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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어인
최 명 익
쥐를 잡아먹고 고양이가 죽었다.
기른 지 3년이나 되도록 쥐를 잡아본 적이 없던 고양이가 하필 여름 생쥐를 잡아가지고 툇마루에서 피를 흘리며 먹을 때 모두 질색하여 쫓아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상귀¹를 핥으려 드는 고양이의 수염은 여전히 은실같이 빛났으나 생쥐 냄새가 나는 듯하여 몰아내었고 밤에는 자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광 속에 가두어 재웠던 것이다.
그 밤을 고양이는 밤새워 울고 보채었다.
아침에 광문을 연 선희는 역한 냄새에 울컥 속이 뒤집히는 듯하였다. 내장이 모두 스러져² 나오는 듯한 것을 무드기³ 게워놓은 앞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는 기신을 못 차렸다.
아침 볕에 간신히 뜨는 고양이의 눈은 밀화⁴ 구슬같이 영롱하던 흰자는 없어지고 옹이 빠진 구멍 같은 동자만이 한없이 깊어 보였다. 고양이를 몰아내고 재를 덮어서 부정한 것을 치르는 선희는 침도 뱉을 수 없이 가슴이 설레었다.
그때도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남편의 심한 기침 끝에 또 각혈을 할는지도 모를 염려로 사지가 저렸던 것이다.
찬거리에서 생고기 부스러기를 주어보았으나 고양이는 눈 떠보지도 않았다. 그같이 청승맞도록 소정하던⁵ 고양이는 더럽힌 입 언저리와 수염을 쓰다듬지도 못하고 눈물에 젖은 눈시울에는 눈곱까지 끼었다.
전 같으면 상귀를 핥고 앞발로 찬그릇을 하우치려⁶ 들 고양이가 조반 때도 그저 툇마루 양지쪽에 송그리고만 있었다.
“고양이가 무슨 나무럼이 갔나”⁷고 현일(玄一) 이가 들여다볼 때, 아까 어머니를 따라가서 본 아들이 “앙이 피 겨워서⁸ 이마망큼”으로 형용을 해놓고 징그럽다는 듯이 밥을 씹던 앞니 빠진 강구입⁹을 찡그렸다.
“아니 어제 먹은 생쥐가 체했던가 봐요.”
이렇게 선희는 어린것의 말을 앞질렀으나 아들은 역시 아버지를 쳐다보며
“피 많이 게우면 괭이 죽나? 응?”
“못써…….” (그런 말 해선) 선희는 이렇게 나오려는 자기 말이 오히려 사위스러워서 말끝을 삼키고 아들에게 눈총을 쏘았을 뿐이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에서 황급히 눈을 돌린 현일은 어리둥절한 아들을 달래듯이 “고양이가 죽을 리 있나 안 죽는다” 하였다. 그리고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기름기 빠진 가죽에 주름살 뿐이었다.
조반상을 물리고 현일은 그의 서재라기보다 지금은 격리 병실인 건넌방으로 가다가 “됐나 원 우리 불량소녀가” 하며 쓰다듬고 쓰다듬어도 고양이의 털은 고슬러서기만¹⁰˚ 하였다.
흰 바탕에―말하자면 흰옷 위에 검정 맨틀¹¹을 등에만 걸치고 가장무도회에 나선 소녀가 검정 복면을 한 것같이 생긴 그 나비 고양이는 쥐도 안 잡고 나증하게¹² 언제나 아랫목에서 낮잠을 자고 깨면 화장에만 골몰하였던 것이다.
고양이가 죽자 단 며칠이 못 가서 쥐가 들끓기 시작하였다.
고가라 누구를 칭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들 고양이가 없어졌다고 그렇게도 금시에 천반자¹³ 위까지 쥐가 들끓으란 법도 없을 것이다.
늘 잠을 못 이루고 밤마다 쳐다보게 되는 천장에서는 제 세상이라는 듯이 쥐들은 날뛰는 것이다. 단칸방 넓지 않은 천장을 이 모퉁이에서 저 모퉁이로 열을 지어 달리기도 하고 산병전(散兵戰)으로 뛰놀다가 서로 부딪치거나 얼크러져 싸우는 모양으로 찍찍 소리를 질러가며 뒹구는 양이 선히 보이도록 고삭은 천장 종이는 금시에 쥐 발이 쑥 빠져나올 것같이 쥐의 몸무게로 불쑥불쑥 드나들었다.
현일의 눈은 최면술에 결린 사람같이 쥐가 달리는 방향을 따라 천장 위를 밤새워 헤매는 때도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신경질이 나고 신열이 나고 식은땀이 났다.
행여 잠이 들까 하여 불을 끄고 누웠노라면 캄캄한 속에서 오직 귀로만 들어오는 쥐의 소동은 꼭 천등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하늘을 뒤말아 굴리는 듯한 그 천둥소리를 듣노라면 어두움이란 지척도 천리라 식은땀에 젖은 몸은 홀로 광야에 누워 있는 듯한 고적과 열에 뜬 몸은 바다의 끝없는 물결에 떠서 흐르는 듯 어지러워서 헛구역 의 충동으로 심한 기침 이 발작하는 것이었다.
기침이 겨우 진정되면 끝없는 어두움이 맴돌아 좁은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이 귀가 울 뿐 캄캄한 적막 속에서 몸의 고통도 신산한 생각도 모르게 그저 허탈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대로 죽지나 않나? 아이 편해’ 이런 생각으로 담 결린 성 대가 말은 채 이루지 못하나 가래가 끓는 것이다.
잠이라기 보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떨어진다.
또 뚜루루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침 소리에 주춤했던 쥐들이 다시 발동한 것이다. 전보다 좀더 요란스럽게 들리면서 천장이 빠지며 수없이 많은 쥐가 앙상하게 드러난 갈빗대 위로, 편한 생각에 히죽이 웃은 표정이 그냥 굳어진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린다. 더덮이는¹⁴ 쥐로 가슴이 답답하고 뭉글뭉글하였다. 떨어진 쥐들은 침이 말라서 미처 감쌀 수 없이 드러난 자기 이들을 짓밟고 달아난다.
이같이 가위에 눌려 몸이 떨리는 악몽에서 깨면, 요와 이불을 뒤쳐 깔고 뒤쳐 덮어야 하도록 도한(盜汗)이 나는 것이었다.
밤은 얼마나 깊었나?
왜 새벽이 어서 안 오나?
부엌에서 덜그럭 소리가 난다. 처가 벌써 아침동자¹⁵를 시작하나?
밤을 재워서 그릇 냄새가 나고 미적지근한 자리끼 말고, 갓 떠온 냉수를 시원히 마셨으면 한다. 벌떡 일어나서 아직 산산한 밤기운에 식은 물이 남실남실 매립도록¹⁶ 용두(龍頭)¹⁷까지 차 있는 수도를 솨 틀어서 마시고 싶은 욕심, 그러나 식은땀에 젖은 몸에는 이불 밖의 밤기운이 바늘 끝같이 차가웠다.
