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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위선 7‘(21-23)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그들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고,
많은 훌륭한 일들을 행하는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종적으로 버림받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주는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시면서 이러한 경고를 되풀이하고 계시며 여기서 다시 우리 앞에 마주쳐오는 무서운 위험과 가능성을 경고해 주십니다.
이 문단에서 배워야 할 큰 교훈은 자기 기만의 위험성입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이러 저러한 일들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많은 사람'이라는 씀은 매우 뚜렷한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즉 자기 기만은 '많은 사람'에게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예수님은 최후 심판의 장면을 묘사함과 동시에 자신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 그들이 주님을 위해 한 일을 보고하는 사람들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41-46).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이 여기 언급한 사람들이 '그날' 곧 심판날에 경악하며 크게 놀랄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문단은 심판날을 의중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판 날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날까지 자기네는 안전한 양 가장해 왔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는 모두 확실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어떤 근거에서였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사탄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행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실로 뛰어난 주님의 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무엇인가 결점을 찾아낼 만한 것이 있음을 잠시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심판 날에도 주님께 '주여, 분명코 당신은 우리들의 기록을 아시지요?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들이 말하고 또한 우리가 행한 것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안심하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그들이 버림받을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역시 '나는 너희를 안 적이 없다. 나는 너희와 아무런 관계를 가져 본 일이 없다. 너희는 항상 주여, 주여라고 말하며 내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행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너희를 인정한 일이 없다. 너희와 나 사이에는 어떤한 교제도 없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물러가라'라고 말입니다.
심판 날의 경이의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식적인 위선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매우 분별하기 어려운 것은 무의식적 위선인 것입니다.
무의식의 위선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며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자신에 대하여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의식적 위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기만의 원인을 생각해 보는 일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우리들 속에서 자기 유혹, 자기 기만의 원인이 그 원인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검토한다면 우리들은 그 원인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영을 시험해 보고 검토해 보라고 권면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 자기 기만의 통상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그릇된 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이 만든 어떤 진술에 확신의 기초를 두려는 경향입니다.
성경은 즉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18).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성구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정한 조항들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한,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백했다는 것만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구원의 보증이나 확증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다루고 계시는 사람들도 '주여 주여'라고 말하며 바른 내용을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라고 말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악령 곧 마귀들도 주님을 인정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도 주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막 1:24).
귀신들도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주님에 대해 바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신들이고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지극히 미묘한 유혹에 대해서 주의해야 하겠고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르치게 하는가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음을 내 입으로 말해 왔다 ...'라고 말합니다.
신자인 기독교인들도 이렇게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의 최종적인 신뢰를 예수 그리스도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의 신앙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신념과 다만 자기가 그 신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신뢰를 둔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바른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 분명할 정도로 악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한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 ... 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는 바른 말을 하면서도 악한 생활을 보이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는 확증이 없이 우리 신앙의 기초를 다만 어떤 규정된 교리 조항을 반복하는데 두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들은 이 무서운 자기 기만의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말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주여, 주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상적인 확신 교리나 거짓된 확신 교리는 자기 기만의 가장 통상적인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기만의 상태의 둘째 원인은 첫째 원인에서 불가피하게 귀결됩니다. 그것은 자기 검토의 거부인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혹은 우리가 '버리운 자'가 아닌가 확증하라고 했습니다(고후 13:5-6).
우리들이 도덕률 폐기론에 빠져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가 어떤 행위를 하든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며,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가 어떤 유의 생활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위험이 있는 것은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도덕률 폐기론은 여러분이 행동에 집중하는 순간 여러분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셈이라고 주장합니다.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문단에서 바로 이것을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독교는 생활화해야 할 하나의 삶이라는 사실을 잊는 것인 바 곧,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에 간직할 하나님의 성품의 참여자이며,
이것이 그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 1서를 요한은 영적 생명에 관한 '저를 아노라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1서 2:4).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1서 1:6)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짓이라고 요한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위반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그 생활습관이 변함없이 사악한 것이라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제1대 왕이었던 사울의 경우에서 그 전형적인 실례를 보십니까?
사울은 아말렉 사람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아각왕을 살려두고 또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에게 견책을 받았을 때 그가 얼마나 현명했던가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는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삼상 15:1-15). 우리들은 누구나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자기의 생활상태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곧 파산할 것입니다.
또 기독교인 생활에서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은 곧 영적으로 파산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주님 자신에 의해 쫓겨날 것입니다.
자기 기만이 또 하나의 흔한 원인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중요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심판주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실 분은 그분입니다.
이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뜻이 매우 강한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에게는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안다'는 말씀은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가 땅의 모든 종족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암 3:2).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처럼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심판 날에 자기를 기만한 이 사람들에게,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의 힘과 자기들의 정력으로 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조금이나마 이 일과 관계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활동이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들을 알고 계십니까?
끝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며 복되신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 자신, 곧 성경이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속사람 곧 마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순종을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바른 말을 하고 매우 바쁘고 활동적이며 일견 놀라운 성과를 가져오면서도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하고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주님을 저항할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입니다.
열정적으로 '주여 주여'라고 말하며 바쁘고 활동적이면서도 참된 충성과 순종을 주께 바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생애를 지배하기를 고집하거나 성경과 가르침이 우리의 행할 것과 그 방법을 지배하게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의견과 논거로 성경의 가르침을 지배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모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은 완전히, 전적으로 양도되지 않은 의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의 제물과 제사가 아무리 크며, 주의 이름으로 하는 행동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주는 우리들의 전 생애와 모든 것에 대하여 어떠한 제한도 없이 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일들 뿐 아니라 작은 일에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과 그 수단에 대해서도 주님이 지배권을 가지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의 방법을 성경에 제시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우리들은 주님과 주님의 방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하는 일이 이 모형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의지의 주장이요 불순종이요, 사술하는 죄와 같이 하나님께는 가증한 것입니다(삼상 15:23).
이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어떤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 누구입니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를 행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이런 일들에 비추어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