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7
12월12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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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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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EsB5lIOQA0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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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외국의 한 신경정신병원 원목과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하시는 수녀님의 고백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향한 수녀님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 사랑과 열정은 병원 전체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 수녀님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과 혹독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수도자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는데,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수녀님 역시 꽤 오랜 세월 정신병동 신세를 지셨답니다.
가장 심각한 증세는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스스로를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큰 죄인, 그를 넘어 벌레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도복은 물론이고 평복도 절대 입지 않았습니다. 억지로라도 입히면 즉시 몸부림을 쳤고,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수녀님을 진료한 전문의들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포기했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수도회 총장 수녀님에게 저 수녀님은 평생토록 정신병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소견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연세 지긋한 자원봉사자 자매님께서 분홍색 잠옷 한 벌을 사 들고 수녀님 병실을 찾았습니다.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의 자매님께서는 환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수녀님 침대 옆에 앉았습니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말을 건넸습니다. “수녀님, 얼마나 힘드세요? 제가 수녀님을 위해 매일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고 있답니다. 제가 오늘 수녀님을 위해 예쁜 잠옷을 한 벌 사왔답니다. 이걸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정말 예쁠거예요.”
자매님은 마치 엄마가 아픈 딸에게 하듯이 수녀님 뺨을 어루만지셨는데, 그 순간 수녀님의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가 자신의 뺨에 따뜻한 손을 댄 것입니다. 수녀님은 자매님의 따뜻한 손을 자신의 뺨에 꼭 대고 대성통곡을 터트렸답니다.
자매님의 따뜻한 손길이 자신의 뺨에 닿는 순간, 수녀님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그 오랜 깊은 병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회상하셨습니다. 따뜻한 한 인간 존재의 따뜻한 손길은 그 어떤 깊은 병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답니다. 결국 사랑만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뒤 수녀님은 기적적으로 병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따뜻한 자매님을 통해서 자신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신병동 원목을 자원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수녀님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동료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계신답니다.
또다시 성탄입니다. 성탄이란 그 따뜻한 자원봉사자께서 가련한 한 수도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다가간 것처럼, 세상 자상하신 하느님께서 허리를 굽혀 가련한 우리 인간에게 따뜻한 손길을 펼치신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앞에 그저 감사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 우리 인간 측에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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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죽옷을 원한다면 두렁이를 벗어라>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입니다.
고향인 폴란드의 슐레지엔으로 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려했던 대로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말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거라.”
무사히 강도들 틈을 빠져나와 한숨을 쉴 때 바지춤에 비밀히 감추어둔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대답했는데 가다보니까 이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받으십시오.”
강도에게 숨겼던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주면서 엎드리더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비록 강도일지라도 진실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묻습니다. 올바른 대답을 들으면 수긍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해는 마음의 뜻 다음에 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이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올바른 말을 들어도 절대 설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뜻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물으면서도 그분의 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변화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해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하기 때문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이미 변화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을 가리기 위해 두렁이를 입은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자기를 가리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말은 칼과 같이 자신을 찌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패와 칼을 들고는 대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아야합니다. 하느님께 내 자신이 솔직해지는 방법은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나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그분도 솔직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슴에 기댄 요한에게만 당신을 배신할 제자가 가리옷 유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모두에게 알려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장해제하고 당신께 더욱 깊이 안기는 사람에게만 당신의 진리를 들려주십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죽옷을 바란다면 나를 가리는 나뭇잎부터 떼어내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효봉 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판사였는데 어떤 사람의 판결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판사직을 사임하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벗어던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느님도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면 진실과 다른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서 절대 나가지 않도록 먼저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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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거꾸로 읽은 세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계사는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그래서 왕조를 중심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종교가 들어온 년도, 전쟁이 일어난 년도를 배우기도 합니다. 세계사는 승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되곤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봅니다. 가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신대륙의 발견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던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은 텔레비전을 거꾸로 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막을 읽기도 어렵고,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거꾸로 보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바지를 입을 때도 오른쪽 다리부터 넣지 않고 왼쪽 다리부터 넣는다고 합니다. 대학의 조직표도 거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총장이 맨 아래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총장은 맨 아래에서 마치 장작에 불을 붙이듯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불쏘시개가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거꾸로 바라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는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 평신도가 있었고, 중간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었고, 맨 위에 주교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주교를 통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서 평신도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동안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고, 세상의 것들이 교회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죄하였고, 다른 종교와 화합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위계제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조직이기 전에 성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전례의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한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한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한이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권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한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섬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겸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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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진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기적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구제 불능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더는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 하신다. 그들은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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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의 갈등은 더욱 깊어집니다. 마태오 복음 21장 23절─22장 46절에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수난 전 반대자와 하신 마지막 논쟁을 보도합니다. 이 부분은 다섯 가지 논쟁과 세 가지 비유로 구성되는데, 오늘 복음은 첫 번째 논쟁 사화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의심하며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메시아로서 공개적으로 보여 주신 활동(성전 정화, 병자 치유, 무화과나무 저주) 때문에 반대자들과 대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직접 왔다고 스스로 인정하시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분께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을 씌워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마태 26,65-66 참조)
반대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질문 형식으로 답하십니다. 라삐 논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방식은 반대자들의 질문에 직접적 답변을 피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오로지 하느님께 근거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적대자들을 무력한 침묵에 빠지게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당신처럼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이로서 신적 권한을 가지고 활동하는 예언자라고 인정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지만,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지키려고 예수님의 권한을 의심하면서 그분의 죄를 단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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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의 권위>
땅의 권위는 어느 정도 다스리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하늘의 권위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하지 못합니다.
