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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이후 박정희에게 제거당하는 장도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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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사관학교 근무 중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광주의 토벌사령부에 잠시 내려갔다 온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 여수ㆍ순천 사건 이후 숙군 작업을 벌이던 군 수사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남로당의 비밀 당원이라는 죄목이었다. 그가 남로당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죽은 그의 형 박상희와 관련이 있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뒤이은 10월 초,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인민항쟁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일제 때부터 항일 운동을 해왔고 당시 선산군 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박상희 역시 군중들과 더불어 구미경찰서를 공격했고 서장 이하 서원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그러나 대구, 왜관 방면이 경찰에 의해 진압되자 그들은 서장과 서원들을 풀어 주고 그들의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10월 6일 진압군이 들이닥치자 도주하던 박상희는 경찰의 총을 맞게 되었다. 박상희의 죽음을 목격한 누이 박재희(朴在熙)에 의하면, "남편이 이불에 둘둘 말린 피투성이의 박상희를 업고 왔고 총 세 발을 맞은 박상희는 곧 숨을 거두었다"한다.
형이 죽을 당시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던 박정희는 형의 장례식에 내려가 보지도 못했고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가장 따랐던 형의 죽음이 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나중에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잘 보살펴 주고 있었고 그에게도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면서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남로당 가입을 권했다고 한다.
김창룡(金昌龍)이 활약했던 당시의 대대적인 숙군 작업은 말썽도 많았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군의 좌익 계열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숙군을 통해 전군의 5% 정도인 4천 7백여 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고, 그 중 수백 명이 총살 또는 징역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러한 숙군 과정에서 유독 박정희만은 살아 남았다. 죄상대로 하자면 거의 총살이나 무기징역이 분명한 그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우선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백을 통해 그는 이념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에 생긴 복수심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 남을 수있었던 보다 중요한 원인은 그가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고, 이를 통해 군부 내 조직원들, 특히 육사 내부의 남로당 세포들이 다수 적발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즉 그는 그의 동료들을 배신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가 군부 내 좌익 색출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구명에 나섰다. 우선 숙군을 직접 담당했던 김창룡과 김안일(金安一)이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白善嬅)에게 숙군에 협조적인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를 만나본 백선엽은 박정희가 구명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아’ 그를 구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백선엽은 하우스만(J. Hausman) 대위와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츠(W. Roberts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형 집행 면제를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다. 또한 백선엽은 육본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 밖에도 박정희의 구명에는 정일권(丁一權), 원용덕(元容德) 등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군내 만주인맥들이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구명 노력의 결과, 박정희는 12월 말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불구속 상태로 진행된 군사 재판은 이듬해 2월 8일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형 집행정지 처분이 취해졌다. 그러나 형 집행은 면했지만 파면은 면할 수 없었다. 이로써 육본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군복을 벗게 되었다. 게다가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불행이 연이어 그에게 닥쳐왔다. 동거하고 있던 여인이 그 일로 인해 그를 떠났고, 또한 박정희의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다시 쌓아올린 노력이 이 사건으로 또 다시 무너져 내렸고 개인적인 비극까지 점쳤던 이때가 박정희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후 박정희는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 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관으로 근무할 당시 박정희는 나중에 5.16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육사 8기생들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다. 즉 1천 명이 넘는 졸업생 중에서 성적 25등 내에서 선발된 김종필(金鍾泌), 이영근(李永根), 석정선(石正善), 이병희(李秉禧) 등 15명의 8기생들이 박정희가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가정교사처럼 대해 주었고, 동시에 8기생들은 정확한 상황 판단력 등을 지닌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쿠데타의 꿈
1952년 8월 17일 대구의 동촌비행장에서 미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이종찬(李鍾贊) 전임 참모총장에게 작달막한 키의 한 대령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한 통의 편지를 건네 주었다. 비행기에서 펼쳐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마당에 이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유린하고 급기야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 민의를 무시한 5.26정치파동 등으로 민심은 이미 이 정권을 떠났다. 이 대통령의 비정은 극에 달해 구국의 움직임이 요청되고 있는 시점이라 본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소관(小官)들은 각하께서 나라를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부당하게 해임을 당하고 이제는 미국으로 쫓겨 가시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지난 번에 구국을 위한 행동을 단행할 걸 잘못한 것 같다. 1년 후 귀국하면 다시 지도편달을 받겠다.’
