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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제가 말씀 안드렸어도 노아의 방주 이야기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 적어도 두세 번은 읽어보셨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요.
읽어보셨겠죠? 읽어보셨을 거라고 저는 믿겠습니다.
지난번 노아의 방주 이야기 첫 번째의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났을 겁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모습이 어떤 때는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고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다.’
야훼 하느님이 노아에게 내린 명령은 그냥 읽기만 하면은 그럴 수 있겠다, 그런 명령을 내려서 그런 배를 지었겠다.
전혀 저항 없이 읽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배는 크기가 3층 정도 되는 큰 배였습니다.
그 당시에 그렇게 큰 구조물은 당연히 없었겠죠. 그리고 배를 짓는 기술이나 설계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또 그 많은 잣나무와 역청, 하물며 동물 한 쌍씩을 어떤 방법으로 포획했을까,
‘이리 오너라’ 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을까, 아니면 그물을 썼나,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배를 바닷가가 아니라 육지에서 만드니 당연히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조롱했겠죠.
하던 가업을 팽개치고 배 만드는 일에 분주했던 노아와 그 식구들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봤을 때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누구도 믿지 않는 일을 자기만이 믿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 세례 받기 전에 믿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셨습니까?
호의적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들 말 하나하나가 다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했습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적개심은 가지신 적이 없었습니까?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믿고 싶었는데 인도하는 사람이 없어 나중에 스스로 찾아오신 분도 있지만,
또 어떤 분들은 주변에서 권고해도 아주 매몰차게 못 들은 것을 들은 것처럼 귀를 닦아냈던 분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겁니다.
교우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신부님 저는 세례 받기 전에는 박해자였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성당 가자고 권할 때마다 소리 질렀고요.
아내 입에서 기도라는 말, 죄의식이라는 말, 또 용서, 구원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비웃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이라고 하는 말에는 아예 강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위선자고 고상한 척해서 아주 꼴 보기 싫다고 비웃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 형제가 세례받기 전에 그토록 민감하게 크리스천을 싫어했고 영적인 말들에 대해 저항감을 가졌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 아내는 하느님을 믿었고 그 남편은 믿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문 안과 밖은 그렇게 차이가 큽니다.
그의 아내는 노아처럼 곧 홍수가 와서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온 가족이 하느님을 믿고 일요일에 성당을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에는
절대 동의할 수도 없었고 강한 반발을 느끼게 됐던 거였죠.
그런데 그분이 아주 큰 병이 들었습다.
그리고 병들었을 때 많은 교우가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나중에 그가 알게 됩니다.
기도의 힘으로 정말 불치의 병이 치유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성당을 열심히 다니고 있죠.
그러면서 그전에 자기 아내를 박해하고 하느님에게 손가락질했던 것을 후회하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기 체험을 통하여 전교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발 더 나가서 세례받기 전에는 박해자였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았다고 합시다.
열심히 다니고 있다고 그럽시다.
그러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의 질은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깊이는 어느 정도나 두꺼울까요?
노아같이 진실하게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온전히 믿고 있는 것일까요?
각자가 각자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당에 열심히 나가고 활동도 많이 하는 부부의 대화입니다.
단둘이 있을 때 아내가 남편에게 얘기합니다.
‘여보, 우리 적금 안 합니까?’
남편은 ‘뭐 하러 그래,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신다고 성경에 쓰여 있지 않소.
우리 저축하지 않아 굶어본 적 한 번도 없지 않소.’
이렇게 얘기하니 아내는 ‘글쎄 그거야 그렇고 또 성경에도 그렇게는 분명히 쓰여 있지만’ 하면서 머리를 긁었습니다.
남편은 단호하게 ‘성경에 적혀있으면 믿어야지 뭔 말이 많소?’
그러니까 부인은 ‘분명히 쓰여 있지만 그래도 저축도 어느 정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면서 속으로 투덜거립니다.
남편은 통장을 들여다보는 일도 없는데 나라도 몰래 저축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남편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믿는 신앙이었고요.
또 부인도 믿음은 있지만 자기의 현실을 자꾸 합리화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믿지 못하면 말씀을 과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게 편리하도록 해석하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그런 불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아와 같이 긴 세월 사람들에게 조소당하면서도 모욕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께서 하명하신 대로
배를 짓고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는 없거나 부족한 겁니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에게만 방주를 만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신약 시대인 지금은 어떠한가?
