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식민지 유대 사회에서 가장 나쁜 인간의 대명사가 둘 있었다. 세리와 창녀였다. 창녀는 성적으로 타락한 불결한 인간의 전형이었고 세리는 제국의 통치에 공모하여 자기 백성을 착취하는, 양심이 더러운 인간의 전형이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세리의 대명사로 소개되는 삭개오는 로마 정부를 대신하여 통행료와 세금을 징수하던 민간 하청업자였다. 이들은 백성에게 로마 정부가 요구한 세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그 차액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요 민족의 배신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친일파이며 일제 고등검찰의 앞잡이 정도였던 셈이다.
삭개오라는 인물을 단순히 회개한 사람으로만 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회개한 사건은 식민지라는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 방식은 직접 지배가 아니라 간접지배였다. 로마 정부는 식민지 내의 상황에 맞는 그 지역의 유력한 자를 지도자로 위임하거나 중간 관리자로 임명하여 대리통치하였다. 이는 현대국가에서도 부도덕한 권력이 국민을 분열시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삭개오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양심이 회복되거나 삶이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 제국의 지배질서에 협력하던 사람이 제국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전복된 사건이다.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자기 부를 나누겠다고 한다. 그가 가난한 자들과 자기 백성을 속여서 빼앗은 것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구조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삭개오가 자기 부를 환원하겠다는 것은 제국의 지배 구조에 대한 저항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탈식민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삭개오 이야기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본다. 그래서 삭개오 하면 뽕나무부터 떠올리게 되고 양심을 회복한 개인적 사건으로만 이해한다. 이러한 성서 읽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윤석열 같은 일본의 앞잡이를 보지 못한다. 그가 가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과 논리가 회개하지 않은 삭개오의 제국적 지배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배권력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식민주의적 성서 읽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과 논리에도 일제의 폭력적 지배체제가 구축돼 있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제 고등경찰의 세계관과 태도가 대한민국 검찰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상식과 법리를 짓밟고 압수수색과 영장 남발, 언론을 통한 조리돌림 같은 방식으로 칼날을 마구 휘두르던 게 일제 고등경찰의 지배 방식이다. 혐의가 없을 때는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혐의를 만들어내고 강압과 협박을 통해 가족과 주변 인물들까지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사람을 파멸시켜 자기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검사의 강압적 수사에 의해 누군가 자살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로드킬(Road kill) 당한 야생동물의 죽음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 백성에게 칼날을 휘두르던 방식 그대로다. 이 땅에 아직 식민지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검찰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제의 식민지다.
윤석열이라는 일제의 고등경찰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땅을 점령한 것은 교회 때문이다. 교회가 영혼 구원이라는 개인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성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사들이 일제의 앞잡이를 내세워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게 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식민지가 끝나지 않은 이유는 교회들이 성서를 잘못 읽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권력도, 식민지 상황도, 제국의 압제와 폭력도 간섭할 수 없도록 ‘영혼 구원’이란 말로 성서의 맥락과 배경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한한국의 삭개오들은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
첫댓글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