편지의 내용은 이종찬이 쿠데타를 단행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는 것이었다. 이 당돌한 편지를 건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희 대령이었다. 남로당 관련 사건으로 옷을 벗은 그가 어떻게 다시 군에 복귀하여 쿠데타를 감행했었어야 한다고 이같이 말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남로당 사건 이후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의 도움으로 소령으로 복직, 전투 정보과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즉 전쟁이 그를 구원해 준 것이다.
이후 그는 9사단, 육군정보학교 교장을 거쳐 1951년 12월에는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작전교육국장은 이용문(李龍文) 준장으로 이용문과 박정희는 의기가 맞았고 그들의 관계는 여기에서 보다 긴밀해지게 된다. 한편 다시 군복을 입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정희는 육영수(陸英修)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1952년 5월, 정국은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 추진으로 인해 급속히 경색되어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국회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이승만은 개헌안을 국회에서 강제적으로 통과시키기 위해 관제 데모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에 이용문과 박정희는 장면(張勉)을 내세우는 쿠데타를 도모했다.
5월 10일 이용문 준장은 장면의 비서실장인 선우종원(鮮于宗源)을 찾아가, 이종찬 참모총장도 알고 있고 밴 플리트(J. Van Fleet) 미8군 사령관도 양해했다며 쿠데타를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는 장면으로 부터 거절당했다. 이런 가운데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5월 25일 이승만은 부산을 위시한 전북, 전남 및 경남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부산 지역에 대한 계엄령 실시를 위해 이종찬 참모총장에게 2개 대대의 병력 차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5월 26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이종찬 휘하의 육본 참모회의는 참모총장 훈령 217호를 작성, 각 부대에 내려 보냈다. 그 요지는 군은 개인이나 기관에 예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추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문건의 작성자는 박정희였다 한다. 그러나 훈령 217호에서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던 박정희 자신은 역설적이게도 쿠데타를 의도하고 있었다.
즉 6월 2, 3일경 이승만에 대한 쿠데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육본 참모회의가 비밀리에 개최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부산에 2개 대대를 파견하여 2, 3백 명에 불과한 원용덕의 계엄군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야당이 우세한 국회에서 이승만을 실각시킬 수 있으리라는 예상에서였다. 회의석상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는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다고 결정되면 지장이 없게시리 수배되어 있습니다"라는 답변을 했다. 즉 그는 쿠데타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회의는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방침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으로 결말남으로써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바람은 무산되었다. 한편 유원식(柳原植)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와 그는 당시 언양에 주둔하고 있는 15연대를 동원,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고 과도 정부를 세워 민정에 이양하기로 했고 이를 이종찬 참모총장과 밴 플리트 장군에게 상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찬 참모총장의 우유부단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하여 이용문과 박정희는 쿠데타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종찬 총장과 그 휘하의 육본측이 이승만의 병력 출동 요구에 반발했을지라도 이승만에 의한 군의 정치적 이용뿐만 아니라 군의 쿠데타 역시 반대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바람은 무산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 제거를 위해 ‘상비 작전(Operation Everready)’까지 세웠던 미국이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태도를 변화시킨 것도 박정희의 쿠데타 바람을 좌절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여하튼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꿈은 이미 이때에도 그의 심중에 뿌리 박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정치파동이 지나간 후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이종찬은 밴 플리트의 주선으로 미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이종찬이 출발하는 바로 그 비행장에서 박정희는 좌절된 쿠데타가 아쉬워 이종찬에게 그런 편지를 전했던 것이다. 1953년 6월 23일 박정희가 유일하게 존경하고 따랐던, 그리고 같이 쿠데타를 도모했던 이용문 장군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대통령이 된 훗날 박정희는 이용문의 아들인 이건개(李健介) 검사를 돌봐줌으로써 이용문에 대한 그의 마음을 나타냈다.
