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와 예수의 사랑 비교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사랑
2022101252 철학과 하봄이
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속 겸상애 교상리(兼相愛 交相利)를 주장하며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기를 꿈꾸었다. 겸상애 교상리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서로 사랑하고 다 같이 서로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신분의 차등을 두지 않고 평등하게 사랑함이 이익이 되며 이롭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로운 것, 이익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사랑함이라는 추상적인 마음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발생한다. 그렇기에 묵자가 말하는 사랑은 현실적이고도 이상적이다. 그의 사랑을 기독교에서 예수의 사랑과 비교해볼 수도 있다. 예수 또한 신분의 차별이 없는 보편적이고 평등한 사랑을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에서의 예수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랑의 정신을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부분에서 예수와 묵자의 사랑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 사랑이 온전히 같다고는 할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사랑은 아가페를 의미한다. 아가페는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는 사랑이다. 이를 잘 나타내는 구절이 마태오복음 5장 43-44절에 나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단순히 내 주변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대상과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의로 대하며 사랑하며 최종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형벌과 같이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묵자의 사랑은 예수의 헌신적이고 초월적인 사랑과는 결이 다르다. 묵자는 당시 혼란했던 시대 속에서 전쟁이 발생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만을 사랑하고 서로 차별하였기에 발생한 결과로 본 것이다. 묵자가 말한 겸상애 교상리(兼相愛 交相利)에서 겸(兼)은 포용함, 차별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상(相)은 서로, 상호적임을 의미한다. 즉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겸상애(兼相愛)는 서로 사랑하기에 이웃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랑을 통해 상대방을 유익하게 함이다. 이 유익함의 결과로 전쟁은 발생하지 않게 될 것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평등한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다. 학설에 의하면 묵자는 당시 사회적으로 하층 계급에 속했다고 추정이 된다. 즉, 묵자는 낮은 계급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사랑을 실천한 것이고 예수는 신이 인간의 형태로서 위로부터 내려와 낮은 자를 보듬어주는 사랑을 행한 것이다.
묵자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 중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대다수에게는 묵자의 사랑이 신적인 존재의 개입 없이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통을 공유하고 연대하였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예수의 헌신적인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헌신적 사랑이 있기에 성인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를 본보기로 우리는 사랑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깨닫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헌신적인 사랑은 대다수가 실천하고 추구하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묵자의 겸상애 교상리를 본받아 가야 하지 않을까. 묵자는 율법적이고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행동을 더욱 강조한다. 그의 절용과 청빈한 삶, 비공(전쟁 반대)와 방어술은 그의 실천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묵자의 사상과 같이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끊임없이 행동을 실천해오고 있다. 이를 굳이 묵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묵자의 겸상애 교상리와 같이 현실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이를 사회 전반에 확대해 가고 있다. 2016년 대통령의 부정과 관련해 온 국민이 들고 일어섰던 촛불 집회도 더 나은 사회,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것의 기저에는 혼란했던 사회에 반대한 묵자의 차별 없는 평등한 사랑이 있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인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묵자의 정신은 정치의 부정부패 속에서 탄압받는 국민을 대변해주고,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의 개선을 주장할 수 있으며, 취약계층의 인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는(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로) 고대 사회와는 또 다른 혼란 속에 놓여있다. 이는 아직 자신만을 사랑한 채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 채 차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완벽하게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는 이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실천을 강조한 묵자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차별에서 멀어진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계속해서 시도한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있다. 이 노력이 있기에 과거보다는 조금 더 나은 지금의 사회가 있다.
첫댓글 중국고대사회에서 묵자의 겸애는 거의 예수의 사랑과 유사한 수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묵자의 사상과 같이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오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419나 518과 같은 공동선을 추구한 것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런 가치 추구가 지금은 약화된 것일까요? 다른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행인 것은 "이 노력이 있기에 과거보다는 조금 더 나은 지금의 사회가 있다."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