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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장로를 모은 모세
출 4: 27-31
이번 월드컵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모였습니다. 현지에서 표를 구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 있는 광경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전 국민이 얼마나 월드컵에 관심이 많은지 전 국민이 응원단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축구해설자입니다. 경기장뿐만 아니라 광화문, 대학로, 야구경기자 등도 응원장으로 변하여 이제는 축구거리(Soccer Street)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어제 스페인과의 경기에는 전국에서 500만이 거리 응원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서울도 시청 앞, 광화문, 대학로 등 중요한 응원장마다 붉은 물결로 완전히 뒤덮였습니다. 이번 월드컵은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가 되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온 국민이 이렇게 하나가 되게 하고, 단합되게 한 것은 3·1운동 이후로 처음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온 나라가 하나가 되게 한 월드컵이 감사하고 우리 나라는 월드컵 주체국으로 얻은 경제적, 정신적 효과는 수천 프로를 능가했습니다. 이렇게 모이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신비한 종교적 힘을 느낍니다. 마치 신비종교집단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나라에서뿐만 아닙니다. 저는 포르투갈과의 경기 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순방 중에 있었는데 여행 중에 차에서 내려서 식당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계속 여행했습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 때에는 밧모섬에서 아테네로 가는 선상에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 일행이 얼마나 열심히 응원했던지 이탈리아 사람들이 기가 죽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우리 민족은 어디에나 모여서 응원하였습니다. 혼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 국민의 기쁨입니다. 저의 딸 가족도 LA 한인타인까지 나가서 응원하였다고 합니다. 손자 아기의 얼굴에 태극기를 그리고 그 곳까지 나가서 응원을 하고 그 곳 시간으로 새벽 3시가 되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전화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이며 승리의 기쁨입니다. 모여서 응원해야 신이 나는 민족입니다. 모이는 그 자체가 힘입니다. 모세 혼자가 아니라 아론과 함께 백성들에게 갔습니다. 모세와 아론 두 사람이 간 것이 아니라 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들은 세력을 규합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단합하고 똘똘 뭉치는 세력의 규합이 필요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백성들 그리고 모든 공동체의 인원이 단합하고, 협력하는 것은 출애굽을 위해 중요한 준비였습니다. "모으다"란 어떤 목적으로 소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어원이 '카할', 혹은 '예다'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모으다란 말입니다. '에클레시아'란 말도 모으다란 말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리처드 코치는 그이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협력자를 선택하는 일이다. 협력자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달성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 살아 있던 모든 영적 지도자들에게는 많은 협조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요안나등 많은 여인들이 곁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역의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바울 곁에는 바나바, 마가, 누가 등 수많은 협력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바울을 도와준 많은 여인들의 이름도 거명됩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바울의 사역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없이 바울의 사역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장로들, 백성들이 없이 모세 혼자서는 백성을 이끌어내고 인도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첫째, 아론을 만난 모세 아론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됩니다.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는 것입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납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호렙산에서 아론은 모세를 만났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도 만났고, 형님도 만났습니다. 왜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나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산의 의미입니다. 아론과 모세는 다시 애굽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애굽에 있던 아론이 호렙산까지 와서 모세를 만나고 함께 애굽으로 다시 갑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만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인간에게는 낭비요, 쓸모 없는 일 같지만 하나님께는 소중한 의미의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협력자인 아론도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혼자 가지 싫었을 것입니다. 혼자 가지 싫은 모세를 아론이 와서 데리고 다시 애굽에 가게 합니다. 모세에게는 이 이상 더 든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든 어른이지만 형님은 동생에게 든든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람을 홀로 보내지 않습니다. 함께 가십니다. 동행하셔서 힘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8:29에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않으신 하나님은 우리도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토비트와 라구엘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변장한 천사를 보내어 어린 라구엘의 여행길을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천사는 홀로 여행길에 나선 아들을 걱정하는 라구엘의 아버지에게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라며 안심시켰습니다. 그래서 라구엘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라구엘을 후대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첫날 밤을 보내기 위해 잠시 티그리스 강가에서 뜻하지 않은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라구엘이 발을 씻으러 강가로 내려 갔을 때, 커다란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올라 그의 발을 물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 천사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그 물고기를 잡아! 절대 놓쳤서는 안돼" 마침내 천사의 말대로 그는 물고기를 잡아서 뭍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물고기의 배를 갈라서 쓸개와 염통과 간은 꺼내어 잘 보관하고 나머지 내장은 다 버려라. 