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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고단한 인생일지라도 행복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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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고단한 인생일지라도 행복한
오늘은 일찍 일어났는데도 수녀님들 피정 동반으로 긴장한 뒤끝이라 그런지
바로 복음 묵상이 되지 않고 나눔을 하고 싶지 않았고 한참 빈둥댔습니다.
쉬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선지 무슨 나눌 거리가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를 보니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과연 복되다 할 수 있는 건지 생각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이 되라면
나는 그것을 과연 은총으로 생각할지 그것이 의문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부터 자기의 인생은 없는,
아주 고달픈 인생이 바오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이때 이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오로”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오로”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실제로 주님의 종으로 아주 고단한 일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바오로를 당신의 그릇 곧 도구라고 하시고
그의 인생이 고단한 인생이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자기 이름은 날리지 않고 주님의 이름이나 알리는 자.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이 전부인 인생.
이런 인생인데도 바오로를 행복하게 한 것은,
예수님을 소유함의 행복이 그렇게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후에 필리피서에서 이렇게까지 얘기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 쓰레기로 여깁니다.”
저도 이 지고한 가치 때문에 피곤한 줄 모르고
주님의 이름을 알리는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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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56)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다툼이 벌어진 유다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 것이다.
내 살은 참되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4-55)
어제 우리는 “먹다”(τρωγω)라는 동사는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뜻으로 말씀을 온 몸으로 음미하며 살아가라는 의미, 곧 ‘실행’을 암시함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56)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이 크신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55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다.”
오늘도 우리는 이 미사 중에,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 제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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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양가 있는 음식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정성이 담긴 음식을 사랑으로 먹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으니 우리는 감사히 잘 받아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과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가장 잘 회복하는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하나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보다 영양가 있는 영원한 생명이신 성체를 모시기를 갈망합니다. 더 자주 미사참례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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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함명춘 시인의 “종(鐘) 이야기”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마음에 울림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루에 걸린 종이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종소리였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그가 행했던 일을 따랐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종소리가 매일 들리지만 귀가 닫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교만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열등감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부활시기에 우리는 독서에서 ‘사도행전’을 듣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하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령이 불혀의 모습으로 사도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자가 된 사람도 수천 명이 넘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도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서로 나누었습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매 주일 공동체는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미사’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는 영이 열려서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성서에 예언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사랑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명예와 능력을 보이고 싶어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불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울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굳게 닫혀 있던 사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이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랑이 종소리’가 됩니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된 시몬과 바오로가 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큰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내는 사랑의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사랑의 종소리가 되어서 지친 이에게 위로를 주었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었고, 원망과 분노는 이해와 평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살과 피를 우리가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살과 피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 세상에 퍼지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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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뉴스를 보면 많은 사건 사고를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에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프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무게가 분명히 더 무겁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대한 것이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음 아픈 거, 정상이야. 마음이 아프다는 건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최선을 다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는 아픔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무게가 가벼워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기에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마음 아파했습니까? 부활을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슬퍼해야 할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내 마음의 아픔이 작았던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우리 마음의 아픔 정도를 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느냐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무관심을 통해 아픔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싫다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음을 지적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의 삶에서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파서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어떻게든 용서하며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마음의 아픔을 만들지 말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얼마나 큰 마음의 아픔을 간직하셨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식인종들의 말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 사람’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몸을 내던지신 사랑의 모범을 보고,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마음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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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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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은총, 회심의 여정, 일치의 여정
-회심과 성체성사-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시편117,1)
사울의 극적인 회심장면은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사울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기다려온 주님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사울이 회심에 이른 결정적 장면중 주님과 사울과의 대화입니다. 때가 되자 주님은 결정적 순간 번쩍이는 빛과 더불어 다마스쿠스 도상의 사울에 나타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박해받는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이십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당신 제자들과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니아스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주님의 생각은 이처럼 깊고 그 시야도 한없이 넓고 깊음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사울이 하나니아스를 만나 안수를 받고 자초지종 사연을 듣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이어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회심의 은총, 회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끊임없는 회심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심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회심의 시스템”과도 같은 일과표에 따라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 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회심과 함께 가는 개안의 여정이요 날로 눈이 열려 밝아지는 영적 시야입니다. 사울과 같은 극적인 회심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적인 회심도 있고 이런 회심이 대부분입니다. 회심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회심의 여정에 성체성사의 영향은 결정적입니다. 회심과 더불어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우리는 더욱 주님의 성체성사를 갈망하고 찾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이 더욱 끊임없는 회심의 여정을 살게 합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회심의 은총입니다.
눈이 열려야, 깨달음의 은총이 있을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깊이를 깨닫습니다. 무지한 유다인들에 대한 주님의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의 전인적인 일치가 날로 깊어가면서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충만한 삶, 영원한 삶이요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참 삶의 여정에 회심과 성체성사의 은총의 역할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과의 이런 상호내주(相互內住) 일치의 은총이 전인적 변화와 더불어 주님을 닮은 참나의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로서 자유롭고 행복한, 아름다운 삶을,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믿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끊임없는 회심과 더불어 날로 믿음을 북돋아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내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의 힘으로, 주님의 힘으로,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아름답고 영원한 복음 선포의 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우리 위한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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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독서에서 사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우리 모두는 사울 즉 바오로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였던 인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떨며 숨기 바빴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 선택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악인은 잘 먹고 잘사는데 선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번민하며 사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울을 선택하신 주님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울을 선택하신 것은 교회의 두 큰 기둥 중 하나를 뽑으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울은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사울이라는 그릇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담아내셨을까요? 그 답을 저는 복음에서 찾아봅니다. 즉 사울이라는 그릇에 담아낸 것은 당신의 살과 피였습니다.
사울이었던 바오로는 주님의 그릇으로써 세상 곳곳을 다닙니다. 그리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주님의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릇 역시도 주님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장엄한 죽음과 하늘나라를 선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주님의 그릇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닮은 사랑을 담아 두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담아주신 것을 필요한 곳에 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들꽃은 무엇을 담고 있나요?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그러나
그 각자는 온 우주의 조화 속에서
완전한 하나를 완성한
저 작은 들꽃을
그녀는 찬찬히 바라봅니다.
꽃 안에 담겨 있는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 말 없이
그저 눈물을 흘려냅니다.
아마도
저 작은 들꽃 하나가
저렇게 뜨겁고 많은 눈물을
간직하고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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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당신을
먹음으로써
당신께
먹힙니다
그리하여
갈림 없이
당신과 하나입니다
당신 안에
머무름으로써
당신을
품습니다
그리하여
갈림 없이
당신과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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