그렇게 찬물이 그리우면서도 몸은 오슬오슬 오한에 떨리는 것이다. 일어났다가 감기가 들면 내일모레는 건듯 죽어버릴는지도 모를 것이다. 죽지는 않더라도 자기의 건강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한 층계를 내리짚고 말 것이다.
‘이렇게 물 한 그릇을 떠먹는 데도 생사를 겨누고 망설이게 돼서야.’ 현일은 베개 위에 다시 머리를 떨어트리고 눈을 감았다.
부엌에서 또 덜그럭 소리가 난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쉬쉬 이놈의 쥐 같으니” 하는 처의 소리가 들린다. 자는 음성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방문 밖에 놓인 화로전¹⁸에 인두의 재를 터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방문이 닫힌다.
‘또 바느질로 밤을 새우는가? 혹시 밤은 아직 그리 안 깊었는가?’
10분. 20분. 찬장에서 놋기명¹⁹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찍찍 놀란 소리를 지르며 쥐가 우르르 달아난다. 벌컥 방문이 열렸다.
“원 속이 상해서.”
그 표정이 보이도록 처의 목소리는 또렷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부엌 바닥에 고무신 끄는 소리가 나고 찬장 문이 열리고 그릇 간집하는²⁰ 소리가 들린다.
안방 시계가 친다. 4시.
머리를 들어 본즉 모기장을 격하여 보이는 바깥 장독대에 놓인 흰 항아리의 윤곽이 새벽빛에 서릿발같이 차게 푸르렀다. 그 아침 이슬방울을 탄 혓바닥으로 핥았으면 하였다.
현일은 부엌 편 담을 퉁퉁 치고 “여보 물 좀 주” 하였다.
“네?”
“물.”
솨 수도 소리가 났다. 현일은 몸을 뒤치어 두 팔고비²¹를 베개에 걸치고 엎디었다.
선희는 물그릇을 들고 들어와서 모기장 밑으로 들여놓고 앉으며 “입때 안 주무셨어요?” 물었다. 물은 그릇 잡은 손이 휘뚝거리도록 감돌아 한가운데는 보조개 같은 적은 소(沼)가 맴돌이를 한다. 손가락으로 꼭 찔러보고 싶게 재롱스러운 것을 마시고 난 현일은
“나는 좀 잤지만 당신은 또 밤새워 삯바느질이오?”
“자려다가 급하다는 것을 맡은 것 이 있길 래 해치우려구……”
“제발 좀 그만두우 그러잖어두 살아갈 도리가 있을 테니.”
“누가 그런 걱정을 한대요. 그저 자미²²루 그러는 거죠.”
“자미!”
“그저 놀면 뭘 해요? 공연히 조바심하지 마시구 학교 일이 결정되는 때까지 한껏 늘어 잡구 쉬어보실 생각이나 해요.”
“누가 안 그런다나, 오히려 이편이…… 글쎄 삯바느질 하는 것이 안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하는 것은 누가 조바심을 하는 게요. 그런 집안에서 밤낮 누워만 있는 내가 편하겠소?”
현일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 밤뿐이 아니었다.
석 달 전에 M학교가 폐교되어 현일이가 직업을 잃게 되고부터 선희는 삯바느질거리를 모아들여서 거진 매일이다시피 밤을 새우는 것이었다.
M학교 교원으로 매달 백여 원의 수입이 있었지만 병약한 현일의 살림은 그 정도의 샐러리맨 이상의 살림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낡은 집이나마 마련하기에 저축이 없었던 것이다.
석 달 전부터 수입이 끊어진 그들은 퇴직금으로 받은 5백여 원으로 살아갈밖에 없었다. 끝없이 초조할밖에 없는 현일은 M학교 대신으로 새 이사회와 새 재단의 조직으로 창립된다는 H학교에 다시 취직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거기 취직이 안 되더라도 아직 남은 돈을 절용해가며 달리 자리를 구하거나 그 역 안 되면 이 집을 팔아서라도 처자를 기를 자신이 있노라고 장담하고 밤새워 삯바느질을 하는 처를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희로서는 딱히 취직이 되리라고 미룰 수 없는 일이요 된댔자 부지하세월을 어찌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절용한다 하더라도 나날이 줄어만 가는 돈이요 그렇지만 병약한 현일의 영양을 위하여는 그의 식찬을 이상 더 덜 수는 없다고 생각되므로 한 푼이라도 보태어 써보려는 결심으로 삯바느질을 시작한 것이었다.
“하여간 내일은 H학교 인사계에서 만나보자니까 내일로 곧 결정은 안 나더라도 되그 안 될 것을 대강이라두 짐작할 수야 있겠지.”
“되겠지요.”
“글쎄.”
“당신의 이력이나 엽때²³ M학교에서 지나온 것을 그이들이 모르겠어요?”
“……사람의 일을 알 수가 있더라구.”
“나두 잘 테니 염려 마시구 주무셔요.”
“음” …… “거기 좀더 앉어요.”
일어서려던 선희는 다시 앉았다.
“모기 물잖어?”
“……”
선희는 말없이 고개만을 흔들고 현일의 베갯머리에 놓인 부채를 집으려고 모기장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에는 매듭이 앉고 손등은 물에 거칠어지고 바늘에 닳은 손끝은 거스러미가 일어선 손이었다.
현일은 그러한 처의 손을 잡았다. 복잡한 감정에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생버들가지를 모아 쥔 듯한 탄력을 장〔掌〕바닥²⁴에 감촉하며 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새벽빛을 받고 있는 그 얼굴은 푸르도록 희었다. 푸른 모기장을 격하여 저편에 멀리 겨울달같이 쳐다보일 뿐이었다. 그 눈도 표정 없이 그저 푸르게 빛날 뿐이었다. 그러한 처가 말없이 손을 빼려고 지그시 당기는 팔의 긴장을 현일은 전신에 느꼈다. 현일은 반항적으로 마주 당기는 자기 팔의 힘을 또 느낄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의 얼굴은 너무 차기만 하고 그 눈은 아무런 감동도 없어 보였다.
‘얼마나 삭막한 부부냐?’ 이런 생각에 현일은 저도 모르게 대담해짐을 깨달으며 한 손으로 모기장을 걷어들고 “들어와요” 이렇게 부르짖으며 처의 손을 끌었다.
선희는 쓰러지듯이 현일의 얼굴을 안았다. 현일의 뺨에 뜨거운 입술이 묻혔다. 그리고 작게 느껴 우는 소리가 났다.
“안 돼요. 지금 이래선 안 돼요. 용서해요.”
이렇게 부르짖고 선희는 현일의 팔을 뿌리치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린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현일은 자기 이마에서 식어버린 처의 눈물방울이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달으며 눈물이 소아오ㅅ르는 것을 씻으려고도 안 했다.
이튿날 11시가 지나서야 일어난 현일은 동경서 어제 왔노라고 적어두고 간 병수의 명함을 보았다.