그 쓸개와 염통과 간은 약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러자 정말로 소금에 절여 놓았던 그 물고기의 쓸개 등은 훗날 라구엘의 아내가 될 사람과 장인의 병을 고치는데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천사와 같이 든든한 보호자를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위험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는 위험한 일을 만나지만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위험도 있어야 예기치 못한 은혜도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만나 오랜만에 형제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의논하고, 함께 애굽으로 가면서 기나긴 얘기도 하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대책을 수립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장인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형을 만나 협력자도 생겼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수용합니다. 출애굽을 향한 순조로운 행진이었습니다. 이론이 와서 모세에게 입맞추었습니다. 아론과 모세의 오랜만의 해우였습니다. 성경에는 형을 속이고 멀리 떠났던 야곱이 다시 돌아오면서 형 에서를 만나 입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창 33:4). 요셉이 애굽에서 동생 베냐민에게 입맞추는 장면도 나옵니다(창 45:14-15). 참 아름다운 입맞춤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룟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만나 입맞추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입맞춤은 배반의 입맞춤입니다. 형제간의 40년만의 만남이란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80년만의 만남입니다. 첫 40년은 애굽에 같이 살긴 했지만 왕궁에서 산 모세와 종살이하던 아론이 자주 만났을 리가 없습니다. 80년만의 만남인데 서로 금방 알아보았을까요? 종살이하면서 애굽에서 지낸 아론과 미디안에서 양치기로 살던 모세가 만났는데 두 사람 다 이제 많이 늙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보았을 것이고 가족의 해우는 반가웠을 것입니다.
둘째, 말씀과 이적을 들은 아론
15절에는 "너는 그에게 말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려고 아론을 만나자 말씀을 전달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신임과 협력을 보십시오. 40년만에 만나 회포도 풀지 못하고 명령을 전달하고 명령을 받습니다. 그들이 서로 만나 가정의 얘기며, 그 동안의 살아온 얘기며, 동족들의 얘기가 끝도 없겠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전하고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주권은 모세가 가지고, 아론은 모세의 대변자로서 협력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모세가 무엇을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자신이 본 하나님,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신이 본 기적을 자신이 보고들은 그대로 전달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말고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명령을 받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정확하게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이런 놀라운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하여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절)고 하였습니다. 이 때 이미 사도들은 옥에서 나갔습니다. 관속들이 탈옥한 사도들을 찾았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사도들을 찾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치더이다"(24절). 사도들은 주의 사자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사자가 가라고 하니 갔습니다. 사자가 서서라고 하니 섰습니다. 사자가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하니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은 주의 사자가 명령한 것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간증은 신앙의 향상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 하면 간증자는 자신의 얘기를 하기 쉽습니다. 과장된 표현을 하기 쉽습니다. 요즘 말로 '오버'하기 쉬운 것이 간증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확하게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손해일 수가 있습니다. 켄 블랜차드라는 사람이 그의 책에서 "리더는 책임지는 역할에서 귀기울이는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듣는 것이 점점 중요한 시대입니다. 듣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지만 리더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아론도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경험했던 모든 것을 우선 듣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듣는 것은 모세의 협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입니다. 잘 들어야 대변인으로서 잘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첫 규칙은 듣는 것입니다. 말하고 있을 때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훌륭한 화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청자가 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기본입니다. 아론은 말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 잘 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말 잘 듣는 것입니다. 말은 잘 들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론도 모세의 대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리더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셋째,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믿은 백성
호렙산에서 만나 모세와 아론은 다시 애굽의 고센으로 갔을 것입니다. 창세기 46:34에는 애굽 사람들은 목축을 가증히 여기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이주한 가족들을 고센 지방에 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호렙산에서 고센 까지는 당시의 걸음으로 가기엔 여러 주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먼 거리를 가면서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론은 고센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을 모으고, 말하고, 이적을 베풉니다. 아론은 이미 모세의 대변인 역할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론도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가감 없이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잘 전했을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사람을 통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어졌습니다. 로버트 모건은 '홍해의 법칙'에서 "믿음이란 타당한 가정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거대한 민족을 이루고 있는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상황에 따른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믿어졌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지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로 믿습니다. 은혜로 듣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 경배합니다. 머리를 숙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믿기 때문입니다. 경배하다는 말은 '솨하'입니다. 이 말은 '몸을 구부리다,' '납작 엎드리다,' '존경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고 존경하는 행위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경배는 하나님이 좋으신 것이 아니라 내게 좋은 일입니다.
