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주는 자세한 교훈을 주셨고 이제는 그의 진리를 적용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 문 가운데 어느 한 문으로 좁은 문이든가 넓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좁은 길이거나 넓은 길로 걷게 될 것입니다.
주의 목적은 이 선택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교훈에 순종하지 않는 위험, 즉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은 위험에 대한 동일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기독교인이라 확신하고는 있지만 심판날의 주님이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환멸[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의 비애[슬퍼하고 서러워함]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열심과 열정과 우리의 활동의 관점에서
우리들을 속이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기 위한 장면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들은 주님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주는 그들을 아셨던 적이 없었습니다. 환언하면, 이번에도 자기 기만의 위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을 속이며 현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계속해서 최후의 장면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기독교인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들은 천국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시 거짓 신앙고백과 진정한 신앙고백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두 사람과 두 집이 있습니다.
우선 두 사람의 경우에서 보는 유사점을 봅시다.
첫째로 그들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집을, 곧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것을 원했고, 같은 것을 생각했고,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 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두 집은 서로 매우 가까이에 있다.
외면이나 표면적으로 볼 때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문이나 창, 굴뚝은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두 집은 같은 설계,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즉 두 집은 땅 밑에 있는 단 하나의 다른 점을 제하고는 분명히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같은 종류의 집을 원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의 차이점은 누가복음 6장 마지막의 기록은 특히 도움이 됩니다.
거기서 그 현명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자기 집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전혀 파지도 않고 기초를 닦는 수고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의 의견에 따르면 자기의 생각만이 최고인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사가 OK다' '이런 사소한 일을 그렇게까지 조심하든가 주의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집을 짓자'는 것이 그의 슬로건(표어)입니다.
즉 그들은 무엇이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 자신의 의견에 만족하고 언제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서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조언을 모두 물리치고 어디까지나 자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물론 이것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그는 지식, 진리, 이해를 구합니다. 잠언은 지혜를 구하고 바라고 우리들에게 강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기 때문입니다'(잠 3:14-15). 그는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으며 성급하게 뛰어들지도 않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집의 후일 시험의 시기가 왔을 때 분명하게 됩니다.
시험은 조만간 확실히 다가옵니다.
이 시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이 확실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시험에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양자 간에 기묘하고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같은 일을 믿고, 같은 것을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또한 같은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의 두 장면도 '거짓 신앙 고백자'는 자기가 안전한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사를 행한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용서함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평안하며, 종교에서 오는 위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력을 가지고, 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을 거의 모두 위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세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사'를 행할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멸망의 자식'(요 17:12)이긴 했지만 다른 열한 제자와의 사이에 명백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 적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무관심한 이 심성, 다만 집을 세우는 데만 열중하는 이 심성을 이 기준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육적 결과를 얻는데 열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아고 점차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것을 열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