아직 기침 전이라니까 저녁에 또 오마고 갔다는 병수가 가져왔다는 버터와 치즈를 선희는 자랑이나 하듯이 현일이 앞에 펴놓으며 그이가 올 때마다 이렇게 많이 사다 주어서 얼마나 요긴한지 모르겠다고 병수에게 치하나 하는 듯이 기뻐하였다.
그 버터로 구운 토스트와 치즈로 아침을 먹고 오정이 지나서 현일은 M학교로 갔다.
M학교라고들 하지만 우중충한 교사(校舍)가 남았을 뿐 지금은 새로 된다는 H학교 창립 사무소가 된 것이다.
육칠 년간 내 집같이 드나들던 현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낯선 급사에게 명함을 주고 서 있는 현일은 이렇게 찾아와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면 인사의 무상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르리라고 생각하며 저편 하늘에 구름같이 피어오르는 감회를 누르려 하였다.
급사를 따라 이전 교원실에 들어선 현일은 권하는 대로 문안〔問安〕 의자를 빌려 앉았다. 낡은 의자나 테이블이 모두 그전 것으로 위치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저편 한가운데 있는 이전 자기 테이블에는 책과 분필곽과 잉크병 대신에 재떨이와 사이다 병과 오리즈메 벤도곽²⁵이 흩어져 있었다. 두세 사람이 아직 벤도를 먹고 셔츠 바람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여럿이지만 한 사람도 알 사람이 없었다.
현일은 다시 급사의 인도를 따라 이전 교장실로 갔다.
거기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직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아사히’를 피워 문 중노인이 다를 뿐이었다.
현일은 새로 조직된 H학교 이사 중의 한 사람의 소개로 H학교 교직원의 인선을 맡았다는 이 중노인을 찾아보게 된 것이었다.
그 중노인은 현일의 인사를 정중하게 받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현일은 벗어진 혈색 좋은 그의 이마를 잠깐 바라보았다. 꽤 몽몽하달 수 있는 아사히 연기를 격하여서도 그 이마와 얼굴은 빛났다. 그 빛나는 이마를 넘어서 현일의 정면인 담〔壁〕 중앙에는 못〔釘〕 구멍 세 개가 이등변 삼각형으로 뚫려 있었다. 본시 난황색이던 이 넓은 담 중앙에 세 못 자국으로 된 이등변 삼각형의 저변(底邊)과 정점 (項點)을 길이로 한 장방형이 희게 보이는 곳은 전 M학교 창립자인 H씨의 사진이 걸렸던 곳이다. 그 자리가 흰 것이 아니라 이 담을 처음 칠한 난황색이 사진 뒤에서 아직 새로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색 낡은 다른 면보다 희게 보이고 지금 바라보는 현일에게는 그 흰 자리가 두드러져 보이기도 하고 깊이 들어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일은 지금도 그 흰 면
에서 H씨의 초상을 보는 듯하였다.
매일 아침 이 테이블 위에 놓인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머리를 들 때마다 그 초상의 다리 없는 안경알이 번쩍 빛나는 듯한 착각을 느껴온 것이었다. 지금도 그런 착각으로 시선을 떨어트렸을 때 눈앞의 중노인은 어느새 금테 안경을 쓰고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현일이가 교수하던 수신 교안이요 손에 든 것은 현일의 이력서였다.
이력서와 교안을 번갈아 뒤적이면서 그 중노인은 “윤리는 대학 선과로 자격을 얻고, ……영어는 검정을 치르고…….” 이렇게 중얼거리던 말끝에
“그래……” 갑자기 안경알이 번쩍하며
“도찌가 도꾸이까네?”
“하〔네〕?”
방금 물은 자기 말을 잊었다는 듯이, 혹은 현일이가 재우쳐 묻는 말에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인지
“몸이 약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보매 아닌 게 아니라 약한 모양인데 본인 자신은 어떤가?”
이렇게 그의 말은 각설로 나갔다.
때마침 서창으로 기운 햇빛에 그의 안경알은 인화(燐火)가 피어오르듯이 눈부셨다.
현일은 수신 교안을 뒤적여보는 것보다도 자기의 빈약한 얼굴을 쏘아보는 그 눈에 더욱 불안을 느낄밖에 없었다. 금시에 뺨 위에 붉은 기운이 치밀고 기침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 인후 속에서 담이 게거품같이 끓어올랐다 꺼졌다 하는 소리가 ‘몸이 약한 것도 죈가?’ 이런 글자를 발음하는 듯하였다. 현일은 입 안의 침을 모아서 삼키고 삼켜서 그런 글자의 발음을 하는 담을 씻
어내리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간신히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책임 감당에 별 장애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끝에
“지금까지의 제 출근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앞으로도…….”
이러한 말이 자기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을 들은 현일은 ‘음, 걸작인걸!’ 하고 신음 소리가 또 저절로 나왔다.
하소하려는 의사도 없이 저절로 나오는 하소였다. ‘나도 어지간히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구나. 그러나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현일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나서마다 쳐다보게 되던 초상을 다시 보려고 눈을 들었다. 그러나 흐린 물에 뜬 나무쪽같이 흰 장방형에는 죽어가는 고양이의 동자같은 못 자국만이 보일 뿐이었다.
현일은 현기가 났다. 넓은 담은 탁류(濁流)와 같이 휘어져 저리로 저리로 흘러가는 듯하고 그 탁류에 뜬 세 못 자국의 흰 면도 한없이 멀어갔다. 마주 앉은 중노인의 무거운 음성이 또 들린다.
“그대가 가르치던 수신 교안을 보면 시대 인식이 좀 부족한 점이 있는 듯한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현일이가 어떻다고 대답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것을 기회로 교원 말고 한번 다른 직업을 구해볼 생각은 없는가?”
그 인화가 피어오르는 안경을 쳐다볼 기력도 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는 현일의 귀에 또 이런 말이 들렸다.
“아직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현일은 이렇게 간신히 대답하는 자기의 말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또 흠칫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기의 그러한 말을 이 중노인이 혹시 ‘교육은 나의 천직이니까요’ 하는 뜻으로 이해(오해가 아니라)할 것 같은 염려로 민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나는 경험도 자본도 건강도 없는 사람이니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가’고 말한댔자 오직 저편의 경 멸을 살 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현일이를 소개한 이사의 체면을 보아 한번 만나준다는 데 그치고 마는 듯한 이 면담을 마치고 나선 현일은 포켓을 더듬어 지갑을 꺼내보았다. 돈이 있었다. 취해보고 싶었다. 친구와 이야기. 술.
그러나 자기를 염려하는 처의 얼굴이 보였다. 현일은 어젯밤 처의 눈물에 젖었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씻었다.