하느님은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방주에 탈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 방주에는 바른 사람, 바르지 못한 사람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방주는 주 그리스도이시죠.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람은 확실히 구조를 받습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신앙을 갖는 한 누구든지 모두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지만,
아무리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셔도 혹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약속하셔도,
이것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구원의 약속은 바보스러운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방주에 내가 너를 초대한다.’ 하더라도 ‘내버려 둬요. 나는 지옥에 갈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거룩한 구원의 초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노아도 많은 사람에게 배에 들어가자고 권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비웃으며 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그 옛날 ‘노아는 참 이기적이다. 짐승들 대신 사람들로 그 배로 채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지우게 됩니다.
분명히 노아는 홍수가 날 거라고, 그때 가서는 발 디딜 땅이 없을 것이니 내가 만든 방주에 들어가자고 권고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사람도 따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냉정하거나 비정하다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권해도 듣지 않고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고 한탄하고 슬퍼하는 노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신앙은 어느 세대나 각자 자유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절대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노아 시대나 오늘날이나 같은 일이죠.
노아는 분명히 권면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듣질 않았습니다.
본인의 자유 의지로 거부했던 겁니다.
노아 방주의 문이 닫히고 40주야 비가 내리면서 온 세상이 물에 잠깁니다.
그리고 150일에 이르는 대홍수로 당시의 사람들은 전부 다 전멸됩니다.
노아의 가족 8명과 종류에 따라서 배에 들어간 한 상씩의 동물만이 생존자들입니다.
홍수가 지나가고 땅이 마르고 겨우 배에서 나온 노아 가족들의 눈에 비친 것은 싹 밀려 내려간 황량한 세계였을 겁니다.
사람이라고는 자기들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무인의 세계였을 겁니다.
‘자기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노아의 심정은 도대체 어땠을까?’
깊은 묵상으로 떠오릅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밖의 세계가 어떻게 됐는지를 잘 알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물이 빠지면 어디엔가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 생명체들이 있겠지’하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는데,
정말 이 세상천지에 오로지 노아의 방주에 탄 생명체들만 남아 있고 사람들은 다 죽었던 겁니다.
노아의 눈에 비친 그 세상을 노아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참 충격이었을 겁니다.
물론 노아의 마음에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 훨씬 컸을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제단을 쌓고 번제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사는 첫 발자국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하느님은 그에 대해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유명한 ‘낳아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을 다시 주십니다.
그리고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하는 언약을 주시면서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가 그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하느님께 축복받을 만한 고결한 신앙의 가족 8명만의 세계가 됩니다.
이 세상에 내 가족 8명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글쎄요.
일단 살아남은 것에 감사도 들겠지만 막막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저는 감사하다는 생각보다 정말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다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큰 충격일 것 같습니다.
신앙 깊은 8명뿐이니 그들은 천국같이 정결하고 평화스럽게 살았을 것이라고
누구나 이렇게 상상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얘기겠죠.
살아남은 여덟 사람은 더욱더 바르고 깨끗하게 평화스럽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덟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정답게 살지 않고서는 이 큰 세상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이 여덟 사람은 정말 아름답고 거룩하고 정겹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어떻게 얘기가 진행됩니까?
인간이란 아무리 곧게 산다고 해도 곧은 것이 한도가 있습니다.
무한히 곧게 살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조소를 참고 견디면서 대사업을 성취하고 비로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에 대한 큰 위험과 또 주변에 수많은 질시,
이런 것을 극복하고 이 여덟 사람은 영적인 큰 임무를 완수했던 겁니다.
그렇기에 그 가족이 절대 갈라져서는 안 됐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분열이 보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아무리 위대하여도 역시 인간의 약점은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의 흔들림이 여실히 보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만이 살아났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겠죠.
‘우리들을 비웃었던 저 남자도, 저 여자도 모두 죽었다. 역시 우리는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택된 가족들이다.’라는 오만한 생각이 쑥 튀어나오지 않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은총 받기 전에는 겸손했던 자들이 은총을 받고 나면 교만하고 오만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총 곁에는 항상 그것을 시샘하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죠.
8명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아서 큰 영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감사와 겸손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성경에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그들에게 오만이 싹 트고 있음이 보입니다.
‘홍수 이전의 노아와 그 식구들의 모습이 아니다.’ 하는 것은 성서에 어떻게 나옵니까?