결론
필립 얀시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격노하게 만든 사람들은 오늘날로 보면 출판계에서 바이블 벨트(Bible Belt; 미국 남부 지역의 신앙이 두터운 지역. 근본주의를 믿음)의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 가운데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사랑을 받는 백성이지만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고, 격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먼저 믿고 선택받은 자답게 믿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말씀이 귀에 들리는 대로 순전하게 믿는 복된 삶이 됩시다. 우리 귀에 들리는 대로 정확하게 명령을 전달하는 한 주간의 삶이 됩시다.
순종과 믿음으로 사는 또 한 주간, 우리에게 주신 선물 같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론의 영접을 받는 모세
출 4: 27-31
여러 차례의 핑계를 거듭하던 모세는 결국 하나님의 설득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애굽으로 가던 길에 하룻밤을 길에서 노숙하는 중,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자, 모세의 아내가 신속히 차돌을 취하여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모세는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리고 그 날 모세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가로 돌려보내고 새로운 각오로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생각, 육체적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와 피로 연합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으며, 누구든지 자아가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를 죽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사람으로 부활해야만,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의 육체와 함께 그의 정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고집, 자존심, 자기체면, 자기의 유익추구, 자기 보호본능을 죽이지 못하면 교회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이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기가 제일이라며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다른 길을 가고, 누구에게 상처받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는 아직도 할례를 받지 못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할례 사건으로 자기의 육신을 죽이는 일을 다시 생각하게 하신 후에 모세를 그의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사람은 있어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각기 그 사람의 자리와 그 사람의 일터로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에게는 니느웨로 가라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으로 가라 하셨으며, 모세에게는 고난 받는 백성들이 있는 애굽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곳이 그들이 있어야할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에 있습니까? 지금 하는 일에서 보람을 얻고 있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있습니까?
모세가 애굽으로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도착하기 훨씬 전에 애굽에서 모든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론에게 모세를 마중하도록 하신 일이 그 구체적 사건입니다. 그들이 만난 곳은 하나님의 산(3:1) 이라고 하는 호렙산 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까지는 걸어서 1주일쯤 걸립니다. 그런데 호렙산은 그 길 중간의 시나이 반도에 있는 산입니다. 시나이반도는 가나안에서는 곧바로 올수 있지만, 애굽에서는 삥 돌아서 와야 하는 관계로 가나안에서보다 더 멉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출발하기 전에 아론이 먼저 출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은 아론에게 먼저 모세를 맞으러 나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는, 같은 날 출발하여 중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형제가 중간지점에서 딱 만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모세가 핑계를 앞세워 순종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가 결국은 순종할 것을 미리 아시고, 애굽에 살고 있던 아론에게 명을 내려 동생을 만나려고 먼저 출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으로 가라 하셨고, 아론에게는 네 동생 모세가 오니 너는 어서 마중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하십니까?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서 그 아버지를 믿는 한, 걱정할 것이 없고, 그분이 명하셔서 그의 종으로 일을 하는 한,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요, 섭리자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만사를 섭리하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 하십니까?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서,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문제가 터질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대통령 짓 못해먹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그런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보다 조금은 낫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에게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천지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움직이시고, 사람과 사건과 역사를 전체로 파악하시며, 통제하십니다.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고, 이쪽과 저쪽을 주관하시며, 피해자와 가해자, 가는 자와 마중 오는 자, 원고와 피고, 청하는 자와 따라가는 자 모든 편의 마음과 행동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볼까요?
