나는 나중에 귀에 멍을 만들려고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잘 되지 않았어. 그런데 외삼촌이 만지고 나면 늘 귀에 멍이 들었어.
외숙모는 그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아무 말도. 외숙모는 그런 걸 몰랐어. 모르는 척 한 걸지도 몰라. 외숙모는 일을 다녔고 저녁 늦게 돌아왔어. 표면적으로 외숙모는 상냥한 편이었어. 그래도 어느 이상 우리들이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어. 거기다 외삼촌의 잔혹한 짓은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점이 있었어. 외삼촌은 우리를 방에 세워두는 것을 가장 좋아했어. 세워두고, 귀를 잡아당기거나 연필 같은 뾰족한 물건을 눈앞에서 흔들며 악담을 하는 거야. 몇 시간이고.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서 용변도 봐가면서, 반드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질이 나쁜 말들을 퍼부었어. 우리는 서 있었어. 그런 걸 어떻게 설명해? 외삼촌이 우리를 세워두고 욕을 합니다. 그렇게? 외삼촌의 악담을 듣고 있으면 몸의 구조가 서서히 비틀어지고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 머리가 팔이고 팔이 다리고 다리가 팔이고 팔이 머리고 등이 배고 배가 등이고. 나는 다리에서 생각하고 손가락에서 생각했어. 악담을 견디면서 이것은 이상하고 괴롭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남에게 이상하고 괴롭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그게 왜 이상하고 괴롭게 여겨지는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 집에서 지낸 마지막 해의 여름에 파씨는 머리를 발로 걷어차였다. 외삼촌의 엄지발가락이 오른쪽 눈을 깊숙이 찔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파씨와 파씨의 동생은 이모의 집으로 옮겨갔다. 파씨의 오른쪽 각막이 아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약하게 시력은 남았지만, 심한 각막혼탁이 발생했다. 외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만 세계를 보면, 모든 것에서 김이 피어오른다고 파시는 말했다. 오른쪽 눈의 세계가 멀어져버렸어. 나는 거리감각을 잃어버렸어.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건 그런 균형을 맞출 수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야. 자기 내부의 잔혹한 광경들과 거리를 둘 수가 없게 된 거야. 이모와 함께 살게 된 이루에도 나는 여러 번 그 집 앞까지 갔었어. 모퉁이에 서서 그 집을 바라보며 잔인한 일들을 상상했어. 외삼촌 내외가 그 집 안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해 난도질당하는 일 같은 것. 그게 나야. 그게 나야. 이것을 몇 백번이나 생각했어. 완벽하게 사뮬레이션해서, 준비가 되면 들어가는 거야, 하고 생각했어. 다트를 던지는 것과 비슷했어. 다트를 쥐고, 표적을 노려보고, 표적의 동심원들을 머릿속으로 장악한 뒤, 자신감이 생기면, 다트를 던지는 거야. 머릿속으로 볓 번이나 세부적인 장면과 순서를 생각하고, 녹초가 되어 이모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어. 나는 기다렸어. 죽이고 싶고, 죽여야 하고, 죽여도 된다는 식으로 매끄럽게 생각이 발전하기를. 그런데 정말 죽어버렸어. 외삼촌이. 자유로에서. 덤프트럭 밑에 틀어박혔어. 이모는 나와 동생을 장례식장에 데려갔어. 기린은 열 살이었는데, 모두 그 애가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어. 이모는 영정 앞에 우리와 함께 서서, 외삼촌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어. 외삼촌은 할아버지 때문에 비뚤어진 거니까, 모든 것이 완전히 외삼촌의 탓만은 아니라는 말이었어. 이모는 울었어. 그때 나는 이모의 말을 더는 알아들을 수 없었어.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다트를 보고 있었어. 외삼촌이 갑자기 죽어버려서, 표적을 잃은 다트는 바닥에 떨어지고 만 거야. 사라지지도 않고, 에너지를 가득 담은 채, 바닥에 놓여 있고, 가운뎃부분이 두툼한 다트의 붉고 단단한 몸통을, 나는 언제까지나 응시하고 있었어.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야.