이 삼사 년 동안 오직 남편의 건강을 위하여 금욕 생활을 지키려고 애쓰는 처의 노력을 생각하였다. 그러한 선희는 어서 세월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현일의 병은 나이 많아 갈수록 병과 싸우는 생리 기능이 늘어간다는 것과 어서 아들이 자라서 병약한 아버지를 받들어 도울 수 있는 대장부가 되기를 바라는 선희는 어서 세월이 빨리 갈수록 그의 가정의 행복도 빨리 올 것같이 믿었다. 그뿐 아니라 세월이 빨리 가면 자기는 괴로운 청춘을 속히 잊어버릴 수가 있다고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아내를 생각할 때 현일은 지금도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일은 자기로서도 똑똑히 형언할 수 없는 반역심이 끓어오르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마다 처에게 여인의 무지한 로맨티시즘이라고 부르짖어도 보았다. 무지한 여인의 낙관주의라고 꾸짖기도 하였다.
―내년에 내달에 그보다도 단 며칠 후에 내가 심한 각혈을 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는지 누가 아느냐? 그리고 아들도 처도 벌써 내게 전염되어서 언제 각혈을 하게 될지 아느냐. 어느 누가 내 병이 나으리라고 하며 우리 집에 장차 행복이 다시 오리라고 누가 보증을 하더냐고 현일은 자기와 처를 위협하고 저주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흥분한 때만이 아니었다. 냉정한 사실과 맹목적 운명을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흥분하는 것은 오히러 그 냉정한 사실과 맹목적 운명에 반역할 수 없는 약자의 울분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과 운명을 발설도 않고 생각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인정인 것이다.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대담히 발설하는 것은 오직 건전한 사람과 다른 병자인 까닭이다. 이렇게 생각할수록 현일은 저주받은 자기의 운명 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현일은 홀어머니의 손끝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었던 것이다. 훈도 생활 근 10년에 약간의 저축을 학자로 교육자라는 특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 철학과에 선과생으로 들어갔다. 그때 현일은 서른이 가까운 나이였다. 3년 후에 대학을 나오자 시간 교사로 M학교에 수신을 가르치게 되고 그 이듬해에는 훈도 시대부터 10여 년간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 자격 검정을 치러서 M학교에 전임 교원이 된 것이었다.
현일이가 처음 각혈을 한 것은 그때였다. 그때 그는 쏟아놓은 요강의 피를 들여다보며 이를 스리물고²⁷ 두 주먹을 굳게굳게 쥐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던 것이다. 또 싸워야 할 싸워 이겨야 할 이길 자신이 있는 그러나 녹록히 볼 수 없는 대적을 눈 앞에 보는 듯한 홍분을 느꼈던 것이다.
언제나 당락²⁸할 것 같은 예감으로 기다린 듯 운명의 타격은 종시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걸음도 움츠리려고는 않았다.
교단에 서는 현일에게는 수신은 열과 신념의 시간이었고 영어는 긍지와 자신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현일은 지금까지 50여 년 반생에 어느 때 한번 마음을 느껴서 숨을 태워본 적도 없이 걸어와 다다른 처지에서 좀 다리쉼을 하여도 좋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각혈은 연거푸 나왔다.
각혈을 하고 누웠을 때 간호에 지친 처가
“세상 살아가기가 이렇게 힘들고 괴로워서야.”
현일의 훈도 시대부터 현일의 간핍한 살림을 받들어온 처의 한탄이었다.
“세상에 무슨 죄가 있나? 그저 내가 불행 한 사람인 것뿐이지.”
“그럼 당신은 무슨 죄가 있어 그래요?”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인과보응을 믿으리만치 선량한 선희는 이렇게 물을밖에 없는 것이었다.
“죄?”
“……“
“죄라면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같이 농사나 짓구 살았으면 이런 병은 안 났을는지 모르지.”
“그 약질에 농사는 하는데요?”
“열소리²⁹ 할 때는 내가 얼마나 튼튼했는데 그래. 동리서는 모두들 내 아버지 닮아서 장골이라고 그랬는데.”
현일은 시골서 보통학교를 마치자 아버지가 돌아가서 땅도 없고 손도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오직 유산이라고 남은 집 한 채와 텃밭 하루갈이를 팔아가지고 모자가 이 도시로 와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사고무친한 이 도시의 한 골목에 셋집을 얻고 삯바느질을 시작하고 구멍가게를 보아서 아들이 훈도가 된 것을 대과(大科)나 한 듯이 기뻐하던 어머니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현일이를 나무라지도 않고 다시 대학으로 가는 아들을 따라가서 며느리와 같이 또 삯바느질을 하다가 현일이가 졸업하는 전해 겨울에 죽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지난 일을 생각하면 암담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자기를 생각하면 고생살이로 너무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도리어 잘하신 일이라고도 생각되었다.
현일은 한교원실에서 오륙 년이나 같이 지나온 동료들을 눈앞에 그리며 누구를 찾을까고 생각하였다. 학교가 없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과 사십에 인생을 재출발한다면서 만주와 북지(北地)로 떠난 사람도 있었다. 그 후 그들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젊은 교원 중의 한 사람은 어느 신문사로 한 사람은 시골 어느 학교로 취직되어 가고 말았다. 그들을 전송할 때처럼 현일은 자기의
나이와 신병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여기 남아 있는 몇몇 사람은 퇴직금을 자본으로 작은 장사를 시작한 이도 있었다.
며칠 전에 거리에 나갔던 현일은 역사 선생이던 ㅇ씨가 낡은 포대실³⁰로 만든다는 소포노를 들고 어느 잡화 도매상점 안에서 점원들과 큰 소리로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길을 돌아갔던 것이다.
그때 현일은 그러한 자기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딴 길로 숨어 가게 되는 자기가 불쾌하고 성가셨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 상점 앞을 지나면서 O씨가 또 있지 않나 생각되어 현일은 곁눈질해 보았다.
M학교 졸업생 두 사람이 사각모를 벗어 인사하고 지나간다. 현일은 아침에 왔더라는 병수를 생각하였다. 작년 겨울 방학에 보고는 만나지 못한 병수를 만나면 하였다. 이 반년간 기울어져가는 학교 문제와 마침내 폐교되어 다시 취직 문제 등으로 뒤숭숭한 판이라 두세 번이나 받은 병수의 편지에 회답할 경황도 없이 지났다. 3년 전에 현일의 담임으로 졸업한 병수는 동경 S대학에 재학 중이다. 방학에 돌아온 때마다 현일을 찾고 전공하는 영문학과 동경 문단의 새로운 문제와 유행 작가의 새 작품의 경향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지난봄에는 로렌스의 단편집과 지드의 일기 영역(英譯)을 보내주었다.
현일은 문외한으로 자처할밖에 없는 문학 이야기와 그보다도 젊은 학생들의 생각과 생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일찍이 청춘다운 학생 시절을 경험할 수 없었던 현일이라 더욱 그러하였다. 병수와 같이 제 시절에 계제³¹를 밟아가는 학생 생활이 부럽기도 하였다. 부럽다는 것이 부질없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독학으로 암기한 현일의 어학이 문법적이라면 그들은 문장적이요 대학에서 단시일에 모아놓은 현일의 지식이 문장적이라면 그들은 사색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젊은 그들의 지식과 생각이 비록 산만하고 너무도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의 생각과 지식에 비겨 얼마나 윤채가 있고 탄력적이랴. 물론 나이 탓도 있겠지만 자기는 젊은 그 나이 적에도 그런 윤채와 탄력이 없었다고 보면 십오륙 년이라는 연령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현일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수와 몇몇 착실히 공부하던 생도들은 현일의 윤리 강의와 영어해석에 탄복하였고 더욱이 현일의 이력으로 보아 노력의 인으로 그를 존경하고 숭배한 것이다. 그래서 방학에 돌아온 때마다 현일을 찾게 되는 것은 전부터의 습관이거나 빤지르르한 인사만은 아니었다.
