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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01-16 09:37:00
제2 석굴암으로 불리는 군위삼존석굴.
부림 홍씨 집안에 전하는 귀한 보물이 한 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이다. 1926년 문중이 입수해 세상에 알린 백원첩(白猿帖)이라는 필적(筆跡)이다.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에 유덕양(劉悳梁)에게 써준 이태백의 시 두 편 중 한 편인데,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덕양의 후손인 유희억(劉禧億)에게서 얻은 글이다. 정몽주는 팔공산 동화사로 놀러 간 1387년 8월15일, 동행한 동료와 후학들에게 유려하게 휘갈긴 이 글씨를 보여주었다.
이날 팔공산 회동에 참석한 이들은 당대에 쟁쟁한 문사 14명이었다. 이재현(李齋賢)의 손자 이보림(李寶林), 이색(李穡)의 아들 이종학(李種學),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김자수(金自粹), 김약시(金若時), 이행(李行), 안성(安省), 도응(都膺), 조희직(曺希直), 홍노(洪魯), 윤상필(尹祥弼), 홍진유(洪進裕), 고병원(高炳元)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날 태조 왕건의 필적을 보면서 한 편의 연시를 남겼다. 그런데 아쉽게 연시는 7명의 글만 남아 있고, 정몽주를 포함한 7명의 시는 전해오지 않는다.
정몽주와 문학적으로 깊은 인연 맺어
홍씨 문중에서 이 글을 소중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선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부림 홍씨인 홍노(1366~ 92)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홍노는 조선이 개국한 날이자, 고려가 망하던 날인 1392년 음력 7월17일에 불귀의 객이 됐다. 이날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다.
삼존석굴이 있는 암벽을 향해 서 있는 홍노의 비석.
그의 행장(行狀)에 전하는 그날의 전경을 들여다보면, 7월 초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홍노는 7월17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더니 “내 어젯밤에 태조 대왕(왕건)을 꿈에서 뵈었는데 오늘 돌아가리라”고 말했다.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배알한 뒤 아버지 진사공께 문안을 드렸다. 이어 마당에 자리를 펴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신은 나라와 함께 죽사오니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라고 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눕더니 정오가 안 된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운명하고 말았다. 개성과 천 리나 떨어진 팔공산 자락에 살던 홍노가 특별한 예지력을 발휘하듯, 고려 왕조와 한날한시에 운명을 다한 것이다.
홍노가 운명한 이후로, 부림 홍씨 집안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치 스러진 고려를 기리는 것처럼. 그리고 홍노가 살던 마을은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팔공산 북쪽 제2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군위삼존석굴이 있는 마을,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와 남산리가 바로 그 동네다.
군위삼존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100년 정도 앞서 조성되었는데,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이 근처에 8만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는 초막 하나 정도로 줄어들었고, 대신에 양산서원이 이 일대를 차지해서 마을 이름도 지금까지 ‘서원’이 되었다.
대율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남천 고택(왼쪽). 대율리의 운치 있는 돌담길.
하지만 요즘은 불교가 번창하고 유학이 쇠퇴하면서, 삼존석굴 밑에 석굴암이라고 부르는 큰 사찰이 들어서 양산서당을 압도하는 상황이 됐다. 양산서당 자리에는 원래 홍노를 배향한 양산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 훼철된 뒤로 훗날 서당이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높다란 사찰 연수원 옆에는 홍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삼존석굴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에는 ‘首陽白日 栗里淸風(수양백일 율리청풍)’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백이숙제가 숨어들었던 수양산의 해처럼 밝고, 도연명이 칩거하던 율리의 바람처럼 맑은 홍노의 기상을 기리는 글귀다. 양산서원이라는 이름도 수양산에서 따온 것이다.
