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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2012년 수필예술에 실린 초대수필 한편을 발견 했습니다.
정목일 선생님의 글이 있어 옮겨 왔습니다.
<초대수필>
달밤에 그대를 만나리
鄭木日
마음 적적한 날이면 저절로 발걸음이 닿는 곳이 있다. 사람마다 혼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 하나 쯤 있지 않으랴.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고향일 수도 있고, 임을 만나고 이별했던 곳일 수도 있다. 나에게도 근래에 그리움의 성소가 하나 생겨났다.
2008년 9월 15일 하오 1시 마산 만날공원(만날고개)에서 열린 만날제 개막식 현장에서 황철곤 마산시장과 이광석 시인, 강호인 마산문인협회장, 2만 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목일 작시 ‘만날고개’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만날고개 달뜨거든 그리움의 피리 불리라
만날고개 달뜨거든 비단고요 밟고 오시라
달무리로 넘치는 그리움
영원 속에 울리는 그리움
기약없이 떠난 님
달빛처럼 돌아오시라
만날고개 달뜨거든 그리움의 손짓하리라
만날고개 달뜨거든 은빛 파도 타고 오시라
은하수로 흐르는 그리움
영원 속에 사무친 그리움
송별 없이 떠난 님
별빛처럼 돌아오시라
이 시는 기약 없이 떠난 님을 기다리며 만날 날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사무친 이산가족의 한과 별리의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그리려 했다. 마음속으로 상봉의 순간을 기원하고 있다.
진주에서 이사 와 마산에 살면서, 그리움의 성소인 ‘만날고개’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혼자 만날고개에 올랐다. 마산바다가 제일 잘 보이는 만날고개 앞 바다에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고개 밑에 있는 ‘완월대’란 유적지는 신라 시대 최치원 시인이 달을 감상하며 머물던 곳이었다.
마산 바닷가 쪽으로 완월동, 월영동, 월포동, 반월동, 신월동 등 달(月)을 넣은 동 이름이 많다. 창공에 빛나는 달이 바다에 비치니, 달밤이 황홀했으리라. 마산은 달빛의 공간, 시(詩)의 도시였다.
만날고개에 와서 만남과 이별의 시간을 달밤으로 설정하고 시를 썼다. 기약 없는 이별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리라는 소망을 담은 시를 쓰고 싶었다.
이 ‘만날고개’란 시는 1988년 마산문인협회가 발간한 <합포의 노래>에 발표되었다. 1989년 마산의 작곡가 김봉천 씨에 의해 작곡되고, 1995년 중학교 1학년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었다.
2008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가다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마산시청의 한 공무원으로부터였다. “마산 만날고개에 ‘만날고개’라는 시비(詩碑)를 세우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수필가의 시비를 세운다는 얘기가 실감나지 않았다.
마산시는 만날공원에서 연례행사로 ‘만날제’를 열고 있다. 음력 8월 17일~18일 2,3만명의 군중이 모여든다. 이별한 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인생이란 만남과 이별로 이어지는 것, 누군들 한 번 만이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어찌 없으랴. 우리 민족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살고 있어 가슴에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다. 전쟁과 피난으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들을 한 번 만나지 않고선 눈을 감지 못할 그리움의 한(限)을 가슴에 묻고 지내오지 않았던가.
마산의 만날고개는 이런 그리움의 한이 맺힌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여, 어느덧 한가위 달이 밝은 날이면 수백, 수천이 모여 서로 마음의 위로를 받다가, 민중의 호응을 얻어 수만의 사람들이 운집하는 그리움의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엔 만날고개가 한 둘이 아니지만, 마산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어서 민중의 마음을 더 젖게 만들었다.
고려 말엽 마산포 바닷가 마을에 살던 가난한 양반 이씨 가문의 편모슬하 큰 딸과 친정어머니가 있었다. 열일곱 살 맏딸이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보살피고자 고개 너머 부잣집 윤진사댁으로 시집을 가서, 엄한 시집살이로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친정이 그리워도 마음대로 가볼 수 없던 딸이 어느 날 먼발치서라도 친정집을 보려고 고개에 올랐다. 때마친 시집간 딸이 보고 싶어 고개를 올라온 친정어머니와 상봉하여 두 모녀는 눈물을 쏟았다. 이 전설이 면면히 이어오면서 고개 이름도 만날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많은 피란민이 마산에 몰려와 연고자를 찾을 때,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마산시는 1980년대 들어 만날고개 전설을 민속행사로 발전시키자는 여론에 따라 정례 행사로 ‘만날제’란 행사를 추석 다음날부터 3일간 국악뮤지컬과 전국명창대회 등을 연다. 오늘날 만날고개는 해돋이 전망대와 무학산 둘레길 시발처로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선 생전에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시비가 세워진다는 건 큰 복(福)이고 영예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예측도 하지 않은 일이 실현된 것이 꿈인 양 여겨진다. 마산에서 평생 동안 좋은 시를 써온 시인들께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만날고개에 시비가 세워진 이후로 외로울 적에는 가볼 수 있는 그리움의 공간이 생긴 것이 나에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2009년 만날고개에 또 하나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마산 출신인 천상병 시인의 ‘새’라는 시비가 세워졌다. ‘귀천(歸天)’이란 시와 함께 천 시인의 대표작이다. 만남의 명소인 고향 만날고개에 천상병 시인의 넋이 시비로 세워진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시비 개막식에 참석하여 완하게 웃던 미망인도 2010년에 별세하였다. 서울 인사동 골목에 있는 ‘歸天’이란 찻집에 가서 천 시인이 입을 벌리며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옛 사진을 보곤 하면서 만날고개에 있는 그의 시비를 생각한다. 그 시비 곁에 ‘만날고개’ 시비가 있으니, 이것도 하늘이 준 인연이 아닌가. ‘나도 귀천하면 서로 만나게 될까’ 이런 엉뚱한 생각마저 들곤 한다.
