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를 다녀왔다. 그런데 꼭 당일치기 일본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맨체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일본 경기는 영국에 사는 일본사람들의 잔칫상. 주변의 일본사람들은 모두 모인 것 같더라. 실은, 일본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일본 응원석에 앉은 나로선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다. 2시간동안 일본말만 들었으니. 게다가 일본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펼칠때마다 터져나오는 ‘니뽄~ 짝짝짝’, ‘슌짱~’, ‘이나~’ 등등의 외침까지 있었으니 정말 일본에 다녀온 기분이 난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첨부된 짧은 동영상을 보시라)
그 무리에 끼어있는 나도 당연히 일본인으로 보였을 터. 몇몇 일본애들이 일본말로 뭔가를 물어오기에 처음엔 살인미소를 띄워주면서(--;) “나 일본사람 아니어요”라고 대답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전반 말미부터는 자랑스런(?) KFA 문양이 새겨진 점퍼를 꺼내입고 경기를 봤다. 때마침 날이 쌀쌀해지기도 했고.
경기는 지루하면서도 건질게 많았다. 전반은 일방적인 잉글랜드의 페이스. 스파링 파트너로서의 일본은 한마디로 수준 미달이다. 에릭손 감독으로서는 현재 가장 골치를 앓고 있는 중앙 미드필드 콤비 구성을 검토하기 위해 일본의 강한 압박을 바랬겠지만 전반 내내 일본의 미들은 한마디로 추풍낙엽. 잉글랜드 선수들이 공을 몰고 들어오면 몸으로 당해내질 못한다. 압박도 거의 없어서 대개의 공격이 페널티 박스 안쪽까지 침투하고 만다. 이래서야 버트 or 람파드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는 에릭손의 갈등이 해갈될 리 없다. 프랑스와 같은 강팀과의 대전을 앞둔 에릭손이 람파드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일본의 강한 맞대응이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상대가 프랑스는 커녕 리히텐슈타인 수준의 압박을 들고 나오니 스파링할 맛이 전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투톱을 쓰는 경우, 최근 부진한 스콜스를 빼고 람파드-버트나 람파드-제라드 콤비를 쓰는게 어떨까 싶다. 제라드를 중앙으로 쓴다면 조콜이나 하그리브스를 왼쪽으로 돌릴 수 있을테지)
반면 전반전 일본의 공격은 한마디로 ‘나비처럼 날아서 나방같이 쏜다’. 전반 내내 페널티 박스 안쪽으로 침투한 적이 거의 없다. 미들에서 거의 잘릴 뿐 아니라 이를 힘겹게 뚫는다 하더라도 테리-캠벨의 벽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슈팅은 PA 바깥쪽에서만 봉창을 두드리고… 전반전 끝나고 J리거 출신의 일본인 친구에게 “너네한테 쪼팔린 경기 아니냐”고 말했더니 글마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일본이 죽만 쑨 것은 아니다. 어쨌든 1골로 전반을 마감했으니까. 잉글랜드가 상대적으로 많은 찬스를 잡았음에도 골을 추가하지 못한 것은 애매한 루니의 역할과 스콜스-베컴의 삽질 덕이 크다. 헤스키를 밀어낸 루니는 오웬의 뒤를 돕는 쉐도우식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상대 수비의 적절한 방어와 미드필드들의 삽질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게다가 계속되는 잔 실수로 실망을 안긴 폴과 데이빗은 그야말로 최악. 특히 베컴은 수많은일본인 팬들을 의식했던건지 전반 중반에는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지단의 개인기(마르세유 룰렛이라고 하던가?)까지 선보이는 쑈까지 벌였지만 마드리드에서 배워온 것은 그게 전부인지 무척이나 게으른 플레이로 일관했다. 특히 오노의 동점골 상황은 그쪽을 돌파해 들어오던 산토스에 대한 방어에 신경쓰지 않은 베컴 탓이 크다. 무엇보다 패스 연결 상황에서 단 한번도 깔끔한 퍼스트 터치를 보여주질 못했다. 컨디션이 나빴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주장이라면 열심히라도 뛰어줬어야지 않나 싶다. 못난이 스콜스처럼. --;;
