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잦은 올 여름, 산사를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비 그치기 기다려 떠난 길, 어느 구비길 산모롱이를 돌아서니, 빛살과도 환한
여울물이 제 앞에 펼쳐집니다. 그 깊지도 않은 물길 앞에서, 가던 길도 고만 잃어
버리고, 그 길 끝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 스님도 고만 잊어
버립니다.
돌다리 징검징검 놓인 그곳에, 헤찰 부리며 퍼질러
앉아서 어느새 황톳물 개운하게 맑힌 채, 그렇게 흐르고 있는 기특한 물길 바라봅니다. 물이
얕을수록, 제 가슴팍에 올려 놓은 자갈이 많을수록, 물길이 급할수록, 자갈 크기가 한결 같지
않을수록, 물은 제 몸을 스스로 맑히는 자정(自淨) 작용이 뛰어나게 된답니다. 그런 곳에
제 몸 부려둔 것일수록 햇살에 더욱 영롱하게 반짝인답니다.
요중(中) 공부가 정중(靜中) 공부보다 수승하다더니 저 얕은목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흐르는 여울물의 뜻이
미상불 그러합니다. 까무룩 해가 지고 말면, 저 물 위로는 번을 갈아 달이
찾아들겠지요.
이천 년에 가까운 한국 불교 역사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자취는 보잘 것이 없거나 폄하되어 있기 일쑤입니다. 일만이천 명 조계종 스님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요즘 형편도 썩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언감생심,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 그 분들의 자취를 좇아 본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생의를 내어 길을 나서 보려고요. 좌선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선사이든, 간경, 포교, 역경, 복지 사업 따위를 전문으로 삼고 있는 법사이든, 땅에서
얻을 것이 다인 양, 그저 농삿일 한 가지에만 매달리는 분이든, 한국 불교 장자 종단인 조계종 스님이
아니든, 그 분들이 구하는 것은 모두 다 한가지로 돌아갈 진리일
것입니다.
하늘에 달이 떠서 천 개의 강에 달이 함께
뜨더라도 그 숱하게 많은 강에 비친 달은 하늘의 달(진리, 법) 하나로
거두어진답니다. <화엄경>에서 이르는
말씀입니다.
길을 가다 숨어든 나무 그늘 밑에서, 산길에
주저앉아 흙 묻은 신을 털다 길을 잃고 말더라도, 잃은 길을 찾아 헤매다 마는 얼뜬 이야기 같은 것도 때로 곁들여 볼
생각입니다.
신독(愼獨), 엿보는 이 없는 방
책상머리에서, 옷자락 여미고 삼가 절합니다.
비구니사
편찬의 초석을 놓다
본각 스님 ⓒ허경민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사통팔달로 뚫린 길들이
낯설다. 이른 시각부터 후끈한 여름 아침, 중앙승가대학 표지판을 짚어 들어선 초입의 길도 낯설었다. 높은 아파트 건물, 그리고 빛깔이 다채로운
가게의 간판들도 낯설고 소란스러웠다. 꼭 10년 전, 객이 교사 신축 공사의 첫 삽을 뜨는 기공식을 참관하려고 이 곳으로 오던 그 날도 덥기는
했지만, 이처럼 낯설고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10년 세월 보내고 다시 찾아든 객이 느끼는 이 소란함은, 초입의 야트막한 구릉 길을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무덤들을 보는 순간에 일순 잦아들었다. 그 무덤들, 그렇게 자연으로 펼쳐져 있던 그 옛것들은, 가까이로 바짝 다가온
새 주택 단지들로 귀퉁이가 잘리어 나가기는 했으나, 여전히 고요했다. 객이 고집스레 기억하고 있던 것은 그 무덤군(群)이었고. '소란스러운
느낌'은 바로 그 기억의 반작용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 때에도 잠시 멈추어 서서 오래 바라보았던 동그란 흙무덤과 비스듬히 박힌 빗돌들, 아마도
그 때는 놓쳤으리라. 오늘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여름 꽃들이었다. 개망초, 달맞이꽃, 명아주의 수수알과도 같은 작은 꽃송이... 그
생물들은 오늘 죽은 자들의 고요한 집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그래서 푸른 칼날처럼 서슬 푸르던 햇살이 비스듬해지고, 열기도 조금 식은
저녁나절쯤에, 동네 사람들이 하루 동안의 부산하고 고단한 마음들을 가라앉히는 산보길로 삼음직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중앙승가대는 원칙으로는 사미(니)계를 받은 예비 스님들에게 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조계종 종립(宗立) 학교로서, 정식 스님의 자격을 얻기 위한 기본 교육을 이수하는 교육 기관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미 지방의 강원에서 기본
교육을 마친 스님들도 학사 자격이나 복지사 자격을 얻기 위하여 입학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안암동 개운사 경내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이전해 온