사도행전 10장에는 예루살렘교회 중심인물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사건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한꺼번에 허물어 버린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날, 하나님은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는 욥바의 베드로를 청하라고 명하시어 베드로를 초청하고 친지를 다 모으고 준비하게 하시고, 욥바의 베드로에게는 세 번 네 번씩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너희가 상종하지 않던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강권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중간에 역사하시는데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나러 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아무리 고지식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방인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고 그날의 사건이 성령에 의한 불가항력적 사건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무식한 이방인 고넬료라 할지라도 성령이 임하시고 감동시키시는데 성령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넬료의 집에 모였던 모든 이방인이 오순절의 성령 충만과 같은 역사를 다 체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주관하십니다. 장사하는 사람과 손님의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회사의 사장과 직원의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여러분이 장사를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 간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십시오. 고객과 주인, 직원과 사장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상대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진실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 장사를 한다면 고객에게 여러분의 가게로 갈 마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사장에게 여러분을 알아주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 만방에 나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면,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실 리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시 교회를 그렇게 핍박하고 사도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사울이라는 사람을 거꾸러뜨려서 교회로 들여보내셨는데, 그 사람은 당시에 가장 유능한 율법학자요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말과 글에서 당할 자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울을 당신의 사람으로 삼아버리시고 교회에 들여보내어 주님이 명하신 그 일을 앞장서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알고 보니 사도들에게 명령 하시기 훨씬 전에, 만세전에 그를 택정하셨고, 때가 되어 그를 불러 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무리하게 보이는 일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틀림없이 대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마주 온다는 정보를 듣고는, 얍복 강가에서 밤을 새워 하나님께 매달려서 간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하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만을 위로하고 만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고 아버지의 축복도 빼앗겨서 내가 지금껏 이렇게 고생만 했다고 생각하여 야곱에게 원한을 품고 달려오던 형 에서의 마음도 하나님이 그 밤에 녹여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그 두 형제가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광경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형과 동생의 혈투가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 에서가 눈에 눈물을 가득히 담고 동생 야곱을 향해 달려와서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서로 화해하고 동생 야곱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쪽에서도 일하시고 저쪽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일이 생각지 않은 방향에서 풀어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내가 할일은 다 했는데 어떻게 될런지 몰라서 불안하십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일했다면, 저 쪽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월요일에 중국 북경에서 북핵문제로 모였던 6자회담이 타결되었고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사찰을 받겠으며,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으며, 적당한 시기에 북한에 경수로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주겠고, 남한은 북한에 200만 Kw의 전기를 공급해준다는 내용이 핵심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타결이 된 것 같았고, 한국은 우리 외교의 승리라고 자랑했습니다. 저는 뭔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 단 하루도 못가서 북한이 성명을 발표했는데,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경수로를 지어주기 전까지는 핵을 포기 못하며, 사찰도 받지 않겠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은 버럭 화를 냈고, 한국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다고 여유를 부렸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 세계가 들어붙어도 북한 핵 하나를 풀지 못합니다. 회담장에서는 이 말하고 돌아가서는 저 말하는 사람들을 제압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아주 쉽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상황을 조정하시고 환경을 만드시며 마음을 바꾸어 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일은 어떤 환경에서도 꼭 성공합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네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신 하나님은 가만히 지켜만 보실 분이실까요? 아니지요? 그럴 분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하려고 찾아올 모리아 그곳의 한 산,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아들을 바칠 그 산위에 먼저 가셔서, 그 산에 뛰노는 산양 한 마리를 잡아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순종하러 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도착해서 단을 쌓고 자기 아들을 결박해서 단위에 올려놓고 막 칼을 들어 아들을 치려는 그 순간, 하나님이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이제 알겠다. 네 아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라.” 