*
파씨는 조커 한 쌍을 뒤집으며 하품을 했다. 이제 이불 위에는 두 장의 카드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남은 카드를 뒤집었다. 클로버 잭. 파씨는 자기가 뒤집은 카드 다발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세지 않고 내가 뒤집은 카드 다발과 섞었다. 누가 이겼어?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으며 파씨가 물었다.
내가 이겼어.
거짓말.
그러면 네가 이겼어.
거짓말.
우리는 불을 끄고 누웠다. 사방이 조용했다. 여러 가지 것이 떠올랐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파씨는 조용해져서 잠들었나 싶으면 하품을 했다. 시계가 걸린 벽 쪽에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엷게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나는 내가 잠든 것을 알았다. 소리가 들려오면 잠에서 깬 것을 알았다. 파씨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동물원에 가자. 얼굴을 베개에 누르고 있는 듯 목소리가 짓눌린 채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씨가 다시 이불을 잡아당겼다. 나는 방금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해주었다. 가자고, 동물원에.
가자.
그래.
주말에?
주말에.
*
목요일에 나는 파씨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씨의 동생은 자다 깨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통화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파씨는 동생을 기린이라고 불렀다. 그 편이 훨씬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린'은 기린의 원래 이름과 한 글자가 같았다. 기린은 언제나 잠을 자고 있었다. 전화를 하면 받지 않거나 자다 깨서 전화를 받았다. 기린은 돈이 다 떨어지고 냉장고가 완전히 빌 때까지 잠을 자다가, 생활이 말할 수 없이 황폐해지면 세수를 하고 바깥으로 나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냉장고를 가득 채운 뒤 일을 그만두고 다시 잠을 잤다. 기린은 일자리를 얻고자 하면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었다. 보기 좋게 마른 데다 목소리가 아름답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동물원?
긴 하품 끝에 기린은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응.
자야 되는데.
하루쯤 어때. 데리러 갈게. 주말에.
수도꼭지를 비트는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목으로 물을 넘기는 소리를 내면서 기린이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깨워주기만 해.
전화로?
응. 전화로.
그러면 입구에서 봐.
주차장에서.
그래, 주차장에서.
전화를 끊자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씨가 싱긋 웃었다. 파씨는 보라색 사인펜의 뚜껑을 열고 달력에 커다랗게 마킹을 했다. 김밥을 싸야 한다고 파씨는 말했다. 김밥을 싸지 않으면 소풍답지 않다는 것이 파씨의 의견이었다. 파씨는 말했다. 소풍을 가서 소풍답지 않으면, 즐겁지 않잖아.
일요일에 우리는 함께 김밥을 쌌다. 파씨는 빨간 뚜껑이 달린 플라스틱 용기에 김밥을 담았다. 나는 탄산음료에 과일을 잘라 넣은 칵테일을 만들었다. 은박에 올리브도 몇 알쯤 쌌다.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꽤 시간이 걸렸고 기린이 한참 전화를 받지 않아 출발이 늦어졌다. 파씨와 나는 세 시가 조금 넘어 동물원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우리 말고는 두 사람뿐이었다. 작업용 방수바지를 입은 남자가 구석자리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고, 노약자석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괴상한 형태로 불룩한 자루를 바닥에 놓아두고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도시락이 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맞은편의 빈 좌석을 바라보았다. 커브를 돌아가며 아코디언처럼 주름진 굴절부가 휘어졌다. 철로의 요철로 발밑이 덜컥 덜컥 흔들렸다. 파씨와 나는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들었다.
기린은 밑창이 납작한 운동화를 신고 주차장 팻말 아래 서 있었다.
여긴 굉장히 넓어. B라고 적힌 팻말을 턱으로 가리키며 기린이 말했다. 어디쯤에서 기다려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어.
기린은 후드셔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귀 뒤편으로 비죽 뻗어있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범위하게 주차장이 펼쳐져 있었다. 주차장 둘레를 따라 굵은 플라타너스가 서 있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브라스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B에서 C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기가 아닐까. 파씨가 손가락을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나무 너머로 케이블과 그것에 매달려서 서서히 움직이는 리프트가 보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좁은 도로를 건너자 광장이 나타났다. 나는 광장에 압도되었다. 모든 동물원과 놀이공원은 이런 광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생각했다. 입구가 벌써부터 이렇다면 안은 어떨까.