지도 다섯 해째가 된다. 흐르는 산세를 따라 두렷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대학의 캠퍼스도 묘원처럼 고요했다. 얼핏 열려진 창문이 보이지
않아서였던지, 방학 중이기도 하려니와, 이 시각, 그 속에는 아무도 없을 듯했다. 하안거와도 같은 침묵의 기간이었다. 넓어서 시원한 길이 객을
캠퍼스의 중심부로 이끌고, 처음으로 만나는 오른편의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한국비구니연구소'라는 팻말을 보기 전에, 스님들의 높고도 맑은
웃음소리를 먼저 들었다. 1층 복도 끄트머리 출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보다 더 밝아서 눈이 부셨다. 그 웃음소리에, 묘지를 가득 채우고 있던
흐드러진 흰 개망초꽃들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성능이 시원찮아 에어컨은 아예 꺼둔 연구소에서는 대여섯 비구니 학인 스님들이 하얀 교정지
뭉치를 앞에 쌓아 놓고 씨름 중이었다. 이 여름이 끝날 무렵, 그들이 흘린 땀방울들로, 503명 비구니 스님에 대한 짧은 명감(名鑑)과
행장기가, 그리고 <조선 실록>과 <고려사> 등의 정사류(正史류)에서 발췌한 비구니 스님 및 여성 불자 등에 관련된 자료를
집대성한 세 가지 결과물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다.
이 학교 불교학과 교수인
본각(本覺) 스님이 이끄는 '한국비구니연구소'는 2000년에 개소된 뒤로 현재 17명의 학인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는 순수 연구 모임으로서, 이미
2003년에 일차 성과물을 내놓았던 바 있다. <신문 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전6권)과 <비구니와 여성
불교>(전6권)가 그것들로서, 전자는 1986~2000년까지의 신문 및 잡지에 실린 비구니 관련 자료 2,500여 건을 담은 것이며,
후자는 비구니와 여성 불교를 주제로 삼은 학술ㆍ교양 논문, 석박사 학위 논문과, 설화 500여 편을 모은 것이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한국 불교에 있어서 비구니들의 역할은 수행과 도제 양성, 포교와 가람 수호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 왔습니다. 1천7백 년 불교사에서 그
역할은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간에 수많은 한국 비구니들의 활동에 대한 발자취는 있으나 이것을 모아서 정리된 기록 자료가 미비하여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이로써) 한국 비구니 및 여성 불교인의 위상이 제고되고, 불교 발전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평가 받기를
염원하는 바"(전국 비구니회 회장 명성 스님의 발간 격려사 중), 그 간절한 소망의 첫걸음이 내딛어진 것이다. 일천 명에 가까운 비구니 스님들을
전국의 사찰을 누비며 직접 또는 간접으로 취재하고, 학업 시간을 여투어 때로는 자료화 작업을 위해 밤을 새기도 했다니, 정규 수업에 바쳐야 할
시간도 모자란 터에, 오로지 학인들이기에 가능했던 순수한 열정만으로 일구어 낸 소중한 결과물인 셈이다. 누가 해도 해야 할 일, 어쩌면 종단
차원쯤에서나 도모해야 할 듯한, 그래서 개인의 원력으로는 가능해 보이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이 일은, 연구소가 궁극으로 과녁 삼고 있는 바,
'한국 비구니사'를 편찬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마련되었다는 의미를 띤다. 유관 연구 작업 또한 이로부터 시작될 소중한 초석이 되어 줄
터였다.
비구니 연구소 개설은 본각 스님으로서는'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1999년
겨울, 대한매일신문사에서 '근세 여성 종교 지도자 명감' 제작을 기획하면서, 당시에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관(기숙사) 관장 소임을 맡고 있었던
그에게 불교 쪽 자료 요청을 해온 것이다. 기독교 등의 타종교 사정과는 달리, 2천 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불교, 현재 조계종 승적을 가진
1만2천 스님 가운데 절반이 되는 비구니 스님들에 관한 자료라고는 생년월일, 본명, 입산과 출가, 득도일 따위가 전부인, 소략하기 짝이 없는
'승적부'가 고작이었던 것이 불교 쪽 형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천주교말고도, 군소 종교까지 참여하는 형편에 불교 쪽 자료만 빠질 상황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매일신문에서 요청한 500명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200명이라도 자료를 모아 보자. 그는 당시
수행관에 함께 사는 97학번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고민을 나눈 끝에, 연구소를 개설하여 지속적으로 이 일에 매진해 보기로 작정하기에
이른다.