2011년부터 마산이 창원에 통합되어 한도시가 되었다. 나에게 혼자라도 마음 내키면 가볼 수 있는 산책로가 있음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동쪽으론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인 주남저수지이고, 서쪽은 무학산 만날고개이다.
외로울 적에 혼자서 가만히 불러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가만히 속으로 노래를 부르면, 내 마음엔 달빛 젖은 대금 산조 소리가 들려오고 그리움의 음계를 밟고서 나는 그대를 만나러 만날고개로 간다.
<유동삼 미수기념특집>
다리이름
윷모 유동삼
장안 저수지 위쪽에 ‘큰그늘다리’가 있다. 이것은 장태산 휴양림에 다왔다는 느낌이 들게 해야 한다는 도움말을 듣고, ‘큰음지’라는 골짝 이름을 본받은 것이다. 이 ‘큰음지’는 일조량이 적어서 결명자를 심었을 때 경험이 되살아나는, 잊어지지 않는 곳이다. 나는 ‘고드름길’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전부터 널리 불리는 이름이 ‘큰음지’여서 ‘고드름길’은 안 쓰기로 한 곳이다.
‘장태울’로 가는 다리를 ‘장태울교’라 하지 않고 ‘장태울다리’라 했다. 장안은 넓은 구역을 이르는 말이고 ‘장태울’은 장안동의 가장 생산량이 풍부한 골짝으로 알려져 있어서 장안교보다는 ‘장태울다리’가 더 알맞다고 생각했다.
질울로 가는 다리가 있다. ‘질울다리’ 아니면 ‘길곡교’ 둘을 비교해 보았다. 옛날 말로는 吉谷(길곡)이지만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질울’로 쓰고 있는 마을 이름이다. 그래서 ‘질울로 가는 다리’의 뜻으로 ‘질울다리’라 했다.
토옥골 앞에 산직교를 넓히고, 포장하는 때였다. 현장 감독인 듯한 분에게 “수고하십니다. 이 다리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렵니까?” "산직동에 있으니까 산직교가 좋지요?“ 나는 산직동 토박이 ㅅ님을 잘 알고 지낸다. 전화로 ‘산직교라 한다는데 괜찮은가?” “다른 이름 무엇이든 다 좋으니 신직교만은 빼어 줘!” 그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옛날 산직이가 살았다고 산직리인데, 지금까지도 산직이들이 사는 마을로 되어, 고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작고한 ㄹ님이 ‘물내치기’라는 지명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마을 노인들이 모르는 이가 많아서 보류했다. 한 주일 정도 있다가 ‘밤길미논’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많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 밤나무가 많은 산 아래 논이라고 알고들 있었다. 이웃 마을 농촌까지 다 아는 ‘밤갈미논’이라는 뜻을 ‘하늘지기’논이란 뜻으로 쓰고 있었다.
그래서 밤갈미논 바로 옆에 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밤갈미다리’라고 했다. 노인회관에도 가서 설명을 했다. 아주 좋다고들 했다.
새로 나온 버스 승강장 길 이름에도 산직은 아니 나오고 밤갈미라고 나왔다.
괴곡 건널목을 없애고 구름다리로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완성되자 교명판을 ‘괴곡과선교’라 하였다.
시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땅히 ‘고릿골구름다리’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탄진에 있는 ‘석봉구름다리’ 불티고개에 있는 ‘불티구름다리’를 결정한 것이 얼마 안 된다. 그 전례에 따라 ‘고릿골구름다리’이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지금 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하면서 가수원 동장에게도 그 글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한 달도 되기 전에 ‘고릿골구름다리’로 교명판을 바꾸었다.
