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로 본 양육의 비밀 (행 22:12-16)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 시간에 “아나니아로 본 양육의 비밀”이라는 제목입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사울일 때 그 사울을 맡긴 다메섹에 살던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과연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맡기셨을까? 여기에 귀한 복음이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사울은 극악한 박해자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권력에 있어서도 대단한 사람이고, 장차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크게 쓰실 사도가 된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울을 맡은 아나니아는 바울과 같은 일군을 길러낼 위대한 양육자의 표상입니다. 한국교회의 희망은 훌륭한 일군들을 많이 배출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 한 사람만 전도하면 2000만명, 다시 한 사람씩만 전도하면 이루어진다고 쉽게 말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주님의 방법대로 일군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 100명만 있으면 민족복음화와 세계에 제일가는 튼실한 기독교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바울 같은 일군을 길러내려면 어떻게 헤야 할까요?
1. 이해와 공감을 가져야 합니다.
12절에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여기 '율법에 따라'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정통 유대교인이었음을 말합니다. 성경이 그걸 언급한 이유는 바울과 공통점이 있어 바울을 맡기에 적임자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빌3:5-6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이해와 공감이 필요합니다. 고난 당한 사람이 고난 당한 사람을 전도하기 쉽듯이 바울도 그랬습니다. 고전9:19-22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통하는 마음입니다.
2. 경건해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그랬는데, 경건한 사람이란 날마다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행10:1-2에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했던 고넬료도, 유대인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레위지파와 같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정통유대교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는 24장로의 보좌가 있는데, 구약교회의 대표인 12지파, 12사도를 상징하는 보좌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뜻은 이들이 신구약의 구원 받은 모두를 암시하지만, 지나쳐선 안 될 부분은 하나님 앞에 경건의 12지파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12사도도 있다는 점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진주문에도 12지파의 이름이 있고, 그 문의 기초석에도 12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은혜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의 특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그 경건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그토록 경건했던 아나니아가 예수까지 믿었으니 얼마나 성령에 충만했을까요? 경건했던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가서 예수를 전할 위로부터 성령이 임하심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 밑에서 위대한 일군이 나옵니다. 복음의 교리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경건도 있어야 합니다. 경건운동이 성령운동입니다. 딤후2:1-2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한 것처럼 은혜 속에 강할 때 바울 같은 일군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3. 덕이 있어야 합니다.
12절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그는 사람에게도 잘했습니다. 인간적인 미덕도 풍부했습니다. 사랑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날로 부흥이 된 것도 사람에게도 칭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행11:24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한 것처럼 안디옥교회가 부흥된 것도 바나바의 인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집요하게 기독교인을 핍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도 기독교가 잘해도 당연한 일이라면서 누구 하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는 잘 모르지만 기독교인들은 존경하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성공입니다. 그만큼 정직하고 사랑하고 베풀고 예절 바르고 모범적이고 봉사하고 희생적이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아야 합니다. 눅7:12에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비천한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고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따르다니 놀라운 사건 아닙니까? 예수님이 청년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청년이라고 불러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인품이 그릇입니다. 거기에 말씀과 성령 그리고 담대함을 더하면 큰 그릇이 됩니다.
4. 명확하고 구체적인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행9:10-11에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6하원칙에 맞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틀림없는 결과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직가에 가도 사울을 찾지 못합니다.
이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더 공부하고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확실히 가르칠 뿐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자들의 삶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한 말씀처럼, 달려가는데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사역자가 되려면 소경 되지 않기 위하여 정말 준비 많이 하고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5. 그때 비로소 바울 같은 사람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행9:17-19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말씀 전하고 기도할 때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하고 정확한 말씀으로 양육하면 시각이 달라집니다. 시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행9:11에 아나니아를 "제자"라 했는데, 그 때 또 다른 예수 닮은 제자가 만들어집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울이 지나간 곳마다 위대한 열매들이 맺혀진 것은 그런 양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28:19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주님의 말씀, 얼마나 가슴 부푼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아나니아와 같은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바울 같은 위대한 제자들로 기를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 바울이 되든지, 아나니아가 되든지, 참으로 가슴 부푼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교육, 여기에 우리의 위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오늘 말씀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더 크고 귀한 비전을 이루어 나가는 가장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