쿠데타의 새벽
1961년 5월 16일 새벽, 일단의 무장 병력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을 점령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혁명’을 알렸다. 즉 박정희를 실질적 지도자로 하는 5.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이미 자유당 말기부터 운위되고 있었다. 195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된 ‘콜론 보고서’는 이승만 정권의 동요로 인한 불안한 정세를 우려하면서 정당 정치가 실패하면 언젠가 군사 지배가 등장할 것임을 경고했다. 콜론 보고서가 예상한 대로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의 4.19혁명에 의해 붕괴되었고 뒤이어 등장한 민주당 정권의 불안한 정당 정치 역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쿠데타를 도모했던 박정희가 다시 쿠데타를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 3.15부정 선거 직전이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결집된 쿠데타 세력은 3.15부정 선거 직후인 5월 8일 쿠데타를 거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4.19혁명이 발생하여 이승만 정권이 붕괴됨으로써 쿠데타 계획은 일단 무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이들은 정군(整軍) 운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5월 2일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는 부정 선거의 책임을 물어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의 퇴역을 요구했다. 다른 한편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도 본격적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렇게 시작된 정군 운동은 육사 8기생들의 연판장 작성, 7, 9, 10기들의 하극상 사건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1961년 2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석정선(石正善) 등이 예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태 진전 속에서 쿠데타 세력은 1960년 9월 10일 충무로에 있던 일식집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재차 결의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의는 이듬해 5월 16일 쿠데타로 이어졌던 것이다.
박정희는 과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을 쿠데타에 참여시켰다. 이를테면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 그와 동기생들인 육사 2기생들, 육사 중대장 시절 그가 가르쳤던 육사 5기생들, 그리고 그가 전쟁 말기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형성된 포병 인맥들 등이 그들이다. 여하튼 3천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감행된 5.16군부 쿠데타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게 된다.
일제 때 일본 청년장교들의 좌절된 쿠데타 시도인 2.26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온 이래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쿠데타의 꿈은 결국 이렇게 실현되었다. 그러나 개인 박정희의 꿈은 실현되었지만, 4.19혁명을 계기로 이제 막 시작된 한국 민주주의의 꿈은 제대로 개화될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채 꺾여 버렸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길고 험한 장정이 또다시 역사 앞에 드리워지게 되었다. 2년간의 군정을 거친 후 대통령에 입후보한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황태성 사건과 박정희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63년 12월 14일 북에서 내려왔던 황태성이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황태성을 둘러싼 논란은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후보가 유세 과정에서, 공화당이 간첩 황태성의 자금으로 사전 조직되었고 공화당 요원들이 황태성에 의해 밀봉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과거 여수ㆍ순천 사건에 관련이 있었다는 ‘사상논쟁’이 이미 윤보선에 의해 제기된 마당에, 황태성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또다시 박정희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른바 황태성 사건의 전말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에 앞서, 우선 박정희에게 황태성은 누구였던가?
앞에서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박정희와 황태성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경북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같이 했던 인물로서 황태성은 주로 김천에서, 박상희는 주로 구미에서 활동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황태성이 박상희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웠다. 황태성이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던 시절, 박정희는 형의 친구인 황태성에게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일제의 만주 육사로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는 이후 단절되었다. 그후 해방이 된 이듬해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인민항쟁이 발생하자 그 와중에서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피살당했고 황태성은 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피신했다가 월북하게 되었다. 북으로 올라간 황태성은 북에서 부무역상까지 올라갔다.
박정희와 황태성의 관계는 남한에서 5.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시 한 번 운명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남한에서 예상하지 못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자 북한의 대남전략은 잠시 혼선을 빚었다. 미국의 뒷조정 없이도 쿠데타를 일으켜 새 군사 정권을 창출했던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주목했던 그들은 남한의 쿠데타 세력과 접촉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남북 대화를 모색했고 그 결과 서해 도서지방에서 몇 차례에 걸쳐 남북간의 비밀 접촉이 이루어졌다. 남한의 쿠데타 세력 역시 군정에 대한 외부 위협을 완화시킬 생각에서였던지 이 접촉에 응했다.