삼천구백 명은 되겠어. 파씨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기린이 말했다.
여기 말이야. 삼천구백 명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여기에서 에어로빅을.
검지를 펴서 거칠거칠한 바닥을 가리키며 파씨가 말했다. 동물원 광장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삼천구백 명의 사람들.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기린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소매 밑으로 드러난 손목이 시렸다. 맑은 날이었고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공기는 싸늘했다. 무지개 조형물이 달린 매표소 안에 서서 요금표를 읽었다.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요금과 테마공원으로 들어가는 요금이 구별되어 있었다. 파씨는 테마공원에도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안내문에 당나귀를 타거나 만져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도시락을 기린에게 맡기고 지갑을 꺼냈다. 어깨가 좁은 매표원이 매표구를 통해 지폐를 건네받으며 몇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성인 세 사람이라고 대답한 다음, 테마공원 입장권도 달라고 말했다. 매표원은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금 시간에는 한 곳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관람시간이 부족해서 충분히 둘러보지 못할 거예요. 동물원과 테마고원 중 한 곳을 선택해 주세요.
아직 네 시밖에 안 되었는데요.
폐장 시간이 일곱 시입니다.
나는 머리를 긁었다. 동물원과 테마공원 중 어느 쪽이 넓습니까. 나는 물었다. 매표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동물원이 훨씬 넓습니다.
나는 더 넓은 쪽을 택했다. 성인 세 사람 몫의 입장권과 잔돈을 건네받으며 나는 리프트를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걸 반드시 타야 하나요? 그렇지 않다고 매표원은 대답했다. 걸어서 들어가는 방법도 있고, 코끼리열차를 타는 방법도 있는데, 걸어 들어가면 오래 걸리고, 코끼리열차를 타려면 탑승권을 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입구로 나오는 마지막 코끼리열차는 일곱 시 이십분에 있습니다. 매표원이 탑승권을 건네주며 말했다.
*
아, 좋다.
파씨가 말했다.
정말.
내가 말했다.
시원해.
기린이 말했다.
우리는 코끼리열차를 타고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좌석이 마주보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파씨와 내가 나란히 앉고 기린이 맞은편에 앉았다. 사람이 많아서, 포장용기에 든 찰떡처럼 모두 엉덩이를 뭍이고 앉아 있었다. 기린의 짧은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날려서 이마를 덮었다. 코끼리열차의 질주는 유쾌했다. 빠르게 달려서 풍경들이 휙휙 지나갔다. 뺨이 차갑게 식었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파씨가 웃었고 기린도 우리를 보면서 웃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웃음이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 추가 달려서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게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여기저기에 부딪혀 웃음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도시락이 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꽉 붙들었다. 동물원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내렸다. 큼직한 배낭을 멘 외국인이 내렸고 어린아이 세 명과 누가 어느 쪽의 일행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 내렸다. 머리를 대강 올려 묶어 정수리가 울퉁불퉁해 보이는 십대 여자아이가 껌을 씹으며 우리를 보았다. 재미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동물원을 막 관람하고 나온 사람들이 우리가 내린 코끼리열차에 올라탔다.
거북등 모양으로 갈라진 포석을 밟고 서서 열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웃느라 생겼던 야트막한 주름들이 사라지고 얼굴이 수축되었다.
모두 어디로 가는 거지?
멀어진 코끼리열차를 바라보며 기린이 물었다.
놀이공원이야. 근처에 있어. 내가 말했다.
거기 가면 즐거울까? 파씨가 물었다. 파씨는 외국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외국인 남자는 손마디를 딱딱 꺾으며 동물원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무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파씨는 홍학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홍학사에는 홍학이 없었다. 오목한 접시처럼 생긴 하늘색 물웅덩이가 비현실적인 색감으로 반짝거렸다. 선명한 주홍색 깃털이 지저분한 수면에 떠 있었다. 우리는 두서없이 방향을 틀어가며 동물들을 둘러보았다. 가슴 부근의 털이 녹색으로 물든 백곰을 보았다. 타조는 깃털이 빠져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든 관리사가 하마의 입 안에서 납작해진 페트병을 빼냈다. 페트병을 하나 빼낼 때마다 관람객들이 박수를 쳤고, 관리사는 증오심어린 시선으로 관람객들을 노려보았다. 호로새라는 이름이 적힌 안내판을 보고 파씨와 기린이 한참 웃었다. 코끼리는 간신히 엉덩이만을 볼 수 있었다. 혀가 저렇게 긴 줄은 몰랐는데. 기린이 하품을 하고 난 뒤 헐거운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사진을 좀 찍고 싶었다. 사진을 찍고 난 다음엔 우리 속으로 들어가 기린의 머리를 만지고 싶었다. 기린의 머리엔 뭉툭한 뿔처럼 보이는 돌기가 두 개 있는데 그게 정말 뿔인지, 얼마나 단단할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누구도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울 속의 기린을 바라보았다.