“이번 오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고.”
다시 이렇게 생각하는 현일은 오래간만에 구지레한 속생활 문제를 떠난 청신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흥분하고 다시 한 번 인생의 정열을 느껴보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실 이렇다고 할 이야기가 없었다. 이 반년 동안에 직업을 잃을 염려와 잃은 후의 걱정과 두 번 각혈을 한 외에는 독서로 조용한 생각도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기가 아직 실생활의 아무런 걱정도 모르는 그에게 지금 자기가 당하는 모욕과 실망을 이야기한댔자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할 것뿐이 아니냐고.
이렇게 생각하는 현일은 어느 다른 누구를 자기와 같은 모욕을 당해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일은 교문을 나서 누구를 찾을까고 생한 때부터 머리 속 한 모퉁이에 들어앉은 도영이를 깨닫고 주춤하였다. 그의 집은 저 골목을 들어가서 한참 걸으면 언덕 막바지 집이었다.
도영이 역시 M학교 교원으로 교원으로는 현일이보다 삼사 년 선배였지만 고학으로나마 계제를 밟아 일찍이 학교를 나온 사람이므로 나이는 현일이보다 두세 살 아래였다.
같은 영어 선생이라 학과 분담 등 교섭이 많은 관계도 있었지만 비슷한 과거를 걸어온 그들이었고 역시 같은 병을 가진 처지였으므로 이해와 동정으로 지내온 사이였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도영의 병세가 더쳐서 1년 전에 그는 사직하고 말았던 것이다. 간핍한 살림에 병과 싸우게 된 도영이는 간신히 마련하였던 집을 팔아 지금의 오막살이를 사고 남은 돈으로 그의 처가 구멍가게를 보아 살아가는 처지였다. 근자에 도영이는 신경 쇠약이 더쳐서 거의 실성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 현일이가 찾아갔을 때 도영이는 철사로 만든 쥐덫 속에 갇혀 있는 쥐를 들여다보며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현일이를 반가이 맞은 그는 동정을 구하듯이 자기 집에 쥐가 많아서 밤에 잘 수 없는 것은 물론 자는 어린것들의 발과 손을 물어뜯기가 예사요 그보다도 질색은 밥에 쥐똥이 늘 섞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맨 처음에는 풀어지지 않는 팥으로 알고 그냥 씹었으나 그것이 쥐똥인 것을 안 다음부터는 팥이 모두 쥐똥으로만 보여서 평생 좋아하는 팥밥을 먹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래서 밥을 나무랄 때마다 그의 처는 “일 않는 서방과 쥐 안 잡는 고양이는 있어야 산다는 말이 옳아. 고양이 소리만 나도 그 놈의 쥐가 좀 없어지련만” 하는 것이므로 그 말이 일 않는 자기를 비꼬아 하는 말인지 위로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여러 번 말다툼을 하다 못해 며칠 전에는 쥐를 전멸해 보이려는 결심으로 약방에 ‘네꼬이라즈’³²를 사러 갔다고 한다.
약방 주인은 자기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주소 성명을 물어서 종이에 적고 도장을 찍으라는 것이므로 자기의 꼴이 자살이나 하게 보이는 눈치였으므로 네꼬이라즈를 안 사고 돌아오는 길에 그 쥐덫을 사온 것 이 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하고 도영이는 조롱같이 쥐었던 것을 치켜들고 현일의 얼굴과 그것을 번갈아 보며 희색이 만연한 낯으로
“‘덫 속에 갇힌 쥐가 오직 할 일은 덫 속에 있는 미끼를 먹고 사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 않소? 그런데 말요. 요놈이 꼭 그 말을 실행하는구려. 신통찮아요? 그래서 나두 이 쥐를 ˙배와서 이전 아무런 것이라도 먹구 살려우. 별수 있소? 아무런 처지에서라두 살아야지. 그래 나는 이 며칠째 쥐똥밥이건 팥밥이건 막 먹지요. 김 선생두 이 쥐의 철학을 배우시우.”
도영이는 이렇게 지껄이고 나서 입이나 맞추려는 듯이 입술을 모아서 쥐덫에 대더니 찍찍 쥐소리를 하고는 껄껄 웃었던 것이다.
그러한 도영이를 현일은 지금 찾아보고 싶지가 않았다. 자기의 말로를 눈앞에 보는 듯한 것이 두렵다기보다 그러므로 오히려 반발적으로 도영이가 밉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 교원실에 있을 때에도 경험한 감정이었다.
서로 이해와 동정을 하면서도 그것이 동병상련이라는 종류의 것인가고 생각될 때마다 현일은 자기에게 역정을 내고 도영이를 미워할밖에 없었다. 무슨 까닭일까 하면서도 심지어 변소에 갈 때마다 담뱃갑과 손수건을 꺼내놓고야 가는 도영의 결벽성 까지도 구역이 나는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담을 아스팔트 위에 뱉고서 주춤하는 때에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시우?”
하는 소리와 마주쳤다.
“……”
“어디를 가시는 길이오?”
재우쳐 묻는 사람은 그림 선생이던 P씨였다.
“그저 공연히 나왔습니다. 자미 어떠시오.”
현일은 또다시 교원 운동을 하러 갔다 오는 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학교가 그렇게 되자 남에게 매인 목숨이라는 봉급 생활을 내던지고 혹은 다시 운동을 한댔자 가망이 없다고 단념하고 제각기 새 직업으로 나선 동료 중의 한 사람인 이 P씨 앞에서 유독 자기만이 이러고 다니는 것은 동료를 배반한 듯이 미안한 듯도 하고 한끝으로는 자기만이 무능하고 병약해서 생존 경쟁 제일선에 나설 주변과 용기가 없어 이러고 다닌다고 그들이 생각할 것이므로 창피도 하였다.
더욱이 지금 당하고 오는 일을 생각하면 바른 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김 선생, 취직 운동 중이시라던데 뜻대로 되시는가요?”
종시 P는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글쎄요, 웬걸 되겠소…… 장사에 자미 보시지요?”
현일은 금시에 말을 돌렸다.
“말씀 마쇼. 멋모르구 시작했다 큰 봉변입니다.”
“왜 그럴라구요.”
“첫째 기술이 문제구, 소자본으로 하는 노릇이라 유(類)가 많아서 동업자 간에 경쟁이 심하고 자 이렇게 견본을 가지구 진일 싸돌아다녀두 금새만 내려 깎지 어데 팔려야지요.”
