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교회하면 떠오르는 십자가. 아니 십자가하면 교회라는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 신약시대 교회가 십자가를 숭배하는 어리석음에 빠질것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구약 시대 놋뱀의 역사를 통해 그림자를 보이시고 실체를 이 시대에 드러내신 하나님이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숭배한 역사부터 살펴보자.
♣ 민수기 21장 4-6절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호르산에서 진행해서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가면 지척인 가나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시험하려 둘러 둘러 오랜 시간을 광야에서 돌리셨다. 이미 가나안을 약속으로 주셨음에도 오랜 광야생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한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묵인하지 않고 많은 백성들을 불뱀을 명하게 물려 죽게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뒤늦게 회개하며 구원을 간구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은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며 살 수 있게 해주셨다. ♣ 민수기 21장 7-9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미지 출처: 네이버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일이 있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된 문제다. 놋뱀 자체가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살게된 것일까?
아니다. 놋뱀의 능력으로 살게 된 것이 아닌 "놋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형체가 없다보니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놋뱀이 그들을 살린 것으로 오해하여 오랫동안 놋뱀을 성전안에서 숭배하고 만다. ♣ 열왕기하 18장 3-4절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은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 시대는 모세 시대로부터 약 800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때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을 성전안에서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당을 제하며 주상, 목상등의 우상 숭배를 타파했던 히스기야는 그 놋뱀을 부수기에 이른다. 그 놋뱀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고 말했다.
누후스단은 놋 조각이라는 뜻을 가졋다. 이는 놋뱀이 단지 놋 조각에 불과한 우상임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을 기뻐하시며 어디로가든지 형통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왕하18:7).
그렇다면 놋뱀을 부순 히스기야의 행동을 하나님은 왜 기뻐하셨을까? 그것이 우상 숭배임을 아셨고 놋뱀을 숭배하면 멸망당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역사는 장래일의 그림자였다(롬 15:4, 히 10:1).
모세가 놋뱀을 장대 위에 단 사건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었다. 예수님의 들리심의 사건, 십자가 사건을 살펴보자.
♣ 요한복음 3장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어디에 들리셨는가?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놋뱀처럼 나무 위에 들린다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뜻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 시대 놋뱀을 든 역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실 것에 대한 모형이자 그림자였고 예언이었다.
그러므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아났던 역사는 신약시대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심의 희생으로 살아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에서 살폈듯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준 것은 놋뱀 자체의 능력이 아니었다. 쳐다보면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놋뱀이 놋 조각에 불과한 우상이었던 것처럼, 십자가도 나무 조각에 불과한 우상이다.
그러나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형인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놋뱀만을 섬겼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약속된 새언약 유월절로 살게 된다는 무형의 하나님의 말씀은 잊은체 눈에 보이는 십자가만을 숭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우상임을 뻔히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게 그냥 놔둬야 할까? 아니다. 구약시대 종교개혁자였던 히스기야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숭배해온 이스라엘의 오랜 우상 숭배의 관습을 깨뜨린 것처럼, 우리도 우상에 불과한 십자가 숭배는 무조건 타파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교회는 십자가가 없다. 결단코 교회의 상징으로 합리화 할 수 없는게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같은 우상을 세우면 저주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 잊지말고 신앙안에서의 우상 숭배를 타파하는 우리가 되자. 목상, 주상, 석상과 같이 어떤 형상이든 다 우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