텅 빈 물범 우리 속에서 모자를 쓴 남자가 바위에 앉아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물이 든 양동이와 나뭇잎이 엉긴 빗자루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를 구경하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리를 쉬려고 들른 카페테리아에서 기린은 잠이 들었다.
우리는 오래된 영화에 대해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 기린은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그 영화를 보았는데, 여배우의 얼굴이 설득력이 있게 생겨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배 부분에 집중적으로 살이 찐 남자가 카페테리아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큰 목소리로 커피를 주문했다. 그를 잠시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기린은 이미 손등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동물원 카페테리아에서 낮잠을 자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반복해서 우리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에도 좀 지쳤으므로 나는 그대로 두자고 생각했다. 파씨는 가방을 열고 손톱가위를 꺼내 손톱을 깎기 시작했다. 카페테리아 점원이 굳은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기린이 일어나면 도시락을 먹자고 내가 말했다. 파씨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이 오렌지색으로 조금씩 탁해지고 있었다. 곧 날이 저물 것 같았다. 한산한 카페테리아에 손톱을 깎는 소리가 딱, 딱, 하고 울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손가락 사이로 테이블에 말라붙은 케첩 얼룩을 보았다. 손을 내리고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펼쳤다. 헐겁게 만 실타래 속에 두 손을 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빈 공간이 느껴져 살을 당기면 다른 곳이 비었다. 따뜻하지만 가볍고, 곳곳이 비어서 불안했다. 불안해서 손가락을 자꾸 움직이다 보면 손마디에 팽팽하게 실이 감겼다. 나는 탁자 가장자리로 튄 손톱을 쓸어냈다. 기린이 빨리 잠에서 깨서, 셋이서 도시락을 배부르게 먹고 싶었다. 물소 울음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왜 동물원에 오자고 했어. 나는 물었다.
평범하니까. 인간답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동물원이 가장 인간적인 영역이잖아.
그런가.
우리를 만들어서 동물들을 넣어두고 관람료를 받는 일 같은 것을 인간 외에 어떤 동물이 생각해내겠어. 동물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고 동물을 관람하는 인간이 있고 동물을 관람하는 인간들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고 그런 인간들에게 통제되고 영향 받는 소수의 동물들이 있는 곳. 압도적인 인간의 영역. 그게 동물원이야. 동물원의 동물들이 어딘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야. 그런 걸 보고 싶었어. 사람들에게 통제되고 영향 받는 동물들이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적힌 우리 안에서 온순하게 살고 있는 것. 그런 걸 보고 싶었다고. 아니야.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먹고 싶었어. 그런 경험을.
먹고 싶었다고?
응. 파시는 새끼손톱을 잘라내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었어. 그런 경험을.
기린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내버려두면 언제까지나 잘 것 같았으므로 내가 기린을 깨웠다. 이제 밥을 먹을 차례지. 도시락을 펼치고 나무젓가락을 쪼개며 파시가 말했다.
우리는 김밥을 먹고 칵테일을 마셨다. 밥알이 좀 굳어 있었지만, 김밥은 맛이 좋았다. 과일칵테일은 김이 빠져서 단 맛만 남아 있었다. 나는 올리브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초반의 짠 맛에 익숙해지면 올리브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정성껏 살을 발라먹고 씨를 뱉었다. 파씨가 젓가락으로 씨를 집어 멀리 던지며 기린에게 말했다.
잠을 좀 줄여 봐.
기린이 부숭부숭하게 부은 눈을 깜박이며 파씨를 보았다. 파씨가 말했다.