P씨는 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가며 빨랫비누 견본을 현일에게 내보이며
“빨랫비누니까 품질이야 별다를 것이 없지만서두 모양이라도 좀 다르게 하노라구 이렇게 고안해봤죠” 하는 P씨의 말에
“거 참 미술적인데요.”
이렇게 대답하는 자기 말이 혹 시니컬하게 들릴 것 같아서 그 타원형 비누를 쓸어보면서
“참 아담하게 된걸요” 하였다.
“그런데 같은 중량인데두 상점에서들은 네모난 것보다 적어 보인다구 ‘가다’를 고치라는구려. 모양이 보기 좋은 거야 알아줍니까! 그래 다시 녹여서 모나게 할밖에 없죠.”
현일이는 “모양도 잘 팔리도록 할밖에 없겠지요” 하였다.
“참 그러드군요. 김선생 이것 가져다 써보세요” 하고 P씨는 견본 비누를 현일에게 밀어 맡기듯이 주며 “바빠서 실례합니다” 하고 총총히 가버리는 것 이다.
현일은 손에 놓인 비누 잔등에 조각된 밀레의 「만종」을 단순하게 그려놓은 그림과 행복이라는 글자를 보고 또 총총히 걸어가는, 젊은 화가 P씨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술은 거품이 되고 말 이 비누 잔등의 의장으로 남기고 행복을 따라 총총걸음을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떠오른 현일은 지금 사람은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전공하고 연구한 자기의 지식과 기술을 그냥 지켜가지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가? 또는 그저 시정인에 부동되어 쉽사리 버리고 마는가? 요새 학교를 나온 젊은 인텔리들이 교문을 나서기만 하면 제복과 같이 인텔렉트를 벗어던지는 것은 웬일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현일은 방금 ‘교원 말고 한번 다른 직업을 구해볼 생각은 없는가’고 권고하는 말소리가 다시금 귀에 새로웠다.
세상의 분위기가, 그리고 절박한 현실이 인텔렉트를 버리고 직업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벌써 직업을 바꾸었어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아직 이러고 있는 것은 오직 건강과 경험과 자본이 없는 탓이 아닐까? 그러나 자기에게 당초부터 자본이 있을 리 없고 장사의 경험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천생 교육자로 태어난 사람같이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쑥스러운 말이 되고 말았지만―얼마 전까지도 현일은 교육이 나의 천직이어니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교단 생활을 직업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이 애착을 느끼는 것이 현일의 진정이었다.
현일은 어디로 갈까고 생각할밖에 없었다. 흥분도 가라앉고 만 현일은 누구를 찾아 이야기하고 취하고 싶은 충동도 사라지고 말았다. 또 찾을 사람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처가 놀라고 걱정하도록 자기의 생명을 학대할 권리나마 내게 있느냐고 생각한 현일은 그만 충동과 홍분이 사라진 뒤에 오는 피곤으로 몸과 마음이 자지러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피곤하지만 지금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취직을 궁금히 기다리고 있을 처에게 이렇게 시든 자기 모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현일은 마침 발 앞에 들이닫는 전차에 망연히 오르고 말았다.
시외 종점에서 내린 현일은 한편에 노송이 울창한 옛 성벽 밑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송림 사이로 산보객들이 희뜩희뜩 보이나 조용한 길이었다. 실바람이 불어오고 메마른 길 위에 나무 그림자가 흔들린다. 보이지 않는 새 소리도 들린다. 흰나비 한 놈이 성벽 굽이를 돌아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옛 성벽에 석양이 비친 돌은 푸실푸실 부스러질 듯이 메마르고 희게 보였다. 굽이를 돌아 능달³³은 돌이끼에서 물방울이 들을 듯이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렇게 우중충한 성벽 그림자가 골짜구니를 덮었다. 그러한 그림자를 벗어나 솟아 있는 늙은 소나무 가지가 좁은 길 위에 아치같이 성벽을 내질렀다. 마른 삭정이였다. 그러나 들보만치나 굵고 싱싱해 보였다.
언젠가 본 상량식에 흰 수목필³³이 너울너울 늘어졌던 기억. 그 한 끝에 축 늘어진 송장의 착각으로 현일은 자기 발밑의 땅이 아래로아래로 꺼져 내려가는 듯이 허전하여 성 벽을 짚고 기대었다.
기침이 나고 이마에 땀이 솟았다.
쳐다보이는 나무는 한없이 늠름하고 기댄 성벽은 끝없이 먼 옛 세월의 화석 인 듯이 창연하고 엄숙하였다.
그러한 성 벽 위에서 어린애들의 창가 소리가 들렸다.
현일은 어디나 언제나 인적이 끊이지 않는 것이 미쁘게 느껴지는 듯하였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또 한 굽이를 돌아가면 누각도 없는 작은 성문이 있었다. 안에는 인가도 없고 잡목이 우거진 산 아래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 넓은 평야 저편에는 병풍 같은 연산(連山)이 들렸다. 현일은 그 성 문지방에서 쉬려고 들어갔을 때 한 층대 떨어진 숲 속에 두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땅바닥을 굽어보고 있는 것 이 내려다보였다.
몇 걸음 나서서 본즉 한 사람은 분명히 병수군이었다.
“병수군.”
현일이가 부르는 소리에 쳐다보는 또 한 사람은 도영이었다.
병수는 일어나 인사하고 도영이는 오라는 손짓을 한다.
“아침에 오셨드라구?”
“네, 주무시길 래 그저.”
내려간 현일이와 병수가 인사도 맞추기 전에
“김선생도 한 병 마시구 후원하시우.”
하며 도영이는 사이다 한 병을 불쑥 내밀었다.
“고맙소. 한데 후원이라니?”
현일이가 묻는 말에 병수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하였다.
도영이는 새로 딴 사이다를 반쯤 나팔을 불고 나서
“다른 게 아니라 이 구멍에 방금 큰 황구렝이가 들어갔는데 그놈을 잡으려구서 지금…….”
풀밭에 뚫린 구멍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그의 말은 그가 혼자 여기서 거닐다가 구렁이가 이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단장 끝으로 후벼보았으나 일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난처한 판에 마침 병수군이 와서 묘한 꾀를 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렁이를 쫓아낼 수단으로 그 구멍에 오줌을 누려고 사이다를 사다 마셔가며 오줌 마렵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그들 옆에 반 다스나 되는 사이다 병을 보며
“대체 구렝이는 잡아 뭘 하우?”
이렇게 묻는 현일은 또 이 사람이 무슨 현묘한 철리를 생각했는가고 언젠가 본 쥐를 생각하며 물었다.
“뭘 하다니 먹지요. 자, 좀 보시려우? 그새 구렝이를 세 놈이나 먹었더니 이 렇게.”
하며 도영이는 그 뼈만 걸린 팔을 걷어 올렸다.
“그래 좀 기운이 나셨소?” 하고 현일은 웃으며 물었다.
“나다뿐이오. 이제 멫 놈만 더 먹으면 완인이 될 자신이 있거든요. 김선생은 혹 더럽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원기를 돕는 데는 구렝이나 독사가 제일이구 열을 내리는 데는 지렁이가 제일입니다.”
