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7-34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본문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매도해 버린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가게 되는데 야곱과 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모세는 야곱을 “조용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루터도 히브리어 (이쉬 탐)을 경건한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막의 사람으로 평온하게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반면에 에서는 “들 사람”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되고 있는 장자의 명분은 가정의 계대로 가장의 권리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분복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신령한 복을 요점으로 합니다(12:3, 22:8). 이런 점에서 에서는 육신의 것을 중대시하고 신령한 것을 경히 여기고 홀대하는 망령된 행실로 지적되고 있습니다(히12:16-17).
1. 본문 27절은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 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 입니다.
1) 이제 모세는 이삭의 두 아들의 생활 모습을 간략히 서술합니다.
사실 모세가 야곱이 보기 드문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찬양과 추억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고 칭찬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야곱은 ‘단순한(simple)’ 소년이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탐)이란 단어가 대체로 ‘정직한’ 또는 ‘성실한’이란 뜻을 지니지만 여기서는 대조하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모세는 에서가 건장하고 사냥을 좋아한다고 말한 연후에 그와는 반대로 야곱의 부드러운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집안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나태한 자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집에서만 있는 자들을 헬라어로 οίκοσιτους(오이코시투-스)라고 하여 주로 ‘근면하지 않는 자’ 를 뜻하듯이 말합니다.
2) 이 비교는 모세가 에서는 그의 정력 때문에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집안에서 여가를 즐겼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는 에서의 성질은 장차 용감한 자가 될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성질은 별로 칭찬할 것이 없는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서 장자의 영예가 야곱에게 이전될 것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장막에 거하면서 잿더미 속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 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기 선택을 얼마간 숨겨 두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어떤 행위 때문에 그렇게 선택된 것이란 주장을 조금이라도 하게 될까 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2. 본문 28절은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자기 선택이 아주 확고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조력이 필요 없으며 어떠한 장애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좀 더 분명히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아버지 사랑을 그 동생보다 더 많이 받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성애에 관해서 만큼은 야곱은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러 가지 주위 사정을 통해서 야곱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뜻에 좌우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택은 그들이 소명을 받은 그 수단에나 인간의 준비에 달려있다는 생각은 조금이라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바가 아닌 아버지가 그 첫째 아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알면서도 그를 그토록 편애했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 했다면 자기 개인적 애정을 억누르는 것이 경건과 겸손에 어울리는 처사였을 것입니다. 장자는 자연히 부모 사랑을 제일 많이 차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동생보다 ‘에서’를 더 사랑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 말씀 속에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경건한 족장에게 더 수치스럽고 무가치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즉 에서가 잡아온 사냥고기를 즐김으로써 아버지가 에서를 더 사랑할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만큼 산해진미에 탐닉해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 은총을 경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자에게 자기 애정을 마음대로 쏟았단 말입니까? 이삭은 자기 아들에게 예정된 유산보다도 음식을 더 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무상의 계약을 힘닿는 대로 전복시키려 했습니다. 이것은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맏이에 대한 맹목적이고 아주 무분별한 사랑 때문에 동생을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와 정반대의 잘못을 범했다고 해야 할지 그것은 불확실합니다. 흔히 부모의 애정은 그렇게 갈리기도 합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이 한 아이를 더 귀여워하는 것을 알면 자기는 다른자식을 더 사랑할 마음이 생깁니다. 리브가는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는 뜻에서였다면 그것은 올바른 일입니다.그러나 그녀의 사랑 역시 잘못 조절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인간 본성의 타락이 잘 드러납니다. 본래 결혼의 유대보다 더 신성한 상호일치의 유대는 없습니다. 자녀가 그 연합을 더욱 단단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녀들이 그 연결을 깨뜨리는 구실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2) 그러나 여기서는 리브가가 하나님의 복을 간절히 염원한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브가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여 맏이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게끔 되었다고 생각할 소지가 생깁니다. 반면에 아버지의 어리석은 애정은 단지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을 더욱 찬란히 빛내 줄 뿐 입니다.
3. 본문 29절은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입니다.