홍노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7세에 효경(孝敬)에 통했고, 22세에 생원이 되었으며, 25세인 1390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포은의 추천으로 한림원에 들어갔고, 이듬해 문하사인(門下舍人·종4품)이 되어 짧은 시간에 상당히 높은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1392년에 이르러 국운이 기울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곧바로 낙향해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포은 선생은 뵙고 왔냐고 묻자 그는 “그분의 마음을 제가 아는데 구태여 만나본들 무엇 하겠습니까. 만났으면 반드시 못 가게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집집마다 성벽처럼 두꺼운 돌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홍노는 “이제 사람도 없고, 나라도 망했다”며 더욱 체념에 잠겼고 그 때문에 병도 깊어졌다. 홍노와 동년배로 조선 왕조에서 좌의정까지 지냈던 허조(許稠)는 그를 평하기를 “나와 같이 벼슬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홍노처럼 도량이 크고 온후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홍노는 벼슬살이 기간이 짧았고, 27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두문동 72현에 꼽히지 않았다. 1932년 전남 장성에 고려 충신각 경현사(景賢祠)을 세울 때 충신 130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비로소 포함되었다. 부림 홍씨 종친회장인 홍연수(洪淵守) 씨는 “충신이라는 것이 자로 잴 수 있겠습니까, 저울로 달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선조의 충절이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다.
홍노의 집안과 홍노가 살던 동네에는 보물이 많다. 태조 왕건의 친필도 지니고 있고, 국보 제109호 군위삼존석굴, 보물 제988호 석불입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보물이 있다. 바로 홍노가 살고, 그의 후손이 대대로 지켜온 한밤마을, 홍노가 이름 붙였다는 대율리(大栗里)다. 집집마다 돌담을 쌓았는데, 돌담이 마치 성벽처럼 두껍다. 제주의 성읍마을이나 아산 외암리의 전통마을보다 더 굳건하고 짱짱한 돌담들이다.
마을 안에는 1632년에 건립된 늘씬한 대청이 있는데, 이는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청 옆에는 두 그루의 잣나무가 심어진 남천고택 쌍백당(雙柏堂)이 있다. 홍노의 위패를 모신 부림 홍씨 종택도 있다. 마을 동구 솔숲에는 홍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비석이 있다. 또 마을 솟대인 진동단에서는 동제를 지내고, 산신당에서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국가의 운명과 함께한 홍노의 맑은 삶이 있고, 그 삶을 기리는 후손들이 있기에 지킬 수 있었던 소중한 자산들이다. 그런데 불안한 소식이 들린다. 팔공산에 터널을 뚫어 대율리 마을로 큰길을 내기로 했단다. 예산만 확보되면 터널을 뚫겠다는데, 큰길이 나면 대율리의 평화도 깨지고, 돌담도 흩어질 테니 걱정이다. 대율리가 개발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부디 홍노의 혼이 머문 전통마을의 자존심은 굳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주간동아 519호 (p88~89)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
◉ 洪敬齋 魯 詩集序 금호세고에 기록된 경암허조의 홍로의 시집서문입니다
洪公得之余之同年友也學行雅望爲儕類所推而天不憖遺未得其壽余每抱先逝之恨公之胤在明袖其先考行狀及遺稿若于篇泣而示余曰
·儕동배제 ·憖억지로은 ,무리은 袖소매수 ·抱안을포, 품을포 ·逝갈서 죽을서 ·泣울읍.