말 그대로 한국 비구니를 연구하는 곳. 간박한 명패만큼 규모는 작으나 그간 쌓은 성과가 적지 않다.
ⓒ허경민
그 이듬해에 학사가 김포로 이전하면서
연구소는 간판을 달았다. '곡절 있는' 간판 달기, 교내에서 공간을 제공받게 되기는 했으나 연구소는 정식 인가를 받지 못했고, 그 형편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이다. "종립 학교에 비구승 연구소도 없는데, (하물며) 비구니승의 연구소가 개설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 학교 책임자가
말하는 비구니 연구소 개설 불가변이었다. 이것이 1천7백 년 역사를 지닌 한국 불교 장자 교단인 조계종의 종헌에 "본 종은 승려(비구,
비구니)와 신도(우바이, 우바새)가 함께 승단을 구성한다"고 명시는 되어 있으나, 승단의 '주역'인 비구 스님들이 사부 대중은커녕, 이부 대중의
하나인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이다.
고문헌에서 다시 만나는 선배와
후배
자료의 디지털화가 속속 이루어지고 있고, 디지털 카메라가 일상화된 요즘에는
일이 많이 수월해졌지만, 연구소가 설립된 뒤로, '시대적 요청'을 제 일로 삼은 초장의 97, 98학번 학인 스님들이 겪어야 했던 노고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묵은 신문을 들추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고, 행장을 기록하기 위해 찾았으나, 인터뷰에 응해주지조차
않는 노스님들의 박대는 때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기록이 되지 않으면 전설이 되고 말 일, 그러나 기록이 되면 역사가 되는 일", 그러나
선문(禪門)의 가풍이 살림살이(수행의 정도)를 드러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데다가, 전통 강원이 아닌 '바깥'(동국대학교나
중앙승가대)에서 수학하는 학인들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치 않았다. 제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헛힘을 쓰고 다닌다는 꾸지람 앞에 그들은
맥이 빠지기도, 마침내 눈물을 쏟고 만 일도 흔하게 겪은 일이었다. 자료화 대상으로 삼은 분 가운데, 이미 입적해 버린 스님들의 경우, 제자를
만나 은사 스님의 흔적을 간접으로 확인하려 할 때에 정확한 정보를 기대하기 힘들었던 점도 그들을 맥빠지게 하는
일이었다.
ⓒ허경민
그러나 2005년 오늘, 회원으로 가입하여 빠듯한 시간을
기꺼이 할애해 내고 있는 학인들은 한결같은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가입하는 회원의 수효가 점점 늘어가는 것도 그들을 기쁘게 한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신문을 스크랩하는 일부터 시작하죠. 사소한 일, 그러나 그런 '사소한' 일의 집적이 비구니사가 쓰여지는 밑자료가 됩니다. 평소에 느끼는
것이지만, 비구 스님들에 비해 비구니 스님들은 드러내는 것에 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죠. 다시금 느끼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
그건 비구 스님과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설 자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활동해 오면서 얻은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더 커져요. 지금 비구니 관련 옛 문헌들을 뽑아 새기고 있는데, 전체 역사에서
비구니의 역사가 차지하는 것이 작은 부분이겠지만, 그 작은 부분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되지 않았을까요."(선나 스님. 현 연구소 회장,
복지학과 4년)
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만나서 작업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고, 경전이나
고문헌 중에서 비구니나 여성 불자들에 관한 자료를 추려 뽑아 읽으면서 선배 비구니들과 이 땅의 곤고한 여성 불자들을 지금 눈으로 다시 만난다.
