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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이야기(국내) 스크랩 서울 동구릉(10.21)
설악산 추천 0 조회 66 07.11.06 2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구릉(10.21)  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명성황후초장지


금년 8월 11일 무더운 날 광나루님의 왕릉답사기 글을 보고 융건릉을 처음 가보았다.

예전에 생각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릉에 올라가볼 수 없어 광나루님의 사진에서 본 느낌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광나루님이 나홀로 테마 여행 까페를 운영한다는 것을 우연하게 알게 되었고 까페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제15차 능원묘 답사에 참가하였다.

아침부터 서둘러 안양역에서 전철을 타고 금정에서 갈아타고 사당에서 또 갈아타고 강변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동구릉가는 버스 타는 방향을 물은 다음 버스를 타면서 기사분에게 물어보니 간다는 것이다.

도착하니 이미 여러분이 모이셨고 광나루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입구에 살펴보니 태조이성계의 등백운봉이라는 시비가 있었고 시비 밑에는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오얏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 오얏 문양은 창덕궁 용마루에도 새겨져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들어가니 입구에 홍살문이 있었는데 좌우 살이 9개 인데 어느 분이 9릉이라서 그런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번 융건릉에서도 느꼈지만 능으로 가는 길은 흙으로 다져진 길 같은데 마치 아스콘 포장처럼 단정한 길이다.

길이 흙이라서 다리에 무리도 없을 것이고 배수도 잘 되고 파여진 것도 없다.

아마도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자갈과 모래로 기반을 다졌을 것으로 기억된다.

길옆 도수로도 나무로 턱을 만들어서 아주 운치있게 보이었다.

여기는 능 입구에 큰 금천교가 있어서 거기를 건너가게 되어 있다.

먼저 간 곳은 수릉이다. 회원님들은 그동안 여러번 오셔서 나름대로 능 답사 정석을 익히신 것같았다.

어떻게 도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아시고 실천하시는 것같았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닉네임을 다 기억할 수 없고 닐리리아님, 최강이님은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 분들은 닉네임이 혼동이 된다.

아마도 수십번 다녀야 닉네임이 기억될 것같다.

제일 처음 간 곳은 문조와 신정황후 조대비의 수릉이다.

새로 보수를 했는 지 정자각과 비각이 아주 깨끗하고 단청도 뚜렷하다.

특이하게 정자각 기둥 밑에 흰색이 칠해져 있고 흰색 상단에는 청색 띠가 둘러져 있다.

정자각은 단청은 연화머리초에 이익공(익공은 새날개란 뜻이고 이익공은 2개라는 뜻이다.)이다.

신계 계단 옆에는 태극문양과 영기문양이 새겨져 있다.

장명등에 새겨진 문양이 비교적 뚜렷한데 무슨 문양인 지는 모르겠다.

고석에 새겨진 용얼굴인지 치우천왕얼굴인지 문양도 아주 뚜렷하다.

보통 귀면문양은 치우천왕 얼굴이라고 하는 경향이 짙어 지는 것같다.

그런데, 고석은 용얼굴이 더욱 유력한 것같기는 하다.

불교의 사물에는 법고가 있고 법고의 뜻은 "법을 전하는 북" 북소리가 세간에 널리 울려 퍼지듯이 불법의 진리로 중생의 마음을 울려 "일심을 깨우친다"는 의미로 불법을 널리 전하여 중생의 번뇌를 물리치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함축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헌인릉의 해설사 선생님은 북은 전진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불교의 법고처럼 진리를 얻어 해탈하라는 의미가 더 다가가는 것같다.

특이하게 본 것은 문인석 뒤에 문양이 학이 여섯 마리가 문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이다.

여기는 무인상의 눈이 튀어나오게 보인다.

문인석도 옆에서 보니 옷이 앞으로 튀어 나오게 보인다.

아마도 석공의 스타일인가 보다.

능 뒤 곡장쪽에는 얕은 기반이 3중으로 쌓여 있었다.

처다보아서 좌측에 있는 능은 문종의 능 같은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장과 영기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태조의 건원릉이다.

여기에는 소전대가 있었는데 후대에는 예감으로 바뀐다고 한다.