홍수 후 노아가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장막 안에 벌거벗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의 하체를 본 그의 아들 함은 밖에 있던 형제 셈과 야벳에게 고합니다.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나옵니다.
노아가 나중에 술이 깨어서 자기의 행한 일을 알고 셈과 야벳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아비의 벗은 모습을 보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함에게 저주합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지금 얘기했던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사건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엄한 경고의 말씀이지요.
하느님이 ‘완전한 자’라고 축복하신 노아조차 폭음하고 알몸의 수치를 드러냅니다.
주벽 이야기나 술에 취하고 저지른 실수는 들은 적이 있지만, 오늘 노아처럼 아이들 앞에서 홀라당 벗고
알몸을 드러낸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음주, 술을 먹는 것 자체가 죄가 되고 불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술에 먹히면 이성과 의지와 모든 신앙이 무너져 내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하느님과 같이 살아가는 신앙인’조차도 이런 기막힌 추태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술에 취한 노아는 결코 홍수 이전에 노아는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홍수 전에 노아와는 다른, 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가족만이 멸망에서 구원받는 큰 은총을 입은 그가 이런 꼴이라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역시 딱 하나입니다.
교만입니다.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오만해졌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신자가 되고서도 오만해지고
자칫하면 하느님에게서 이탈하기 쉬운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셈과 야벳은 아비의 알몸을 안 봤습니다.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에게 옷을 입힙니다.
참 훌륭한 일이죠. 아비의 알몸, 아비의 수치를 덮습니다.
그렇지만 맨 처음에 아비의 알몸을 본 함은 비웃으면서 나가서 뭐라고 그럽니까?
‘형제들아, 아버지가 훌떡 벗고 잠자고 있으니 빨리 와 봐.’
무슨 구경거리나 난 것처럼 아버지의 수치를 와서 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홍수 이전의 함이라면 분명히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게 하려고 자기의 옷을 벗어서 아버지를 가렸을 겁니다.
그러나 함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 못했을까? 저는 생각을 이렇게 해봤습니다.
홍수 이전의 노아가 아닌 아비를 존경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비를 존경할 수 없는 함 자신의 선한 바탕도 이미 변질돼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여러분들 제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그토록 존경하던 아버지가 홍수 이후에 걸핏하면 술에 취해서 아무 데서나 자고 옷을 벗고,
아마 옷을 홀랑 벗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 자식들 눈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라지죠.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이젠 아버지를 우습게 보게 된 겁니다.
그러니 동물원에 원숭이 보듯이 벌거벗은 아버지 와서 보라고 얘기했던 겁니다.
집안이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술에서 깬 노아는 직접 함을 저주하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 다시 말하면 노아의 손주를 저주함은 또 웬일일까?
왜 손주에게 저주할까?
저는 이 대목에서 또 탁 막혔지요.
그래서 결국에 생각해 낸 것은 함의 태도로 짐작하건대 함의 아들 가나안도 조부를 존경하지를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기껏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 관계가 뒤틀리고 불신과 저주로 엉켜버린 모습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도 다시 깨지고. 가족들 간의 관계도 깨집니다.
노아의 후손인 인류가 죄악의 세계를 이루어 놓는 것 당연합니다.
노아가 변질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몇십 년 신앙을 지켰어도 하루아침에 신앙을 상실할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뒷 까마귀가 앞장 서고 앞 까마귀가 뒷장 선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경고입니다. 그리고 무서운 얘기입니다.
은총을 받은 자가 교만해졌을 때 어떻게 변질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엎어지고 깨어지면서라도 어떻게든지 하느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고
그리스도를 붙들고 늘어져 살아가야만 됩니다.
그리고 축복받았다고 해도 절대 교만하지 말고, 축복받는 그 순간 우리들은 무너질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노아와 여덟 식구가 자기들은 당연히 선택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를 않고,
선택받을 자격조차 없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감격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노아의 신앙은 더욱 빛났을 겁니다.
인간은 은총에 의지하지 않으면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결코 노아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에 배’였던 것을 다시 확인하며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두 번으로 끝을 내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해드렸던 이 강의는 절대 한 번에 여러분에게 스며들지 않을 겁니다.
시간 날 때마다 들으십시오. 들으면서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하십시오.
홍수 이전의 노아의 모습과 홍수 이후에 노아의 모습에 차이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고 하는 것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부터는 이제 바벨탑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바벨 탑 미리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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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