일테면, "연산군이 한양성 안팎의 여승방 23개를 헐어 버리면서 비구니들을 환속시키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한 이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명맥이나마 유지되던 산골의 여승방들이 깨지고, 승려의 신분이 천민으로 전락하면서 씨가 마르니,. 잡초와도 같은 자생력을 가지고 비구니의
명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 열녀지도를 지킬 수 없었던 아낙, 옥사가 난 집안의 아녀자, 도망친 관비나 사비들이었다. 산골절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인들의 해방구였던 것이다. 스스로 삭발 염의하고 비구승들이 사는 절에 기생하거나, 그 옆에 초막을 치고 살았으되, 모녀간,
모자간, 또는 시모, 며느리, 손녀 3대가 함께 출가하기도 했던 그들은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 기생, 무녀, 의녀, 궁녀와 함께 조선 사회 5대
직업 여성 단체를 이루었고,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한국 비구니 승단의 모태가 되었다. 머리를 깎지 않은 여인네들에게도 불교는 위안이고
희망이었다. 국가 권력도, 유생들도 그들의 절로 가는 발걸음은 막을 수가 없었던" (삼우 스님) 선대 비구니 스님들은, 오늘 후학들이 동시성으로
함께 가꾸어 가야 할 역사적 존재들이다.
연구소에서는 신문 잡지류를 바탕으로 한 자료화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한편으로, <고려사>나 <조선 실록> 등의 정사류에서 불교 관련 문헌을 찾아 모으는 일이 일단락되면,
이어서 개인의 문집, 각 단위 사찰의 사적기, 비석문을 포함한 금석문으로까지 자료화 대상을 넓히려 한다. 방학을 이용해서 비구니 스님들의
발자취가 남은 유서 깊은 사찰을 탐방하여 문서화 및 시각 자료화하는 작업도 현재 진행 중이다. 이를테면, 안암동 개운사에만 해도, 상근 스님의
비석이 있다. 서울 창신동에 있는 청룡사 주지로서 안암동에 강원이 개설될 때에 당신의 개인 재산을 후히 보탰던 분이지만, 그 비석이 언제 뽑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학을 이용한다면 그 회수는 1년에 두 번, 그러나 "한 십 년 계속하다 보면 그 성과는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각
스님은 느긋해 했다. 또한 연구소에서 잠정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것, 이어서 야사류나 설화류(<대동야승> 등), 구비
문학(<한국구비문학대계> 등) 따위를 자료의 대상으로 포함하고, 다른 나라, 인도권을 포함한 동양권, 그리고 서양권까지 확대시킨다고
보면, 이 일은 그가 표현하는, 그저 "비구니사를 쓰기 위한 작은 징검다리를 놓는 일에 지나지 않을 일"로 한정되지는 못할 터였다. 이 일은
종교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역사나 문화적 의미도 아우르게 될 터였다.
ⓒ허경민
불교 경전 속의
여성
불교 경전 속에서 나타나는 비구니 스님들에 관한 불평등 조항은
'팔경법(八敬法)' 같은 것을 비롯하여 분명히 존재한다. '팔경법'이란, "백 살이 된 비구니라도 갓 수계를 받은 비구에게는 절을 하고 자리를
내드린다"는 내용을 비롯한 여덟 가지 '불평등' 계율로서, 세 번이나 반대하다가 아난의 요청으로 비로소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하면서 그 전제
조건으로 내놓았다는 부처님 재세(在世) 당시의 계율이다. (이천 년에 가까운 한국 불교 역사에서도 교학상의 여러 변화와 개차법(開遮法) 등을
두어 계율 운용에 있어서 융통성을 보여 왔지만, 유독 비구니 팔경법에 관해서는 엄격한 유지를 강요해 왔고, 비구니들도 이에 순응해 왔다.
)
부처님 생존 당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란, 고대 인도의 베다 시대에는 최고의 가치
체계인 제사 의식에도 참여하는 등 높은 지위를 누리던 것과는 달리, 이후로 이어지는 브라만 시대의 <마누 법전> 같은 데서는 극단적인
표현으로까지 하락하여 나타난다. 이 시대 여성의 존재 의미는 남아를 낳고 선조와 브라만 신(神)들에게 종교적인 의무를 지속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그 지위는 더욱 낮아져서 경전이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수행 교단의 장애물로, 탐욕과 질투심과 어리석음의
덩어리"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대승경전의 경우에도 이런 류의 폄하 내용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으로 꼽는 <수타니파타>에서는 파사익 왕의
비인 말리카가 여아를 낳은 것에 대해 왕이 서운해 하자, 석존이 "부인이라고 해도 남자보다 훌륭하다. 지혜가 있고 시어머님을 존경하며 남편에게
충실하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영웅이 되고 지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달랜 것을 비롯, 오백 명의 여자들을 이끌고 출가를 허락해 주기를
간청했던 당신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열반에 들자, 수많은 비구들과 함께 장례에 참가하여 "이미 윤회의 바다를 건너서 고뇌를 다 없애고
열반에 들었다"고 선언하기도 했으니, "여성의 출가를 허락함으로써 천 년이 갈 정법이 오백 년으로 후퇴되었다"는 '석존의 개탄'은
어리둥절해지기조차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성은 아마도 상대나 상황에 맞춘 대기(對機) 설법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혼인한 뒤에는 남편에게, 그리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여인 삼종설(三從說)이나, 제석천이나 범천, 전륜성왕, 불타 등 다섯 가지 지위에 오를 수 없다는 여인 오장설(五障說), 또한 여자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으며 남자 몸을 받은 뒤에나 성불이 가능하다는 전여신설(轉女身說) 등, 석존 입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부터 대승
경전에 이르기까지에 나타나는 갖가지 불평등 내용들은, 그러나 자귀 그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상황을 함께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고 본각 스님은 생각한다.