한편 북한은 남북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과거 박정희와 관계가 있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다. 당시 신장도 하나 떼낼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황태성은 그 일에 자원했다 한다. 남으로 내려온 황태성은 과거 자신이 중매했던 박상희의 처 조기분을 통해 박정희 및 그녀의 사위가 된 김종필과 접촉하고자 했다. 그러나 추후 발표에 의하면 그는 ‘조 여사의 고발’로 남한 당국에 의해 1961년 10월 20일 검거되었다 한다.
황태성이 접촉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검거되었는지, 아니면 접촉을 하다가 검거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검거된 황태성은 한동안 반도 호텔에 머물다가 그해 12월 초 서대문 형무소로 넘겨졌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황태성에 관한 비밀이 시중에 누설되어 공화당 사전 조직설과 연계되고, 황태성에 대한 재판이 군법회의와 대법원을 왔다갔다 하는 사이 그 사건의 전모가 미 정보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쩍어 하던 미군정 당국은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렇게 확산되자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대법원에서 황태성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그를 사형에 처해 버렸던 것이다.
일제하의 젊은 시절에 5년여의 감옥 생활을 감수하며 항일 운동에 투신했고, 말년에는 병든 몸으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으로 내려왔던 황태성, 반면 일제하 젊은 시절에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일본 근대에 투신했고 해방 이후에는 쿠데타의 꿈을 실현했던 박정희. 개인적인 관계로 볼 때, 박상희를 통해 서로 얽혔던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악연으로 끝을 맺었다.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군부 세력이 황태성을 죽인 것은 이후 1960년대 내내 남북 관계를 격화시키는 전조가 되었다. 북한은 미 사건을 통해 박 정권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박정희 역시 이 사건을 통해 미국에게 자신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경제성장의 공과(功過)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뒤이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년 동안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이 걸렸던 산업화의 과정을 그는 단기간 내에 압축적으로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재임중 달성한 이러한 비약적인 경제성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과거 우리와 비슷한 경제성장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근의 중국에서는 박정희의 인기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대가로 우리가 잃은 것은 없었는가? 또한 경제성장이 남겨 놓은 후유증은 없었는가?
먼저 외향적 경제성장을 추구함에 따라 우리가 잃은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전반 박 정권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일제의 식민 지배라는 과거 역사를 지니고 있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 정상화는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 지배의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의 입장과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입장 사이에는 민족적 자존심과 관련된 뿌리깊은 앙금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에 충당할 자금이 긴급히 필요했던 박 정권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청구권과 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달러의 돈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이러한 굴욕 외교에 학생들과 야당은 박 정권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례식에 처하는 등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했지만 박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여 이를 억눌러 버렸다. 차관은 나중에 갚는 것이니 실제로는 3억 불을 얻고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헐값으로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제성장 자금을 위해 1960년대 중후반에 취해진 또 하나의 조치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이었다. 대략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 ‘월남특수(特需)’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월남 파병 역시 그 명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 못했다. 자신들의 독립을 되찾고자 근 1세기에 걸쳐 투쟁해 왔던 월남인들의 고난은 차치하고서라도 미국 내에서조차 반전 운동을 일으킬 만큼 문제가 많았던 월남전에 한국군이 사실상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하기에는 너무나 명분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남북간에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켜 1960년대 후반의 남북 관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 과정에서 박 정권은 다수의 공안 사건들을 터뜨렸고 북한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EC 121기 격추 사건, 청와대 습격 사건, 울진ㆍ삼척 습격 사건 등을 일으켰다. 한일회담이나 월남 파병과 관련하여 이제는 정신대 문제나 고엽제(枯葉劑) 후유증 같은 일만이 우리에게 남겨졌지만, 당시 급속히 추진된 외향적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민족적 자존심의 상실과 남북 관계의 악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이 뒤따랐던 것이다. 다른 한편, 경제성장이 초래한 더욱 커다란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계급적, 지역적 분열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이다. 1970년 11월 어느 날 서울 청계천에서 백주 대낮에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바로 전태일(全泰壹) 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성장 10년의 뒤안에는 10대의 어린 나이로 하루 14시간 이상씩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일해야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3분의 1도 안 되는 그런 희생들이 있었다.
