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작가가 추천하는 우리말 보고라 하는 소설 『임꺽정』을 찾아보다가 3권 양반편을 읽었다. 구수한 우리말과 함께 보다못한 한자어까지. 친절하게 국어사전처럼 낱말풀이가 되어 있어서 흘낏흘낏 쳐다보며 읽을 수 있었다. 먼저 분량이 일반 단행본보다 두껍다. 400여쪽. 소설이라 줄거리 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시대적 배경에 따른 낯선 말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첫 권부터 읽는 게 아니라 3권부터 읽었으니 더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이지만 사료를 바탕으로 쓴 역사 이야기다. 역사적 사전 배경이 탄탄하지 않으면 읽어내는 속도가 붙지 않을 수도 있다. 3권 양반편에서 임꺽정의 활약은 미미하다. 등장하는 장면도 후반부에 가서야 나타난다.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 위기 시 자원입대를 거부당한다. 명분만 내세우는 신분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에 뛰어든 임꺽정은 자신의 칼솜씨를 멋지게 발휘한다. 활쏘기의 명수 이봉학과 함께 왜군을 맞이하여 큰 공을 세우는 장면은 전투장면이라서 그런지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반면 궁중 내 모략과 암투 장면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졸하고 숨이 헉헉 막힌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모함하고 멀쩡한 인재를 고문으로 죽음으로 내몰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양반들의 적나라한모습을 작가 벽초 홍명희는 소상히 독자들에게 밝혀 낸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모두 눈이 멀게 되나 보다. 땡초같은 중 '보우'를 국사로 삼는가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넘어가 국정을 혼돈에 빠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고스란히 피해는 백성들이 짊어져야 하는 애처러운 실상을 보게 된다.
재미난 점은 임꺽정 일행이 길을 지나가다 어린 소년 '이순신'을 만나는 장면을 설정한 점이다. 이순신의 어릴 적 용맹스러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른 임꺽정의 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임진왜란 발발 전 전라도에서 일어난 각종 왜변들을 스케치 하듯이 그려내면서 앞으로 닥쳐올 재난에서 임꺽정 일행의 활약상을 예고하는 듯 하다.
벽초 홍명희 작가는 '양반편'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을까?
국가의 위기를 불러온 당사자들이 바로 양반이라는 점과 위기 앞에 자신을 희생하며 앞장 선 이들은 양반이 아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음을 꼬집어 이야기하는 듯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도 그렇지 않은가? 잘못은 위에서 저질러 놓고 수습은 아래에서 하라는 식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해 가는 소위 '양반'이라고 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며 만약 벽초 홍명희 작가가 살아 있었다면 '양반편'이 아닌 '권력자편'으로 집필하지 않았을까 싶다.