진주까지 가는 대전 남부 순환도로에 큰 다리 갑천교 공사가 시작되었다. 갑천 하류에서는 ‘국가하천 갑천’이 잘 어울리는데 중류 상류에서는 ‘갑천’이라는 말을 전연 쓰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갑천교’는 다르게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알렸다. 다리가 끝나는 마을 이름이 ‘모샛골’이니 ‘모샛골다리’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고속도로의 모든 다리는 예외없이 ‘○○교’이고, 터널도 예외없이 ‘○○터널’이니, 그 통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통일할 것이 따로 있지 ‘○○교’로 통일하고 ‘○○터널’로 통일하는 것은 우리말 현실을 모른 척하는 비민주 행위라고 말하였다. 건설부 장관에게 “다리나 굴길로 주민이 희망하면 들어 주는 규정을 만들 수 없느냐”고 했다. 답장이 한 달이 돼도 안 와서, 내용증명으로 다시 보냈더니, 바로 회신이 왔다. 규정에 따라서 해 온 것이 아니고 전례에 따라 해 왔으니 주민이 원하면 ‘○○다리’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약 한 달 후에 어느 실장 이름으로 서신이 왔다. ‘○○다리’로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이어서 교통부 담당자한테서 한국도로 공사에 일임했다. 이름까지도 맡기고 손을 떼겠다. 완공 직전에 대전시장의 의견을 들어서 결정하겠다는 공문이 왔다.
또 얼마 후에 그냥 갑천교로 하기로 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공문이 왔었다. 그러자 내 방에 있는 대전 지도를 보고 회덕에 갑천교가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 사실을 팩스로 알렸더니 그냥 갑천교라고 한다고 답장이 왔었다.
“편지 내용도 안 보고 답장 쓰는 것을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전화로 호통을 쳤다. “선생님 아니면 대전에 갑천교가 둘이 될 뻔했습니다. 모샛골교로 하기로 하겠습니다.”
모샛골보다는 모샛골다리가 좋으나 고속도로에는 ○○교가 하나도 없어서 모샛골 다리로는 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자꾸 말하다가 지쳐서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말을 아는 사람들은 모샛골교는 오토바이를 탈 때 헬멧을 써야지 갓을 쓴 것 같다고들 하였다.
민주주의는 국회나 정부에서만 힘써서 만드는 게 아니고, 고속도로 공사에서도 힘써야 된다는 것을 누누이 설명했으나 묵살되고 말았다.
다리 이름에서 ‘○○다리’를 용납하면 터널 일색에서 ‘굴길’로 써야 하고 국가하천 유등천도 버드내로 고쳐야 한다.
검은돌길 길가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정방교, 용촌교를 곧 놓는 일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내 고향 다리는 마을 이름에 다리를 붙여서 정방이다리 미리미다리라고 귀에 젖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기성동장에게 정방교 용촌교는 한문세대의 표현이고 그 마을 사람들은 예외없이 정방이다리, 미리미다리라 말하니 주민 정서를 존중하는 뜻으로 주민의 말로 다리 이름을 붙이라고 건의했다.
서구청 직원이 현지 조사를 한 끝에 주민의 말대로 다리 이름을 교명판에 쓰기로 확정했다는 공문이 왔다. 잘했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리지는 않아도 내 뜻을 받아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주체성을 살리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옳다. 언제까지나 주민의 현실을 무시하고 고유어를 살리지 못한다면 명예스러운 대전이 되기 어렵다.
올봄부터 ‘토옥교’공사를 하고 있는 ‘토옥’은 ‘토옥골’이 마을 이름이니 ‘토옥골 다리’가 더 합리적이라고 주민과 해당 구청 담당자에게 전화로도 하였고, 문서로도 보내어 ‘토옥교’라 아니하고 ‘토옥골 다리’로 하기로 했다.
■ 권두에세이
노출 무대 / 육상구(대전수필문학회장)
노출패션이 거리를 살랑살랑 휘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한 거리일수록 발끝에서부터 목까지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온전히 드러낸 옷차림이 넘쳐납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었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옷을 입은 것처럼 보입니다.
몸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원시 시대에 대한 회귀본능 때문일까요. 마지막 성역을 지키느라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을 경우 고가의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보다 노출이 심할수록 인간의 본능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노출 패션이 더 과감하게 진보될 것이 뻔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노출패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자신을 밖으로 노출시키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의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출의상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여줄 뿐이지만, 속살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의상을 입어야 합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찾는 무대이고, 사람마다 고유한 영혼의 세계까지 드러낼 수 있는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무대를 통하여 인간 본래의 욕망을 분출하고,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술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수필문학입니다. 수필은 일인칭 문학이요, 고백의 문학이라는 숙명을 갖고 있어서 자신의 겉모습이 아닌 속내까지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장르입니다.
수필의 고유한 특성 때문일까요.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이고 평론가인 아나톨 프랑스(1844-1924)는 수필이 미래 문학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노출패션이 앞으로도 더욱 더 유행할 것이라는 패션계의 전망과도 일치합니다.
수필문학을 삶의 일부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노출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겉모습이 아닌 속내를 보여주려고 밤낮으로 고심합니다. 영혼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여기<수필예술>에 우리 대전수필문학회원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특별하게 겪은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사유를 글로 풀어냈습니다. 회원들의 속내에 쌓여있는 사랑과 연민 그리고 장래의 소망을 펼쳐놓은 무대입니다.
명지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아이를 닮은 고운 얼굴도 있고, 산전수전 겪으면서 입은 상처가 아물어진 흉터도 있습니다. 더러는 외계인처럼 익숙하지 않은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이 세상에서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우리 회원들의 고유한 모습들입니다.
무대 전체가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다시 읽으니 새롭네요.
영혼의 세계를 보여줄 만한 노출무대가 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네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