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쉰을 코앞에 두었을 적에 충무공 리순신의 『난중일기』에 나타나 있는 해몽과 척자점이니 『주역』으로 점친 내용을 분석한 바가 있다. 그때는 『주역』의 상식으로 『난중일기』를 풀었으므로 이제 와서 보니 잘못된 점이 몇 군데 보였다. 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세월만 흘러갔고 여태껏 그저 내버려 두었다가 이제야 『주역』을 『역경』으로 자리를 되찾아봄으로써 만 27년이 지난 지금에 『역경』으로 편역하면서 이의 잘못을 고치고 보완하였다. 오랜 짐을 풀어낸 셈이다.
『주역』 또한 머리맡에 두고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화강 리인섭 씨의 『이순신의 리더십 척자점의 비밀』(2006.4.)을 번역했을 적에 추천사와 감수를 부탁받았고, 이로부터 10년만에 다시 『주역』을 번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이 이 또한 차일피일 늦어져 또 15년이나 더 지난 2023년 10월 초에야 초벌 번역을 끝내고서 제4부 『주역』에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통치의 으뜸 바탕이 무엇인지를 찾아봤으며, 제5부 충무공 리순신의 심리적 불안과 그 해소를 손봄으로써 드디어 완성을 보게 되었다.
특히 『주역』의 번역에서 중요한 사실의 발견은 중부괘의 63효의 “得敵或鼓或罷”의 해석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에 더 용기를 얻었다. 『주역』의 번역자나 연구자들을 보면 적군에 대한 대응 자세로서의 군사지식에 깊이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 탓에 ‘或罷’의 ‘罷’를 ‘파루>바라 불다’로 보지 못하고, 대개 ‘그만두다’라는 말로 끝내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 발단은 왕필과 공영달부터 소강절도 주희도 마찬가지였고, 다산 정약용도, 도올 김용옥도, 유산 윤재근도 이를 조금도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답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64괘의 순서가 점치는 목적에 이루어진 『주역』을 고쳐 음양의 배열 순서에 따라 인간관계학의 정신수양서로 재인식하도록 이름을 『역경』으로 복원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을 이어온 비결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과 의문은 평생의 숙제였는데, 『역경』을 편역하면서 알게 된 것이 바로 “사랑[仁]”에 있었고, 그 실천이야말로 조선의 임금은 성군이 되기를, 그것을 위하여 신하들은 목숨 걸고라고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가 『주역』을 통하여 이루려고 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랑[仁]”을 향한 조선은 위대한 나라였다. 현실에서는 지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 갇혀 있지만, 역사의 진실은 지구전반구 자체였음이 옛 문헌의 곳곳에 흩어져 있음을 본다. 이 『역경』의 본문에 “기자箕子”의 존재와 더불어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했고, 『전한서前漢書』「률력지律曆志」에는 “武王訪箕子 箕子言大法九章”라고 언급되어 있다. 기자의 홍범구주와 같은 말이다. 그러데 주조周朝의 무왕武王 희발姬發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며 “武王封箕子於朝鮮”이라고 『후한서後漢書』「동이전」에 실려 있는데, 무왕은 즉위 13년째에 기자를 찾아가서 천하를 다스리는 비법을 물었고, 이에 기자는 무왕에게 그 홍범구주를 가르쳐주었다고 『서경書經』「주서周書」에 나온다. 그렇다면 그 무왕이 기자를 찾아간 곳이 한반도 평양이었겠는가? 정말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지리적 상관관계의 문제이다.