홍득지(洪得之)는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이다. 학행(學行)과 고아한 명망이 동배들의 추중(推重)이 되고 있었는데 하늘이 애써서 남겨두지 않아서 그 수를 누리지 못하여 내가 항상 먼저 세상을 떠난 한스러움을 품고 있었더니, 공의 아들 재명(在明)이가 그 선고의 행장(行狀)과 유고(遺稿) 약간 편을 가지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竊聞先考於令公道義交勉臭味相合知先考平日之所踐履者莫若我令公也幸爲文以其之余遂喟爾曰公之學也邃而正焉狀其行者詳且盡矣公之學行曾不假是而著
·竊훔칠절 ·幸 다행, 바라다행 ·遂 이를수 ·喟 한숨위 ·爾 너이 ·邃 깊을 수 ·假 빌가, 거짓가,
·著 분명할저
“제가 들은 바로는 선고(先考)와 영감(令監)께서는 도의로 서로 권면(勸勉)하고 취미(趣味)가 서로 화합하셨으니 선고의 평소 이력을 알고 계시는 분은 우리 영감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그 사실을 기록하여 서문(序文)을 지어 주십시오” 하므로 내가 드디어 탄식(歎息)하며 말하기를 “공의 학문은 깊으면서도 정도였고 그 행장(行狀)을 쓴 사람도 상세하고 빠짐없이 말했으니 공의 학행(學行)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렇게 내 말을 빌릴 필요가 없을 것인데
子之所囑如是其懇余雖咫見謏聞豈可虛孤其盛意而不記其萬一也哉蓋洪氏之本貫缶林者未知其幾百年矣世濟其美蟬冕接武而·囑 부탁할촉 ·懇 정성간 ·咫 길이지 ·謏 적을소, 착한일을 권하다
자네의 부탁이 이와같이 간곡(懇曲)하니 내가 비록 본 것이 짧고 들은 것이 적지만 어떻게 그 깊은 뜻을 헛되게 저버리고 그 만분의 일이라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대저 홍씨(洪氏)의 본관은 부림(缶林)이라고 한 것은 몇 백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대로 그 조상의 세업(世業)을 이어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계속 이어졌으며
以德行文章鳴於一世者不能盡記至于公襲九齋圭臬之芬著一心誠正之學持身謹重爲世所宗妙年登第顯親以孝經筵講道事君以忠臣子職可謂盡矣·襲 엄습할습 ·圭 홀 규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으로써 한세상을 울린 사람은 다 기록할 수 없는데, 공에 이르러서는 구제(九齋)의 아름다운 법도를 한마음에 착실히 승습(承襲)하여 성실하고 정직한 학문으로 몸가짐이 근실하고 중후하여 세상에 추중하는바가 되었으며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어버이를 빛나게 하는 효도를 했고 경연(經筵)에서는 도학(道學)을 강론하여 임금을 충성스럽게 섬겼으니 신하와 자식의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데,
惜乎其中道夭天不得展施於明時而嘉言善行未傳於世也展噫余以蒹葭倚玉半世從遊同榜當年甚喜冠公之得人豈意今日泣編柳子之遺文悲愴哽咽不忍
·蒹葭 : 갈대. 보잘 것 없는 신분 ·蒹 갈대겸 ·葭 갈대 가 ·倚 의지할 의, 기이할 기
애석하게도 그 중도(中道)에 요절(夭折)하여 깨끗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태평시대(太平時代)에 뜻을 펼 수 없었으니 훌륭한 말과 착한 행의가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다. 아! 내가 보잘것 없는 사람이 옥과 같은 사람에 의지하여 반평생을 종유(從遊)했고 동방(同榜) 급제(及第)하던 그 당시는 대단히 기뻣는데 구공이 사람을 얻게 된 것이 오늘에는 류자(柳子)의 유문(遺文)을 눈물로 편철(編綴) 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슬프고 목이 메어 차마 쓰지 못하겠으나
書亦不忍忘也洪武戊寅八月日禮曹參議許稠謹書
또한 차마 잊을 수도 없다.
조선태조 7년 서기1398년 8월일 예조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 근서
첫댓글 참으로 이 글을 재미있게 보았읍니다. 옛 우리조상들의 지혜에 감탄과 놀라움이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이 글에 근거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홍씨 자손들의 마을을 찾아가 보았읍니다.그리고 그 마을 전경을 우리카페에 폰앨범에 담아보았읍니다.
좋은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고 너무 재미있게 보았읍니다. 이 글에 대한 우리조상들의 문화 유산을 다 담지는 못했읍니다.삼존석굴등은
담지 않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