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산청 걸음
예년보다 몹시 무덥던 여름도 종착지가 보인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과 가로수가 시들어 갈 때였다. 처서 무렵 단비가 내려 목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었다. 팔월 끝자락 토요일은 창원에 사는 친구 내외와 1박2일로 다녀올 걸음을 나섰다. 우리 집사람도 동행하해야 했다만 몸이 불편해 함께 나서질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집사람은 다니는 절간으로 봉사활동 나갔다.
같은 대학을 나온 동기생 여덟 명이 여러 곳에 흩어져 지내다 방학이면 한 차례 얼굴을 보는 모임이 삼십 년이 지난다. 결혼해서는 부부와 자녀들도 동행하다가 아이들은 모두 커서 이제는 부부들만 모인다. 지난겨울 통영에서 모였다가 헤어지면서 여름엔 보령 무창포해수욕장에서 조개를 주우려했다만 물때를 맞추기 어려워 장소가 변경되어 함양 지리산 기슭 리조트를 예악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뚫고 진주를 벗어나 산청을 지났다. 간밤부터 내린 비는 골골마다 대지를 흠뻑 적시고 경호강의 강물은 흙탕물로 흘러내렸다. 그간 지표면 푸석푸석 말랐던 흙먼지들이 함께 씻겨 내리는 듯하였다. 운전해 가는 친구는 통발을 놓고 낚시할 준비물을 챙겨간다는데 강물이 불어나 천렵은 할 수 없겠다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더위를 식혀주는 단비가 고마웠다.
함양에 사는 친구가 예약해둔 숙소는 엄천강 강가에 있는 리조트였다.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다면 다슬기도 잡고 통발도 놓아볼 참이었다. 통발을 놓기에 좋은 옴팍한 곳은 못 밑 논 서 마지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얘기도 전한다. 백무동에서 골을 따라 흘러내린 물길이 말떼가 달리는 듯하다고 마천(馬川)이다. 급한 물살이 평지를 만나 쉬면서 휘감아 흐르는 곳이 휴천(休川)이다.
숙소는 한남마을 나박정 숲과 가까웠다. 한남마을은 세조가 등극하면서 일으킨 계유정난 때 세종의 열두 번째 왕자 한남군이 함양으로 유배와 살던 곳이다. 한남마을 어귀 나박정 숲은 한남군이 책을 읽으며 보낸 곳으로 전한다. 지역민들은 지난봄 한남군을 기리는 빗돌과 정자를 세워두었다. 유배지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 병사한 한남군은 상림에서 가까운 필봉 언저리 묻혔다.
비가 계속 내리는 속에 친구들이 속속 모였다. 통영과 울산에 사는 두 친구는 다른 일이 있어 빠지고 대구와 울산과 창원에서 여섯 가족이 합류했다. 저녁은 숙소에 멀지 않은 산청 금서 화계로 가서 흑돼지고기를 구워 반주를 곁들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친구가 올봄과 여름에 교장 자격연수를 다녀왔고 한 친구는 가을에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총무를 맡은 대구 친구는 저녁에 먹을 술과 안주거리를 넉넉히 마련해 왔다만 불로 막걸리만 몇 잔 마셨다. 서로 나눈 얘기 가운데 건강에 대한 정보 교환이 많음은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간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종전 같으면 밤 이슥하도록 술잔을 비우거나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만 우리들은 모범생처럼 일찍 잠들었다. 새벽녘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창문을 닿아야 했다.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잠 깨어 숙소에서 떨어진 강 건너 들판과 마을을 산책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아침은 어디서 해결할지 의논하고 있었다. 민물매운탕으로 속 풀이를 겸한 아침상을 차려줄 식당을 찾고 있었다. 알려진 맛집 한 곳은 일요일은 영업을 하지 않아 간밤 저녁을 먹은 식당과 이웃한 매운탕 집을 가기로 했다. 전화로 예약해 두고 갔더니만 메기매운탕이 금방 차려졌다.
아침 식후 우리가 찾아간 곳은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전하는 구형왕릉이었다. 자연석을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봉분은 여느 왕릉 양식과 특이했다. 이어 우리들은 필봉과 왕산 아래 동의보감촌에 자리한 산청 세계전통의약엑스포 행사장으로 갔다. 한의사협회 경기지부 임원들은 개막이 임박한 한방 축제를 미리 와 둘러보고 있었다. 나도 필봉과 왕산의 기를 한껏 받아왔다. 13.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