더구나 기자에 관한 것이 이 『역경』의 소휵괘小畜卦䷈乾下巽上의 역사적 배경에 나오고, 명이괘明夷卦䷣의 65효의 본문 속에 나오기도 하므로, 그 기자는 아예 지리적 중앙의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지리적 중앙이라는 것은 아시아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지구전반구의 중앙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미세기 현상에 하루에 일곱 번 밀물이 드는[一日七潮] 곳이 있고, 그곳이 조선 중국의 서북쪽 해안[西北潮候]이며, 유럽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서북쪽 해안이다. 또 임진왜란 때에 유일하게 전투함의 손실을 크게 입은 광주양 해전이 있었는데, 좌초로 불태워졌다. 1598년 10월 3일 한밤이었는데, 이 시간의 한반도에는 고조시로서 좌초가 될 수 없는 환경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미세기로 본 한국 – 하루에 7번 밀물 드는 나라 조선』과 『임진왜란시 광주양 해전 고찰』에서 밝혔는데, 지구상에서 정반대의 저조시가 되는 곳을 찾으면 상상을 초월한 아프리카이다. 이 아프리카를 조선의 역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일식 현상이 있다. 부루 단군도(재위 58년/B.C.2183.10.), 백제 위덕왕도(559년 윤5.), 조선의 세종대왕도(20년/1438.9.), 고종 때도(2년/1875.9.과 16년/1905.8.) 일식을 보았는데, 이 다섯 번은 시기를 달리하지만 거의 똑같은 일식대이며, 이 일식은 특히 아프리카 대륙만을 지나가는 것이므로, 아프리카 중심부에서부터 서남아시아와 아시아 남부에서는 분명하게 일식을 볼 수 있는 일식대이니, 옛날 백제의 강역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하며, 고조선 때에도 조선의 일부였음이 분명하다. 이 식분은 한반도와는 전혀 무관함에도 백제 사람들은 이렇게 일식을 보았다. 그러면 지중해의 동쪽 서아시아부터 그 동쪽으로는 모두 신라의 땅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입증으로서 『역사기행Ⅲ 천문으로 읽는 조선』에서 밝혔다.
그리고 유럽이 조선에서 어떤 지리적 위치를 갖는가 하는 것은 지중해가 조선의 연해/연안이라는 사실로서 『1909년 해상충돌예방법 적용의 지명 고찰 ― 지중해와 한국의 지리적 관계를 중심으로』와 역주해 『해동성국 발해고』에서는 특히 발해가 『龍飛御天歌』 권1에 나오는 “東海共稱渤海 我國在渤海之東”라는 사실에서 그곳이 발틱해라는 사실을 밝혔으며, 조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중국정사中國正史』로 자리매김 된 「동이전」을 망라한 『26史로 본 조선 통사』와 『또 다른 왜, 26史로 본 일본 통사』에서 밝혔다.
이에 따라 제후국을 다스린 조선의 중심은 어디인가?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것은 모두들 지나치고 있는 것으로서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라[國之語音 異乎中國]”이라는 한마디 말에서 『위대한 유산 훈민정음의 비밀』을 펴내어 조선이라는 강역의 틀 속에 중국이라는 정권세력이 있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중국은 조선의 지리적 중앙, 문화적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그 안에서 살던 사람들의 풍습으로 9묘廟·7묘·5묘를 행했던 것에는 바로 『조선은 천자국, 상제례 문화에서 본 한국』으로 조선은 중국 자체요, 천자국이요, 황제국이며, 『위대한 한국사의 비밀 환단고기』를 새롭게 번역하고, 『세계의 중심 환단고기의 역사적 가치 고찰』과 『사방 5만리의 나라: 귀양지 3000리의 조선 강역』을 펴냈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은 현재와는 지리적으로 전혀 딴판이다. 원문마저 가감삭제로 왜곡시켜 진실을 감춰버렸으니, 그 진실을 찾기란 무척 어렵고, 알아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역사만큼은 진실대로 바로잡아 놓아야 한다.
이제는 『역경』을 보는 눈도 이렇게 넓어져야 한다. 그리고 점치는 것으로는 조금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는 있을지라도, 인격을 수양하고 인간관계를 위한 휫손의 지침서로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처음에 본괘로서 건괘䷀를 얻었다고 하자, 그 괘의 내재된 상황을 보는 배합괘는 음양이 다 바뀐 곤괘䷁이다. 그 뜻은 당연히 정반대이므로, 상황과 대응해야 하는 세부적 내용도 반대일 수밖에 없다. ‘하라’는 말인가? ‘하지 말라’는 말인가? ‘길하다’ 해놓고 ‘흉하다’ 하니 어쩌란 말인가. 다시 말해서 『주역』으로 점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본괘의 내용으로서 어떤 상황에 대응하는 조치를 심신수양에 힘쓰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며, 그래도 불안하거나 더 궁금하다면 그 전환시기를 판단해 보는 것으로서 충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대학』에서 “修身齊家수신제가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라며 천하를 다스리려면 내 몸과 마음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했듯이, 그 핵심이 사랑[仁]과 겸양과 권선징악이다. 나머지는 이의 곁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겸양과 권선징악을 삶의 목표로 실행하며 살면 모든 것이 잘 풀어질 것이다.
