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 여자가 부르마가 아니었다면 베지터는 그 누구의 집에서라도 '얹혀서 사는' 생활은 절대로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우주에서, 이 행성 저 행성 돌아다니며 특정한 거주지 없이 이십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베지터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베지터는 왜 부르마를 따라갔나.
가장 꼽고 싶은 이유가 '용기'다. 베지터는 자신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늘 그랬다. 처음 손오공과의 싸움에서도 '나보다 약한' 자신의 편, 즉 내퍼보다는 적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인 카카로트와의 전투다운 전투를 더욱 중요시 여겼다. 베지터의 이러한 성향은 베지터의 첫 등장 이후 드래곤볼이 최종적으로 끝날때까지 큰 변화없이 지속된다.
부르마의 용기는 참으로 높이 살만하다. 그래도 한때는 지구의 안위를 위협했던 악당 베지터에게 한다는 말이, '당신도 오지 그래! 갈 데도 없을텐데! 분명 손오공처럼 엄청난 대식가겠지! 맛있는 음식 많이 해줄게! 대신 이상한 생각은 하면 안되요~'이런 말이다. 베지터는 그 용기인지 뻔뻔함인지 모를 부르마에게 질려 등장 이후 처음으로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겨우 거기서 그쳤다면 베지터-부르마 커플의 형성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사건의 전환점은 프리더+프리더파파의 지구행이었다.

다들 프리더 부자의 어마어마한, 참으로 무시무시한 그 기를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부르마는 무슨 꿍꿍이인지 그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고 태연하다. 부르마를 보고 놀란 야무치가 '왜 여기왔냐'니까 부르마는 '프리더를 보려고'라고 참으로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답한다. '프리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알아, 분명히 지구를 날려버리겠지. 어차피 죽을거라면 프리더가 어떤 놈인지나 보고 죽으려고'
예사롭지 않은 용기다. 베지터는 우연히 이 대화를 듣고 약간 놀랐다는 시선으로 부르마를 응시한다(저기 저 놀란 눈빛을 보라!) 아직 야무치와 부르마가 사귀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야무치의 반응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야무치는 '음, 그건 그렇지만...'하고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 뿐만 아니라 드래곤볼 전회를 걸쳐 야무치만큼 몸을 사리는 캐릭터도 또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어차피 상대도 되지 않는 상대와 싸우다가 죽느니 안 싸우겠다는 판단이 현명할 수도 있지만, 역시나 만화나 영화속에서 그런 판단은 캐릭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만을 심어줄 뿐이다. 야무치의 용기는 부르마만 못하다. 둘의 용기를 바로 옆에 세워놓고 키를 재어볼 수는 없지만, 드래곤볼을 처음부터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납득이 갈만한 말일 것이다.
부르마의 성격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타입이다. 대 재벌 캡슐 코퍼레이션의 따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드래곤볼을 찾아나섰겠나. 부르마는 늘 더 나은것을 원했다. 그런 부르마가 자기보다 겁이 많은 야무치와 갈라서는 일은, 어쩌면 그 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해져있었던 운명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베지터는 그런 부르마의 용기를 높이 샀을 것이다. 부르마 역시 자신과 비슷한 모토를 지니고 있는 베지터에게 남모르게 정이 갔을 것이고. 부르마의 베지터에 대한 관심은 미래 트랭크스가 프리더를 쳐부순 후 다 함께 오공을 기다릴 때 '트랭크스와 베지터, 닮지 않았어? 분위기 같은 게...'하는 부르마의 대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얼핏보면 베지터는 먼저 대시하거나 할 성격이 아닌 것 같지만, '3년 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인조인간이 나타나고, 가까스로 살아난 손오반을 제외한 모두는 그 3년 후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트랭크스의 깜짝 발언에, 속으로 '3년 후에 살아남는 건 나일 것이다'고 마음을 다잡았던 베지터. 그만큼 중요한 전투가 3년이라는 길지 않는 시간으로 다가왔는데, 베지터에게 과연 연애고 뭐고 할 틈이 있었을까.
틈이 없어도 틈을 내서 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르마의 용기있는 행동 이후 분명히 베지터가 부르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결국 야무치의 바람기가 걸림돌이 되어 부르마와 야무치 커플이 파경을 맞이한 후엔, 뭐, 뻔하고 뻔한 얘기다.
베지터가 얼마나 부르마와의 사랑에 열중했느냐 하면, 그건 트랭크스라는 그들의 아이와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3년 후의 베지터에게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베지터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 수련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부르마가 존재했으므로.
3년의 기간동안 초사이어인으로의 변모는 성공했지만, 그는 정말로 강해지지는 못했다. 17, 18호에게 쪽도 못썼다. 하지만 얼마 후 셀의 등장(그것도 인조인간보다 훨씬 더 강한!). 그의 정신과 수련의 방에서의 단 1년의 수련은 그를 엄청나게 성장시켰다. 부르마와 관련된 모든 일이 차단된 정신과 수련의 방에서야말로, 그가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수련에만 열중할 수 있었으리라. 그의 그 4년간의 성장률을 따지자면, 처음 3년간은 끽해야 20, 정신과 수련의 방에서의 1년이 나머지 80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장에 기여했다.
셀이 비로소 없어져버린 후에도 그는 단지 '카카로트 자식, 죽으면서까지 나를 부끄럽게하다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겠어...'라고 말하며 전투장소를 뜬다. 부르마의 집이자 베지터의 집, 그들만의 집으로...
말하자면, 바로 부르마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될만큼 부르마가 그리웠던 것이다! 인조인간의 등장부터 셀의 소멸까지 지구시간으로는 단지 며칠이 흘렀을 뿐이었지만, 그는 정신과 수련의 방에서 이틀을 보냈으므로 2년이 넘는 세월동안 부르마와 그렇다 할 접촉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잔혹했던 그가 사랑을 알아가는 그 과정은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르게 한다.
그 둘은 이 시점부터는 안정기로 접어든다. 함께 살며, 트랭크스가 충분히 크자 베지터는 손수 트랭크스를 훈련시킨다.

드래곤볼은 나름대로의 로망스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피 튀는 전투 뒤에는 이런 사랑이 존재했다는 것을!
첫댓글 우와,, 너무 공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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