그래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다가 뿔이 수풀에 얽혀 있는 산양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치밀성에 놀라면서 “여호와이레” 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명령을 순종하는 자를 위하여 미리 다 준비해 두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그 양으로 제사를 드리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야기하며 내려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독자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순종을 한다면 그 다음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빌립에게 이스라엘에서 가사로 가는 광야 길로 가서 전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평소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충만한 빌립집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 분명 순종하면 뭔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광야 길로 갔는데, 그 길에는 마침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이 마치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는 있었지만 내용을 알 수가 없는지라, 궁금해 하면서 해석해줄 사람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읽으시는 그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아니요,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이 알면 이리로 올라와서 좀 가르쳐주세요.” 그래서 빌립은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에게 아주 쉽게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책임하게 우리에게만 전도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철저하게 순종할 때, 전도를 받을 사람도 예비 시켜 놓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고, 그분의 명령은 대책 있는 명령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고, 그분이 하시는일에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하라 하셨다면, 그것은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양편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은 그 일을 직접 주관하고 계시며, 내 손에 닿지 않는 쪽에서도 그 일을 도와줄 사람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모세보다 아론을 더 먼저 출발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은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 하나만을 요구하셨지만, 당신은 천수백년 전부터 독생자를 보낼 것을 준비하셨고, 그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그를 부활시켜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셨으며, 오늘 우리의 삶과 사역을 성령으로 날마다 돕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고맙게 여기고 달게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의 백배도 더 많은 일을 이루십니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헌신합시다.
모세와 아론이 드디어 만났습니다. 헤어진 지 40년 만의 상봉입니다.
그것도 생사를 전혀 모른 채, 소식이 완전히 두절된 채 완전히 격리되어 살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신기하게 길에서 만난 것입니다. 얼마나 반가운 혈육의 상봉 이었겠습니까?
더구나 이들의 만남은 형제의 만남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일을 위하여 앞으로 생사를 같이 해야 할 동지의 만남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입 맞추고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일과 위탁하신 이적을 아론에게 다 말하고 보여줍니다. 여기서부터 이들은 형제를 뛰어넘어 이스라엘의 해방과 인도라는 한 목표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할 공동운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교회안에서의 만난 성도들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만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전하고 함께 천국의 영광에 참여할 동지로 만났습니다. 잘났다고 튀지 말고, 못났다고 자학하지 말고, 삐지지 말고, 오해하지 말고, 편 가르지 맙시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생각합시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의 자식이고,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함께 복음전할 사명을 가진 동지요 고난과 영광에 함께 참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고후 1:7에,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 하였고, 벧전 4:13에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서로가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랑으로 품읍시다. 사랑으로 먼저 섬깁시다.
모세와 아론이 함께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 장로들을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려 하신다는 말씀과,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정을 알려주었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이적을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고 모세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지 않고 감찰하셨다면서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습니다.
미디안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뭐라고 핑계했었습니까? 자기가 애굽에 가도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우기며 순종하지 못하고 망설였는데, 와 보니 하나님의 말씀하시던 대로 그들이 믿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아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먼저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고, 당신의 준비가 거의 다 된 시점에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의 명령만 따르면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줄 알고 내 생각, 내 판단, 내 혈기를 동원하는 순간 여지없이 실패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순종하면 일이 이뤄집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겁 없이 순종하는 성도 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자주, 그리고 아주 많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번 기회에 기도를 명하셨고, 기도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눅 11:9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14:1에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셨고,
골 4:3에서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하셨으며,
약 1:5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의 공통점은 명령이면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 하시고 저쪽에서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이 철저하게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당신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기도하라 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함께 순종합시다.
하나님께서 저쪽에서 틀림없이 만들고 계시는 응답을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그래서 함께 주의 일을 이루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