당시에 석존이 삼엄한 계급 제도를 부인하고
본성(本性) 평등을 주창하고 나온 것부터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혁명적 선언이 아니었던가. 여성의 출가를 인정할 경우에 빚어질 문제점들은 현대
사회의 우리로서는 짐작하기 힘들 만큼 어려웠던 만큼, 또 그만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처의 여성 불평등에 관한 언설은, 여성의
남성과 다른 신체 구조에 대한 배려이자, 속세와 인연을 끊고, 더 이상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역할을 거부하려는 여성들을 허용하는 일을 두고
쏟아질 세간의 질타에 대한 고육지책, 이를테면 '미리 든 거짓 매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라"(<수타니파타>) 하셨다. 본각 스님이 '불전에 보이는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논문에서 밝히듯, 본성 평등의 주창자인 부처가
"여인은 본성이 악과 거짓됨으로 뿌리 깊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평등한 요구를 한 것이라면, 진실로 그러하다면 불교는 결코 본성 평등의
종교가 아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기록과 비구니 교단의 성립 경위를 설명하는 팔경법 등의 모든 기록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비구니
스님들의 권리 찾기 문제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 사상을 더듬는 작업의 일환이 되는 것이다."
본각 스님과 학인 스님들의 공덕이 ‘신문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 여섯 권과 ‘비구니와
여성불교’ 여섯 권에 쌓여있다. ⓒ허경민
노자가 이르는 '현빈(玄牝)'은 '오묘한
수동성'이다. 받아들임으로써 만물을 낳는 '수동성의 신비함'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여성성'에 관한 관심이 드높은 이즈음, 미래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코드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불교와 여성성이라면, 비구니사 편찬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한 것이다. 그 역사의 첫머리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아도가 신라 땅에서 홍법(弘法)의 가능성을 타진할 때에 그 근거지를 제공했던 모례(모록)의 누이동생인 사(史)
씨가 될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절로 삼고 영흥사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그이는 사료에 나타나는 첫 비구니 스님이다. 이후로, 왕을 따라
출가하여 법명을 묘법이라 한 법흥왕의 비(妃)로 이어지니, 그는 사 씨의 유풍을 흠모하여 제가 지은 절 이름도 사 씨와 같은 영흥사로 이름
짓는다. 그러나 이후로 정사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자취는 적막하고도 악의에 찬 것이기
쉽다.
"종교의 속성상 신행(信行) 부분은 남성보다는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지지만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비구니는 거의 소외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있어서 여성 불자나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것을 그나마 조금 알 수
있지요. 불교가 융성할 때인 고려대에만 해도, <고려사 절요> 같은 것을 편찬한 것은 성리학자들이었습니다. <조선 왕조
실록>을 편찬한 의식과 다를 바 없어요. 그래서 여성 불자, 비구니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지요. 이것은 요즘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지 부분의 활동상은 비구승이 쫓아갈 수가 없는데도 폄하되거나 간과되고 있어요. 학술 연구의 성과커녕, 관심 자체가 아예 없는 형편입니다."
비구니연구소에서 고문헌 중에서 불교 관련 자료를 찾는 일에 열성적으로 동참해 오고 있는 황인규(동국대 사범대학 역사교육학과) 교수의 말이다.
누가 해도 해야 할 일, 본각 스님으로서는, 비구니 스님들의 정체성은 역사 기록을 찾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비로소 찾아질
것이고, 이 또한 비구니사가 쓰여져야 하는 까닭으로 연결된다. "과거의 비구니 선사나 참선 이외 교육이나 포교 등의 분야에서 애쓰고 있는
법사들의 행장을 기록하는 일은 시대적 요청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문헌이 되는 것은 그 결과로 얻어질
일이지요."