물을 다스리는 사람은 이쪽 물을 저쪽으로 수로를 만들어 옮기며 넉넉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보내주고 받지만 하늘의 물을 이곳저곳으로 공평하게 내리게 하거나 날씨를 조정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일은 서로 의논하여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고 힘을 나눌 수 있지만 하늘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 바꾸거나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저렇게 변경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훈과 가르침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고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생각의 힘으로 바꿀 수 있지만 진리이시고, 선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모님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절대적 순종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의 권한은 하늘부터 온 것이지만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심으로 주님의 권위를 들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수련 때 장상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배워 알고 있지만 장상이 하느님의 권위를 따르지 않은 권위는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 외 인간의 모든 권위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사형제도는 인간의 법이라서 하느님의 생명을 중시하시는 뜻에 위반되니 폐지를 주장합니다.
인간의 생명, 생존권, 완전성에 위배되는 법이나 관습은 도전을 받고 양심을 거스르는 법도 도전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법을 반대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법을 모르고 반대를 위한 반대는 찬성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에 반대는 두 손 들고 반대합니다.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결정한 일을 황공무지로 소이다 지당 하나이다, 하지 않고 아니면 아니다 라고 말을 하는 용기가 팔요합니다.
어떤 판결을 고등 법원까지 가고 헌법 재판까지 갈 수 있는 제도는 참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법에 모두가 순종하여 정의로운 세상,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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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언자인 이방인 점쟁이, 발라암의 신탁을 들려줍니다. 발라암은 모압의 임금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메시아의 축복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영에 이끌려, 야곱에서 나온 임금이 이스라엘과 많은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교회 전통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 예언이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분으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정통 교리를 지키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자신의 불신 때문에, 그리고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오는 신비에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난을 일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권한을 조용히 부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참예언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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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앞으로>
마태오 21,23-27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앞으로>
누가
뭐라 하든
멈추지 말고
다만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꼿꼿하게
주저함 없이
흐트러짐 없이
바른 길을
깨끗한 길을
살리는 길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게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삶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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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명에 응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눈 가리고 아웅’ 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 42,20). 하늘의 그물은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 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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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새벽에 묵상하다가 제게 기적 같은 일이 정말로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성직자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제가 20년 넘게 사제로, 또 사람들로부터 “잘살고 있다”라는 평을 들으며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형제들 간의 우애에 금이 가서 남보다 못하게 사는 가족도 많은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도 형제간의 우애는 변함이 없는 것도 기적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성지가 힘들다고 하는데, 제가 있는 갑곶성지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이 밖에도 기적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기적에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는데, 이를 마치 당연한 것으로 또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이란 항상 있는 기적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작은 것에 감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작은 것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자기에게 다가온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반드시 커다랗게만 다가올까요? 돈 많이 벌고, 승진에 성공하고, 앓던 병이 말끔하게 치유되어야만 주님의 손길을 받은 것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서도 기적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근처에 기적에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실현을 위해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해서, 깜짝 놀라야 정상인 상황에서도 또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권한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권한에 관해 묻기만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 안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천천히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기적의 기쁨을 쉽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있는 기적에 매 순간 놀라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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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
- 분별력의 지혜 -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 25,4-5ㄱㄴ)
