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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변주 - 욕의 사회적 의미]
북한산을 등반하면서 ‘엿 먹어라’하는 말이 어째서 욕이 되었을까? 그 어원은 무엇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다. 어느 선배의 주장에 따르면, 중학교에 입시가 있던 시절 1964년 서울시 중학교 입시 문제에 ‘밥으로 엿을 만들려고 한다. 만약 엿기름이 없다면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나왔다 한다. 이때 문제의 보기는 1번 디아스타제, 2번 무즙, 3번 꿀, 4번 녹말이었는데 이중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논란이 발생했다. 2번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국민학교 자연 교과서에는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라는 내용이 수록돼 있었다. 결국 이 논란은 ‘무즙 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재판부는 “실제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는지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한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만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원고 측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일군의 학부모들이 굴하지 않고 기어이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냈다. 이 일로 ‘엿 먹어라’라는 말이 당대 유행어가 되었고 1964년 12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무즙 엿 먹어보라”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결국 법원은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하여 38명의 학생이 구제되었다 한다.
위의 사건을 근거로 ‘엿 먹어라’는 말이 욕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내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이와 다른 대략 세 가지 유형의 설이 존재한다.
첫째, 시험 낙방설(說)
과거시험이나 입학시험 때, 엿이 끈끈하게 잘 붙는 성질 때문에 시험에 붙으라고 엿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시험에 낙방한 사람에게 엿을 주며 놀리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때 ‘엿 먹어라’라는 말이 낙방에 대한 조롱과 언어유희를 거치며 비아냥거리는 욕설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둘째, 엿의 속성에 관한 설(說)
엿은 끈적거리고 입에 달라붙는 음식이다. ‘입에 붙는다’라는 말은 곧 말이 붙는다, 미련이 붙는다, 떼기 어렵다는 부정적 의미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엿 먹어라’는 ‘입 다물어라’, ‘귀찮게 굴지 마라’라는 뉘앙스를 갖게 되었다는 설이다.
셋째, 민속적 저주설(說)
민속학적으로는 엿이 귀신을 붙잡거나 부정을 막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나쁜 일이나 사기(邪氣)를 내쫓을 때, 엿을 던지거나 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엿 먹어라는 ‘저리 가라’, ‘재수 없으니 떨어져라’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옛날에는 엿기름 찌꺼기를 부정하거나 천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엿이나 먹어라’라는 말은 더럽고 하찮은 것이나 먹으라는 뜻으로 사회적 천대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엿 먹어라’라는 표현은 문학작품이나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신문·잡지에 욕설을 우회적으로 표기한 예는 1950~6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다. 경향신문의 1957년 3월호 기사 중에 “시험 망친 녀석들한테 엿이나 먹으라 하더군.”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로 봐서 ‘1964년의 무즙 엿’ 파동 이전에도 이 말은 욕설로서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젠장’은 뜻에 맞지 않거나 불만스러울 때 혼자서 하는 욕이다. ‘제기 난장’의 준말이다. ‘제기’는 ‘제기랄’이고, ‘난장(亂杖)’은 조선시대에 몽둥이로 신체의 부위를 가리지 않고 몸 전체를 마구 때리던 고문을 말한다. 난장이 ‘치다’ ‘맞다’와 호응해서 사전엔 ‘난장 칠’ ‘난장맞을’이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러므로 ‘젠장’은 ‘제기 난장(亂杖)을 맞을 것’이라는 뜻으로, 마음에 맞지 아니하여 불평스러울 때 혼자서 욕으로 하는 말을 의미하는 감탄사 ‘젠장맞을’이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인마’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비속어이지만 친한 사이엔 오히려 친근감마저 준다. ‘임마’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인마가 옳은 표현이다. 인마는 ‘이놈아’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얌마’ 역시 ‘얀마’가 옳다. 얀마는 ‘야 이놈아’의 준말이다. ‘지랄하다’는 의학적 용어인 간질(癎疾)이 발작하는 요란한 행동을 가리켜 지랄병이라고 하던 데서 유래한다.
‘오라질 놈’은 ‘포승(捕繩)’ 곧 오랏줄을 질 놈이라는 뜻으로 포박을 당할 놈이라는 뜻이다.
‘경을 칠 놈’은 얼굴에 죄목을 새겨넣는 묵형(墨刑)이나 문신을 새겨 넣는 자자형(刺字刑)을 당하게 될 놈이라는 뜻이다.
‘난장칠 놈’은 여러 명이 둘러서 멍석말이하여 신체의 부위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하는 난장(亂杖)을 당하게 될 놈이라는 뜻이다.
‘육시랄 놈’은 시체를 꺼내어 토막 내는 육시(戮屍)의 형벌을 말한다.
‘오살할 놈’은 불교에서는 부모를 죽이는 ‘부모살(殺父母)’, 수행을 완성한 성자를 죽이는 ‘아라한살(殺阿羅漢)’, 부처님 몸에 상처를 내는 ‘출불혈(出佛血)’, 승단을 분열시키는 ‘파승(破僧)’ 스승이나 은인을 죽이는 ‘악심살사(惡心殺師)’의 다섯 가지 살생을 말하고, 유교에서는 ‘살생’보다는 ‘오살(誤殺)’ 즉 실수로 사람을 잘못 죽게 할 놈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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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은 언어의 그림자이고 말의 이면이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며, 욕설은 그중 가장 원초적 감정의 표현이다. 욕이 단순히 ‘나쁜 말’로써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가치관, 도덕규범, 체면 의식이 빚어낸 언어적 그림자이자, 억눌린 감정이 찾아낸 비공식적 해방구이기도 하다.
한국어의 욕설은 특히 직설보다 완곡(婉曲)을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유교적 예절 문화와 체면을 중시하는 언어풍토 속에 분노를 직접 드러내기보다 ‘둘러 말하는 기술’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욕설은 단순히 공격적이기보다 은유적·풍자적 언어유희의 형태로 진화했다.
한국의 욕설이 은유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교 사회의 핵심 가치인 ‘체면(體面)’과 ‘예(禮)’ 때문이다. 공적 자리에서 직접적 모욕은 개인의 품격을 해치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감정을 표현하되 품격을 유지하는 언어적 절충이 요구되었다. 이런 문화적 맥락에서 욕은 ‘감정의 배출구’라기보다 ‘사회적 마찰을 완화하는 완충 언어’로 발전했다. 욕설조차 품격의 문법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합의가 있었다.
욕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대의 억압이 심할수록 욕은 더 정교해지고, 자유로울수록 욕은 더 직접적으로 변한다. 오늘날 “엿 먹어라”는 더 이상 심한 욕이 아니다. “닥쳐”, “꺼져” 같은 직설적 표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체면의 시대에서 직설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언어적 징후이다. 즉 욕의 변화는 사회적 정직성의 지표이기도 하다.
욕은 순간적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의 반사신경이다. 그 속에는 분노와 좌절뿐 아니라, 유머와 풍자, 심지어 인간미도 깃들어 있다. “엿 먹어라”는 단순한 욕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회적 억압을 비트는 유머와 체면과 감정 사이의 긴장, 그리고 언어의 창의적 생명력이 공존한다. 결국 욕은 반드시 ‘나쁜 말’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말하려는 언어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霞田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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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가로 조선시대 남사당패 기원설이 있습니다.
남사당패 단원들 즉 남성들 사이의 은여였다는 설이지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