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 전서 2장8-15절] 출처:http://cafe.daum.net/ilmak |
1. 여성들이 써야 했던 너울의 의미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며 여자는 남자를 위해 지음받은 존재라고 증거합니다. 따라서 여자들은 남자의 권위 아래 놓여 있다는 표를 보이기 위해 예배에 임할 때는 반드시 너울을 쓰도록 권고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전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항상 남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아래 복종하며 교회 안에서 침묵하고 모든 것을 삼가도록 가르쳐졌습니다. 비록 너울을 쓰는 규례는 사라졌지만 그 규례 속에 담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너울로 씌워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와 교단이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본뜻을 헤아린다면 이러한 견해들은 새로이 수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신학자인 켈러(E. Kahier)는 면밀한 주석을 통하여 너울에 대한 규례가 당시 교회들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필요했던 시대적 관습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여성들은 남성들과는 다르게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은 창조 질서에 역행하는 성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들이 머리에 너울을 쓸 것을 권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고린도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는 풍습이 유행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고 사학자들은 고증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성들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덕스러운 모습으로 활동하게 하기 위해 너울의 규례를 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은 것은 여성 해방적인 차원이나 혹 예배의 흥분에 사로잡혀 그랬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너울을 쓰지 않는 여인은 첩이나 창녀 등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에 여인들이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교회를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오해시킬 소지가 있었습니다. 또한 귀부인은 머리치장을 심하게 하고오고 종이나 천민은 머리를 다듬지도 못한상태에 예배를 참석하기 때문에 예배의 규레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롬16:16, 고전16:20, 살전 5:26, 벧전 5:14).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지금도 성경대로 인사할 때 입맞추지 않는가? 성경대로라면 반드시 그들은 교회에서 서로 만났을 때 입맞춤으로 문안해야 할 것이나 우리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계명이 아니라 그 시대와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하나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2.성만찬 성찬규례들
당시의 성만찬은 오늘날의 성찬례(sac-rament)와는 달리 일종의 애찬식의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일 저녁에 모일 때마다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공동 식사를 하고 마지막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주의 만찬을 기념했습니다.(벧후 2:13 ; 유 1:12). 공동으로 나누는 식사와 성찬의 전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되새기고 성도들간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마련해 온 음식을 함께 나누지 않고 자신들만이 먹음으로 미처 음식을 장만하지 못했거나 부실하게 준비해 온 가난한 자들에게 모멸감과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하나 됨을 확인해야 할 주의 만찬이 오히려 반목과 분열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 대해 바울 사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오류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성만찬의 본래 의미를 왜곡한 것이며, 둘째는 거룩히 여겨야 할 교회를 경홀히 여긴 것, 셋째는 가난한 형제를 멸시하고 상처를 준 것 등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책망은 오늘날의 교회들에게도 매우 큰 의미를 시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속의 은혜에 대한 넘치는 감격과 형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는 성만찬은 단순한 형식일 뿐 주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없음을 모든 성도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변화와 변혁이 필요하지만 말씀의 원리를 벗어난 변화가 기존 질서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면, 복음 사역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말씀의 원리에 따라 변화를 추구해 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때로 말씀의 원리가 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의 원리를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할 우려가 많습니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리고 바른 태도가 함께 할 때, 진정한 말씀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대할 때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3. 창조 질서 속에서의 여성
사도 바울은 결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다른 창조 질서 속에서 여성과 남성을 창조하셨음을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과 남성에게 주어진 역할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장미와 민들레에게 나름의 향기와 모양을 주시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꾸미게 하셨던 것처럼 남녀 각각에게 고유한 특성을 주시고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종속이나 지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름대로의 특성에 따라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실 뿐, 남녀 사이에 어떤 가치나 책임의 우열을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인식시켜 주고자 했으며, 남성과 여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여성들의 복종과 남성들의 배려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요구된 복종을 남성들에 대한 맹목적인 종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특성과 역할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성경이 일러주는 '복종'의 참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또한 창조 질서에 따른 순서와 남녀 간의 종속문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속하기 때문입니다.
4. 여성들의 역할과 의무
여성들은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의무를 깨닫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나온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동일한 은총 아래 놓여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을 재발견할 때, 여성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여성들의 보다 적극적인 헌신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선교에 있어서, 사회 사업과 봉사에 있어서, 또 교회의 올바른 위상 정립에 있어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주체적인 자기 결단과 헌신으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성도의 의무를 감당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여자들에게 있어서 수건을 쓰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었을지라도 오늘날 이런 전통은 유명 무실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조시대에는 여성들이 너울을 쓰고 외출을 하였고, 지금은 그 규레는 허래허식 인 것을 다 압니다.이처럼 신앙 생활이란 그 본질은 변하지 않으나 형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치문제는 교회가 존재할때부터 문제였습니다. 부자는 귀한 비단옷을 입고오고 천민은 무명옷에 낡아서 냄새나는 옷을 입고 옵니다. 서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인데 잘 입은자는 자랑거리요, 못입은자는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사치란 자기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하는 경우입니다.
5.여자가 가르치는 문제
가르치는 문제 또한 이제는 남녀가 따로 없다고 봅니다.성경의 고칠 수 없는 법이 있고,규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의 법칙이 아닙니다. 요즘 숏커트를 하고 교회가면 창녀입니까? 아니면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은 다 화류계 사람인가요? 고린도의 특성은 이방신전에서 사제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일종의 창녀였습니다. 이런자들의 옷차림을 그 시대 여성들은 선호하였습니다. 이시대는 연예인들 차림을 따라서 유행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지만 누가 여성들을 천하다고 할 수 있나요?
제가 어렸을때(1960년대)만 해도 마을에는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고, 한문은 남성들의 전유물인양 훈장선생님이 있어 가르쳤지만 여자 훈장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를 못했습니다.그후에 학교에서는 남자 선생님들 틈에 간혹가다 여자선생님이 있었지만 남자선생님들이 여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들은 엄밀히 따지면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선생을 하나님은 허락하셨는데 남자들은 자기 밥그릇이 위태하여서인지 무척이나 반대하는 분들이 많군요? 이는 말씀을 잘 모르든지 율법에 얽매여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못하는 분들인줄 압니다.
로마 교회가 망할 때 로마도 같이 망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망할 때 로마 교회 신부들이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바늘 끝에 천사들이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3일이나 싸웠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결국 로마가 망한 것입니다. 러시아 교회가 부패될 때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 교회 신부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사를 집례할 때 황금색 가운을 입어야 되나, 빨간색 가운을 입어야 되나 하는 것으로 일주일간이나 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금색 가운도 입지 않고 빨간색 가운도 입지 않았는데, 그것이 뭐 그리 중합니까?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니 공산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교단 총회에서도 축도할 때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해야 되나 ‘축원할지어다’라고 해야 되나 하는 것 가지고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한국 교회의 부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리 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전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중한 것입니다.
규례와 규범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철칙처럼 변치못하는 것은 구원에 문제입니다.구원 문제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데 마음대로 바꾸고 마치 구원을 목사님들이 주는 것같은 착각을 하게하면서 막상 별로 문제될 것도 아닌문제는 큰일나는 것같이 호들갑을 하니 어찌 이것이 바른것인가요?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떤가요? 용기있는 자가 먼져 뛰어들어서 구하면 되는 것을 별문제도 안되는 것에 반대입장에 선다면 우습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생각해보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시고 판단하시길 원합니다. 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