여러 면에서 손해야. 네가 자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여러 가지 것들이 지나가잖아.
상관없어. 잠을 자는 게 가장 즐거워.
더 재미있는 것을 해. 내가 말했다.
재미있는 것?
그래. 재미있는 것.
재미있는 계획이라면 하나 가지고 있어. 기린이 김밥을 입에 넣고 말했다.
우는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싶어. 밥을 먹으면서 우는 레스토랑. 북미 쪽에는 그런 레스토랑이 벌써 생겼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 가게를 가지고 싶어. 손님들은 밥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 놓고 울기 위해서 레스토랑을 찾아오는 거야. 밥을 먹으면서 울다니, 어색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상당히 서럽고 간단해. 밥을 먹으려면 입을 벌리잖아. 입을 벌리면 울 수 있어. 실은, 입을 벌리니까 울 수 있는 거야. 거기다 음식물 때문에 목이 꽉 막혀서 통곡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상태가 되는 거야. 손님은 먹으면서 울고, 더러운 것을 모두 테이블에 쏟아버린 뒤에, 깨끗해진 상태로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집으로 돌아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으면서, 생각하는 거야. 괜찮아. 그것들은 모두 거기 테이블에 버리고 왔으니까. 나는 지금 한결 나아졌으니까, 라고.
근사하다. 파씨가 말했다. 내가 첫 번째 손님이 될래.
뭐라고 했어? 기린이 이마를 찌푸렸다. 입에 든 걸 삼키고 말해.
나는 말했다. 파씨가 가고 싶대. 파씨가 그 레스토랑에 첫 번째 손님이 될 거래.
파씨라고?
파씨.
파씨가 누구야?
파씨가 누구냐니.
나는 내 오른쪽 자리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파씨가 없었다. 방금 누군가 박차고 일어난 듯 빈 의자가 비틀린 채 놓여 있었다. 나는 카페테리아 계산대 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도 파씨가 없었다. 기린이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김밥 한 조각을 집었다. 기린은 김밥을 우물우물 씹었다. 칵테일을 마시고, 바닥에 달라붙은 파인애플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곰곰 따져보듯 씹었다. 몸집이 큰 초식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나는 은박을 구겨 휴지통을 향해 던졌다. 은박덩어리는 휴지통 가장자리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째서 자기를 파씨라고 불러.
휴지통을 응시하며 기린이 말했다. 기린은 파인애플 조각을 아직도 씹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기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린이 주먹으로 턱을 받치며 뚱하게 말했다.
파씨는 어렸을 때 우리가 기른 토끼의 이름이잖아. 왜 자기를 그런 것으로 불러.
터지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목덜미에서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부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더듬자 차갑고, 축축하고, 딱딱했다. 자꾸자꾸자꾸 자꾸 부풀어서 팡, 터지는 소리가 났다.
*
다트 말인데. 파씨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내 얼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어 땀이 샘처럼 고인 모공이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파씨의 입김 때문에 내 속눈썹이 하늘거렸다. 나는 간지러워서 눈을 깜박였다. 그 다트 말이야. 파씨가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을 거야. 나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는데, 해가 진 뒤였고, 오렌지를 손에 쥐고 있었어. 먹겠다는 생각도 없이 나는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어. 껍질이 두꺼운 오렌지라서 굉장히 손톱이 아팠지만, 끝까지 칼을 사용하지 않고 손톱으로 찢었어. 껍질을 벗기는 동안 엄청나게 땀이 났어. 그렇게 땀을 흘려본 적은 없었어. 오렌지를 쪼개면서 나는 생각했어. 외삼촌과 같은 인간이 되어서 어두운 얼굴로 어두운 짓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정말 끔찍하게 싫다, 라고. 이모는 완전히 외삼촌 탓만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오렌지를 씹으면서 나는 생각했어. 외삼촌은, 자기를 괴롭힌 사람의 다트를 응시하느라 자기 속의 다트를 보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외삼촌이 우리에게 한 일에 대한 몫은 완전히 외삼촌 한 사람만의, 자발적인 몫인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다트를 계속 지켜보자. 나는 생각했어.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내가 하려고만 하면 뭘 할 수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했어. 다트가 있고, 그걸 지켜보는 내가 있어. 잔혹한 방법으로 어딘가에 보복하고 싶어하는 내가 있고, 그것을 하지 않는 내가 있어. 나는 다트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게 바로 그것이란 걸 알고 있어. 이것은 상당히 안전하고 유리한 일이야. 있잖아. 자기 속에 그런 게 어디 있는지 모르거나 그런 걸 충분히 보려고 하지 않는 인간들은, 자기가 받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남에게 되풀이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괴롭혔고 아버지가 자기를 괴롭혔고 이제 자기가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식의, 어쩔 수가 없다는 식의 지저분한 연쇄를 되풀이하는 거야. 오렌지 한 알을 먹으면서 나는 그걸 생각했어. 덕분에 다트는 여전해. 다트는 별 탈 없이, 다트는 여기 있어. 내가 다트를 보고 있으니까. 내가 다트를 보고 다트를 지키고 다트가 지금 여기 있어. 다트의 에너지는 전혀 사라지지 않아. 다트는 굉장해. 그것을 계속 들여다보는 나도 굉장해. 그런데 이것은 좀 쓸쓸한 일이야.