일본은 화려한 면면의 미드필더들이 이름값을 하기 시작한 후반전부터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경기 막판에는 일방공세를 폈다. 오노 신지, 나카무라 순스케, 브라질리안, 이나모토 주니치 등이 버티는 일본의 허리는 상당히 인상적인 조합. 나카타가 없이도 이만큼 해준다는 게 더더군다나 눈에 들더라. 이날 경기 내용이 썩 좋지는 못했지만 영국 안방에서 1-1로 비겼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처럼 기본 이하(오만,베트남에게 진다든가 몰디브에게 비긴다든가--;)로는 떨어지지 않는 꾸준함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장 위협적인 적군일 수 밖에 없다는걸 입증한 셈. 하지만 일본의 약점은 역시 공격. 비즈니스 클래스 타고 다니면서 ‘이코노미 클라스 증후군’에 걸린 희한한 녀석(다카하라)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공격진은 약하기 그지 없다. 그 잘~나간다는 9번도 이날은 거의 보이질 않았고 유럽에서 뛴다는 스즈키(오토바이냐?)와 야나기사와(다른거 사가면 안돼?)는 여전히 J리그 수준을 벗어던지지 못했다는걸 확인했으니. 하지만 어쨌든 아시아 수준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인 녀석들이므로 아시안컵에서 예상되는 맞대결이 상당히 기대된다.
전반적으로 이 경기는 2년전 서귀포에서 열린 대한민국-잉글랜드戰과 유사하다. 전반과 후반의 양상, 스코어 등등 비슷한 점이 꽤나 많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몇가지가 완전히 다르다. 일단 영국은 2년 전과 달리 이날 경기에 ‘핵심’ 베컴과 제라드를 뛰켰다. 게다가 이번은 영국의 홈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상대를 밀어붙이며 1-1 무승부를 일군 일본 대표팀의 저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친구들, 얼마전엔 체코 1진마저 꺾지 않았던가. (이런 기세의 얘들에게 아이슬란드전 승리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말해봐야 헛수고지만 일본 선수들이 유럽을 돌면서 자신감과 기량을 함께 늘리는 사이 우리는 언제나처럼 안방잔치만 벌이고 있으니 괜시리 씁쓸할 따름이다. 게다가 100% 리얼 시트콤에 버금가는 ‘감독찾기 쑈’는 회를 거듭할수록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러다가 정말 아시안컵에서 또 한번 뒷덜미 잡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스럽다. 뭐, 아시안컵이야 중국에서 한다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유럽에서 열리는 독일 월드컵은 어떡할건가. 일본은 본선 진출을 지들 멋대로 기정사실화한 후에 벌써부터 유럽 돌면서 ‘현지 및 상대팀 적응 훈련’을 벌이고 있는데 말이다.
뭐, 경제 규모로 보나 뭐로 보나 일본을 우리에 비교하는건 (협회나 관계자들 입장에서)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으쨌거나 찝찝한건 찝찝한거다… 일본 응원석에 앉아서 베컴과 오노가 악수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베컴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주제에 K리그 박차고 일본 가려는 놈의 나라와 안방 대결을 앞두고 있는 내 나라 축구의 안타까운 면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묘하드라. 그노무 ‘니뽄 니뽄’ 소리가 이날따라 왜 이리 불쾌하게 들리는지. 속으로 아무리 ‘니 뽕이다’를 외쳐봐도 돌아오는건 한숨뿐이고. 에효… -,.-
첫댓글 재미있다..
우리나라도 저런배짱이필요 -_- 벌써 저거맘대로 진출확정하고 현지및 상대팀 적응훈련 ㅡㅡ; 우린..리얼시트콤 ㅋㅋㅋ 저렇게 축협이 빌빌거려서야..
본인이 포함된 그곳에서 찍은 사진한장이라도 올려주세요. 맨체스터까지 가서 경기를 보고 오셨다면, 사진은 분명히 찍고 오셨을듯...
말씀하신데로 일방적인 잉글랜드의 우세속에 후반중반부터의 일본의 약진이었다면 위에서 예로든 월드컵직전의 한국 과 잉글랜드전의 양상은 절대 아닙니다.. 그경기는 오히려 우리가 주도한 경기였네요
리얼시트콤 반전에 반전 대박!실컷 웃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