“그래 도영씨 비위로 그런 것을 자셔요?”
“먹다뿐이오. 김선생이나 나 같은 사람은 첫째 비위가 좋아야 삽니다. 결벽성이라는 것은 일종의 센치입죠. 아무런 짓을 해서라두 병이 나아야지. 안 그래요? 인생으로 실패라는 것은 남이 다 사는 세상에 혼자 일찍 죽는 것이외다. 살고 볼 일이지 노상 한때는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공연한 관념 유희거든요. 병수군은 지금 그런 생각을 할는지 모르지만 나같이 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죽잖고 사느냐가 문제거든. 하루라도 더 살구 싶으니까. 김선생은 그렇게 생각잖아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요?”
“글쎄요.” 현일은 사실 이렇게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것 보시우, 김선생은 아직두 좀 건강에 자신이 있으니까 나 같이 오직 살고 싶다는 한 가지의 욕망만을 가질 수가 없는 게죠.아직도 여유가 있으니까, 복잡한 생각두 하고 그래서 비관두 하고 염세니 뭐니 하지, 한번 막다른 곬³⁵에 들어서면 비관이니 염세니 할 여유가 있더라구요, 그저 살겠다는 욕심뿐이죠. 그 고비를 지나야…… 자! 이것 좀 보시우. 살기만 한다는 단단일념 〔單單一念〕으루 비관이니 염세니 하는 망상이나 결벽성을 버리고 뱀이건 지렁이건 다 먹으니까 이렇게 살이 오르지 않았어요?…….”
이렇게 떠들던 도영이는 갑자기 긴한 의논이나 하려는 듯이 한층 말소리를 낮추어서
“한데, 내가 너무 살이 올랐거니만 생각하니까 혹시 사실보다 내 눈에만 더 살이 오른 것같이 보이지 않나고 의심되기도 하는데 좀 보아주시우.”
하고 도영 이는 앞가슴을 헤쳐 보이는 것이다.
현일이와 병수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서 도영의 얼굴만을 쳐다볼 뿐이 었다.
마침내 현일은
“그런 의심을 할 필요는 뭐요. 살쪄 보이면 보이는 대로 좋을 게지” 할밖에 없었다.
“하긴 그도 그래. 아 참, 약에 쓸 칡뿌리 캐러 오구는 깜박 잊구서. 정신두 원.”
그 말이 사실인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칡넝쿨이므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도영 이는 분주히 일어났다.
“오좀은 안 누셔요?” 병수가 묻는 말에
“응, 마려우면 올게. 두 분이 구멍을 꼭 지키시우” 하며 도영이는 언덕 풀밭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
그를 따라가려는 눈치인 병수를 부른 현일은 “앉아 이야기나 하지” 하고 앉기를 권하였다.
“혼자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 그에게 위험이나 남었겠나. 지금의 그이나 내게”
하고 현일은 허허 웃었다.
“그래두 도영 선생은 아직 그 패기가 장하신데요.”
“패기? 패기가 아니라 그이는 지금 비관이나 절망까지도 잊어버리고 만 셈 이지.”
“그럴까요? 그래두 말씀이 논리적이랄까 하여튼 그런 말씀은 신경 병자의 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잖아요?”
“논리적 이니까 듣는 사람에 게는 더 효과적 이었을는지 모르지.”
“?…….”
“참말 산 사람이라면 건강과 생을 즐길 것이지. 그러지 못하니까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야겠다고 악을 쓰며 울부짖는 꼴이란. 비장하달까? 그 독백이 퍽 효과적으로 들리던가?”
현일의 말에 치가 있는 것을 느낀 병수는
“결코 그런 뜻으로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발명하듯이 말할밖에 없었다.
“그럼?”
“도영선생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듣고 하는…….”
“그것이 정말 패기라?!” 현일의 말은 또 이렇게 까리는³⁶ 말씨였다.
“……”
“자네 불쾌하겠지만, 나는 아까부터 불쾌했네.”
마침내 흥분한 현일의 말소리는 좀 떨렸다.
“?…….”
“장난두 아니구! 설마 자네가 도영선생을 장난감 삼을 경박자라구는 결코 생각지 않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도영선생이 하두 애타하시니까 저는 구렝이가 있는지 없는지두 모르구 그저…….”
“그러게 말일세. 자네의 장난 같은 행동이 잘못이라든가 그 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의 대조랄까, 그러한 대조로 느껴지는 분위기랄까 그것이 내게는 불쾌했다는 말일세……”
말하기에 힘이 드는 듯한 현일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쉬고 나서
“그때 나는 폐병, 신경 쇠약, 구렝이라는 말의 냄새, 이런 음산한 기분에 자네가 거기 어울리는 듯한 것이 싫어서 불쾌하였겠지.”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현일의 침울한 얼굴을 쳐다보는 병수는
“그러한 제 행동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닐까요? 도영 선생에게는 황송한 말씀이지만 저 같은 젊은이로서 앱노말리티에 대한 호기심.”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도리어 현일에게 묻듯이 말하였다.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그렇게 불쾌했을 리가 없어. 나의 신경도 어지간히 약해졌지만 그러니만치 지금 꼭 날카로운 내 육감을 사신할 만한 상태라고 보는데 호기심보다도 동정적이었구 동정 이상의 공명이랄까 퇴폐적 기분에 섞여 있으려는 태도 같애서. 게다가 도영씨의 말이 ‘패기’라는 둥, 그런 ‘패기’가 부러운가?”
현일의 이런 말을 듣고 있는 병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발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놀라운 육감이 맞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잠히 있는 것은 그 말을 승인하는 셈이든가 불쾌를 표시하는 셈이 된다고 생각하는 병수는 거칠매³⁷ 없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무엇이라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한 병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현일은 역시 잠잠히 있으면서 흥분한 것을 후회하고 화제를 돌리려 궁리하다가
“자네 언젠가 생물학과로 전과할 의사가 있다더니 어떻게 작정했나?”
언젠가 병수의 편지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 하는 문과를 마치고 또 하렵니다.”
“그래도 좋지만, 그러나 목적이 변했으면 하루바삐 전과하는 것이 좋잖을까?”
이렇게 묻는 현일의 말에, 대답을 기회로 솔직히 자기의 생각을 말해버리고 싶어진 병수는
“하루바삐 하면 뭘 합니까? 학생 생활도 세월 보내는 한 수단일는지도 모르니까 요행 있는 학비니 할 수만 있으면 오래 학창 생활을 해보렵니다.”
“음…….”
“학생 생활에만 애착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나서기가 무서워서 그러죠.”
“그것이 요새 젊은이들의 생각인가? 혹시 자네만이 그런가?”
“글쎄올시다.”
“그런 것이 소위 불안이라는 유행병인가?”
어느덧 이야기가 또 이렇게 되풀이되는 것이 현일은 불쾌하였다. 병수를 만나면 젊은이의 청신한 기분을 맛보려니 기대하였던 자기가, 자기 말조차 이렇게 삐여지는³⁸ 것이 우울하였다.