『주역』을 『역경』으로 체제를 바꾸면서 초벌 번역이 끝날 즈음에 경남출판 대표 오하룡 씨와의 대화에서 나의 근황을 말하면서 ‘『주역』을 번역한다’고 했더니, 『작은 문학』지에 “주역 계사전 살펴보기”를 유산 윤재근 씨가 연재하고 있는데, 그 『계사전』을 다시 정리하여 출판사에 넘겼다는 말을 들었고, 『주역』 두벌 번역에 들어갈 즈음에는 동창동문인 수하 김복근의 조부의 『묵묵옹집』을 감수하다 나온 말에 유산 선생이 평생의 역작으로 『주역』을 새롭게 번역하여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는 말도 들었기에 그 내용도 훑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기다렸다가 마침내 서점에 잠깐 들러 문제의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분량만 보더라도 심혈을 기울인 ‘대역작’임에는 분명하지만, 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전에 펴냈던 『주역』과 『작은 문학』지에 연재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그 가운데서 특히 문제의 중부괘 63효의 해석이 기존의 여느 사람과도 전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에 이 『인간관계학의 고전 - 바꿔라 : 역경易經』이 내가 『주역』을 마주한 지 4반세기만에 전혀 새로운 체제로서 조금 늦게 나오기는 했지만, 반세기 이상을 『주역』에 빠진 유산 선생 나름의 세계관으로 다시금 번역하여 펴낸 것임을 생각할 때, 그 또한 아쉽고 서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으나, 적을 만나[得敵] 대하는 나의 대적관의 생각을 『역경』의 본질에 맞도록 새롭게 처음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므로, 늦었음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기자箕子를 비롯하여 조선을 다스린 임금들의 통치술에 기본 개념에 “사랑[仁]”이라는 사실이 『역경』을 통하여 새롭게 밝혀졌음이 자랑스럽다 하겠다. 독자들도 역경逆境에 부딪쳤을 때나, 미래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인격도야와 심신수양에 이 『역경易經』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이 세상의 꼭 필요한 주역主役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23.12.3.
자은 문학박사 최두환
첫댓글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미세기 현상에 하루에 일곱 번 밀물이 드는[一日七潮] 곳이 있고, 그곳이 조선 중국의 서북쪽 해안[西北潮候]이며, 유럽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서북쪽 해안이다.
<- 위는 임진왜란의 한 장소 같은데, 유튜버 빛의전사들님은 미국이 임진왜란의 주요무대이고 해적왕으로 알려진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이순신이랍니다. 어떤 이는 이순신=드레이크가 키 3여미터의 거인이랍니다. 당시의 일본의 주체는 스페인인데, 전유럽을 통일하고는 조선황실이 있는 미국을 침공했답니다. 한산도대첩의 정체가 바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해역에서 몰상당한 칼레해전이랍니다.
개인적으론, 아마도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지구 전역에서 발발한 전쟁이 임진왜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엔 영국이 조선의 일부라는데, 실제론 영국제도에서 출병해 프랑스 및 네델란드를 포함한 유럽전역을 침공하였지 싶습니다. 병자호란 때까지만 해도 네델란드가 조선의 일부였다고 하죠. 스페인과 영국 등의 서구인연합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중점적으로 벌인 전쟁이 임진왜란? 드레이크는 영국해적이 맞지 싶고 영국에서 대군을 집결해 유럽침공해서 빼앗고 이후 이디오피아의 바티칸이 유럽으로 이사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