세계문화유산적 존재인 한국 비구니
교단
여성 수도자의 집단인 비구니 교단의 출현은 세계의 사상사에 있어서도 경탄할
만한 일이었다. 불교가 비롯된 지 100년(또는 200년)이 될 무렵에 그리스 사람인 매가스태내스는 그의 견문록에서 "인도에서는 놀랍게도 여성
철학자들이 남성 철학자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당당히 논의하고 있었다"고 적어 놓고 있다. 이레 만에 생모를 잃은 부처를 길러 줌으로써 그의
어미 노릇을 감당했던 마하파자파티는 석가 종족 오백 명의 여인들과 함께 어렵게 교단을 결성시킨 최초의 비구니다. 그는 진리에 눈뜬 자로서 수행
생활이 가져다 준 자기 완성의 희열을 시로써 토해 놓았다.
ⓒ허경민
나고 죽는 모든 것들의 최상자이시여,
영걸이시여! 모든 사람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당신께 예배 드리나이다. 저는 모든
괴로움을 널리 살펴 끊고, 그 괴로움의 원인인 망집(妄執)을 떨쳐 내고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여 망집의 끊어짐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깨달음의 경지를 등진 채
윤회했으나 이제 거룩한 스승님을 만나, 거듭 태어나는 윤회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
다시 헛된 삶을 계속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천 년에 가까운 한국 불교사에서, 비구승과
함께 수행과 포교의 한 축을 담당해 왔던 비구니 교단의 존재는 삼천 년에 가까운 세계 불교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수행과 교육의 질이나 교단의
규모로 보자면, 거의 문화 유산적 수행 단체라 할 만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전체 비구니 스님은 400명 정도로서, 다도와 꽃꽂이 등의 활동을
통한 '전통 문화 지킴이'로서의 면모가 강하고, 그나마 전체 일본 사회가 닥친 노령화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국 교단만큼의 활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형편이다. 현재 대만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불광산사는 비구니승의 수효가 비구승의 네 배쯤 되는 곳으로, 그곳 또한 사찰을
복합 문화 공간화하는 한편, 세계 각지에 포교원을 두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으나, 수행보다는 포교에 주력하고 있는 곳이다. 중국 본토의
경우, 혹독한 문화 혁명을 겪은 뒤이기는 하나, 그 유구한 역사와 광활한 땅을 바탕으로 현재 불교 부흥의 기운이 역력한 곳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일 뿐, 그 밖에 티벳 등 여타 동남아 지역에서는 정식 스님이 되는 의식인 비구니계조차 받을 수 없고 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비구니 교단'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셈이다.
한국의 비구니 교단의 위치는 '석가의
딸'들 가운데서도 장형(長兄)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이는 지난해에 그가 주도하여 성료시킨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Sakyadhita-석가의
딸들)'에서도 새삼 확인된 것이다. 사찰 순례 사흘을 포함하여 열흘 동안 열린 대회의 첫날인 개회식에는 2,000여 명이, 폐회식에는
1,500여 명이 참가했다. 사캬디타 회장 소임을 맡고 있는 까르마 렉쉬 소모 스님을 비롯하여, 티벳의 영적 지도자인 영국인 텐진 팔모, 태국의
매친니, 대만의 쯔후이, 일본의 아오야마 순또 스님 등 각국에서 불교 발전을 책임지고 있거나 영향력 있는 분들, 또 엔 클레인, 페마 초드론 등
세계 유수 불교 학자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뜻깊게 했다.
