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는 여행은 고사하고 나들이 조차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어린이 날이면 아빠의 손을 잡고 사직공원에서 자장면으로 외식을 하고 전망대에 올라가 시내 구경 한 번 하고 오는 것이 큰 행사였다. 여름철이면 아빠의 휴가를 맞춰 남평의 드들강에 가 개헤엄이라도 쳐보고 오는 것이 유일한 내 어릴 적 여행이었다.
요즘은 학교 소풍이 그닥 반가울 것이 아니지만, 그 때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가는 학교의 소풍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모처럼의 해방의 날이고, 간만의 자유의 날이었음이 분명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리 흥미로울 것도 신선할 것도 없는 소풍이었음에도 말이다. 매년 같은 동선을 따라 걷다가 비슷한 곳에 눌러 앉아 똑같은 행사를 했다. 그래서 사실 기억에 남는 풍경이라거나 구경거리는 전혀 없다. 다만 김밥. 소풍날이면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 재료를 가지런히 준비하여 김밥을 돌돌 말아서 도시락에 담아주시던 엄마의 손길만이 가장 강렬한 추억이다.
학교 건물 안에서나, 소풍을 나온 밖에서나 점심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기는 매일반이었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내면 각자 싸온 김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밥 한 알씩 바꿔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집 저 집의 집밥의 맛을 맛보기 딱 좋았다. 나는 한 두 개 바꿔 먹어보다가 이내 내 김밥 먹기에만 집중했다. 아무래도 나의 김밥이 가장 맛있었다. 김밥 재료야 다들 비슷했으니 그다지 차이가 날 맛도 아니건만 엄마가 싸주신 김밥은 매번 단연 최고였다. 아이들도 내 김밥이 맛있다고 엄지 척이었으니, 내 입맛에만 특화된 김밥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 김밥을 싸게 되자 그 옛날 엄마 김밥의 감칠맛이 생각나 비법을 여쭤보았다. 양파가 감칠맛의 근원이었던 것. 엄마는 양파를 잘게 다져 그것과 함께 밥을 한 번 볶는 과정으로 엄마의 김밥을 특화 시킨 것이다.
타국에 나가 살다 보면 유독 그리운 내 나라 음식이 있다. 내게는 그 음식이 김밥이었다. 가장 간편하면서도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던 메뉴였던 만큼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분식집이 김밥 집이었다. 바깥 용무를 끝내고 저녁 식사 시간이 임박할 즈음, 집으로 귀가하자면, 급한 마음에 김밥 몇 줄을 사가 저녁을 때우곤 했다. 급하게 아들들을 데리고 나들이 갈 참이면, 김밥 집에 들려 몇 줄 김밥을 챙기는 것은 아들 둘을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주었다. 먹을 것만 덜 챙겨도 일이 줄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김밥은 가장 손에 닿기 쉬운 음식이었고, 내가 가장 많은 특혜를 누린 음식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여 어느덧 김밥에 대한 정의情意가 생겼던 걸까? 그 허구 많은 그럴싸한 한국 음식들 중에서 유달리 김밥 생각이 잦았으니 말이다. 김과 단무지, 한국식 어묵 등은 중국에서는 흔한 음식 재료가 아니었다. 한국 마트까지 나가야 구입할 수 있었건만, 주기적인 김밥 생각으로 천리 길(?)을 마다 않고 구입하여 주기적으로 김밥을 싸먹었다. 심지어는 나 혼자 먹고자 김밥을 말기도 했으니 김밥이 흔한 곳을 떠나보고서 김밥과 깊은 정이 들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도 김밥은 나들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코로나로 멀리 떠나지 못했지만, 겨울에서 봄이 오는 길목, 여름에서 가을이 되는 즈음에 번개처럼 모여 번개 나들이를 할 때, 내가 김밥 당번 맡는 것이 번거롭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김밥, 당근과 오이, 햄과 달걀로 만든 김밥을 들고 나가, 돗자리를 깔고 누워 나무에 가린 하늘을 바라보자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사각거리는 나뭇잎의 소리는 영락없이 김밥 오물거리는 소리와 맞물려 조화를 이루었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배경으로 오물거리는 김밥 먹는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답답함, 일상의 의무가 갖다 준 지리함도 어느덧 씹혀져 사라진 듯 가벼워지곤 했다. 위로도 격려도 공감도 이미 얻어버린 시간이 되곤 했다.
김밥은 조화로운 음식이다. 주로 들어가는 속 재료는 당근, 오이나 시금치, 햄과 단무지 그리고 달걀이다. 당근의 달작지근한 맛과 오이의 상큼한 맛, 고기의 맛 햄과 달걀이 밥과 더불어 까만 김 한 장 속에서 서로를 감싸 안으며 화애로운 맛, 게다가 영양소를 따져본다 하여도 부족할 것이 없다. 이런 조화로움은 각자의 재료를 성질에 맞게 선先 처리를 하기 때문이다. 육질이 단단한 당근은 기름에 살짝 볶아 유들 하게 만들어준다. 당근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A나 베타카로틴은 기름에 볶아주면 흡수율이 더욱 좋아진다고 한다. 오이는 열처리 없이 소금에 약간만 간을 해둔다. 수분 함유가 많은 오이에게서 물기를 조금 빼주어야 시간이 지나도 맛의 변화가 적다. 금방 먹은 것이라면 아삭한 식감을 위하여 그냥 넣어도 좋겠다. 햄은 살짝 볶아서 준비해두면 육류 특유의 냄새를 제거할 수 있다. 단무지는 말해 무엇, 새콤한 맛의 화룡점정으로 빼놓을 없는 김밥의 주재료 되시겠다.
김밥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속 재료는 얼마든지 바꾸어도 된다는 말이다. 상추와 불고기를 속 재료로 하면 불고기 김밥이 되고, 양배추와 돈까스를 넣으면 돈까스 김밥이, 참치(통조림)와 깻잎을 넣으면 참치 김밥이 되어, 색다른 맛을 선사한다. 연어와 아보카도를 넣으면 연어아보카도 김밥이 될 것이다. 속재료로 무엇을 넣든지 김밥은 성공이다. 적절한 소스를 만들어 함께 내놓으면 맛은 더욱더 상승한다. 종로 사장의 마약 김밥이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김밥을 찍어먹는 소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겨자장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아 마약 김밥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밥에도 한 가지 약점이 있으니 탄수화물을 필연적으로 많이 섭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비법이 있다. 양배추를 볶아 밥에 듬뿍 넣어 함께 비벼준다. 양배추대신 양파를 볶아 듬뿍 넣어도 되겠다. 그 옛날 나의 엄마는 양파가 흰쌀에 가려 보이지 않도록 다져 넣었지만, 듬뿍 넣기 위해서는 채 썰어 넣어주어도 무방하겠다. 단연코 탄수화물의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양배추나 양파가 속을 편안하게 하기 때문에 많이 먹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꼴리는 대로 마음껏 변주해도 다양한 맛을 뽐내며, 추억의 맛까지 정겨움을 선사하는 김밥이라니! 진정 변주의 귀재라 불릴만하지 않은가.
첫댓글 저도 김밥을 참 좋아하는데요, 김밥 만들기 과정을 통해
또 하나의 문학을 배우고 가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변주의 귀재가 선영님의 글에서 나온 오늘의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밥을 먹다가도 '위로도 격려도 공감도 이미 얻어버린 시간이 되곤 했다'"
라는 문단에서 합일적인 표현이 가능하시니 김밥의 문학이 된 것 같습니다.
글요리 열심히 배워서 차별화된 미각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간이 손을 타는 음식들을 통해 맛있는 문장을 맛본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