건원릉은 특이하게 봉분에 잔디가 아니고 억새풀로 덮여 있다.

이는 원래 태조가 자신을 함흥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태종이 하륜의 꾀를 받아들여 함흥의 억새풀을 심으면 함흥에 묻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해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

태조의 능에는 고석이 5개이다. 나중에는 4개로 바뀌었다고 한다.

건원릉의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기문양 그리고 금강령과 금강저가 조각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조선의 문화는 불교문화라는 말이 입증이 되는 것같다.

네 번째는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목릉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잘 대처하지 못해 우리 국민들이 지질이도 싫어하는 임금이다.

그런데 글씨는 아주 잘 썼다고 전해진다.

목릉의 정자각의 단청은 아주 특이하다. 병머리초도 아니고 항아리머리초라고 해야 할 정도로 어디서 본적이 없는 모양이다.

누가 임진왜란때 석공들이 끌려가서 석물들의 조각이 엉성하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같은 느낌이 든다.

무인석 모양이 약간 꺼벙하긴 하지만 병풍석의 부처모습, 영기문양이 아주 뚜렷하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좋은 돌을 써서 그런 지는 모르겠다.

의인왕후의 무인석과 문인석의 눈매는 눈초리가 올라갔음에도 눈이 좀 티미하게 보인다.

다섯 번째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이다.

정자각이나 비각은 상당히 낡은 듯 단청도 벗겨졌다.

그런데 장명등이나 고석의 조각이 아주 선명하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약간 엉거 주춤한 느낌이 든다.

석주와 동자석주의 문양도 아주 뚜렷하고 망주석의 문양도 아주 뚜렷하다.

대신 십이지신 조각은 없고 글씨로 적혀있다.

특이하게도 정자각 옆에는 사각형의 우물이 있다.

여섯 번째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이고, 이 능은 쌍릉이다.

우리가 간 날은 유치원생들인 듯한 아이들이 소풍을 와서 왁자지껄 줄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 난간석의 동자석은 마치 위로 손을 받치는 듯하게 조성이 되어 있었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서 인지 각종 조각이 아주 선명하였다.

여기는 혼유석은 각각 하나씩 2개인데 장명등은 한개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무엇이 좋은 지 입이 위로 올라가 있다.

무인석은 투구를 썼음에도 머리를 뒤로 묶은 것처럼 보인다.

일곱 번째는 헌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경릉이다.

여기는 참도인 신도와 어도 좌우에 박석이 아주 넓게 깔려 있었다.

이 곳도 장명등은 하나인데 혼유석은 3개이다.

혼은 각각 놀아야 하는가 보다.

이곳 무인석은 석질이 그래서 인지 콧구멍에 흰것이 나와서 마치 코를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누군가 석물에 총을 쏘았는지 여러 군데 총탄 자국이 있다.

원래 이곳은 헌종와 왕비인 효현왕후의 능만 있었는데 나중에 효정왕후가 끼어 들어 삼연릉이 되었는데 능 뒤에서 정자각을 향해 보면 균형이 안 맞게 배치되어 있다.

여덟 번째는 경종의 왕비 단의왕후의 혜릉이다.

여기 정자각의 단청은 반주화머리초이다.

이 곳의 무인석은 어떤 놈이 코를 짤라가 버려 아주 흉하게 보인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현종와 왕비인 명성왕후의 숭릉이다.

다른 왕릉의 정자작은 모두 맞배지붕인데 여기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무인석의 투구는 뽀족한 투구를 쓰고 있어 다른 무인석에 비해 특색이 있다.

여기 정자각 옆의 우물은 원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명성왕후의 초장지를 구경하고 내려왔는데 그 밑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 내려와서 큰길을 가려는데 희귀하게 좀작살나무의 흰열매가 눈에 띠는 것이다.

영기가 서린 지역이라 좀작살나무 흰열매가 열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망우산공원으로 향했다.


아래 자료는 동구릉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수릉(綏陵) 

추존 황제 문조(文祖, 1809~30)와 신정황후(神貞皇后, 1808~90) 조씨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세자 시절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며, 모든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양주 용마산 아래로 옮겼다가 1855년 철종 때 다시 건원릉 왼쪽으로 옮겨왔다.