“물론 시대적 원인도 크겠지만 자네같이 젊고 무엇을 하려면 할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은 ‘나만은 그런 유행병에 감염이 안 된다’는 의지와 패기를 가져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현일의 말에
“제가 불안병자로 자처하는 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생 말씀같이 쉽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의지나 패기는, 오히려 선생의 신병과 정신적 타격의 반동이 아닐까요?”
하였다.
이렇게 속에 있는 대로 털어놓고 보니 병수는 도리어 쓸쓸하였다. 말이 지나쳤다고 후회되었다.
M학교 시대에 또 각혈을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현일선생이 그러한 때마다 ‘개체인 자신이 불행하더라도 그 때문에 결코 인생을 어둡게 보거나 저주할 것은 아니라’고 열성적으로 강조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감격하였고 현일선생을 더욱 승배하였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한 희생과 추억과 지금의 자기 태도를 생각할 때 병수는 더욱 쓸쓸하였다. 이런 것이 문학청년다운 자기의 예민한 관찰을 자랑하려는 경박한 것이 아닐까고도 생각되었다.
현일은 현일이대로 병수의 말에 아픈 타격을 느낄밖에 없었다.
절망적으로 자기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마다 지금까지의 노력 정진 전진 노력으로 싸우며 살아온 자기의 일생이 이뿐이냐 하는 생각에 한 사회인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희망도 야심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세상이 어둡고 인생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것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때만은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전부였다. 소크라테스가 아닌 범인의 본능이었다.
그러한 자기의 감정과 본능을 이론적으로 극복하려는 심정으로 수신 시간의 강의는 더욱 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현일은 병수의 온건치 않은 말이 불쾌하면서도 전연 억측만도 아닌 바에야. 그러나,
“그러나 자네 말대로 내가 절망적이요, 그 반동으로 의지와 패기를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의지와 패기가 필요찮을까? 물론 나는 건강으로나 교육자로나 절망적이지만, 자네 같은 사람들이야 왜.”
“결국 용기 문제겠지요.”
이렇게 대답하는 병수는 용기 없다기보다는 용기를 일으킬 만한 사상과 신념을 붙들지 못하였다는 것이 솔직한 말이 아닐까고 생각하였다.
병수는 늘 하는 버릇대로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자신을 더 추궁하기를 지금도 단념하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서 자기 마음을 빼치려는 듯이
“오좀 안 누세요?”
하고 돌아앉아서 구멍에 오줌을 누기 시작하였다.
도영선생의 말이라 미덥지는 않지만 금시에 큰 구렁이가 기적같이 솟구쳐 나올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기도 하였다.
“안 나오나?”
이렇게 군말같이 묻는 현일이 역시 그런 이야기를 중동무이하는 데 미련이 없었다. 금빛같이 찬란하게 화염같이 붉게 피어오르고 무너지는 구름산을 바라보았다.
“소변이 부족한지요” 하는 병수 대답에
“그럼 나두 눌까” 하고 현일이도 누었다. 역시 구렁이는 안 나왔다.
그때 도영이는 죽은 지렁이 한 놈을 길게 드리워가지고 돌아왔다.
“자, 이것 보시우 이놈이 열 내리는 데는 제일이랍니다.”
하고 지렁이에 달라붙은 개미들을 툭여서³⁹ 떨구고는 입에 집어넣고 사이다를 들이켜서 삼키고 말았다.
그것을 본 현일은 울컥 구역이 나고 뒤이어 기침이 발작되었다.
지렁이를 삼키고 태연히 앉아 있던 도영이도 따라서 기침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듯이 앉아서 언제 멎을지 모르게 기처대였다.⁴⁰
현일은 코언저리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씻으면서 그저 망연히 눈앞에 서 있는 병수에게
“자네는 뭘 하러 거기 서 있나, 저리 가게나. 챙피할세.”
하며 간신히 웃어 보이려고 하였다. 사실 수치스러운 꼴이나 보인 사람같이 그 웃음은 일그러지고 어색한 것이었다.
병수가 무엇이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도영의 입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기 시작하였다.
피가 좀 멎자 기신을 못 차리는 그의 입 언저리의 피를 씻으려고 병수는 손수건을 들고 다가앉았다. 그것을 본 현일은 명수를 떠밀어내며 노기를 띤 언성으로 “저리 가라니까” 소리를 지르고 자기 손수건을 내어 도영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얼굴을 씻으며
“이런 더러운 피에 왜 손을 적시려나…… 정신 차리거든 내가 다리구 갈게 자넨 가게나.”
병수는 할 수 없이 돌아서 성문으로 들어갔다.
처음같이 피가 솟구쳐 나지는 않지만 그치지 않고 입언저리로 가늘게 흘러내렸다. 도영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기대어놓은 현일이는 피가 멎을까 하여 자기 수건과 도영의 수건을 모두 적시어 보았으나 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돌 위에 웃저고리를 접어놓은 베개에 도영이를 누이고 정신 차리기를 기다릴밖에 없었다. 성벽 저편으로 해가 기울어서 진한 그림자가 덮이고 바람이 불었다.
아무리 저녁인들 이 여름에 바람이 싫으니…… 나 역시 이 세상과는 벌써 인연이 멀어진 사람이로구나.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현일은 앞가슴에 옷자락을 여미고 송장 같은 도영의 옆에 엎디었다.
절망과 패기. 비관과 낙관. 그 두 가지 정반대의 생각을 번갈아가며 지금까지 살아왔거니.
절망과 비관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뼈를 깎는 듯한 절망에 부대끼다 못하여 애써 빈약하지만 자기의 철학의 지식을 끄집어내어 구원한 인생의 발전을 명상해볼 때에는 청징한 공기를 호흡하듯이 상쾌함을 느끼는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자기도 한 짐을 맡았으면 하는 패기도 느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을 등지고 죽어가는 자신을 생각할 때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절망을 느낄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자기의 세계라면 참고 사는 때까지 살아가리라 하였다. 그러나 또 견딜 수가 없었고 아직 남은 마음의 탄력으로 또 상쾌한 명상으로 떠올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무엇이 남았으랴. 절망인들 남았으랴. 죽어가는 폐어 (肺魚)에게 물도 공기도 무슨 소용이랴. 지금 폐어는 반신(半身) 물에 잠기고 반신 바람에 불리면서도 두 가지 호흡의 기능을 다 잃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현일은 꿈속같이 생각하며 죽은 듯이 엎뎌 있었다.
얼마 후에 성문 저편에 자동차가 멎고 병수가 돌아왔다.
운전수의 손을 빌려서 도영이를 차에 싣고 떠났다. 죽은 듯한 도영이를 무릎 위에 누이고 현일은 차 한편 모퉁이에 기대었다.
눈도 뜰 수 없이 피곤하였다.
운전대에 앉아서 돌아보는 병수는 ‘이런 더러운 피에 왜 손을 적시려나’ 한 선생의 말을 생각하였다.
-끝-
2016년 4월 2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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