현재 45개국 1,900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 단체의 이 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가 활동하고 있는 비구니연구소에 해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이 지난해에 한국 대회를 참가하고, 석남사와 운문사의 비구니 선방과 강원, 그리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판전을 둘러보고 난 뒤에
가진 소감은 한국 비구니 교단이 교육과 수행의 면에서 세계 최대이자 유일한 교단이란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이로써 한국 비구니 승단에 거는 기대치 또한 높아졌으니, 처지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곳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나 인력 지원 따위가 그것이다. 개인으로 감당할 일도, 또 그렇게 도모될 일도 아니니, 이 또한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는 사캬디타 회원국으로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 책무일 터였다. 대회를 치른 뒤로 1년이 지난 지금, 한국 비구니 승단에 관한 자료를 요청해
오거나, 복지 관련 등, 국내 비구니 스님들의 활동 현황에 관한 연구 의사를 전해 오고 있다. 비구니 관련 연구 모임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1982년도에 범어사에서 혜공(慧空)이라는 법명으로 수계를 받은, 현재 미국 샌디에고 대학 종교학부 교수로서 사캬디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소모 스님은, 그가 관심 두고 있는 티벳 사미니들이 한국에 와서 수계식을 받고 정식 스님인 비구니로 태어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도 교구 본사 주지나, 종무 행정에서의 소임 등에서는 역할이 배제되거나 한계가
있는 형편이지만, 국내 비구니 스님들의 활약상은 70년대부터 두드러진다. 특히 복지 분야나 단위 사찰별 유아 및 청소년 포교에서 그러하다. 다른
종단에 비해 대사회 활동이 뒤떨어져 있다는 뼈아픈 현실적 인식과 함께, 종단 차원에서도 복지관 운영을 통한 포교 및 복지 사업이 양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때이다. 그 무렵에는 중앙승가대에서도 복지학과가 신설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라 밖의 그런 관심에 대해, 본각 스님은 마냥 기꺼울 수만은 없는
듯하다. 아직도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면모가 강한 한국 불교의 풍토도 문제려니와, 억불기 동안 단속(斷俗)하고 정신 세계를 지킴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지켜온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할 수는 없을 것이라 했다. 사회 변화에 대한 인식을 게을리 한다면 불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찾기 힘들 것이라 여긴다. 사회 변화에 대한 낮은 인식, 이는 그가 80년대 초, 불과 20년 전에 일본 유학을 하려는 그를
반대하는 주위의 뜻에서도 확인되었던 바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겠지요, 하고 본각 스님은 웃었다.
ⓒ허경민
해와 달이 함께 짜는
베
"세 살 때에 절로 들어온 우리 본각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지." 지난해 세계여성불자대회 대회장에서, 새벽 바람에 절을 나서셨다는 어느 노스님은 입구에서 손님맞이를 하고 있는 본각 스님의 손을
뜨겁게 잡아 주었었다. 세 살이라면 얼굴에 윤곽이 채 새겨지기도 전이다. 병사한 부친의 49재를 지내기 위해 성철 스님(당시 안정사 주석)을
찾은 것을 계기로 성철 스님의 맏제자가 된 큰형(천제)을 비롯해서, 법명까지 받아 놓은 채로 입적한 모친과 함께, 큰언니(혜근), 둘째
언니(적조), 셋째 언니(보명), 둘째 오빠(삼소)까지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식구 모두가 출가의 복을 지은 드문
집안이다.
1952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에서 태어난 본각 스님은 세 살 때에 석남사 인홍
스님의 권속 관계인 인천 부용암에서 육년(六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성철, 일타(지족암), 그의 법명을 지어 주신 전강, 혜암(수덕사),
춘성, 석남사 인홍, 봉녕사 묘엄 등, 그는 삶에서 큰 스승을 많이 만났던 일을 큰 복으로 여긴다. 석남사와 운문사 강원을 거쳐 동국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서양 철학을 전공했으며, 졸업하면서 다시 '재출가'의 초발심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까마귀와 새를 쫓거나 허드렛 일을 하여 복과 선을
짓는 구오(驅烏) 사미니의 뜻조차 지킬 수 없던 나이에 절로 들어와, 명자(名字) 사미니로서의 형편을 스스로 떨쳐 버리고, 그는 다시금 체발을
하고 구족계를 받았던 것이다. 이어서 봉녕사 강원을 졸업하고 3년 동안 중강 소임을 맡아 보다가, 1982년 가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릿쇼(立正)대 석사, 동경 고마자와(駒澤)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1991년부터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로 강의를 하기 시작, 현재에
이른다.
되돌아 보니, 그이가 시련과 고통의 고비를 맞았다고 여기던 때는 기존의 통념에
맞서던 때라 할 만한 것이었다. 강원 아닌 바깥 배움터에서 공부를 계속하려는 그를 야단치는 절집안의 통념과 맞부딪치고, 나라 안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데로 나아가려는 자신을 향한 걱정들을 몸으로 물리치고 난 뒤에 얻은 것은 남보다 한 발짝 앞서 내다보는, 한 자 깊이 들여다보는
'혜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 벽에 바를 진흙을 이기고 있는 가섭에게 한 사미가 물었다. 존자는 왜 손수 하시나이까.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묵묵히 내가 할 일을 해나가는 것', 이것은 그가 건네는 개인 이력서 가운데 '생활의 신조'로 밝힌 내용이다.