파씨는 말을 점점 빠르게 해서 나중엔 거의 숨을 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쓸쓸한 일이라고. 파씨의 말을 받아 내가 말했다. 기린이 천천히 하품을 한 뒤 나를 바라보았다. 해가 졌어.
응.
폐장이 몇 시야?
일곱 시.
그럼, 가자.
우리는 어둑한 비탈길을 내려갔다. 가방 속에서 빈 도시락이 달각거렸다. 샛길과 나무 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비탈길에 합류했다. 나무와 캄캄한 철창들과 앞서 내려가는 사람들의 등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몇 번이고 메마른 눈을 문질렀다. 음료를 판매하는 가판대에서 얼음을 채운 콜라를 샀다. 빨대를 입에 대고 단숨에 반을 마신 뒤 기린에게 건네자. 기린이 나머지 반을 마셨다. 차가운 날씨에 차가운 음료를 마셔 안팎으로 배가 싸늘하게 식었다고 기린이 투덜거렸다. 늑대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울부짖는 늑대를 보러 달려 올라갔다. 회중전등을 든 남자가 스쿠터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왔다. 야. 야. 야. 그는 재규어 우리 앞에서 스쿠터를 앞뒤로 몰아가며 외쳤다. 회중전등 불빛이 재규어의 날렵한 점박무늬 등을 훑었다. 약이 오른 재규어가 우리 속을 빠르게 왕복하며 이를 드러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야행성 동물들을 깨우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스쿠터를 몰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터벅터벅 비탈길을 내려갔다. 저것 봐. 기린이 말했다. 저 뿔 좀 봐. 소를 닮은 흰 동물들이 우리 속의 완만한 구릉지에 서 있었다. 목 부근의 뚜렷한 갈색을 제외하고는 몸의 대부분이 흰 빛깔이었다. 두 개의 긴 뿔이 등 쪽을 향해 활처럼 휘어 있었다. 흰오릭스래. 기린이 안내문에 눈을 바짝 대고 말했다. 점프를 잘 하고, 잘 뛴대.
그렇데 왜 뛰지 않아. 내가 중얼중얼 말했다.
야. 야아. 야. 오릭스야. 여기까지 와 봐. 우리 가장자리를 탁, 탁, 두드리며 기린이 말했다.
야아. 야. 야. 오릭스야. 이걸 넘어 봐. 우리 가장자리를 텅, 텅, 두드리며 내가 말했다.
야. 야. 야. 오릭스 무리가 머리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갑작스럽게 머리 위로 내려왔다. 잠기가 완전히 가신 목소리가 기린이 말했다.
일곱 시야.
이제 완전히 어두웠다. 기린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칠 분이야.
응.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계속 우리 안을 바라보았다. 기린이 아프다고 투덜대며 발을 번갈아 들었다가 놓았다. 그런 뒤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밤의 짐승들이 깨어나 수런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릭스들의 눈이 편광유리처럼 복잡한 빛깔로 반짝였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83.6매)
첫댓글 오 멋지다. 가장 멋진 구절은 망상이란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그걸 몸이 믿었어...압권.
그렇죠? 이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