순조의 뒤를 이어 문조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였고, 헌종은 부왕인 문조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했다. 신정왕후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면서 조선 후기의 정국을 좌지우지한 여장부였다. 아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아 남편이 익종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후사 없이 승하한 철종 뒤에는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손에 거머쥐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원군과 손잡고 고종을 즉위시키고 조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합장릉이지만 단릉처럼 봉분과 혼유석을 하나만 마련해 놓았다. 왕릉의 상설물은 대부분『국조상례보편』을 따르고 있다.

능 앞의 3단(초·중·하계) 중 중계와 하계가 합해져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 단에 서 있다. 영조의 원릉부터 철종의 예릉까지 이처럼 3단이 2단으로 되어 있다.

문인석은 융건릉에서처럼 길쭉한 얼굴에 광대 뼈가 나오고 눈이 가늘며 얼굴이 어깨에 묻혀 답답해 보인다.

  

현릉(顯陵) 

조선 5대 문종(文宗, 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하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보령 39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부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생전에 영릉 오른쪽 언덕(본래 세종의 영릉이 지금 헌인릉 오른쪽에 있었다)을 장지로 정했으나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취소하고 이곳 건원릉 동쪽에 안장되었다. 구 영릉이 조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옮겨졌으므로 현릉은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능이다.

능의 형식은 『국조오례의』의 표본이 되는 영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의 방울,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고석도 4개로 줄었다.

제일 아랫단에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인석은 머리 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주먹 만한 눈이나 코로 인해 위엄 있게 보이지 않는다. 문인석도 튀어나온 눈이며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병풍석에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현덕왕후는 왕후에 오르기 전 1441년에 원손(단종)을 출산하고 그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경기도 안산군에 예장되었다.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현덕왕후로 추숭되었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으로 능호를 바꾸었고,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현덕왕후 친정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현덕왕후는 추폐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져 물가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 후 1513년(중종 8)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복위되어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되어 동원이강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신주는 다시 종묘에 봉안되었다. 

왕후릉 후면. 멀리 오른쪽에 왕릉이 보인다. 동원이강 형식의 능. 왼쪽이 왕릉이고 오른쪽이 왕후릉이다. 현덕왕후릉.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건원릉(建元陵)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이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는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 

태조의 비는 신의왕후 한씨(齊陵, 북한)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貞陵, 정릉동)다.

태종 8년 74세로 승하했으며, 묘호를 태조(太祖)라 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놓았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했다. 보통 능호는 외자로 하지만 건원릉만 두 자이다.

넉넉한 크기의 봉분 아래 부분을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고, 봉분 앞 혼유석 밑을 귀면이 새겨진 고석 5개가 받치고 있으며, 양옆으로 망주석이 서 있다. 특이하게도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 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소전대 : 능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3대 태종왕릉(헌릉)까지만 있고 이후 예감으로 대체된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기본 능제는 현정릉을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 등 세부적으로는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병풍석에 새겨져 있는 십이지신상 석물들의 형태는 우람하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 배위가 있고 안쪽에는 정자각,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비각 안에 태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왕릉에 묻힌 왕의 행적을 새겨놓은 비석이다.

= 일화 =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태종)이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치에 뜻을 잃어버린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뒤 정종의 뒤를 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때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보낸 차사들이 가면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咸興差使)’란 말이 생겨났다. 한번 가기만 하면 깜깜소식이란 뜻으로, 심부름꾼이 가서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더디 올 때 쓰이는 말이다. 


목릉(穆陵) 

조선 14대 선조(宣祖, 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 1600)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이 보이는데, 동원이강의 형식의 변형이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567년 왕으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 건원릉 서쪽 다섯 번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물기가 있고 불길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의인왕후 박씨는 건원릉 동쪽 셋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인목왕후 김씨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고 자신은 서궁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신분이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는 건원릉 동쪽 다섯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선조릉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선조릉에서 본 의인왕후릉.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전란 뒤라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목왕후릉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이 선조릉, 오른쪽이 의인왕후릉이다.