이 설명은 아이들의 장난을 말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은 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형은 사냥터에서 기진맥진한 채로 돌아와 자기의 장자권을 주고 음식을 구걸했습니다. 도대체 이 무슨 흥정입니까? 야곱은 응당 자기 형의 굶주림을 채워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 청을 받고 야곱은 거절했습니다. 그의 비정을 누군들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에서로 하여금 그의 장자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합니다. 여기서는 야곱이 불의하고 천박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순간의 사건 속에서 에서의 성품이 시험되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야곱의 경건한 마음의 실예가 드러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바를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곱을 선택하신 일이 하나님께서 그의 품성의 어떤 가치 있는 점을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에서가 장래에 경건치 못하게 행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거부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택이란 무상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사도께서는 사람의 됨됨이에서 어떤 구별의 근거를 찾으려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께서는 사실상 인간은 처음부터 부패했고 멸망에 예정되어 있는 고로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어느 누구도 그 파멸에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의 첫째 되는 공리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서게 되는 것은 그 자신들의 공적 때문이 아니고 모두가 은혜에는 무자격한 고로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선택한 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좀 더 나아가서 이렇게 추리합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 자기 권한으로 생사를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자기를 해명할 책임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 자신의 뜻이 곧 ‘원인들 중의 원인’ 입니다. 이렇게 추리한다 해서 바울이 하나님을 마치 궤변자들이 그분의 절대권을 조롱하여 말하듯이 독재자라고 본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광명 속에 거하시는 반면 그분의 판단은 가장 깊은 심연보다 더 깊으신 판단이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홀로 정하신 그분의 목적에 삼가 묵묵히 복종합니다. 사람이 이 같은 선택의 문제를 지나치게 파고들어서 이 거대한 혼돈이 그들의 감각 일체를 마비시켜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점에서 하나님이 두 형제 중 하나를 선택하시고 하나를 버리시나 그것은 그들의 공적을 예견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는 달라야 한다고 선포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도 형과 다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바울을 통해서 제시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무도 자기 노력이나 덕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는 남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란 천부적으로 평등하지만 모세가 에서란 인물을 통해서 반영해 주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를 받지 아니하고 저들의 성질대로 내버려진 자들이란 점을 알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야곱이란 인물을 통해서 모세가 반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선택의 은총이 선택 과정에서 무용한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실상 그분의 소명을 통해서 그분의 선택을 입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에서는 장자권을 팔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이 일을 주시해서 보면 무엇이 발견될 수 있는가? 또 성령님께서 그에게는 계시지 않으므로 땅의 것만은 즐기게 되었을까? 또 어째서 그의 동생 야곱은 음식 먹기를 단념하고 인내로써 허기를 참았을까?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자기가 출세하게 될 것을 기다리면서 하늘의 생명을 사모했을까? 라는 점 등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령의 은총을 주시지 아니한 자들은 세상적이요 육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세상적이요 육욕적인 사람은 이 땅위에서 금방 사라져 가는 생명을 즐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는 생각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의 은총으로 다스리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귀한 소명을 저버릴 만큼 육체의 덫에 깊이 빠져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모든 자들은 계속 육체의 죄악에 빠져있게 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만들어져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품이 되어서 선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는 하나님이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대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무감각을 교정하거나 버림받은 자들 속에 있는 못된 욕망을 바로잡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저들의 양심이 오히려 저들 자신을 정죄하면서 하나님께는 무죄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은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자고 해 지기보다는 어느 정도라도 하나님이 정하시고 행하신 일 앞에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4. 본문 30-32절은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입니다. 에서가 여기서 말한 것은 결코 자기가 진수성찬을 원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무슨 음식이든 배를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의 맛은 말하지 아니하고 빛깔만 말한 것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어떤 바보스런 일을 계기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의 부모가 신중히 검토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음식을 간청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비난받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을 지경이니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라고 말했을 때, 에서는 땅의 것과 육적인 것을 탐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완전히 무심중에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에서가 자기는 죽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게 되었다’고 한 에서의 말은 단지 자기 생명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어떤 자들은 ‘그가 매일같이 맹수 사냥을 하므로 참으로 목숨이 항상 위태로왔기 때문이다’ 는 사실을 뜻하는 정도로만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죽지 않으려고 에서는 자기 장자권을 음식과 교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은 큰 죄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장자권이 현재 생명에 보탬이 되지 않는 한 그것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결국 신령한 것을 땅의 썩어져 가는 것과 물물교환을 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를 ‘불경한 사람’ 곧 망령된 자(히12:16) 라고 했습니다. 이런 별명은 현세에 안주하여 더 고귀한 것을 소망하지 아니하는 자를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자기 장자권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수 천번 죽음을 감수했던들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될 뻔했습니다. 장자권은 한 세대라는 짧은 기간에만 한정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자손에게까지도 영원한 하늘 생명을 물려줄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각자를 살펴봅시다. 우리 성향이 온전히 지상적인 것이므로 우리 본성을 지도자로 삼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하늘 상속권을 쉽사리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의 형태가 이런 방식으로 드러나는 일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사도의 권고를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말자’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5. 본문 33절은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입니다.
야곱은 자기 형에게 잔인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에게 주셨던 권리를 확증 받기만을 바랐습니다. 그것도 아주 경건한 의도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선택을 보다 분명히 하려했습니다. 이에 반해 에서의 얼빠진 모습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 이름으로 또 그분의 존전에서 자기 장자권을 파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미칠 것같은 굶주림의 압력 때문에 함부로 음식에 달려들었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맹세를 하는 현 시점에서는 약간의 종교심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짐승같은 물욕을 시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탐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 배은망덕에 살아 계신 증인이 되시도록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맹세”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에서의 망령이요 망언입니다.
6. 본문 34절은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말이 쓸데없는 군더더기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세는 하늘 생명을 열망하는 가운데 음식에 대한 욕망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경건한 야곱의 신앙심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가 목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상 자기가 먹으려고 음식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에서보다는 더 오래 전부터 더 식욕이 당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허기를 견디기 위해서는 자신과 투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좋은 생명에 대한 신령한 욕망이 그의 맘속에 용솟음치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그토록 자기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그의 형 에서의 놀라운 무관심이 몇 마디 말 속에 역설되어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그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네 가지로 동작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세히 언급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의 그 다음 행동, 다시 말하면 그는 무한히 값진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하려는 것이리라고 판단됩니다. 그런 점에서 스파르타 포로의 불평은 역사가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포위 공격을 오랫동안 버티어 오던 스파르타 군대들이 물이 없어서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강물을 들여 마시고 난 다음에도 “오 동지들여! 우리는 얼마나 하찮은 쾌락 때문에 무한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던고! ” 라고 한 병사가 탄식하였습니다. 이 불쌍한 사나이는 갈증을 해결한 다음에는 의식을 되찾고 나서 정작 잃어버린 자기 자유를 애통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에서는 식욕을 채운 다음에도 반 시간이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을 살기 위해서 수백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신령한 복을 희생하고도 그 신령한 복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망령된 자들의 상습입니다. 하늘 생명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을 크게 꾸짖으시기까지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욕된 소망을 즐기고 있는 한 하나님의 진노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들의 멸망을 향해 바보처럼 나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교훈을 배웁시다. 우리 모두는 어느 때든지 세상 유혹물들에 속아서 곁길로 나아갔을 때에는 즉시 그 구렁텅이에서 뛰쳐나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