경제성장의 숨은 영웅들은 진정 그들이었다. 경제성장은 이렇듯 사회의 계급적 격차를 확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진행된 경제개발은 지역적 소외감을 초래했고, 이는 이후 광주민중항쟁의 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지역 정치의 폐단을 남기고 있다.
장기 독재의 길
19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도성장의 업적에 힘입어 박정희는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치러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극도의 혼탁상을 면치 못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부정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9월 14일 개헌지지서명을 했던 122명의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3별관에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일요일 새벽 2시 30분,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3선 개헌안이 확정됨에 따라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선에서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즉 그는 1960년대에 이룩한 고도성장을 인질로 해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대선의 마지막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박정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뽑아줄 것’을 눈물로써 호소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어린 호소는 얼마 가지 않아 거짓임이 점차 드러났다. 당시 닉슨 독트린 (Nixon doctrine)으로 인해 야기된 데탕트의 물결 속에서 남북 대화가 진척되는 가운데, 박정희는 영구 독재 체제인 유신 체제의 수립을 비밀리에 진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 선언에 의해 현행 헌법의 효력을 일부 중단, 유신체제 등장을 위한 비상조치를 취했다. 다음은 유신 체제 수립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당시 대통령 특별 선언의 일부이다.
"우리는 지금 국제 정세의 거친 도전을 이겨내면서 또한 남북 대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습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것은, 남북대화를 더욱 굳게 뒷받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모든 체제의 시급한 정비라고 믿습니다."
즉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 3선 개헌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다면,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남북 대화’는 유신 체제 등장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유신 체제가 등장한 후, 동시에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헌법 개정에 의해 수령 체제가 등장한 후, 이제 별 필요가 없어진 남북 대화는 아쉬움없이 중단되었다.
유신 독재하의 사회는 남발되는 긴급조치와 빈틈없는 통제로 꽉 짜여진 숨막히는 사회였다. 그런만큼 그 틈새마다 민주화의 저항이 치받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회이기도 했다.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은 그 충돌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거칠고 적나라해졌다. 백만인 개헌청원운동, 긴급조치 1, 2호, 민청학련 사건 및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서울대 김상진의 할복자살, 긴급조치 9호, 민주구국선언, YH사건,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과 제명 조치, 부마항쟁 등등. 그 중에서 박 정권이 취한 가장 야만적인 조치는 민청학련을 공산주의자들과 연관시키기 위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관련자 8명을 대법원의 기각 결정 하루 만에 사형시켜 버린 일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장기 독재의 길에서 갈 데까지 간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의 대응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김재규의 표현대로 그것은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야누스적 두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던 시기에 해당되고 그 과정에서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대 통령으로 재임중 압축적 산업화를 통한 사회 구조의 변화는 심대했고 독재와 민주의 갈등은 격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동시에 혹독한 장기 독재를 꾀했다. 그렇다면 그는 경제성장의 영웅인가, 아니면 독재의 화신인가?
개인적으로 볼 해도 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형 박상희가 항일 운동에 투신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만주로 갔다. 학병으로 끌려갔던 장준하가 일군을 탈출, 광복군에 참여했음에 비해 그는 일제 사관학교와 만주군에서 성공하길 바랐다. 또한 그는 자신이 남로당에 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사이자 형의 친구인 황태성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쿠데타의 집념 뒤에는 동료들도 거리낌없이 배신하는 냉혹함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애증(愛憎)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야누스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기로부터 해방 이후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가 걸었던 궤적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한다. 일제의 권력에 편승하여 입신하고자 했던 처신,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위해 항상 정치판을 뒤집어 엎고자 했던 집념어린 쿠데타의 꿈, 그리고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가차없이 억눌러 버렸던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이런 것들이 좌절을 딛고 성공한 집념의 인간상으로, 또한 경제성장의 영웅으로 조명되는 그에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면인 것이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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