의인왕후릉 석물. 큰 전쟁을 겪은 뒤라 인명과 재산 피해가 큰 상태에서 훌륭한 장인을 구하기가 어려워서인지 각 석물의 조형미가 떨어져 조선 왕릉 가운데 가장 졸작으로 꼽힌다.


휘릉(徽陵)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88)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다. 10년 뒤인 1659년 효종마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숙종 14년 자손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는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이 시기의 붕당정치는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3면이 곡장으로 둘러싸인 능침에는 병풍석이 없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현종 비 명성왕후의 숭릉 5년 뒤에 조영한 능이라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숭릉과 거의 비슷하다. 석양과 석호는 그리 크지 않으며, 석양의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아 있다.

한 단 아래 중계에 서 있는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크지만 마멸되어 윤곽만 남아 있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맨 아랫단에 있는 무인석은 목이 없이 얼굴이 가슴에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커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건원릉의 형식을 따른 5개로 되어 있으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원릉(元陵)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의 능이다.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52년) 왕으로,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붕당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들 사도세자는 붕당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

영조는 서오릉의 홍릉(원비 정성왕후)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지금의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안장하고 원릉이라 했다.

15세의 나이에 66세의 영조의 비가 된 정순왕후는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하였고, 순조 때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다. 정순왕후는 자손 없이 승하하여 원릉의 영조 옆에 묻혔다.

영조는 최장수 임금이었던 만큼 생전에 8회에 걸쳐 산릉원을 조영하거나 천장해 능제에 관심이 많았다. 숙종의 교명을 근거로 제도를 정비하여 『국조상례보편』을 펴냈다. 따라서 원릉의 석물제도는 새로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과 같다.

원릉은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며,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능의 중간에 제외 장명등을 화문으로 장식해놓았다.

망주석의 세호는 혜릉처럼 오른쪽의 것은 위를 향하고 왼쪽의 것은 땅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문인석이나 무인석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입체감이 떨어지는 편이고, 모두 사실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경릉(景陵) 

조선 24대 헌종(憲宗, 1827~49)과 원비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43)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 1904) 홍씨를 모신 삼연릉으로,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다. 정면에서 보아 제일 왼쪽 봉분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의 능이다.

헌종은 요절한 문조의 아들이며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삼정이 문란해지고 계속된 홍수로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헌종은 혹독한 천주교 탄압정책을 폈으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많은 신자들이 학살당했다. 후사 없이 보령 23세로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장사지냈다. 효현왕후는 1837년 왕비에 책봉되어 6년 만에 승하했다. 효정왕후는 효현왕후의 뒤를 이어 1844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908년 헌종은 성황제(成皇帝)로 추존되고 효현왕후, 효정왕후도 성황후로 추존되었다. 경릉의 세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터서 연결했으며, 각 능 앞에 혼유석만 따로 마련했을 뿐 모든 제도는 단릉과 마찬가지로 조성했다.

능 앞에 3단을 2단으로 줄여 장명등과 문·무인석은 18세기 이후의 양식인 눈꺼풀·눈동자·입술선 등이 입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있다.


혜릉(惠陵) 

조선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 능이다. 단의왕후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 44년 승하하여 숭릉 왼쪽 산줄기에 모셔졌다가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석물도 별로 크지 않게 제작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아담한 느낌이다. 조선 왕릉들은 대부분 북침(北枕)을 하고 있는데, 혜릉은 서쪽에 머리를 두고 있다.

망주석은 다른 왕릉들보다 작게 만들어졌으며 좌우 세호의 방향이 다르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난간석에 새겨진 12지가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다.  1990년대 초에 재건된 정자각. 


숭릉(崇陵) 

조선 18대 현종(顯宗, 1641~74)과 원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83) 김씨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효종)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1659년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재위기간 중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왕조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군비 강화와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영직첩(影職帖)과 공명첩(空名帖)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것은 이후 정부의 재정보충책으로 보편화되어 신분제의 해체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성왕후 소생으로는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으며, 현종 왕릉 옆에 쌍릉으로 안장되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다른 왕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숭릉의 정자각은 팔작 지붕을 하고 있다. 또 보통 정명 3칸, 측면 2칸의 정자각 형식에 익랑이 붙어 규모가 커졌다. 문인석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인석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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