한밤중 일어나 조심조심 하루를 시작하면서 문득 떠오른 말마디둘입니다. 하나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는 뜻으로, 지금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잘 돌아다보고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수행의 과정이나 신자의 길도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수행자로 참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또 하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뜻으로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역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니,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싶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에게 선사되는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온갖 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시절에 분별력의 지혜는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특히 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에게 분별력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베네딕도 역시 아빠스는 분별력을 지녀야 함을 특히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어제 깊이 묵상한 한자 둘, “원圓”과 “덕德”자입니다. 성철 스님은 '자신은 모나게 살았지만 제자들은 둥글게 살라'고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었다는데, 수행에 남달리 날카롭고 엄격했던 법정 스님은 제자들은 덕스럽게 살라고 법명에 “덕德”자를 넣어 주었다는 일화입니다. 둥글고 덕스런 “원圓과 덕德의 삶”, 역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이나 복음의 예수님은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받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간절히 청할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신탁을 선포하는 발라암입니다. 야곱의 천막이, 이스라엘의 거처가 그대로 먼 훗날 실현될 교회의 모습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지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다.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흡사 풍요롭고 충만한 은총 가득한 교회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내다보는 발라암의 천상 지혜입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별이, 왕홀이 상징하는 바, 미구에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현자, 발라암을 통해 계시되는 천상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도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수석사제들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지?” 묻는 불순한 질문 자체가 그대로 덫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던 덫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하며 역공逆攻합니다. 복음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적대자들의 결정적인 덫에서 벗어난 물음, 예수님의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젠 공수가 바뀌어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입니다. 이들의 의논의 결론이 이미 답을 말해주지만 차마 말은 못합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려우니 이래저래 참 진퇴양난입니다.
결국 “모르겠소” 대답함으로 자기들의 덫에 자기들이 걸린 꼴입니다. 예수님의 분별력의 천상 지혜가 요약된 다음 말씀이 결정적 한방이 되어 적대자들을 침묵케 했음을 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스스로 헤아려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이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답은 나와있지만 완고함에 눈먼 이들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발라암처럼 열린 눈을 지닌 겸손한 이들에게 위로부터 분별력의 지혜가 선사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106,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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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21,23)
<우리에게 주어진 신적 권한!>
오늘 복음(마태21,23-27)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 틀' 안에 맞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신적 권한을 가지고 열일하신 예수님께 '신성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신적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적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신적 권한을 가지고 너와 세상과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며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양극화 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와 남북의 평화 문제와 기후위기 문제인 생태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적 권한'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처럼 당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기득권 세력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신적 권한을 가지고 모두의 구원을 위해 열일을 하셨던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신적 권한을 가지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런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신적 권한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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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2b2bD57G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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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마태 21, 25)
일을 해도
일을 안 해도
문제라 합니다.
좋은 일을 해도
칭찬과 지지는 커녕
누구로부터 이러한
권한을 받았는지를
따져 묻는 우리들
서글픈 모습입니다.
사랑은 실천이
중요한 영역입니다.
출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져 물을 시간에
작은 기도의
실천이라도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권한을 따져
묻는 이들에게
되돌려드립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러한 것을
따져 물을 수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어리석음의
악순환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생산적인 논쟁이
아닌 삶 안으로
뛰어들어 사랑의
삶을 우리가
살길 바라십니다.
요한의 세례를
더럽히는 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세례의 실천은
성탄을 준비하는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은 출처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권한은
섬김과 봉사입니다.
이와 같이
권한이 있다면
다시 일으키고
다시 살게 하는
예수님
사랑의 삶이
바로 권한입니다.
삶을 잃어버린
권한은 권한이
아닙니다.
계명과 율법에
갇혀있는 권한은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권한은 사랑에서
오고 최고의
권한인 사랑은
서로를 진정
살립니다.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기다림의
깊어가는 시간입니다.
권한은 존중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사람의 존중
사람의 권한
사람의 세례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요.
사람의 성탄은
사람의 존중입니다.
존중이 빠져버리면
권한은 갈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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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의 권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못마땅할 때면 언제나 권한의 출처를 예수님에게서 묻게 되는 교만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먼저 부패한 우리정신과 마음을 정화시키십니다. 권한은 정신과 마음에서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한 가운데로 내려오는 겸손한 권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써 당신의 권한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권한은 논쟁을 통해 얻거나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참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빠져버린 권한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권한은 자신의 길을 기쁘게 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관계의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현존이 예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는 사랑의 삶이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힘을 우리가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재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관계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권한은 더욱 빛나는 현존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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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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