서양 철학을 전공했던 그이가, "여성의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그이가, 비구니 스님 행장기를 준비하는 아뜩한 일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가 할 일'로 삼아 버린 것은 그의 생활 신조, 곧 자신의 신념 체계와 관련되는 문제였나 보았다.
인홍 스님의 열반송을 아로새긴 죽비 ⓒ허경민
화엄학을 전공한 그가 승가대 학인들에게 화엄
사상과 대승 불교 사상을 가르치면서 함께 강조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이다. 한 송이 싸타르마 푼다리카(백련)보다는 아바탐사카, 곧
'동산에 함께 어울어져 핀 온갖 꽃들'이 함께 귀하다 했다. 선재가 만난 선지식은 한 사람이 아니라 쉰세 명의 보살들이었다. 그의 초발심 시절을
야물려 주신 석남사의 인홍 스님도 '율장에 적힌 대로 비구 스님을 존중하되, 서로 존중받을 바탕을 스스로 가꾸라' 하셨거니와, 비구와 비구니는
대척점에서 서로를 경원하는 관계가 아니기를 승가대 학인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학기 말 학인들에게 '대승 불교의 현대적 조명'이라는 제목의
시험을 번번이 치르게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의미있는 결합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대승 불교가 지난 시대의 역사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며, 이 시대에 맞는 방법론으로 다시 구현되어야 함을 일깨우고자 한다.
학기 중에는 일
주일에 닷새를 학교 연구실에서 연구와 강의에 매달리다가, 주말이면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금장사에 머문다. 이 절의 주지이기도 한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 토요일 밤이면 신도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한다. 미국의 버클리 G.T.U의 I.B.S대학원에서 객원 교수로 머물 적에는 동서양의 밤낮의
뒤바뀜일 뿐, 시간에 대한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나, 일타 큰스님이 그토록 강조하시고 또한 몸소 자주 행하셨던 바, 다시금 믿게
되는 것은 '밤을 새워 올리는 밤기도의 수승함'이다. 일상을 접고 밤을 새워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그는 말했다. 밤 12시, 오늘과 내일의 경계, 그 '묘함'에 대한 것을 몸으로 느낀다. 옛사람도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안아 (텅 비어
있어 가득 차는) 허무의 기운으로 조화를 삼는다" 하였거니와, 그가 애쓰고 있는 해와도 같은 드러남이 바탕 삼고 있는 것은, 그렇게 지나치듯
들려주는, 달빛과도 같은 그의 밤기도일지도 모르겠다.
소쿠리로 결어질 부들도 볕에서
사나흘 말린 다음 응달에서 말려 주어야 볕과 어둠이 어울어져 '제됨'이 온전히 드러난다 하였다. 초목을 키우는 것은 해를 우러르는 나뭇잎들만이
아니라, 어두운 땅 속 깊이 내리고 있는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무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법다이 지켜 볼 도리를 생각하게 하는 곳, 그가
오가며 눈길을 주기도 하는 학교 앞 무덤을 지키는 것 또한 이 쨍쨍한 한낮의 여름 꽃들뿐만이 아니라, 혼자 떴다 혼자 이우는 푸른 달의 가만한
발길이기도 할 터였다. 제 태를 수선스럽게 드러내는 바 없이 천지 운행의 한 축을 든든히 감당하고 있는 저 어여쁜 '여성'일
터였다.
필자 약력
195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월간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해인>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에 <봐라, 꽃이다! - 우리 시대의 스님들>(2002년,
도서출판 호미)이
있다.
허경민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계간 잡지 ‘디새집’에서
기자로 일했다. ‘디새집’에서 만난 이 땅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모아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여자이야기’를 엮었다. 뒤늦게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사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김영옥/언론인
출처 : 프레시안 문화(인터넷뉴스)
첫댓글 스님 ...정말 감동했습니다.제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시던지..대자대비의 관세음 보살의 자비가 느껴졌습니다. 항상 좋은 법문을 듣고 싶습니다.가슴에 잘 담아 가겠습니다.감사 합니다.....
늘 저희곁에 계서주셔서 감사합니다.스님의 간절한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겨 지혜로운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감히 서투른 필설로 표현하기조차 송구합니다. 그래도 가까이 뵐수있어 큰 영광으로 생각할 밖에요... 관세음 보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